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페디우스 라틴어: Quintus Pedi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3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페디우스(아버지) 대 율리아(어머니)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형) 율리우스 카이사르(삼촌) 아티아(사촌)[1] 발레리아(아내) 퀸투스 페디우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43년 |
전임 |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
동기 | 옥타비아누스 |
후임 |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카리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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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종신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로, 아우구스투스가 18살의 나이에 등장할 때부터 그를 도와 2차 삼두정의 기틀을 만드는데 힘을 보탠 인물로 알려져 있다.2. 생애
파스티 카피톨리니에는 그의 아버지의 프라이노멘이 '퀸투스'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들어있지 않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나 대 율리아의 손자라고 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그의 경력을 고려했을 때 대 율리아의 아들이자 카이사르의 조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어머니 대 율리아는 두번 결혼했는데, 첫 남편인 로마 명문귀족 피나리우스와의 사이에서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를 얻었고, 두 번째 남편 퀸투스 페디우스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 집정관을 지낸 퀸투스 페디우스이다. 따라서 그의 이부형제는 원로원 의원으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지했음에도 퀸투스 페디우스와 함께 옥타비아누스를 돕고,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과정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 멸망 과정에서 결정적인 장면을 만든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가 된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치를 때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기원전 57년 갈리아 나르보네시스에서 새로 모집한 2개 군단을 이끌고 가세했으며, 벨가이 원정 때 루키우스 아우룬쿨레이우스 코타와 함께 로마 기병대를 지휘했다.
기원전 55년 조영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카이사르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그나이우스 플란키우스와 아울루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에게 밀려 낙선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나이우스 플란키우스를 위한 변호>에서 이 점을 들먹이며 플란키우스가 사람들을 선동하여 다른 후보들을 위협했다는 고발은 그가 당선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인물'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캄파니아에 있던 그는 카이사르와 키케로 사이를 중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키케로는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페디우스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 브룬디시움 공방전에 대해 설명했다고 밝혔다. 이후 카이사르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상대하러 원정을 떠난 동안 이탈리아에 있으면서 법무관을 역임하던 그는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 개 군단을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했다.
그 후 전직 법무관의 자격으로 가까운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티투스 라비에누스 등이 이끄는 적군에 맞서 카이사르의 본군이 올 때까지 버텼고, 카이사르가 문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로마로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할 때 참여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따라 카이사르 재산의 1/8을 물려받았다. 그는 이부형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와 유언장상 외삼촌 카이사르 재산 전체 중 1/4을 물려받았는데, 두 사람은 이 재산을 유산의 3/4을 받은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선물하고 그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다만, 그의 이부형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는 외삼촌 카이사르 암살범들에게 복수하기 용이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일단 지지해, 페디우스만 옥타비아누스를 초반부터 후원했다.[2]
기원전 43년 8월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로 군대를 진군시키고 집정관에 선임될 때 동료 집정관이 되었다. 그는 카이사르를 죽인 자들에게 궐석 상태에서 유죄를 선고한다는 내용의 <페디우스 법>을 통과시켰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했던 원로원 결의를 폐지했다.
그 후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페디우스에게 서한을 보내 12~17명의 이름으로 구성된 첫번째 숙청자 명단을 제시하며 이들을 숙청하라고 명령했다. 이 사실이 새어나가자 로마 시 전체가 공포에 사로잡혔다. 페디우스는 비밀 명단을 공개하면서 탄압은 이것으로 제한될 것이니 안심하라고 권했지만, 시민들의 동요가 워낙 극심해서 이를 수습하는 데 애를 먹다가 얼마 안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 후 삼두는 로마로 입성한 뒤 본격적인 숙청에 착수했다.
그는 기원전 61년 집정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의 누이 또는 사촌으로 추정되는 발레리아와 결혼했다. 기원전 41년 재무관을 맡은 퀸투스 페디우스는 그의 아들로 추정된다.
[1] 소 옥타비아,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남매의 어머니이자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종질.[2]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일방적으로 소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통보하고, 소 옥타비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두 딸 대 안토니아, 소 안토니아에게 무관심하자, 사실상 지지를 철회한 다음 벼르다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전부터 옥타비아누스를 사실상 지지했고, 해전 패배 후 수세에 몰린 안토니우스가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자, 그 사절을 자리에서 바로 죽이고 옥타비아누스의 요청에 따라 함께 군을 이끌고 이집트를 공격해 멸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