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알렉산드리아의 아피아노스 (영어: Appian of Alexandria, 그리스어: Ἀππιανὸς Ἀλεξανδρεύς) |
출생 | 95년경 |
사망 | 미상 |
직위 | 변호사, 징세관 |
[clearfix]
1. 개요
서기 2세기경에 활동한 로마 제국의 역사가. <로마 역사>를 집필했다.2. 생애
생전에 자서전을 집필했다고 전해지나 현존하지 않으며,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건 거의 없다. 단지 그의 글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가정교사였으며 그의 친구였던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의 편지로부터 간접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95년경 로마 제국의 가장 부유한 동방 속주인 이집트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고, 로마 시민권을 획득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116~117년 이집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루쿠아스(Lukuas)라는 인물을 메시아라고 믿고 로마에 반기를 들었을 때, 그는 유대인 약탈자들의 습격으로부터 탈출했다고 기록했다.이후 로마로 이주한 그는 변호사가 되었다. 저서 <로마 역사> 서론에서, 그는 "황제들 앞에서 로마의 한 사건을 변호했다"라고 자랑했다. 이것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와 공동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건 변호를 맡았음을 암시한다. 한편 프론토는 제자 아우렐리우스에게 그를 징세관으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징세관은 기사계급이 주로 맡는 직위이므로, 그는 로마 제국에서 기사 계급의 신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실제로 직위를 수여받았는지는 불확실하다. 그 외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3. 로마 역사(Romaica)
그는 24권에 달하는 '로마 역사'를 집필했다. 이중 절반이 전해지지 않으며, 남은 책들 중에서도 다수가 파편적으로나마 전해질 뿐이다. 이중 온전히 전해지는 책들은 <한니발 전쟁>, <이베리아 전쟁>, <일리리아 전쟁>, <시리아 전쟁>, <미트리다테스 전쟁>, 그리고 13~17권으로 구성된 로마 내전이다. 로마 내전을 다룬 다섯 권을 따로 떼어 <내전기>라고 일컬어진다. 이 다섯 권의 내전기는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과정과 이에 따른 내전과 분쟁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포괄적인 역사서이기 때문에, 이 시대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의 주요 사료로 쓰인다. 내전기에서 다루는 각 권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제13권: 술라의 내전
제14권: 카이사르의 내전
제15권: 무티나 내전
제16권: 해방자 내전
제17권: 시칠리아 내전
아쉽게도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내전을 다룬 책은 전해지지 않는다.
제14권: 카이사르의 내전
제15권: 무티나 내전
제16권: 해방자 내전
제17권: 시칠리아 내전
아쉽게도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내전을 다룬 책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로마 내전을 다룰 때 내전의 원인을 개인의 문제로 국한하지 않고, 사회적 원인을 초점으로 뒀다. 즉, 로마가 세계를 정복한 뒤 부의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사회 계급간 갈등이 심화되었고, 쌓여만가는 민중의 불만을 힘으로 억누르며 사익을 챙기는 귀족들과 민중을 선동하여 권력을 탈취하려는 야심가들의 대립이 내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의 <로마 역사>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연대별이 아니라 지역별로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 4권 <갈리아 전쟁>은 기원전 390년 브렌누스의 로마 약탈부터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할 때까지 로마와 갈리아의 3세기가 넘는 기나긴 전쟁을 서술했다. 또한 제 12권 <폰토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에서는 폰토스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 미트리다테스가 권력을 잡고 영토를 확장하다가 로마와 충돌하여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서술했다. 그리고 <이베리아 전쟁>에서는 한니발과의 전쟁 도중 로마군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군사 작전을 벌이는 것부터 시작하여 로마가 스페인 부족들을 상대로 벌인 정복전쟁, 비리아투스가 주도한 루시타니아 전쟁을 거쳐 기원 전 61년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주도한 세르토리우스 전쟁으로 마무리했다.
그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이야기가 로마에 지나치게 집중되는 걸 지양했다. 하지만 각 사건들에 대한 연대별 분류를 소홀히 다뤄서 내용 이해가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예를 들어 한니발 전쟁에서는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전쟁,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전쟁, 북아프리카에서의 전쟁을 따로 서술하기 때문에, 통합적인 이해를 하기 힘들다. 한편, 그는 제국의 신민으로서 로마가 세계의 지배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여겼으며, 공정한 군주에 의한 덕치는 혼란스러운 공화정에 의한 난치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 역사가들이 고전 그리스어를 고집하던 것과는 달리 라틴어를 기꺼이 사용했고, 공화정의 제도와 대중 운동을 냉소적으로 평가했다. 이는 그가 2세기의 그리스인으로서 황제의 스승과 친분을 맺는 등 제정에 우호적일 만한 환경에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