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포르키우스 카토 라틴어: Lucius Porcius Cato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89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대 카토(조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살로니아누스(아버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리키니아누스(삼촌)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사촌) 가이우스 포르키우스 카토(사촌)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89년 |
전임 |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
동기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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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라티움의 투스쿨룸에서 기원한 평민 가문인 포르키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대 카토는 포르키우스 씨족 최초로 집정관, 감찰관을 역임하며 로마 정계에서 맹활약했다. 아버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살로니아누스는 대 카토의 위명을 등에 업어 법무관을 역임했다. 또한 삼촌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리키니아누스 역시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사촌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와 가이우스 포르키우스 카토는 각각 기원전 118년과 114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카토'와 '폼페이우스'라는 호민관이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를 상대로 맞서다 추방당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복귀시키기 위한 법안을 마련했다고 한다. 오로시우스는 카토와 폼페이우스의 전체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폼페이우스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카토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118년 집정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라고 추정하지만, 프리드리히 뮌처는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카토라고 추정한다. 아무튼 이들의 법안은 파트리키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다른 호민관인 푸블리우스 푸리우스의 적극적인 반대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푸리우스가 반대한 배경에는 메텔루스의 오랜 정적인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늦어도 기원전 92년경에 법무관을 역임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90년 에트루리아 총독으로서 에트루리아에서 동맹시 전쟁에 호응하여 일어난 반란을 수습했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그는 "큰 피와 큰 노력을 들여" 이 지역을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후 기원전 89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스트라보가 북부 전선을 담당하는 동안, 그는 남부 전선을 맡았다. 그러나 그 해 초 푸키네 호수 전투에서 마르시 족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오로시우스는 로마군이 패전의 여파로 혼란스러웠을 때 젊은 마리우스가 지휘권을 탈취하기 위해 카토를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기록들과 교차검증이 되지 않기에 학계로부터 근거없는 이야기로 간주된다. 일각에서는 오로시우스가 마리우스의 정적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회고록에서 인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