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라틴어: Gaius Antistius Vet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아버지)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0년 |
전임 |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
동기 | 옥타비아누스 |
후임 |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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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플레브스 가문인 안티스티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아버지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는 기원전 69/68년 먼 히스파니아 속주의 총독을 역임했다. 이 당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버지 베투스의 밑에서 재무관을 맡았는데, 기원전 61년 먼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한 카이사르는 아들 베투스를 재무관으로 선임했다. 이후 기원전 56년 호민관을 역임했다.기원전 45년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 또는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해 카이사르의 사촌인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바수스 토벌을 맡았다. 당시 섹스투스에 의해 유대 왕국의 실권을 쥘 수 있었던 안티파트로스가 협조했다. 그러나 아랍 왕자 알칸도니오스와 파르티아 왕자 파코로스 1세가 그를 도우려 왔고, 베투스는 큰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베투스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게 충분한 지원을 제공하지 않은 킬리키아 총독 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를 비난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기원전 44년 초 카이사르가 급파한 루키우스 스타티우스 무르쿠스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로마로 귀환하던 그는 발칸 반도에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만났다. 그는 브루투스에게 시리아에서 확보한 국가 자금을 넘기고 가까운 장래에 로마에서 법무관 선거가 열리지 않으면 개인적으로 브루투스와 합류하겠다고 약속했다. 기원전 43년 약속대로 브루투스와 합세해 레가투스로 선임되었다. 이후 브루투스가 필리피 전투에서 패망하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안티스티우스'라는 인물이 알프스산맥에 거주하는 살라시 족과의 전쟁을 이끌었다. 그는 산길을 점령한 뒤 2년 동안 산꼭대기에 숨은 적을 포위 공격한 끝에 살라시 족이 로마 수비대가 자기들 영역에 주둔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인물이 기원전 30년 집정관 안티스티우스와 동일인물이며, 기원전 35년에서 33년 사이에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기원전 30년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으며, 기원전 26년 가까운 히스파니아 총독에 선임되었다. 플로루스에 따르면, 기원전 26/25년 겨울에 가우손이 이끄는 아스투레스인들이 눈덮인 산에서 내려와 아스투라 강으로 진군한 뒤, 아스투라 강 인근의 타라코넨시스에서 겨울 숙영 중이던 3개 로마 군단을 습격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베나벤테 지역의 브리게키니 족이 아우구스투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아우구스투스는 즉시 현지 로마군에 대응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에 따라 먼 히스파니아 총독 푸블리우스 카라우시우스와 함께 칸타브리아 전쟁을 단행했다. 로마군이 메둘리오스 산을 포위하여 15마일 길이의 해자와 도랑을 건설하자, 아스투레스족 지도자 가우손은 이를 뚫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을 퍼부었으나 끝내 뚫지 못하고 기아와 추위로 인해 도저히 살아남을 가망이 없어지자, 병사들에게 독약을 마시거나 검으로 자살하라고 명령하고 자신도 함께 자살했다. 살아남은 아스투레스인들은 베투스에게 항복했다. 기원전 25년 아우구스타 에메리타(오늘날 메리다 유적지)에서 승리를 기념하는 주화가 주조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는 기원전 6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