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라틴어: Gaius Sentius Saturnin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아버지?)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장남)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차남) 루키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삼남)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9년 |
전임 | 마르쿠스 아풀레이우스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 |
동기 | 없음 |
후임 |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퀸투스 루크레티우스 베스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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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로마 시 남쪽의 라틴 도시 아티나에 기반을 둔 원로원 의원 가문 출신이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는 제2차 삼두정치의 숙청을 피해 시칠리아로 망명한 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활약했으며,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폼페이우스간의 동맹을 주선했지만 안토니우스가 비협조로 나오면서 성사되지 않았고, 기원전 36년 시칠리아 내전에서 패배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아시아 속주로 피신할 때 함께 했다가 그를 떠나 안토니우스에게 귀순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기원전 19년 집정관과 동일인물이라고 추정했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그럴 경우 훗날 게르마니아 총독을 맡았을 때 나이가 80세를 넘겨야 하는데, 그의 휘하에서 장교로 복무했던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가 이 인상적인 사실을 거론하지 않았을 리 없다며, 기원전 19년 집정관은 아피아노스가 언급한 사투르니누스의 아들일 거라고 추정한다.기원전 19년 단독으로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원로원 의원이었으며 로마 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마르쿠스 에그나티우스 루푸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추천하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루푸스가 법무관을 맡은 지 2년밖에 안 지났기에 최소한 3년 후에야 집정관에 도전할 수 있다는 로마법에 위배될 뿐더러, 로마 시민들에게 인기가 높은 그가 집정관에 오르면 자신의 권력에도 지장이 있을 거라 보고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여론이 매우 좋지 않자, 아우구스투스는 사투르니누스의 동료 집정관을 공백으로 두다가 기원전 19년 9월에 사투르니누스를 사임시킨 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와 퀸투스 루크레티우스 베스필로를 집정관으로 세웠다.
기원전 18년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는 '퀸데킴비리 사크리스 파키운디스(quindecimviri sacris faciundis: 15명의 신성한 책 관리자)'에 선임되었고, 기원전 17년 5월 31일부터 6월 3일까지 아우구스투스가 주최한 축제에 참여했다. 기원전 14/13년에 아프리카 총독에 부임한 뒤 옛 카르타고 터에 '콜로니아 율리아 콩코르디아 카르타고(Colonia Iulia Concordia Carthago)'를 건설했다.
기원전 8/7년 시리아 속주의 레가투스 아우구스티 프로프라이토르(Legatus Augusti pro praetore)에 선출되어 시리아를 통치했다. 이 당시 헤로데 대왕이 두 아들 아리스토볼로스와 알렉산드로스가 로마를 상대로 반역을 꾀했다고 고발했다. 그는 베라투스에서 회의를 소집한 뒤 유대 총독에게 두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제안했지만, 헤로데 대왕의 뇌물을 받고 회의에 참석한 이들 대다수는 헤로데의 아들들을 처형하는 데 찬성했고, 결국 두 사람은 처형되었다. 한편 카르타고 출신의 기독교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는 그가 시리아의 레가투스로 군림하고 있을 때 예수가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이에 따른다면, 예수는 기원전 8/7년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대다수 학자들은 이 기록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서기 4년 마르쿠스 비니키우스를 대신해 게르마니아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티베리우스의 지휘를 받으며 로마를 상대로 봉기를 일으킨 게르만 부족들을 상대했다. 그와 티베리우스의 군대는 라인 강과 베저 강 사이에서 분란을 일으킨 부족들을 모조리 제압한 후 베저 강을 건너 체루스키 족을 제압했으며, 엘베 강 중부 지방에 살고 있었던 랑고바르드족도 물리쳤다. 2년간의 원정 끝에 게르마니아의 소요는 진압되었고, 그는 공적을 인정받아 아우구스투스 포룸에 자신의 모습이 새겨진 개선문이 세워지는 영예를 누렸다. 서기 7년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로 교체되었으며,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생전에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는 서기 4년 집정관, 차남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는 서기 4년 보결 집정관을 역임했고, 셋째 아들 루키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는 시리아의 레가투스를 맡은 아버지를 따라가서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역임했으나 이후의 행적이 전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