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라틴어: Gaius Claudius Marcell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조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아버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삼촌)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형)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사촌)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49년 |
전임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동기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 |
후임 |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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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대표적인 옵티마테스파 인사로, 카이사르의 내전 때 카이사르에 맞섰다.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명문 귀족 집안인 클라우디우스 씨쪽의 평민 방계 집안인 마르켈루스 가문의 일원이다. 고조부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로 혈투를 벌이고 시라쿠사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명장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이며, 조부는 기원전 166년, 155년, 그리고 152년에 집정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이다. 그는 아들 마르쿠스와 가이우스를 낳았는데, 첫째 아들 마르쿠스는 기원전 91년 수석 조영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73년 키케로가 시칠리아 전 총독 가이우스 베레스를 고소했을 때 법관을 맡은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인물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51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작은 아들 가이우스가 바로 이 문서의 주인공이다.생애 초기, 군대 또는 행정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기원전 56년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에 대항하여 수석 조영관에 출마했을 가능성이 있다. 키케로는 그해 11월 23일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마르켈루스 후보가 코를 너무 크게 골아서 멀리서 들리는구려."
또한 학자들은 행정관직의 나이 제한을 규정한 코르넬리우스 법(술라가 제정한 법)을 고려해 늦어도 기원전 52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거라 추정한다. 기원전 50년 여름 집정관에 출마한 그는 카이사르를 공격하는 연설을 하여 옵티마테스파의 지지를 얻어냈다. 이에 카이사르는 자신의 지지자인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를 지원했지만, 폼페이우스는 그를 지원했다. 이리하여 두 정치가가 완전히 갈라섰다는 게 민중들에게 분명히 알려졌다. 투표 결과 갈바는 낙선했고, 그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반대파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가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그들은 공공연히 "카이사르로부터 모든 명예와 지위를 박탈하기 위해 집정관이 되었다"고 밝혔다.
기원전 49년 1월 1일, 그와 렌툴루스는 그해 첫 원로원 회의를 소집했다. 이때 카이사르가 보내온 편지가 도착하자, 편지를 읽는 걸 막으려 했지만 호민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등의 강력한 항의로 어쩔 수 없이 편지를 읽는 걸 허락했다. 카이사르는 이 서신에서 자신이 로마에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는 법을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언급한 뒤 원로원이 원한다면 즉시 군단을 해산하겠지만 폼페이우스 역시 군단을 해산해야 하며, 만일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모든 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렌툴루스와 더불어 이 서신을 '협박'이라고 간주하고, 폼페이우스의 무력을 믿고 카이사르와 대결하라고 요구했다. 상당수의 원로원 의원들은 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아 망설였지만, 소 카토,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메텔루스 스키피오 등 강경파의 강한 압력과 폼페이우스의 장교들을 통한 은근한 압박 등이 더해지면서 침묵했고, 결국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군대 해산을 명령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등 호민관들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권고를 가결하여 호민관의 거부권을 묵살했다.
그 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로마를 떠나 남쪽으로 도피하여 카푸아에 이르렀다. 키케로는 그곳에서 집정관 일행을 만난 뒤, 친구 아티쿠스에게 "모든 사람이 카이사르가 제시한 평화 제안을 집정관이 받아들이길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는 며칠 뒤 집정관이 평화에 관심이 없다고 알렸다. 이후 지원군을 모아 카이사르와 맞서려 했지만 좀처럼 병력이 모이지 않자 검투사를 강제 징집하려 했다가 반발이 심하자 곧 포기했고, 2월 17일 폼페이우스의 지시에 따라 브룬디시움으로 급히 이동했다. 3월 초 그와 동료 집정관 렌툴루스는 선봉대를 이끌고 디라키움으로 건너갔다.
그 후 그는 기원전 49년에서 48년 겨울에 가이우스 코포니우스와 함께 함대를 이끌고 로도스 일대를 경비해, 카이사르가 일리리쿰으로 건너가는 걸 저지했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키케로가 기원전 44년부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성토하기 위해 발표한 필리피카이에서 그를 전쟁의 희생자로 언급한 걸 볼 때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와의 전쟁 도중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