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3 22:17:55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font-size: 0.742em; letter-spacing: -0.35px"
{{{#!wiki style=""<tablewidth=100%><tablealign=center> 라틴어 문구 색상 범례
  • sine collega: 동료 없이 단독 선출
황제 겸 집정관 }}}
기원전 100년 기원전 99년 기원전 98년 기원전 97년 기원전 96년
가이우스 마리우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티투스 디디우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기원전 95년 기원전 94년 기원전 93년 기원전 92년 기원전 91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기원전 90년 기원전 89년 기원전 88년 기원전 87년 기원전 87년 보결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카토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
기원전 86년 기원전 86년 보결 기원전 85년 기원전 84년 기원전 83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기원전 82년 기원전 81년 기원전 80년 기원전 79년 기원전 78년
가이우스 마리우스 마르쿠스 툴리우스 데쿨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기원전 77년 기원전 76년 기원전 75년 기원전 74년 기원전 73년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루키우스 옥타비우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기원전 72년 기원전 71년 기원전 70년 기원전 69년 기원전 68년
루키우스 겔리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 그나이우스 아우피디우스 오레스테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
기원전 68년 보결 기원전 67년 기원전 66년 기원전 65년 기원전 65년 보결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 푸블리우스 아우트로니우스 파이투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기원전 64년 기원전 63년 기원전 62년 기원전 61년 기원전 60년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마르쿠스 푸피우스 피소 프루기 칼푸르니아누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기원전 59년 기원전 58년 기원전 57년 기원전 56년 기원전 55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기원전 54년 기원전 53년 기원전 52년 기원전 51년 기원전 50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기원전 49년 기원전 48년 기원전 47년 기원전 46년 기원전 45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sine collega
기원전 45년 보결 기원전 45년 보결 기원전 44년 기원전 44년 보결 기원전 43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기원전 43년 보결 기원전 43년 보결 기원전 42년 기원전 41년 기원전 40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퀸투스 페디우스 가이우스 카리나스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기원전 40년 보결 기원전 39년 기원전 39년 보결 기원전 39년 보결 기원전 38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가이우스 코케이우스 발부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기원전 38년 보결 기원전 38년 보결 기원전 37년 기원전 37년 보결 기원전 36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루키우스 겔리우스 포플리콜라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기원전 36년 보결 기원전 36년 보결 기원전 35년 기원전 35년 보결 기원전 35년 보결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루키우스 코르니피키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퀸투스 마르키우스 크리스푸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티투스 페두카이우스
기원전 34년 기원전 34년 보결 기원전 34년 보결 기원전 34년 보결 기원전 33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가이우스 멤미우스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 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
기원전 33년 보결 기원전 33년 보결 기원전 33년 보결 기원전 33년 보결 기원전 33년 보결
루키우스 아우트로니우스 파이투스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마르쿠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루키우스 비니키우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퀸투스 라로니우스
기원전 32년 기원전 32년 보결 기원전 31년 기원전 31년 보결 기원전 31년 보결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마르쿠스 티티우스
가이우스 소시우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기원전 31년 보결 기원전 30년 기원전 30년 보결 기원전 30년 보결 기원전 30년 보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루키우스 사이니우스
기원전 29년 기원전 29년 보결 기원전 28년 기원전 27년 기원전 26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포티투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기원전 25년 기원전 24년 기원전 23년 기원전 23년 보결 기원전 22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세스티우스 알바니아누스 퀴리날리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아이세르니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기원전 21년 기원전 20년 기원전 19년 기원전 19년 보결 기원전 18년
마르쿠스 롤리우스 마르쿠스 아풀레이우스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 sine collega 퀸투스 루크레티우스 베스필로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기원전 17년 기원전 16년 기원전 16년 보결 기원전 15년 기원전 14년
가이우스 푸르니우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타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우구르
기원전 13년 기원전 12년 기원전 12년 보결 기원전 12년 보결 기원전 11년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아피아누스 가이우스 발기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기원전 10년 기원전 9년 기원전 8년 기원전 7년 기원전 6년
아프리카누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데키무스 라일리우스 발부스
율루스 안토니우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술피키아누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기원전 5년 기원전 5년 보결 기원전 5년 보결 기원전 4년 기원전 4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하테리우스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가이우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키우스 비니키우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루키우스 파시에누스 루푸스 갈루스 술피키우스
기원전 3년 기원전 2년 기원전 2년 보결 기원전 2년 보결 기원전 2년 보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ⅩⅢ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 퀸투스 파브리키우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
기원전 1년 기원전 1년 보결 연도 불명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아울루스 카이키나 세베루스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37px; padding: 0 6px"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라틴어: Servius Sulpicius Rufus
생몰년도 기원전 105년 ~ 기원전 43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지위 파트리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퀸투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아버지)
포스투미아(아내)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아들)
참전 카이사르의 내전
직업 로마 공화국 집정관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51년
전임 폼페이우스
메텔루스 스키피오
동기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후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법학자.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옵티마테스파에 가담했지만 도중에 귀순한 후 새 체제에 순응하면서 법전 연구에 힘을 쏟았다.

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가문인 술피키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키케로는 기원전 63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가 집정관으로 당선된 후 뇌물 수수 혐의로 고발되었을 때 무레나를 옹호하는 연설을 하면서, 낙선한 그를 가리켜 "매우 잘 태어난 사람'이라고 밝히면서도, "직계 조상은 공직에 있은 적이 없다. 조부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으며, 아버지 퀸투스는 단순한 기수였다. 그러니 그는 새로운 사람과 다를 바 없다"라고 비꼬았다. 일부 학자들은 퀸투스 술피키우스 루푸스가 기원전 88년 호민관을 역임한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의 형제 또는 사촌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그와 키케로 사이에 나이 차이가 거의 없다고 밝혔다. 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그의 나이가 기원전 105년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는 키케로와 법학, 웅변 등 동일한 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민법에 관심을 많이 두고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기원전 88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내전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이 시기 공직을 맡았을 것으로 보이나 기록이 없어서 확실하지 않다. 기원전 82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권력을 잡자, 동방으로 떠나 로도스 섬에서 그리스 수사학자의 지도하에 교육받았다. 기원전 78년 술라가 죽은 후 로마로 귀환하여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기원전 74~73년 즈음에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와 함께 재무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65년 법무관을 맡아 여러 건의 횡령 사건을 법무관 자격으로서 심판했다. 기원전 63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여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 데키무스 유니우스 살리누스, 카틸리나와 대결했다. 선거에서 패한 후, 그는 무레나를 유권자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고발했다. 이듬해 호민관으로 선출된 소 카토와 그나이우스 포스투미우스가 고발자 측 변호사를 맡았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 그리고 키케로가 피고인 측 변호사를 맡았다. 키케로는 무레나가 이대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3위로 낙선한 카틸리나가 집정관이 될 테고, 그리 되면 그가 내세운 공략인 "채무자의 빚 전면 탕감"이 현실이 될 것을 우려했다.

키케로는 법정에서 긴 연설을 통해 그에게 존경을 표했지만, 동시에 그의 지적 업적을 무레나의 군사적 업적에 비해 덜한 것으로 묘사했다. 심지어 그의 집안이 파트리키이지만 신참자와 다를 바 없다고 비꼬기도 했다. 이로 인해 무레나는 무죄를 선고받고 집정관으로 인정받았다. 동문으로서 절친한 관계였던 키케로에게 모욕당한 게 큰 충격이었는지, 그는 오랫동안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기원전 59년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와 함께 이듬해 집정관으로 출마하려 했으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장인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포기했다. 기원전 52년 초에는 인터렉스를 맡아 폼페이우스가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된 선거를 조직했다.[1]

기원전 51년, 그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간의 대립이 격화되는 걸 우려하여, 원로원에서 또다른 내전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료 집정관 마르켈루스는 카이사르를 겨냥한 두 가지 법안을 제안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카실피나의 노우보 코무스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걸 불법으로 선언하고 갈리아의 모든 속주에 총독을 미리 임명하자는 것과 사령관이 부재 중에 집정관 직에 출마하는 걸 금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면 카이사르는 심한 압박을 받아 무력을 동원하는 걸 고려하게 될 것이다"라며 반대했지만, 원로원은 마르켈루스의 제안을 승인했다. 다만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등 호민관들이 거부권을 행사해서 발효되지 않았다. 한편 그는 킬리키아와 시리아에 파견할 증원군 모집을 반대했으며, 로도스와의 오래된 동맹을 재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자, 그는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수도를 떠났다. 그러나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희망해 캄파니아에 남아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아들 세르비우스를 브룬디시움을 포위하고 있던 카이사르에게 보냈다. 폼페이우스가 발칸 반도로 가자, 그는 로마로 간 뒤 원로원에 출석해 카이사르를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키케로에게도 로마로 돌아오도록 설득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한편, 그는 카이사르에게 히스파니아 원정을 감행하지 말고 폼페이우스와 화해하라고 촉구했지만 실패했다.

그 후 카이사르가 유권자가 뇌물을 받은 것에 대해 심판을 내리는 폼페이우스의 법에 따라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의 권리를 회복하기로 결정하자, 그는 깊은 실망을 느끼고 이탈리아를 떠났다. 기원전 47년 여름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사모스 섬에서 그를 찾아간 걸 볼 때, 그는 내전 동안 사모스 섬에서 조용히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46년 초 카이사르의 부름에 응하여 그리스 총독이 되었다. 그는 키케로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이 임명을 수락한 이유가 "내전의 상처를 씻고 모두가 화합할 길을 열고자 하는 데 있다"라고 설명했고, 키케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당신이 언급한 모든 이유는 합법적이며, 당신의 권위와 신중함에 완전히 합당합니다."

그는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 지지자들을 가능한 온유하게 대해, 그들이 안심하고 새 정권에 순응하도록 노력했다. 기원전 45년 가을에 로마로 돌아온 그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된 직후 원로원에서 결정된 모든 사안을 대중에 공개하는 법을 폐지하자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5월 원로원과 카이사르파 수장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간의 갈등이 또다른 내전으로 확대되려 하자, 그는 로마를 잠시 떠났다가 연말에 귀환했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암살자 중 한 명인 데키무스 브루투스로부터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를 강제로 받아내기 위해 쳐들어가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옥타비아누스를 내세워 안토니우스를 토벌하기로 했다. 그는 기원전 43년 1월 1일 회의 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법에 규정된 연령 제한에 개의치 말고 옥타비아누스에게 공직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해, 옥타비아누스를 내세워 안토니우스를 꺾으려는 키케로의 정책에 한 몫 거들었다.

이후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함께 안토니우스를 찾아가 데키무스 브루투스와의 전쟁을 중단하라고 요청하려 했다. 당시 그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내전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받아들였다. 그러나 안토니우스 진영에 도착하기 직전인 기원전 43년 1월 중순에 결국 병으로 사망했다. 원로원은 기원전 43년 2월 4일 회의에서 공화국을 위해 희생한 그의 무덤을 조성하고 동상을 연단에 세우기로 결의했다. 키케로는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죽음은 공화국의 큰 손실이라고 밝혔다.

그는 당대 로마 최고의 법학자였다. 키케로는 그가 법학에 깊은 이론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변증법을 통달했다고 밝혔다. 그는 생전에 180편에 달하는 법률에 관한 저서를 집필했는데, 서기 2세기 법학자 섹스투스 폼포니우스가 그의 저서를 인용한 걸 보면 그때까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으며, 몇몇 로마 학자들의 저서에 파편적으로나마 전해진다. 그의 글을 인용한 학자들은 그의 법학에 대한 열성적인 탐구와 풍부한 지식을 칭송했는데, 특히 민법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였다고 극찬했다. 키케로는 "만약 그가 민법에 도움이 되는 것만 웅변에 써먹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웅변에 전념했더라면, 이 시대 최고의 웅변가로서 명성을 떨쳤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그는 키케로와 서신을 자주 주고받았는데, 현재 전해지는 건 다섯 통이다. 그 중엔 키케로의 딸 툴리아의 죽음과 관련하여 키케로를 진심으로 위로하는 내용이 있었고, 동료 집정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도 있었다.

그는 생전에 포스투미아와 결혼하여 동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은 로마의 여성 시인인 술피키아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높다.


[1] 당시 로마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패거리와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 패거리간의 격렬한 시가전으로 혼란에 휩싸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선거가 불가능했다. 원로원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독재관에 선출하려 했지만, 소 카토 등이 "독재관이 아니라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하라"라고 요구하여 관철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