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라틴어: Lucius Valerius Flacc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64년 이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증조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조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00년 |
전임 | 가이우스 마리우스 마니우스 아퀼리우스 |
동기 | 가이우스 마리우스 |
후임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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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감찰관, 기병장관.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표명한 인물이다.2. 생애
고대 로마에서 가장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발레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 중에서도 플라쿠스 지파는 메살라 지파와 함께 기원전 2세기부터 발레리우스 씨족 중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쳤다. 증조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95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대 카토와 함께 감찰관을 맡았다. 조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52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31년 집정관을 역임했다.그는 초년기에 마르스 신전의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에 선임되었다. 플라멘 디알리스는 항상 머리 장식을 착용하고 집 밖에서 3번 이상 밤을 지새울 수 없으며, 포메리움(Pomerium: 로마 시의 경계) 밖에서 군대를 이끌거나 말을 타는 것 등이 금지되었다. 이 때문에 눈에 띄는 군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사제직을 역임한 경력은 그가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공화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도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어느 시점에 사제직에서 물러난 뒤 기원전 103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100년 4번 연속 집정관을 맡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동료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마리우스는 정적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를 따르는 이들이 동료 집정관에 세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퇴역병들을 대거 동원하고 유권자들에게 돈을 풀었다. 그 결과 메텔루스의 추종자들은 낙선했다. 이후 마리우스와 결탁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로마 정계를 한바탕 흔들어놓으면서 심각한 정쟁이 벌어졌지만, 그는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았다.
마리우스는 기원전 99년 집정관 선거에서 불출마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사투르니누스의 동료인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의 집정관 선임을 추진했다. 역시 호민관 연임을 꾀하고 있던 사투르니누스는 마리우스의 계획을 돕기로 하고, 지지자들을 총동원해 집정관 선거전에 투입했다. 그러나 글라우키아는 기원전 100년 12월 10일 집정관 선거에서 낙선했고, 또다른 후보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와 가이우스 멤미우스가 당선되었다. 그러자 사투르니누스의 지지자들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는데, 그 과정에서 멤미우스가 살해되고 말았다.이에 원로원은 사투르니누스 일당에게 원로원 최종결의를 선포하고 마리우스에게 토벌을 맡겼다. 마리우스는 고심 끝에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친히 토벌했다. 이렇듯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갔지만, 그는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플루타르코스는 그를 "마리우스의 동료가 아니라 장식품이었다"라고 평했다.
기원전 97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와 함께 감찰관이 되었다. 두 감찰관은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은 이탈리아인들 중 시민권을 수여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 자들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또한 국가 행사에 들어가는 예산을 제한하는 법을 폐지할 것을 제안한 호민관 마르쿠스 드로니우스를 원로원에서 추방했다. 하지만 드로니우스가 이듬해에 그를 제쳐놓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뇌물 수수 혐의로 고발했던 것을 볼 때, 안토니우스가 이 모든 정책을 주관했고 그는 그저 따라가기만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몇년간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던 그는 기원전 90년 또는 88년에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가 사망한 후 프린켑스 세나투스 직위를 물려받았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가이우스 마리우스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을 때 어느 쪽과 손잡지 않고 중립을 고수했으며, 술라가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마무리하고 그리스로 건너가서 이탈리아로 쳐들어갈 준비를 하면서 내전이 임박하자 마리우스파와 술라파 양자가 서로 화해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양자 모두 화해 대신 무력으로 해결하기를 선호했기에 무산되었고, 그는 나중에 술라에게 귀순했다.
기원전 82년 말 술라의 내전이 종식된 후 인터렉스에 선출되었다. 그는 집정관 선거를 조직하는 대신 술라에게 공화국의 질서를 재건하기 위해 독재관의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을 도입해 통과시켰다. 술라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플라쿠스를 기병장관에 삼았다. 하지만 술라가 나름의 개혁을 추진하는 동안, 그는 별다른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으며 사망 날짜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기원전 63년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사투르니누스를 살해한 혐의로 고발당한 가이우스 라비리우스를 변호하는 연설을 할 때 플라쿠스를 "여전히 잘 기억되는 고인"이라고 밝힌 것을 볼 때, 그는 그 이전에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손에 대해서는 전해진 바 없다.
기원전 86년 집정관을 맡아 술라를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하려 했다가 살해당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그의 사촌인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