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7 10:51:57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16년 집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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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라틴어: Lucius Domitius Ahenobarbus
생몰년도 기원전 49년 ~ 서기 25년
지위 노빌레스, 로마 황족
국가 로마 공화국로마 제국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부모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아버지)
아이밀리아 레피다(어머니)
배우자 대 안토니아
자녀 도미티아(장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장남)
대 도미티아 레피다(차녀)
소 도미티아 레피다(삼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차남)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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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원로원 의원, 황족, 장군, 외교관, 행정가이자 인기 전차기수, 배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리비아 드루실라의 두 아들인 티베리우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형제와 함께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게르마니아 땅을 거의 정복한 장군으로, 아우구스투스 시대 동안 제국 동부에 대한 행정, 외교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선보인 황족 중 한명이다. 허나 대중들에게는 5대 황제 네로의 할아버지로 유명하다.

2. 생애

해군제독으로 "오만하고 잔인하고 사치스러움 속에서 나온, 비루한 인간의 표본"으로 악평을 받은, 집정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그의 아내 아이밀리아 레피다의 외아들이다.

옛 공화정 시절, 평민씨족 도미티우스 일족 중 가장 강력하고 위세가 대단한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출신이다. 조부는 이름이 같은, 옵티마테스파의 일원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이고, 할머니는 소 카토의 누이 포르키아이며, 외가는 알바롱가에서 기원했으나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후예로 알려진 명문 파트리키 일족 아이밀리우스다. 더욱이 직계조들이 부친을 포함해 로마 공화정 아래에서 고위 선출직을 독점해, 부와 권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능력이 뛰어나고, 인간성이 괜찮은 편인 명문 귀족임에도 직계조들의 행적으로 얻은 아헤노바르부스 가의 악명, 선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행적으로 인해 원로원 입성 전부터 이상하리만큼 평이 나빴다.

소년 시절부터 이렇게 세간의 평이 최악이 된 이유는 해군제독 그나이우스의 외아들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루키우스는 동료 귀족들 사이에서 "오만하고 잔인하고 사치스러운 가문의 악명"과 "비루한 사내의 표본"이라는 선친의 악평을 죄다 뒤집어 썼고, 유언비어로 속앓이를 했다. 하지만 그는 생애 전반에서 보여지듯, 큰 문제가 없었고 늘 저평가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명문귀족의 자제답게 훌륭하게 성장해, 젊은 시절부터 오늘날 프로 스포츠 선수의 인기, 수익을 독차지한 전차기수 중 슈퍼스타로 명성이 자자했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운동능력과 전차 운전 기술은 손자 네로와 달리 상당히 뛰어났다. 아헤노바르부스는 현역 전차기수로 활동한 기간 내내 모든 로마인에게 "헌신적이고 책임감이 대단한 사람"으로 평가받았고 그 인기가 상당했다.

10대 후반, 20대 초반부터 슈퍼 스타이자 뛰어난 리더십과 헌신적인 전차기수이며 명문귀족 자제라는 타이틀로 유명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얼핏보면 아내로 맞이한 대 안토니아와의 결혼 역시 이 명성이 아니냐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기원전 36년, 고작 7세의 나이에 2차 삼두정치를 이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 레피두스의 화합을 위해 안토니우스, 소 옥타비아 부부의 딸 대 안토니아와 약혼해, 대 안토니아가 결혼 적령기에 이른 기원전 22년 혹은 기원전 23년 26세의 나이에 결혼했다. 그래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일찌감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일원이 됐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이래 수많은 고위직을 차지한, 도미티우스 씨족의 권세 지파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이라는 후광, 누나 소 옥타비아의 사위라는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인간성과 재능 모두를 높이 평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아헤노바르부스를 아꼈다. 그 결과, 그는 제국의 요직과 남성황족들이 차지한 직책을 역임한 뒤, 모두의 인정 아래 기원전 16년 집정관이 됐다. 이후 기원전 13년과 기원전 12년의 두 해 동안 원로원 관할 아래 있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임명됐다.

20대 초반의 나이부터 인기 프로 스포츠 선수에 해당되는, 로마 최정상급의 전차기수으로 유명했지만 아헤노바르부스는 원로원 입성 직후부터 그 재능을 뽐냈다. 그는 주변이 색안경을 끼고 안 좋게 보는 가운데에서도, 아우구스투스의 안목 그대로 재정, 행정, 외교 쪽의 능력이 출중하고 결단력과 판단력이 상당했다. 하여 그는 속주 총독 임기를 마친 뒤, 원로원 안팎에게 능력을 인정받았고 이는 그가 아우구스투스 아래 요직에서 그 능력을 뽐낸 이유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주도로 철저히 계획된, 게르마니아 전쟁이 개전된다. 이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남자 친인척들을 대거 참전시켜 로마군을 이끌게 하는데, 소 옥타비아의 사위인 그는 개전과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티베리우스와 일리리쿰과 라인강 상류 쪽 전선을 담당하며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수행했다. 이때 그는 로마군을 지휘하면서, 무수한 적들을 물리치고 목숨을 건 헌신을 선보이며 엘베강을 도하한 장군으로 로마군 병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이 시기, 아헤노바르부스는 장모의 남동생이며 로마 공화국의 국가 원수이며 실질적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에게 승리와 열정을 기리며 제단을 쌓았다.

전쟁 기간 동안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이는 그와 동서 사이인, 대 드루수스였다. 드루수스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 제국의 실질적인 2인자 아그리파 등의 추천과 인정 아래 갈리아 전역 총독으로 있으며 전쟁을 진두지휘했고 군공이 가장 화려했다. 더욱이 그는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 뱃속에 있던 시절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아우구스투스는 두 양자 중 그를 친아들로 여겨 무척 예뻐했다. 이런 상황에서 드루수스는 로마 장군 최초로 엘베 강을 돌파하고, 북해를 건너 베저 강까지 도달했고, 정복한 일대를 거진 로마 영역으로 만든다. 이는 이전부터 측근들과 원로원에게 "내가 죽으면 그 다음은 내 아들 드루수스다"고 여러 번 의견을 밝힌 아우구스투스를 흥분시켰고, 원로원과 민중들은 드루수스 아래에서 게르마니아가 곧 로마 땅이 될 것이라고 찬사를 늘어 놓았다. 따라서 대 드루수스는 전쟁 수행 와중에도,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적극적인 추천과 도움 아래 집정관이 됐다. 원로원은 흥분해 그에게 각종 영예를 내렸다. 그래서 게르마니아 전쟁을 수행 중인 여러 장군 중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 주도 하에 유일하게 개선식을 보장받는다. 이는 아헤노바르부스의 손아랫동서 드루수스가 개선식 이후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 가문에 정식 입적돼 그와 그 자녀들이 차기 제위를 이어받는다는 것을 뜻했다. 그런데 로마로 귀환하기 전, 도하 작전 수행 중 낙마사고로 드루수스가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하늘에 대고 신을 욕하고 저주를 퍼부을 정도로 좌절하는데, 드루수스 장례식 직후 아헤노바르부스는 드루수스 자리를 대신하게 된 티베리우스와 함께 로마군을 통솔하게 된다.

아헤노바르부스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수많은 승리를 이끌었다. 그래서 아그리파, 대 드루수스의 연이은 죽음으로 후계 문제를 위해 로마로 조기 소환된 티베리우스 대신 기원전 3년부터 1년간 게르마니아 전쟁 총책임자로 전쟁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용감함과 과감함, 침착함 아래에서 대 드루수스 못지 않은 성과를 내며 로마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늪지대와 빽빽한 산림 지대를 돌파하고 게르만 부족들이 매복한 늪지대에서 수없는 적을 무찔렀고, 라인강과 엠스 강 사이의 습지 위에 폰테스 롱기라는 산책로를 건설해 로마의 게르마니아 행정작업에 힘을 쏟았다. 이때 그의 결정은 무모해보였는데, 18년 뒤인 서기 15년 로마와 게르만족 사이에서 벌어진 폰테스 롱기 전투에서 로마군은 이때 만든 산책로의 이점 아래 승리했다. 그래서 아헤노바르부스의 안목과 결단력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원로원 모두에게 큰 찬사를 받았다. 하여 그는 폰테스 롱기를 만든 공로를 인정받아 상승 장군들에게 수여된 승리의 휘장과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렇지만 이런 군공과 성과에도, 아헤노바르부스는 1년만에 사실상 경질돼 로마에 조기소환됐다. 그 이유는 표면상으론 아우구스투스가 거의 끝내가는 전쟁을 확실히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아헤노바르부스가 취한 전략이 로마에게 약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을 적부터 외교관, 행정관으로 오리엔트와 레반트에서 로마, 헬레니즘 왕국, 페니키아, 아르메니아, 파르티아가 활용한 통상적인 외교 전략에 능통했다. 그래서 그는 게르만 부족들을 대할 때 지극히 오리엔트,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국가들에서 사용하고 활용된 외교 전략을 차용했다. 그러나 게르만족들은 부족마다 입장이 달랐고, 그들은 대 드루수스가 취한 카이사르, 아그리파 식의 "신뢰와 상호 공존" 형태의 것이나 티베리우스가 활용한 상호 신뢰 방법을 선호했다. 따라서 아헤노바르부스의 이런 전략은 기원전 5년 게르만족들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친로마파 전선을 형성한 게르만 부족들은 제 이익을 앞세우며 여러 부족을 이용해 심리전을 펼친 아헤노바르부스를 믿지 못했고, 이는 티베리우스&드루수스 형제가 상호신뢰 아래 쌓은 친로마 전선에 균열을 야기했다. 설상가상 아헤노바르부스는 현지 사정상, 군사전략을 한동안 더 수행해야 된다고 판단한 책임자인 까닭에 이는 자신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서둘러 게르마니아 정복을 마무리하고자 한 아우구스투스가 그를 1년만에 사실상 경질한 이유가 됐다.

따라서 아헤노바르부스는 소환된 뒤, 군공과 성과를 인정받고 보다 좋은 중책을 맡았음에도 다음 해에도 개전될 게르마니아 전선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아헤노바르부스의 후임으로는, 노련한 장군으로 정복지 속주화 작업 능력이 탄탄하다고 평가받는 마르쿠스 비니키우스가 물러받는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바루스를 파견하게 되는데, 바루스는 아헤노바르부스와 달리 매우 강압적이고 폭압적인 통치술로 일관한 인사인 터라 이는 최악의 오판으로 기록된다.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와 함께 게르마니아를 거의 정복할 뻔한 장군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인척 남성이고 문무 모두의 경험과 능력이 뛰어났다. 따라서 로마 귀환 이후, 여러 중책을 연이어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그 결과, 루키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이자 후계자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동방으로 파견될 당시 함께 지중해 동부로 떠났다. 이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아헤노바르부스의 능력과 인간됨을 상당히 인정해 손수 고른 수석고문단의 한 자리를 그에게 내렸다.

아헤노바르부스는 게르마니아 전쟁 기간 내내 비사교적이고 폐쇄적인 티베리우스와 친분을 나눈 몇 안 되는 로마 제국 최고위 인사였다. 따라서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반발 속에서도, 어떻게라도 양자 티베리우스를 로마로 복귀시키고자 한 아우구스투스는 아헤노바르부스를 파테르쿨루스 등 티베리우스 측근들과 나란히 고문단에 집어 넣었다. 즉, 오랜 세월동안 티베리우스와 교류해온 인사였기에, 내심 이번 동방 순행 후 티베리우스를 로마로 데려오길 원한 아우구스투스의 본심도 깔려있었다. 다행히 눈치 빠른 아헤노바르부스는 마르쿠스 롤리우스가 수석 단장으로 있는 가이우스 카이사르 일행 중 한명으로 로마를 떠나, 제 역할을 다 했다. 수석 고문단장으로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스승인 롤리우스는 티베리우스와 일찍부터 견원지간이었는데, 아헤노바르부스는 다른 고문들과 함께 슬기롭게 이를 해결했다. 이때 가이우스 카이사르 일행은 로도스 섬에 들리어 은퇴 후 유학 생활 중인 티베리우스와 만났는데, 그는 롤리우스의 간계로 벌어진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카이사르 사이의 갈등도 완만히 해결했고 원로원과 황제의 조사 요구에 성실히 답해 티베리우스 복귀의 길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롤리우스와 가이우스 카이사르 간의 대립 속에서 다른 고문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어 롤리우스 뇌물 수수 사건으로 뒤숭숭해진 가이우스 카이사르 사절단 안에서 동방의 여러 현안을 성공리에 완수한다.

하지만 가문의 이미지와 뜬 소문으로 퍼진 세간의 편견, 다른 이들의 이중적 시선, 망나니 아들 루키우스가 벌인 폭력 사건과 살인 사건은 아헤노바르부스의 명예, 위엄, 인간됨을 모두 깎아 내렸다.

그가 비난받은 이유는, 상술했듯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이 그동안 쌓은 악명과 선친의 내전 기간 행보가 컸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그가 비난 받은 것은 젊은 시절 전차기수를 하면서 얻은 명성, 그리고 두 아들의 망나니 같은 언행과 사고 때문이었다.

주변 원로원 의원들은 아헤노바르부스가 젊을 적부터 뛰어난 실력 아래, 인기와 부를 독차지한 인기 스포츠 스타라는 점만으로 그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아헤노바르부스를 미워했고 어떻게든 그를 헐뜯었다. 따라서 가이우스 카이사르 고문단의 귀국 직후, 그는 동명이인의 장남이 벌인 폭력 및 살인 사건(자유민 살해)를 그가 했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들이 사고를 쳤는데 이름이 같아 오해받고 잘못 소문이 나면서 모든 비난을 뒤집어 쓰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원로원 내 반대파에게 지나친 폭력성과 비열함과 잔인함을 갖췄다고 죽을 때까지 비난받고, 이는 후일 차남 그나이우스과 손자 네로, 외손녀 메살리나의 악행과도 연관돼 사후에도 그가 후대 로마인, 현대인들에게 모든 비난을 받게 된 원인이 됐다.

더 끔찍한 것은 주변의 안 좋은 시선, 질투보다 심각한 가문과 조상들이 쌓아 놓은 악명으로 얻게 된 이미지였다.그는 다른 귀족들처럼 사소한 잘못을 했더라도 모든 것이 악행이 됐고, 이는 곧 그가 존재하면 안 되는 이유이자 비난 사유가 됐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그가 스스로 벌인 몇 번의 논란도 있어, 마냥 억울함을 호소할 수만은 없게 됐다고 한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명문귀족이며 황족임에도, 예술가, 운동선수로서의 능력을 과감히 뽐냈다. 이는 차남의 아들로, 아헤노바르부스의 손자인 5대 황제 네로와 비슷한 점이다. 이때 그가 진심을 다해 최선을 다한 취미활동 내지 제2의 직업은, 무언극 연기와 배우 활동이었다. 그는 장군, 행정가, 외교관임에도 무언극 배우이자 연기자로 활동하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따라서 전차기수를 그만 둔 이후, 원로원 의원으로 있으면서 바쁜 공무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이 취미를 즐기고 자신의 끼를 마음껏 발산했다. 오늘날 기준으로 이런 취미는 일반적인 로마귀족들의 사치스러운 고급요리 탐닉, 밤낮으로 계속된 주연과 같은 것과 달리 매우 건전한 여가생활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상식은 매우 보수적인 로마사회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로마 사회에서 연기를 하는 것은 매우 저급한 것으로 폄하됐고, 로마인들에게 있어 본업을 잘하더라도 예술적 취미를 갖는 것은 비난과 조롱거리에 불과했다. 제 아무리 건전한 취미라고 해도, 어쨌든 예술 활동을 한다는 것은 그가 욕을 먹는 이유가 됐다.

허나 아헤노바르부스는 젊은 시절 전차기수로 활동했던 만큼이나, 주변을 신경쓰지 않았고 배우로서의 작품 활동과 연기에 몰두해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문제가 터지는데, 아헤노바르부스는 연기에 몰두한 나머지 로마 기사계급의 기혼 여성을 상대역으로 삼아 연기까지 벌였다. 이 행동은 자신의 판토마임 연기 중 코미디 연기를 하면서 기사계급 기혼 여성과 남편을 무대에 올리고, 이후 관중들과 함께 화기애애하게 끝난 점에서, 불륜이 아니었고, 델라토르들에게 간통죄 누명을 쓸 이유도 없었다. 당사자 간엔 더 큰 소란이 벌어지거나, 정치적 문제로 확대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행동은 그는 색안경을 끼고 어떻게든 그를 까려는 동료 의원들에게 크게 욕을 먹는 원인이 됐다. 정적들은 그가 무례하다고 비난했다. 명문귀족 수장으로 황제의 조카사위인 뛰어난 장군, 외교관이 사람들 앞에서 저급한 희극 공연 배우로 꾸준히 활동했다는 이유였다. 이때 욕을 어느 정도로 정적들과 매우 보수적인 로마 귀족 에게 먹었는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측근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에게는 저열한 행동을 했음에도 그동안 능력을 보여준 것마저 무례한 행동이었다고 욕을 크게 먹었다. 또 그는 플란쿠스 등 보수적인 아버지, 숙부뻘 선배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장군, 외교관으로 보여준 그 동안의 뛰어난 모습 역시 결국엔 모순적이고 가증스러운 행동이었다고 질타받고, 검열관, 감찰관으로 아프리카 속주, 일리리쿰에서 선보인 성과마저도 결국엔 무례했었다고 욕을 먹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당연히 가문의 악명과 아버지 그나이우스의 나쁜 이미지, 명문가 자제이나 망나니들인 아들들의 행보와 엮어 안 좋은 소문으로 재생산돼 거리에 퍼졌다. 그 결과, 그는 대중적 이미지까지 깎아 먹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가문행사를 위해 검투사 경기를 역대급 규모로 개최해줬음에도, 이때 참전한 검투사들의 경기력이 과도하게 유혈사태가 났다고 이야기가 날 정도 격렬해 욕을 먹었다. 이탈리아 도시 곳곳에 야수쇼를 열었던 것도 비난받았는데 상식 이상으로 비난의 화살이 인격적 비난으로 비화돼 정신없이 쏟아졌다고 한다. 이때 그를 비난한 이들은 "소문처럼 아버지처럼 오만하고 잔인하고 사치스럽다"고 맹렬하게 비난했고, 정적들은 사실을 확대해 아우구스투스에게 아헤노바르부스가 벌인 검투사 경기가 잔혹하고 유혈 사태가 났다며 고발했다. 다행히 이렇게 말한 이들은 대부분 호사가들과 반대파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방치할 경우, 상황이 악화될 것은 당연해,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조카사위인 그에게 이 문제를 정식 경고했다.

고조부 이래 내려온 가문의 악명과 부친의 행적을 제외하고,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욕먹은 근본적인 이유 중 또 다른 것은 자녀들의 행실과, 그들의 인성교육 문제였다. 아헤노바르부스, 대 안토니아 부부의 다섯 자녀 중 요절한 첫째 도미티아를 제외한 네 자녀 중 문제가 된 것은 두 아들이었다. 아헤노바르부스의 두 딸은 정숙하고 인품이 훌륭했지만,[1] 큰아들 루키우스와 둘째 아들 그나이우스는 가문의 나쁜 이미지 그대로 인성과 품행 모두 최악이었다. 이들의 망나니 행동은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아주 유명했는데, 이는 후일 손자 네로, 외손녀 메살리나까지 악명을 떨치면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사후에도 온갖 악행의 상징으로 기록된 원인이 됐다.

그 결과, 아헤노바르부스는 두 아들의 품행 문제로 "사기와 조작의 달인", "폭력적인 저열한 인간의 대표주자"로 오늘날까지 악명을 떨치게 됐다. 이는 당대에도 비슷했는데, 아우구스투스 사망 당시 대 안토니아의 남편이자 옥타비아의 사위였고 집정관까지 지낸 최고위 원로원 인사였음에도, 원로원 내에서 늘 평판이 나쁜 탓에 호사가들과 반대파들에게 아우구스투스 사후 황제의 유언장을 조작했다는 소문에 시달렸다.

여기에 부채질한 인사가 100년 뒤의 역사가수에토니우스인데, 그는 거리에서 떠 돈 이야기를 그대로 실어 놓으면서 네로의 할아버지인 그를 "오만하고, 잔인하고, 악명 높고, 사치스럽다"고 악평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그는 아헤노바르부스가 아프리카 속주 총독, 일리리쿰 사절 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무례한 행동을 했다고 적었다. 이런 수에토니우스의 기록 외에도 그는 아버지 그나이우스의 행적, 두 아들 루키우스, 그나이우스의 망나니 행보로 여러 정적들에게 "오만하고 잔인하고 사치스럽다"고 비난받았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인 서기 25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가 지병으로 사망할 때, 병세가 악화된 이유는 계속 속을 썩인 아들 그나이우스 때문이었다고 한다.

3. 가족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소 옥타비아 부부의 딸 대 안토니아와 결혼해, 다섯 자녀를 뒀다. 이중 성인 이후에도 살아남은 아이는 1남 2녀인데, 이중 요절한 장남까지 포함한 네 자녀 중 대(大) 도미티아 레피다 외에는 전부 문제가 심각해, 당대부터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악명답게 막장이 가득하다고 손가락질 받았다. 특히, 두 아들은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도 망나니 중 망나니로 악명이 대단하고 이들의 악평은 당대부터 최악이었다. 이는 남자형제들처럼 망나니가 아니었던 막내딸 역시 같았다. 그녀는 전반적으로 친절하고, 인격적으로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나이우스의 여러 비리, 범죄와 연루되어, 이 문제로 큰 논란을 낳았다. 이 문제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대 안토니아는 귀족과 서민 모두에게 자녀 인성교육을 최악으로 만들었다고 손가락질 받았다. 이는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손자 네로, 외손녀 메살리나도 비슷해, 이런 집안의 역사는 루키우스의 인격적 평가마저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대 안토니아 부부의 자녀, 손자, 외손녀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막장 남녀황족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당대와 후대 로마인 모두에게 비난받았다. 하지만 부모 모두 인격적으로 문제 없고, 예의 바른 만큼, 자식 농사는 망치지 않았다고도 평가받았다. 왜냐하면 사실상 장녀였던 차녀 대 도미티아 레피다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정평이 날 정도로 예의바르고, 상냥하고, 모범적이었고, 막내딸 소 도미티아 레피다 역시 경제 범죄 전력 외에는 전반적으로 인격적 문제가 없었다고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 도미티아(요절)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부부의 장남으로, 아버지와 동명이인이다. 성년식 직전에 요절한 까닭에 바로 위의 도미티아와 달리 영유아 사망이 높던 시대 속에서는 당시 평균 수명으로는 일찍 죽지 않았다고도 평가받는다.
남동생 그나이우스와 함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직계, 방계 황족 전체를 통틀어 막장 황족의 대명사로 악명을 떨쳤다. 어릴적부터 과격한 행동, 폭력적 행동으로 부모 얼굴에 먹칠을 한 것으로 유명했다. 도심지에서 명마를 몰고 전력으로 말을 몰아 소란을 일으키는 행동은 그나마 악행치고는 약한 편이었고,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거나, 상대가 그냥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신을 능욕했다며 분이 풀릴 때까지 폭행하기로 유명했다.
그럼에도 훌륭한 장군이자 로마 제국 동방 최고 전문가로 유명한 아버지가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따라 동방에 갔을 당시, 수행원으로 따라 갔다. 헌데 시리아 속주에서 술을 잔뜩 먹고, 시비가 붙은 현지 자유민을 폭행해 죽여 큰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동명이인인 해당 문서의 주인공은 장남의 망나니 짓을 했다고 모함받아, 아들이 요절한 뒤 이야기가 와전돼 원로원에게 죽을 때까지 난폭하다고 욕을 먹었다. 로버트 사임의 연구에 따르면, 술을 마시고 속주민을 죽을 때까지 때려 죽인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이 사람이라고 한다. 성년식을 올리기 전 사망했는데, 바로 아래인 대 도미티아 레피다가 기원전 8년생이고,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동방에 간 시점이 기원전 1년인 것을 생각해보면 사망 당시 10대 중후반으로 추정되는데, 사임과 같은 로마사 권위자들은 네로 아버지의 출생일로 알려진 기원전 17년이 여러 증거상 이 사람의 출생일이라고 말한다. 그가 죽은 뒤 가문의 후계자는 기원전 2년생인 동생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된다.
  • 대(大) 도미티아 레피다 : 기원전 8년생으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대 안토니아 자녀 중 가장 인간성이 고결하고 평이 좋기로 유명하다. 단순히 막장이 가득했던 남매(특히 오빠와 남동생) 중 상대적으로 좋았다는 수준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 기준이 엄격한 귀족들 사이에서도 훌륭한 규수, 귀부인으로 평가할 만큼 모범적이었다.
그녀는 세 번 결혼했다. 첫번째 남편은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였는데, 그는 세야누스의 사촌이었다. 사이에는 유니우스 블라이수스를 얻었는데, 유니우스 블라이수스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네 황제의 해 당시 비텔리우스 황제에게 총독에 임명된 경력이 있었다. 첫번째 남편이 세야누스의 사촌인 까닭에 곧 이혼했고, 이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외손자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와 재혼했다. 두번째 남편 하테리우스 아그리파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무능하고 졸린 사람이라고 평가받은 인물이었는데, 사이에 차남 퀸투스 하테리우스 안토니누스를 낳았다. 그녀의 차남 퀸투스 하테리우스 안토니누스는 어머니, 이부형 유니우스 블라이수스와 달리 외삼촌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인품이 판박이였고, 여러 횡령과 비리 등으로 그녀 속을 적잖이 썩였다. 세번째 결혼은 두번째 남편 하테리우스 아그리파가 티베리우스 치세 후기에 숙청된 이후였다. 그녀는 33년 주변의 중매와 추천으로 아시아 총독을 지냈던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와 재혼했다. 세 번의 결혼 중 그녀와 가장 잘 맞았던 배우자였고, 가정적이고 그녀의 두 아들에게는 친아버지 이상의 존재인 까닭에, 이 결혼은 그녀의 장남이 훌륭한 성품을 갖추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 결혼은 칼리굴라 암살 사건 후 제위에 오른 클라우디우스 1세가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재치 넘치고 부유한 크리스푸스와의 이혼을 명령해, 어쩔 수 없이 이혼했다.(이후 그녀의 세번째 남편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강권으로 칼리굴라의 여동생으로 도미티아의 시누이였던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하게 된다.)
상술했듯, 해당문서 주인공의 자녀 중 대중들에게 본인과 남편, 후손 모두 인격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평가받았고 실제로도 도덕적이고 온화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는 그녀의 모범적이고 고귀한 성품을 항상 높게 샀고, 그녀를 황족으로 훌륭히 대접했다. 그러나 그녀는 권력욕이 대단했던 황녀 중 혈연상으로 조카뻘이고, 남동생 그나이우스의 아내인 소 아그리피나에게 미움을 받고 사이가 나빴다. 그 이유는 첫 남편이 세야누스가 입양되어 입적된 가문과 먼친척이었고, 소 아그리피나가 크리스푸스와 결혼하면서 관계가 껄끄러워진데다, 성격이 상극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대인배 답게 소 아그리피나를 이해했고, 아그리피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친언니처럼 보호해줬다. 그래서 칼리굴라 시대때 소 아그리피나가 칼리굴라 암살 음모를 꾸민 것이 들통나, 추방됐을 때 홀로 남은 조카 네로를 어머니처럼 따뜻하게 보살폈고, 그녀 석방에도 노력했다. 따라서 소 아그리피나와 관계는 회복됐는데, 후일 아들 네로가 즉위한 뒤, 네로가 친어머니 아그리피나보다 큰고모 대 도미티아 레피다를 진심으로 따르고 존경하자, 다시 관계는 나빠졌다. 아그리피나는 네로가 사춘기에 접어들고, 세네카와 부루스를 가까이 하자, 네로를 온전히 통제하고 경고하기 위해, 대 도미티아 레피다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아그리피나는 팔라스와 함께, 조작된 근친상간 루머와 주술을 명분삼아, 그녀를 기소해 유죄를 선고해 강제 자살하는 방식으로 그녀를 죽였다. 야사에 따르면 심한 변비를 앓아 네로가 걱정하면서 보낸 약을 먹고 독살됐다는 이야기와 함께 법정에서 네로가 고모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면서 자살로 내몰았다고 하는데, 이는 근거 없는 낭설로 평가받는다.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32년 집정관을 지냈으며, 게르마니쿠스의 장녀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해 5대 황제 네로를 낳았다. 아버지가 할아버지 덕에 안 좋은 평판을 듣고, 죽을 때까지 각종 비방성 소문에 시달렸다면, 이 사람은 진짜 막장이었다.(자세한 행적과 악행은 해당 인물 편 참조.)
  • 소(小) 도미티아 레피다 : 대 안토니아의 세 딸 중 성인 이후에도 살아남은 두 딸 중 한명이다. 기원전 4년생이라는 말도 있어,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연년생 누나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외할머니 소 옥타비아를 닮아 상당한 미녀로 유명했다. 하지만 외할머니 옥타비아, 이모 소 안토니아와 달리 여러 비리, 사기 문제로 여러 논란을 낳았고, 딸 메살리나 교육과 방임 문제로 인해, 다사다난한 삶을 보냈다.
남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에 엄청난 규모의 영지를 가지고 있던 여인으로 당대부터 유명했다. 하지만 이 재산 축적은 그나이우스가 현직 법무관, 현직 집정관 시절에 벌인 사기에 가담해 이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취한 점으로 손가락질 받았다. 특히, 그녀가 관련 사업으로 벌인 말농장의 경마, 전차용 경주마가 그나이우스의 승부조작 외의 다른 전차 경주 등 비리에 사용되었다는 의심이 이를 부추겨, 후일 이런 의심은 농장 직원으로 고용된 해방노예, 노예들의 남이탈리아 폭력단 의혹에 관여되었다는 모함으로 이어져, 억울함을 토로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가 됐다. 이런 문제 외에도 망나니인 오빠의 악명 때문에 오빠 그나이우스와 근친상간한다는 소문에 시달렸고, 이후에는 속 썩이는 딸 메살리나와 언제라도 그녀를 죽이려고 이를 가는 새언니 소 아그리피나와 조카 네로 때문에 고통받았다.
서기 16년 모계 친척이자 발레리우스 가문 출신의 명문귀족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와 결혼해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황후 발레리아 메살리나를 낳았다. 이후 그녀는 대략 서기 20년경 종신독재관 술라의 후손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쿨루스와 재혼해 아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맏사위)를 낳았다. 이후 사위인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한 직후인 서기 41년 명문가인 유니우스 가문 출신의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세번째 결혼을 하고, 이 사이에서 막내아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낳았다. 네 아이 중 첫째인 메살리나가 중혼을 저지른 뒤, 루쿨루스의 정원이 있는 별장에 강금될 당시 함께 있다가 눈 앞에서 딸이 살해되는 것을 봤고, 그 자리에서 근위대에게 죽은 딸의 시신을 인도받아 매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기 54년 죽었는데, 죽을 때까지 소 아그리피나, 네로 모자에게 "노예들로 폭력단을 조직했다"고 모함받아 고생을 했다고 한다.


[1] 막내딸 소 도미티아 레피다는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돌아가신 뒤, 그나이우스의 사기 행각 속에서 막대한 돈을 벌어 들여, 이 문제로 죽을 때까지 손가락질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