최근 수정 시각 : 2023-12-28 19:45:26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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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루스 가비니우스
라틴어: Aulus Gabinius
생몰년도 기원전 101년 ~ 기원전 47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달마티아 살로나
지위 평민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조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아버지)
롤리아(아내)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시센나(아들)
참전 카이사르의 내전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58년
전임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동기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후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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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군인. 폼페이우스가 지중해 해적 토벌,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위해 막대한 권력을 가지도록 했으며, 시리아 총독으로서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복귀에 기여했다. 그러나 뇌물 수수, 원로원 명령 위반 등의 혐의로 추방되었고, 카이사르의 내전 때 복귀하여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관이 되어 일리리아에서 군대를 지휘하다 병사했다.

2. 생애

캄파니아 출신의 가비니아 가문 출신이다. 고대 사료에 따르면, 이 가문 사람들은 본래 칼라 시에서 노예 신분으로 도자기 제조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러다 해방된 뒤 로마에 이주했고, 그의 할아버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가문 최초로 호민관에 올랐다. 하지만 정적들은 노예의 손자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아버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는 동방 로마군 지휘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1] 휘하 재무관을 맡았으며, 작은 아버지 푸블리우스 가비니우스는 기원전 89년 또는 88년에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와 함께 법무관을 맡은 후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을 역임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군대에서 복무한 대대장 '가비니우스'는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시기인 기원전 86년 카이로네이아 전투 전날에 주민들의 요청으로 카이로네이아 시에 주둔한 군단을 지휘했다고 한다. 술라는 그런 그를 총애했고, 기원전 81년 아시아 총독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가 중앙 정부의 허락 없이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벌이는 걸 중단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게 했다. 가비니우스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미트리다테스 6세가 제공한 선물을 거부했다.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뮌처는 이 가비니우스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그가 역사에 확실히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67년 호민관을 맡았을 때다. 그는 폼페이우스의 후원으로 그 자리에 올랐던 만큼, 폼페이우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지중해에 해적들이 날뛰고 있어서 무역이 마비될 지경이었고 로마의 식량 공급이 위협받았다. 그는 폼페이우스에게 지중해 전체의 해안에 대한 비상 권한을 3년간 부여하여 함대 전체를 지휘하여 해적을 소탕하게 했다. 원로원은 격렬히 반대했지만, 민회는 압도적인 표결로 찬성했고, 폼페이우스는 비상 대권을 손에 쥐고 불과 3개월 만에 해적들을 토벌했다. 그는 뒤이어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금방 끝내지 못하고, 수많은 재물을 갈취하고 있다며 루쿨루스를 맹비난했고, 비티니아와 폰토스의 총독 자리를 그해의 집정관 중 하나인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에게 넘어가게 했다. 결국 루쿨루스는 속주를 잃고 군대만 지휘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입지가 많이 약해졌다.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를 재치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이어받은 뒤 호민관 임기가 끝난 가비니우스를 부관으로 삼으려 했다. 원로원은 이번에도 반발했지만 민회가 찬성하면서 통과되었고, 그는 기원전 65년에 폼페이우스군의 일부를 지휘하여 유프라테스 강 너머 티그리스 강까지 진군했다. 같은 해 또는 이듬해에 마르쿠스 아이미릴우스 스카우루스의 부하로서 유대 일대의 권력을 놓고 대립하던 요한 히르카노스 2세아리스토불로스 2세와의 전쟁에 개입했다. 스카우루스와 가비니우스는 각각 400 달란트, 300 달란트를 뇌물로 받아낸 뒤 히르카누스를 몰아냈다. 아리스토불루스는 나중에 폼페이우스에게 이 사실을 폭로했지만, 폼페이우스는 그냥 넘어갔다.

폼페이우스가 나중에 아리스토불루스와 전쟁을 벌였을 때, 그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돈을 받아내려 했다. 아리스토불루스는 화해와 배상을 제시했지만, 그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 예루살렘을 점거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 일로 로마에 복귀한 뒤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지만, 키케로의 변호로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기원전 58년 폼페이우스의 지원에 힘입어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2]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어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그리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입맛에 따라 법률을 제정하고 정책을 시행했다. 특히 삼두정치를 비판하던 키케로를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반역 음모 사건 때 재판도 없이 시민들을 학살했다"고 고발하여 추방당하게 했다.[3]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뒤 킬리키아 총독을 배정받았지만, 나중에 새로 병합된 키프로스가 킬리키아 속주에 즉시 포함되지 않을 게 분명해지자 시리아로 변경하길 원했다. 그래서 원로원 의원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찔러줬고, 그 덕분에 시리아 속주 총독에 선임될 수 있었다.

기원전 57년 시리아 속주에 도착한 뒤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이끌었던 유대 반란을 진압하고 유대 정치 체제를 개혁해 유대 왕의 권한을 신전의 일에만 국한시키고 5개 지역 마다 산헤드린을 자체적으로 세우도록 했다. 기원전 56년 로마에서 도망친 아리스토불루스가 재차 반란을 일으키자, 마케론에서 반란군을 무찌르고 아리스토불루스와 또다른 아들 안티고노스를 포로로 잡아 로마로 압송했다. 원로원은 가비니우스가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내에게 요새를 제공하는 대가로 자녀들의 자유를 약속했다고 서면 보고했기에, 안티고노스와 알렉산드로스를 곧 석방했다.

그렇게 유대 지방을 평정한 직후, 파르티아에서 정변이 일어나 오로데스 2세에게 축출된 미트리다테스 4세가 그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변까지 이르렀지만, 더 많은 자금을 제공한 프톨레마이오스 12세파라오로 복위시키기로 마음먹고 이집트로 향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1만 달란트를 약속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이집트로 가려면 사막을 가로질러야 하는 힘겨운 여정을 감수해야 했기에 망설였고, 장교 대부분도 원로원에서 허용하지 않은 원정에 반대했다고 한다. 폼페이우스도 프톨레마이오스 12세에게 막대한 뇌물을 받고 그를 왕으로 복귀시키자고 제안했지만, 원로원의 강력한 반대와 시민들의 회의적인 반응 때문에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에게 거액의 뇌물을 받은 이상 이집트로 가기로 마음먹고, 기원전 55년 3월 지중해 해적을 도운 이집트 당국을 비난하며 쳐들어갔다. 그는 펠루시움을 전투 없이 점령했고, 알렉산드리아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베레니케 4세의 군대를 가볍게 물리쳤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왕위에 복귀한 뒤 딸이지만 자신을 내쫓고 황위에 오른 베레니케 4세와 추종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호위하기 위해 2,000 로마 군단병과 500 속주 보조병을 알렉산드리아에 남겨두고 시리아로 돌아갔다. 이 부대는 가비니아니(Gabiniani)란 이름으로 파라오의 정예병으로 자리잡았으며, 훗날 알렉산드리아 전쟁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따라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적했다.

시리아 속주로 돌아온 뒤 해안의 해적들을 토벌하고 유대 반란을 토발했으며, 나바테아인의 약탈을 저지하는 등 총독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기원전 55년 트레벨리아 법이 로마에서 통과되면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5년간 시리아를 통제하게 되었다. 그는 크라수스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나 귀환 직후 3가지 고소를 당하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첫번째는 원로원의 동의 없이 이집트로 쳐들어간 혐의였다. 하지만 폼페이우스가 비호해주고 키케로도 고발 측 변호인이었지만 폼페이우스와의 관계를 고려해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이면서, 배심원 70명 중 38명이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무사히 풀려났다.

두번째 혐의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그에게 건넨 1만 달란트를 갈취한 혐의였다. 폼페이우스는 대중 집회에서 그를 변호하는 연설을 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갈리아 원정 도중 그를 옹호하는 서신을 보냈으며, 키케로가 변호를 맡았다. 그러나 배심원들은 이번 만큼은 그의 죄가 명백하다고 여겼고, 민중은 첫번째 재판 직후 테베레 강이 범람하여 여러 주거지를 덮치는 일이 벌어지자 신들이 명백한 범죄자의 무죄를 선고한 것에 분노했다고 여겼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비난했다. 결국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막대한 벌금을 내지 못하게 되자 망명을 택했다. 세번째 혐의는 집정관 선거 중에 뇌물을 받은 것이었는데, 그가 두번째 재판 후 망명을 택하면서 취하되었다.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그는 오랫동안 로마에 돌아오지 못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로마로 돌아왔고, 기원전 48년/47년 겨울에 카이사르의 군대에 가담하여 15개 보병 대대와 3,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이탈리아에서 일리리아까지 행진했다. 그러나 도중에 달마티아 부족의 공격을 받고 큰 손실을 입고 간신히 살로나로 향했다. 그곳에서 폼페이우스 측 지휘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의 공격에 맞서 항전했으나, 식량이 부족해져 곤궁한 처지에 몰렸다가 몇달 후 병사했다.

그는 기원전 71년 호민관인 마르쿠스 롤리우스 팔카니우스의 딸 또는 자매인 롤리아와 결혼했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롤리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아들로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시센나가 있었는데, 아버지의 유대 반란 진압에 동참했다.


[1]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버지다.[2]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장인이다.[3] 키케로는 이 일로 그와 피소를 적대시했고, 편지에서 두 사람을 가리켜 "괴물", "국가의 무덤 파는 사람", "모든 악당 중 최악의 악당",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로 얼룩진 자", "흉폭하고 역겨운 짐승"이라고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