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투스 디디우스 라틴어: Titus Didi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89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헤르쿨라네움 |
지위 | 노부스 호모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섹스투스 디디우스(조부) 티투스 디디우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98년 |
전임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동기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 |
후임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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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켈티베리아인과의 전쟁에서 군공을 세웠고 동맹시 전쟁에서도 활약했으나 도중에 사망했다.2. 생애
평민 가문인 디디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 따르면, 그의 조부는 섹스투스 디디우스이고 아버지는 티투스 디디우스라고 한다. 학자들은 기원전 143년 사치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킨 호민관 티투스 디디우스가 그의 아버지인 티투스 디디우스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그는 동전 주조관으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그가 주조한 동전 뒷면 그림은 고고학자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시칠리아에서 발발한 제1차 노예 전쟁 또는 제2차 노예 전쟁의 에피소드를 다룬 것이라고 추정하며, 어떤 학자들은 두 검투사간의 싸움을 다뤘다고 보고, 백부장이 죄를 지은 병사를 처벌하는 것을 묘사한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기원전 103년 호민관에 선출된 그는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아라우시오 전투의 참패로 인해 "로마인의 위대함을 모독한" 혐의로 동료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에게 고발당하자, 다른 호민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함께 재판이 폭력적이고 비합법적이라는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하려 했다. 그러나 두 호민관은 사투르니누스와 노르바누스에게 동조한 민중에 의해 연설장에서 강제로 쫓겨났고, 카이피오는 추방형에 처해졌다.
그 후 모종의 시기에 법무관을 역임한 그는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부임하여 그 지역을 약탈하러 쳐들어온 스코디키족을 격파하고 로마로 귀환해 개선식을 거행했다. 고대 기록에는 이에 대한 정확한 날짜를 밝히지 않았다. 19세기의 대다수 학자들은 플로루스가 트라키아인에 대한 승리를 거둔 로마 장군들을 나열할 때 기원전 118년 집정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와 기원전 112년 집정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시이에 '디디우스'라는 이름을 넣은 것을 볼 때 기원전 113년 이전에 마케도니아를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법무관을 역임한 자는 3년 후 집정관에 출마할 수 있는데 15년 후에야 집정관에 출마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현대 학자들은 그가 기원전 101년경에 마케도니아 총독을 맡아 스코디키 족을 물리친 뒤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한 후 기원전 98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으리라 추정한다.
그는 파트리키 신분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된 뒤 지난날 사투르니누스와 맞서다 추방당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를 복귀시켰다. 또한 민회가 법안을 다루는 것에 대한 법안인 "카이킬리아-디디아 법(lex Caecilia Didia)"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르면, 서로 다른 법안을 하나의 패키지로 결합해서 통과시키는 것은 금지되었으며, 제안된 법안의 첫번째 개시일과 투표일 사이에 최소 "3번의 눈디나에(nundinae)"의 기간을 두어야 했다. 눈디나에(nundinae)는 당시 사용되던 로마 달력의 한 주로, 1주는 8일이므로 3번의 눈디나에는 24일이다. 이는 농촌 주민들이 법안에 익숙해지고 투표에 참여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포풀라레스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민중을 선동하여 법안을 즉결 통과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켈티베리아인과의 전쟁을 개시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20,000명가량의 아레바키족을 주살하고 테르만티아 주민들을 산에서 평원으로 이주시키고 9개월 동안 항전하다가 항복한 콜렌다 주민들을 노예로 팔았다. 또한 아군의 보급물자를 약탈한 부족 대표들에게 "인구 조사를 수행하고 토지를 분배하겠다"고 약속해 한 곳에 모아놓은 뒤 모조리 학살하고 부족민들을 노예로 팔았다. 이 시기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그의 휘하 대대장을 맡았다. 세르토리우스는 카스툴로에서 켈티베리아인의 습격으로 도시가 함락당하자 탈출 후 병사들을 규합한 뒤 켈티베리아인의 복장으로 꾸며 성으로 접근했다. 켈티베리아인들이 동료인 줄 알고 성문을 열자, 그는 사방으로 공격해 그들을 섬멸하고 살아남은 자들을 모조리 노예로 팔아버렸다.
기원전 93년 켈티베리아인과의 전쟁을 마무리한 그는 로마로 귀환하여 2번째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91년 말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자 남부 전선을 맡은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 레카투스(Legatus: 군단장)에 선임되었다. 그와 함께 레가투스에 선임된 이들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등이었다. 기원전 89년 캄파니아에서 반란군과 맞붙은 그는 로마에 충성을 바치기로 한 히르피니족[1]의 지원에 힘입어 헤르쿨라네움 공략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해 6월 11일 갑작스런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