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 라틴어: : Publius Sulpicius Quirinius | |
생몰년도 | 기원전 51년 ~ 서기 21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라누비움 시 인근 겐스 술피키아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조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아버지) 클라우디아(첫번째 아내) 아이밀리아 레피다(두번째 아내)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조카)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2년 |
전임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 |
동기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아피아누스 → 가이우스 발기우스 루푸스 |
후임 |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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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51년경 라누비움 시 인근 겐스 술피키아에서 출생했다. 조부와 아버지 모두 푸블리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는 것 외엔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여자 형제는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아내인 이름 미상의 귀부인이 있다. 그녀는 리보와의 사이에 세 자녀를 얻었는데, 첫째인 큰딸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결혼한 스크리보니아, 둘째와 셋째는 이란성 쌍둥이 형제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다. 퀴리니우스의 남자조카들은 모두 16년 티베리우스 황제와 황제의 모후 리비아 드루실라, 외삼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 남매를 암살하려는 미수 사건으로 고발받아 16년 9월 13일 각각 처형, 자살했다.플로루스에 따르면, 기원전 15년 크레타와 키레나이카 지방의 총독을 맡아서 가라만테스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뒤 로마로 귀환했다고 한다. 기원전 12년 집정관에 선임되어 6개월간 재임하다가 사임했고, 기원전 5년부터 기원전 3년까지 갈라디아와 밤빌리아의 총독에 선임되어 킬리키아 출신의 호마나데스족 요새를 공격해 포위 공격을 펼쳐서 수비대를 굶주려 죽게 한 끝에 함락했다. 이후 기원전 1년부터 서기 4년까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수행원으로서 동방 여정에 동행했다.
서기 6년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왕이 추방된 후, 유다이아 일대는 로마의 직접 통제하에 들어가 시리아 속주에 속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퀴리니우스를 시리아 총독으로 선임했다. 이후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지시에 따라 세금 액수를 정하기 위해 유다이아 전역에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이때 모든 사람은 가족원 외에도 재산 및 소유한 토지의 크기를 명확히 밝혀야 했다. 인구 조사를 통한 세금 징수는 유대인 사이에 큰 불만을 일으켰고, 한때는 반란이 일어나는 듯했지만 대제사장 안나스가 잘 설득해 봉기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열심당원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고고학자들은 시리아 총독으로 퀴리니우스가 발행한 주화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카이사르 36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악티움 해전으로부터 계산한다면 서기 5/6년에 해당되는 년도로, 당시 그가 시리아 총독으로 활동했다는 걸 알려준다. 또한 1674년 베이루트에서 베네치아로 운송된 로마 장교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세쿤두스의 비문에는 "나는 퀴리니우스의 명령에 따라 아파메이아 시의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이는 퀴리니우스가 인구 조사를 실시했음을 입증한다.
누가복음 2장에는 예수가 탄생할 무렵 인구 조사가 있었다고 기술되었다. 하지만 당대 기록에 명시된 유다이아 지방에서 실시된 인구조사는 오직 서기 6년 퀴리니우스의 인구조사 뿐이며, 헤로데 대왕 말년(기원전 4년 이전)에 태어났다고 명시된 예수의 탄생과 일치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성경 비평 학자들은 누가복음과 역사적 증거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지만, 데이비드 J. 아미티지 등 일부 학자들은 누가복음이 잘못 해석된 것으로, 인구조사는 그 전의 구절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퀴리니우스는 12년까지 시리아 총독으로 재직하다가 로마로 돌아갔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퀴리니우스가 9년 후인 21년에 사망했을 때, 티베리우스는 그를 위한 공개 장례식을 치르고 제사에 쓸 공물을 바치자고 요구해 승인을 얻어냈다. 티베리우스는 장례식에서 그를 "아우구스투스 통치 기간에 충실한 봉사로 집정관이 된 지칠 줄 모르는 군인"으로 묘사했다.
16년, 여자형제의 아들들로 조카들인 루키우스 리보, 마르쿠스 리보 형제가 티베리우스 황제와 황제의 어머니, 외삼촌을 암살하려고 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때 퀴리니우스는 형제를 돕고, 변호사로 법정에 서서, 조카들의 억울함을 항변했다. 퀴리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전처(前妻) 스크리보니아와 함께 리보 형제가 억울하게 고발됐다고 호소했는데, 피고가 된 퀴리니우스, 스크리보니아의 조카 루키우스는 외삼촌, 고모와 함께 법정에서 억울함을 함께 밝혔다. 그렇지만 이 고발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마르쿠스는 병을 핑계로 재판에 불출석하고 자신의 노예를 도피시키려고 하거나 그의 법정 증언을 막고 협박했다. 그래서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티베리우스 황제는 마르쿠스 리보의 노예를 황실 재무관 휘하 노예로 소유권을 바꾼 다음, 그를 해방노예로 신분을 바꾸고, 증인 자격으로 재판에 참여시켜 재판을 재개한 다음, 9월 13일 유죄 판결을 내렸다.
퀴리니우스는 처음에 클라우디아라는 기원이 불분명한 여인과 결혼했고, 모종의 시기에 이혼한 뒤 서기 3년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손녀이자 서기 11년 집정관인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자매인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들은 몇 년 안에 이혼했다. 그는 20년에 아이밀리아 레피다가 간통을 서슴지 않았고, 재혼한 남편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사실은 자기 자식이며, 결혼 생활 중에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고 고발했다. 형제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그녀를 변호했고, 저명한 여성들이 티베리우스 황제를 찾아가 그녀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결국 그녀는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