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티티우스 라틴어: Marcus Titi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티티우스(아버지) 무타니아(어머니)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외삼촌) 파비아 파울리나(아내)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1년 |
전임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옥타비아누스 |
동기 | 옥타비아누스 |
후임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옥타비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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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플레브스 집안인 티티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어머니 무나티아는 기원전 42년 집정관이자 기원전 22년 감찰관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의 누이다. 즉, 그는 플란쿠스의 외조카였다.기원전 43년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에 의해 숙청 명단에 들어갔다. 외삼촌 플란쿠스가 삼두의 편에 서서 로마 진군에 함께 했던 것에 비해, 그가 숙청 대상으로 낙인찍힌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추적자들로부터 목숨을 건지기 위해 시칠리아로 망명하여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보호를 받았고, 폼페이우스로부터 일부 함대의 지휘권을 부여받은 뒤 서부 지중해 일대에서 해적질을 시작했다, 특히 에트루리아 해안을 심하게 약탈해 여론이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삼두에게 반감을 품도록 조장했다.
기원전 40년 삼두의 회유를 받아들여 그들에게 귀순하려다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해안가에서 폼페이우스의 해군 사령관 메노도로스에게 격파되어 생포되었지만 폼페이우스의 용서를 받았다. 그 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와 폼페이우스가 미세눔 협약을 맺으면서 전쟁이 종식되었을 때 사면되어 로마로 귀환했다. 그 후 삼촌 플란쿠스를 따라 안토니우스의 추종자가 된 그는 기원전 36년 재무관에 선임되었고, 기원전 35년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동행한 뒤 아시아 총독에 선임되었다.
그 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 내전에서 패배한 뒤 미틸레네로 도망친 후 3개 군단을 모집한 후 아시아 속주에 상륙했다. 그가 안토니우스의 보호를 받으려 했는지, 아니면 안토니우스를 꺾은 파르티아와 손잡고 재기를 도모하려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티티우스는 폼페이우스가 파르티아와 손잡으려 한다고 간주하고 아시아 총독 가이우스 푸르니우스와 함께 공격해 폼페이우스를 물리친 뒤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폼페이우스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군대가 흩어지자 곧 아무 조건 없이 항복했다. 그러나 티티우스는 약속을 어기고 폼페이우스를 처형했다. 그가 단독으로 감행했는지, 안토니우스의 지시에 따랐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안토니우스가 그를 질책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볼 때 안토니우스가 이를 지시했거나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갈등이 심화되어 내전이 일어날 조짐이 감돌자, 그는 플란쿠스와 함께 옥타비아누스 편으로 돌아섰다. 플루타르코스는 두 사람이 클레오파트라의 초대에 불응했다가 눈밖에 났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참패하면서 위세가 약해진 걸 보고 대세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기울었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두 사람은 로마로 이동한 뒤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가 발표한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에 대해 낱낱이 보고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유언서를 화로의 여신을 숭배하는 사제 처녀들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밀고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신성모독죄를 무릅쓰고 이를 탈취해 선동의 도구로 이용했다.
티티우스는 로마로 돌아온 뒤 폼페이우스 극장에서 연극을 개최했지만, 관중들이 "폼페이우스의 아들을 죽여놓고 어떻게 폼페이우스를 기리는 극장에서 연극을 개최할 수 있느냐?"라며 야유를 퍼붓는 바람에 극장을 급히 떠나야 했다. 기원전 31년 5월부터 9월까지 보결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악티움 해전이 벌어지기 전 마지막 육상전에서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와 함께 안토니우스의 기병대를 물리치고 팔라고니아의 국왕 데이오타루스 필라델푸스의 귀순을 받아냈다.
기원전 13년 또는 12년경에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뒤를 이어 시리아 총독을 맡앗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카파도키아 왕국의 국왕 아르켈라오스와 갈등을 벌였다가 유대 왕국의 헤로데 대왕의 중재에 따라 화해했다. 또한 파르티아의 프라아테스 4세가 기원전 10년 또는 9년 아내 무사의 조언에 따라 이전 아내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세라스판데스, 로다스페스, 보노네스 1세, 프라아테스 등 4명의 자식을 인질로 보냈을 때 이를 접수받고 아우구스투스에게 보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기원전 45년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딸인 파비아 파울리나와 결혼했다.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의 조부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의 아내 티티아가 그의 딸이라는 가설이 제기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