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3 00:39:48

무티나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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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티나 내전
영어: Mutina civil war
시기 기원전 44년 ~ 43년
장소 북이탈리아와 갈리아
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침공과 원로원의 전쟁 결의
교전 세력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로마 원로원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옥타비아누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안토니우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레피두스
지휘관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옥타비아누스
파일:rome_pompey_mon_256.png 데키무스 브루투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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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ome_antony_mon_256.png 루키우스 트레벨리우스 피데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결과 카이사르파의 승리
영향 제2차 삼두정치 결성과 대숙청

1. 개요2. 배경3. 경과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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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4~43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침공에 대응하여 원로원이 안토니우스 토벌을 천명하면서 발발한 내전. 제2차 삼두정치 결성의 계기가 된 전쟁이다.

2. 배경

기원전 44년 3월 15일, 종신 독재관을 역임하던 율리우스 카이사르파르티아 원정을 앞두고 원로원 회의에 참석했다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데키무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등 의원들에게 암살당했다. 암살자들은 자신들을 '해방자'라고 칭하며, 폭군 암살이 공화국의 회복으로 이어질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암살극에 호응하긴 커녕 집에 틀어박혔고, 암살자들은 여론이 예상과는 달리 호응해주지 않자 유피테르 신전에 숨었다.

한편, 현직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를 설득하여 독재관의 모든 서류와 유언장을 확보했다. 이후 7억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하는 국고를 확보해 카이사르를 따랐던 병사들과 지지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당시 로마 시 근처에 전투 준비가 된 부대는 기병대장(부독재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군대 뿐이었다. 그는 당초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로마에 군대를 이끌고 가 포로 로마노를 점거한 뒤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를 죽인 자들을 척살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상황이 불확실한데다 암살자들 중 자신과 가까운 이들도 많았고, 또다른 내전이 촉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레피두스를 말렸다. 그는 '해방자'들과 카이사르파를 중재해 3월 17일 원로원 회의에서 타협안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3월 17일 데메테르 신전에 의원들이 모였지만, 카이사르의 옛 부하들과 군중이 둘러싸고 있어서 암살자들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몇몇 의원이 카이사르를 폭군으로 선언하고 암살자들에게 감사를 표하자고 제안하자, 안토니우스는 그렇게 되면 카이사르의 모든 명령이 취소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많은 의원들이 카이사르에 의해 공직에 임명되거나 상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수용할 수 없었다. 안토니우스는 암살자들을 사면하고 카이사르가 생전에 내린 모든 명령을 승인하자고 제안했고, 키케로 등이 동의하면서 합의가 이뤄졌다. 또한 합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의 아이들을 공화파에 인질로 넘기기로 했다.

3월 19일 안토니우스의 집에서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낭독되었다. 주요 상속인은 카이사르의 양자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였으며, 평민 한 사람당 300 세스테르티우스를 기부한다는 내용이었다. 3월 19일 또는 20일에 카이사르의 장례식이 공개적으로 거행되었다. 군중은 카이사르의 유해를 보고 분노해 폭동을 일으켰고, 암살자들은 로마를 탈출해야 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4월 초에 로마를 탈출해 이탈리아 남부로 피신했고,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게 지정된 대로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리하여 로마에서 전권을 잡게 된 안토니우스는 "독재를 영원히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히스파니아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불러들여 로마 함대 사령관으로 앉히자고 제안해 옛 폼페이우스 지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자신은 마케도니아 속주를 배정받았고, 동료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는 시리아 속주를 맡기로 했다. 여기에 최대 6천 명을 호위병으로 모집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백인대장을 모집하고 병사를 선발하여 군대를 통솔할 권한도 받아냈다.

안토니우스는 여러 명을 새 의원으로 임명하고, 속주와 속국에 다양한 특권을 부여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카이사르의 공개되지 않았던 명령이라고 주장했지만, 동시대인들은 그가 거액의 뇌물을 받는 대가로 가짜 법령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여겼다. 키케로는 이에 대해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다음과 같이 한탄하는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그의 노예가 되지 않겠지만, 그의 메모의 노예가 되었다네."

4월 중순, 그리스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자신을 양자로 지명하고 전 재산을 상속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어머니 아티아와 계부 필리푸스는 로마의 정세가 너무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그는 이를 뿌리치고 로마에 가서 카이사르의 상속을 받아들이기기로 하고 친구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등과 함께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했다. 4월 19일 키케로를 만나 그의 호의를 얻어냈고, 매형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통해 원로원내 거물급 인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로마에 도착한 뒤 카이사르가 약속한 돈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카이사르가 자신이 아니라 그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에 내심 불만을 품었던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재산을 그에게 양도하는 걸 거부하고 입양 절차 또한 질질 끌었기 때문에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로부터 돈을 받아내지 못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자신의 재산과 토지 소유물을 어머니, 계부와 함께 팔고 마련한 재산을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그는 이를 통해 많은 이의 호의를 얻어냈다. 기원전 44년 초여름, 카이사르의 옛 병사들이 로마로 몰려들면서 치안이 불안정해졌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지지자와 클리엔테스들을 규합하면서 내란의 조짐이 감돌았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6월 3일 속주 교환에 관한 법률을 제시했다. 이 법에 따르면, 마케도니아를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양도하고, 갈리아 키살피나는 자신이 차지하며, 브루투스를 아시아로, 카시우스를 시칠리아로 보내 로마에 빵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겼다. 브루투스는 이를 모욕적이라고 여겼다.

6월 8일, 원로원의 저명한 인사들이 안치오에서 회의를 열었다. 키케로, 브루투스, 카시우스,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 카시우스의 아내이자 세르빌리아의 딸인 유니아 테르티아, 브루투스의 아내 포르키아[1] 등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어떠한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다. 키케로는 희망을 잃고 사위 돌라벨라에게 자신을 시리아에 부관으로 데려가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바람이 그의 배를 이탈리아 해안에 못박았고, 브루투스와 새로운 만남을 가진 뒤 마음을 달리 먹었다. 그는 8월 31일에 로마로 돌아간 뒤 안토니우스 탄핵을 본격적으로 단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동방에서 안토니우스에 대항하기로 결심했다. 8월 말, 두 사람은 각각 마케도니아와 시리아로 가서 군대를 징발해 다가올 전쟁을 준비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마케도니아에서 4개 군단을 소집하고, 9월 1일 원로원 회의에서 카이사르에게 신성한 영에를 돌리는 법안을 발의했다. 키케로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자, 안토니우스는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강제로 데려갈 거라고 위협했다. 키케로는 이에 분노하여 다음 날 안토니우스가 부재한 틈을 타 첫번째 필리피카이를 발표했다. 그 후 한달간 안토니우스를 거침없이 비난하면서, 이와 동시에 옥타비아누스를 의도적으로 추켜세워 두 사람간의 대립을 조장했다. 그 결과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안토니우스는 10월 9일 브룬디시움으로 가서 마케도니아 군단과 합류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맞서 참전용사들을 모집하고자 캄파니아로 향했다.

그런데 브룬디시움에 도착한 마케도니아 군단은 400 세스테르티우스를 줄 테니 자신을 따르라는 안토니우스의 요구를 묵살하고 "카이사르가 양자로 삼은 그 분을 따르겠다"고 답했다. 안토니우스는 이에 분노해 자신을 조롱한 백인대장과 군단병들을 체포해 모조리 처형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이때 300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군인들은 이에 분노했는데, 특히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 앞에서 처형이 이뤄진 걸 수치로 여겼다. 이후 안토니우스는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갈리아로 3개 군단을 보냈고, 자신은 제 5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캄파니아에서 3,000명의 병사를 모집한 뒤 그들에게 각각 2,000 세스테르티우스를 약속하여 충성을 받아낸 후 로마로 진군했다. 안토니우스가 병사들의 반발에 시달리는 틈을 타 로마에 먼저 입성한 그는 안토니우스에 대적할 준비가 되었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아레티아에 진을 치고 군대를 모집하자, 11월 하반기에 로마에 도착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려 했다. 그러나 제5군단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옥타비아누스와 싸우는 걸 거부하고 옥타비아누스와 합류하려 했다. 이에 충격받은 안토니우스는 병사들에게 거액의 돈을 줘서 진정시킨 뒤, 11월 28일 원로원 회의에 참석해 마케도니아를 동생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에게 양도하겠다고 선언하고, 신병으로 구성된 2개 군단, 2개의 마케도니아 군단, 퇴역병으로 구성된 군단 1개, 보조군 및 근위병 코호트 부대들로 구성된 원정군을 이끌고 북상했다. 한편,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총독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속주를 넘기길 거부하고 무티나에서 군단과 검투사 징집 부대로 요새화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3개 군단을 보유했지만 무장을 덜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끝까지 복종을 거부하자, 안토니우스는 무티나를 포위 공격했다. 이리하여 무티나 내전이 발발했다.

3. 경과

기원전 43년 1월 1일, 아울루스 히르티우스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가 새 집정관으로 취임했다. 두 사람은 즉시 2개 군단씩 모집하였고, 원로원은 일련의 회의에서 행정관을 역임한 적이 없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는 카이사르의 옛 부하들이 주축이 된 군대를 통솔하려면 옥타비아누스의 협력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자고 주장했지만, 원로원엔 여전히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자들이 많았기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대신 안토니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타협하라고 권했지만, 안토니우스가 이를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기원전 43년 1월 7일, 옥타비아누스는 아레티아의 숙영지에 도착하여 병력을 집결시켰고, 뒤이어 히르티우스의 군대와 합세한 뒤 1월 중순에 북쪽으로 이동하여 안토니우스의 군대에 접근했다. 양측은 곧 소규모 접전을 벌였지만, 협상의 여지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대치했다. 2월에 협상에 실패한 사절들이 로마에 귀환했지만, 안토니우스를 적으로 선언하자는 키케로의 주장은 또다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케도니아와 시리아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각각 총독 권한을 부여받게 하자는 주장은 받아들여졌고, 제멋대로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를 죽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는 것 역시 받아들여졌다. 원로원은 재차 안토니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화해하라고 권고했지만, 안토니우스는 단호히 뿌리쳤다.

결국 그와 타협할 여지가 없다는 게 확인되자, 집정관 판사가 4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에서 출발했다. 당시엔 여러 속주에서 로마에 돈을 보내려고 서두르지 않았기에 군자금이 부족했다. 그래서 원로원은 100여년 만에 처음으로 로마 시민들에게 직접세를 부과하여 군자금을 마련했다. 그해 봄, 히르티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무티나에서 포위된 사람들이 그들의 진영의 불빛을 볼 수 있도록 아주 가까이 접근했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그들과 대치하는 한편,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히르티우스-옥타비아누스와 합세하려는 판사를 기습하려 했다. 이리하여 4월 14일 포룸 갈로룸 전투가 벌어졌고, 판사는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패퇴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승리를 거두고 진영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히르티우스가 급파한 2개 코호트 부대가 그들을 갑작스럽게 습격했다.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크게 패하여 들판과 습지에 무질서하게 흩어졌고, 어둠이 깔린 덕분에 전멸을 면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진영에 남아서 안토니우스의 다른 부대의 공격을 막아냈다.

4월 21일, 원로원 군대는 무티나 근처에 야영 중인 안토니우스의 진영을 공격했다. 무티나 성채에 고립되어 있던 데키무스 브루투스 역시 몇몇 코호트를 보내 협공했다. 격렬한 전투 와중에 히르티우스가 전사했지만, 안토니우스는 크게 패해 얼마 안 되는 병력을 수습하여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로 도주했다. 다음날 중상을 입고 숙영지에 있던 판사 역시 사망하면서, 옥타비아누스가 히르티우스와 판사의 군대 전체를 이끌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실은 옥타비아누스가 히르티우스가 전장에서 죽게 만든 뒤 병석에 누워 있던 판사에게 독을 먹여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현대 역사학계는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대표적인 카이사르파 인사였고 옥타비아누스와의 관계도 원만했던 점 등을 볼 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원로원은 무티나 승전 소식에 고양되어 4월 말에 비로소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무티나의 승리를 기념하고자 50일간의 감사 축제를 거행하기로 했다. 원로원은 사망한 두 집정관의 군대를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양도하라고 명령했지만, 병사들은 카이사르를 암살하는 데 관여한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경멸하고 카이사르의 양자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그들은 카이사르의 심복이자 자신들과 함께 전장에서 함께 싸운 안토니우스와 계속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다. 한편, 아스쿨룸에 있던 안토니우스의 부관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는 안토니우스가 크게 패하고 갈리아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신병을 모집하여 2개 군단을 결성한 뒤 아펜니노 산맥을 횡단하여 400마일을 행군한 끝에 바다(Vada)에서 안토니우스와 합류했다. 당시 무티나 패전으로 인해 군대가 와해되었던 안토니우스는 그의 합류에 힘입어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를 따르는 병사들을 흔들기 위해 옥타비아누스가 지급하기로 약속했던 20,000 세스테르티우스를 안토니우스를 떠난 2개 군단에게만 주기로 결의했다.[2] 그러나 군단병들은 원로원 사절들과 대화하기를 거부했으며, 동료들이 보상을 박탈당하는 것에 분개했다. 이렇듯 옥타비아누스와 원로원이 마찰을 빛는 사이, 안토니우스는 노예까지 동원해가며 손실을 메꾼 뒤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을 맡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합류하려 했다. 레피두스는 당초엔 이를 따르지 않으려 했지만, 병사들이 안토니우스와 합세해야 한다고 강권하자 어쩔 수 없이 5월 29일 포럼 율리우스(현재 프랑스 남동부 프레쥐스) 인근에서 그와 합세했다. 이 소식을 접한 원로원은 레피두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아프리카에서 군단을 소집하고 동방에 가 있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또한 옥타비아누스에게 레피두스-안토니우스 연합과 맞서라고 요구했고, 갈리아 코마타[3] 속주 총독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에게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협력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상황은 원로원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무티나 숙영지를 떠나지 않고 7월에 로마에 대표단을 보내 집정관에 선출해달라고 요구했다. 원로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옥타비아누스는 8월에 8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원로원은 급히 모든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2개의 아프리카 군단이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도시 자체에 1개 군단이 있으니 그들과 합세한다면 버티지 못할 것 없다고 여기고 태도를 바꿨다. 그러나 불행히도 3개 군단 모두 옥타비아누스 편으로 돌아섰고, 그는 전투 없이 로마 시를 점령했다. 그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대가로 공식적으로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었으며, 8월 19일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가 13개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 키살피나로 진군했다.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는 대세의 흐름을 파악하고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협력하길 거부하고 안토니우스 편에 섰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합류하려고 마케도니아로 떠나려 했지만, 군대가 그를 배신했다. 결국 그는 300명의 기병과 함께 탈출했지만, 나중에는 10명만 그를 따라갔고, 알프스를 넘던 중 어느 작은 부족 지도자에게 붙들려 처형된 뒤 수급이 안토니우스에게 바쳐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을 상대하고자 북상했지만,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가 20개 군단을 모아서 로마로 진군하려는 상황에서 안토니우스와 전쟁을 지속하다는 건 어리석다고 판단해 9월부터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기원전 43년 11월, 보노니아 근처 라비니아 강 한 가운데의 작은 섬에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3자가 회동했다. 이틀간 이어진 회의 끝에, 공화정을 사실상 종식시키는 결정이 내려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직을 사임했고, 그 대신 세 사람이 로마를 나눠서 통치하기로 했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레피두스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와 히스파니아, 옥타비아누스는 아프리카, 사르데니아, 시칠리아를 접수했고, 이탈리아는 공동으로 관할하기로 했다. 해방자를 자처하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에 대한 전쟁 수행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맡기로 했고, 레피두스는 로마를 지키기로 했다. 또한 병사들에 대한 보상으로 이탈리아의 18개 도시에 속한 땅을 그들에게 분배하기로 결의했다. 이리하여 무티나 내전은 종결되었고 제2차 삼두정치가 탄생했다.

4. 이후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어 로마에 남아있던 카이사르의 조카 퀸투스 페디우스에게 서한을 보내 12~17명의 이름으로 구성된 첫번째 숙청자 명단을 제시하며 이들을 숙청하라고 명령했다. 이 사실이 새어나가자 로마 시 전체가 공포에 사로잡혔다. 페디우스는 비밀 명단을 공개하면서 탄압은 이것으로 제한될 것이니 안심하라고 권했지만, 시민들의 동요가 워낙 극심해서 이를 수습하는 데 애를 먹다가 얼마 안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 후 삼두는 로마로 입성한 뒤 본격적인 숙청에 착수했다. 숙청자 명단의 최상위에 올려진 키케로는 피신하다가 추격대에게 잡혀 살해되었고, 그의 머리와 오른손은 자신을 수없이 비방한 그에게 원한을 품었던 안토니우스에게 전달되었다.

삼두는 단지 17명만 숙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이들을 '관련자'로 지목하여 숙청 명단에 포함시켰다. 이는 해방자파와의 대결을 앞두고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막대한 재산을 몰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부동산 소유자는 연간 소득의 절반을 지불해야 했는데, 이 금액은 삼두의 마음에 따라 임의로 설정되었다. 모든 노예는 세금을 내야 했으며, 유산계층의 대표자들은 독신 여성일 지라도 연간 소득에 해당하는 일시금과 재산 가치의 2/3을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삼두의 숙청으로부터 가까스로 빠져나온 인사들은 동방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또는 시칠리아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가담했다. 그 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예정대로 발칸 반도로 출진했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이에 맞서 역시 마케도니아로 진군하면서, 공화정의 운명이 걸린 필리피 전투가 벌어졌다.


[1] 소 카토의 딸[2] 그나마도 절반인 10,000 세스테르티우스만 주기로 했다.[3] 율리우스 카이사르갈리아 전쟁으로 새로 확보한 갈리아 일대에 설치된 임시 속주. 후에 아퀴타니아, 벨기카, 루그두넨시스로 분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