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 라틴어: Gaius Coelius Caldus | |
생몰년도 | 기원전 140년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조부) 가이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아버지) 가이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장남) 루키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차남)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94년 |
전임 |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
동기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후임 |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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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평범한 플레브스 집안인 코엘리우스 씨족에서 처음으로 고위 행정관에 오른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그와 같은 프라이노멘인 '가이우스'를 사용했다고 한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동년배라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140년에 출생했을 것이다.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가이우스 마리우스,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처럼 명예를 얻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공적을 세우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또한 키케로는 그가 "사적인 문제에서 친구들을 돕고 공적인 문제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근면함, 영적 자질 및 웅변술"을 가졌다고 밝혔으며, 그의 웅변은 다소 평범했지만 좋은 경력을 제공했다고 설명했다.
처음에 재무관 선거에 출마해 낙선했지만, 기원전 107년 호민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티구리니 족을 상대로 패배한 뒤 굴욕적인 평화 협약을 맺은 귀족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레나투스를 고발했다. 그러면서 그가 배심원들을 매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역 사건을 다루는 사법 위원회에서 비밀리에 투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결국 유죄를 피할 수 없게 되자, 레나투스는 평결이 내려지기 전에 망명했다. 기원전 106년 또는 104년에 동전 주조관에 선임되었다. 그가 주조한 동전은 한쪽에는 로마 여신이 그려졌고 다른 쪽에는 전차를 탄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새겨졌다.
모종의 시기에 자신을 풍자한 시인 가이우스 루킬리우스를 고발했지만 패소했으며, 법무관을 맡아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를 관리했다. 기원전 94년 집정관에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당선되었으나, 집정관 시기에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기원전 91/90년에 갈리아 트란실파니아 속주에서 살루비족의 반란을 물리친 '가이우스 코엘리우스를 언급했는데, 이 인물이 기원전 94년 집정관 가이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 가이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는 기원전 69년경에 동방의 어느 속주 총독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차남 루키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는 에풀로네스 사제단의 일원이 되었다. 루키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의 아들 루키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는 동전 주조관으로서 조부의 얼굴을 새긴 데나리온을 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