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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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말기에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 2세 시기에 걸쳐 일어난 일련의 내전들로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제국의 마지막 자존심들마저 무너져 내린 사건들.2. 제1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376년)
2.1. 요안니스 5세의 친서방 행보
요안니스 5세는 1354년 제위에 오르자마자 적극적인 친서방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레즈보즈 섬을 제노바에 넘겨주는가 하면, 아나톨리아에 남은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항구인 헤라클레아를 베네치아에 팔아치웠다. 개인적으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까지 했는데, 이런 친서방행보는 더 이상 제국의 힘만으로 방어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서방의 지원을 얻어내고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결과적으로는 별로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만 많은 상태를 낳았다. 거기에 트라키아의 마지막 영지가 오스만 베이국에 점령당하자 이제 껍데기만 남은 동로마 제국 황제는 서방에서 구원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에 몰렸다.1369년, 요안니스 5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과 테살로니카를 자신의 두 아들, 안드로니코스와 마누일에게 각각 맡기고 서방 순회에 나서, 교황 우르바노 5세와 회동하고 베네치아에서 황제의 부채를 탕감해주는 대가로 테네도스 섬을 넘겨주는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가 선택한 것은 아버지를 버리는 일이었다. 안드로니코스는 테네도스 섬을 넘겨주는 걸 거부했고, 요안니스 5세는 베네치아에 2년간 갇혀있다가 작은 아들 마누일 덕에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자 안드로니코스 4세는 그가 오스만 베이국의 봉신이 되었던 일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요안니스 5세를 추방하고는, 무라트 1세의 사남 사비치 베이와 협력하여, 오스만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다.
2.2. 내전과 안드로니코스의 흥망
두 불효자의 연합은 무라트 1세에게 사비치 베이의 눈알이 뽑힌뒤 후에 처형당하는 것으로 일단락 내려졌다. 그러나 무라트 1세는 아들의 빈자리에 다시 돌아온 요안니스 5세에게 안드로니코스와 손주 요안니스 7세도 똑같이 장님으로 만들어 버리라고 요구했는데, 요안니스 5세는 눈알을 둘 다 뽑지는 못하고 반만 이행했다. 말 그대로 눈을 하나씩만 뽑아주고 대신에 안드로니코스를 투옥시킨 것.골치거리인 장남과 손주를 제거한 요안니스 5세는 둘째 아들 마누일과 공동 황제에 오르고는 약속대로 테네도스 섬을 베네치아에게 팔았으나 이는 새로운 분란거리를 낳았다. 그동안 이 섬에서 활동하던 제노바인들은 베네치아에게 쫓겨나는 것에 분개하여 1376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갈라타 조차지에 근거지를 마련한 제노바인들은 안드로니코스와 오스만군을 끌어들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는 데 성공한다.
이제 복수의 칼을 쥔 안드로니코스 4세는 아버지와 동생을 투옥시키고는 쿠데타에 대한 지원의 보답으로 테네도스를 제노바에 넘기고 갈리폴리는 오스만 베이국에게 넘겼다. 이에 분개한 베네치아는 로마와 전쟁을 벌였었으며, 혼란 중에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 2세는 오스만 베이국으로 도주했다. 오스만의 봉신이 되고 필라델피아를 넘기는 대가로 오스만의 지지를 얻은 요안니스 5세는 아들이 버티고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다.
안드로니코스 4세, 요안니스 7세, 요안스 5세, 마누일 2세 등 4명의 황제가 난무한 혼란 끝에 요안니스 5세는 마침내 황위에 복귀하여 내전이 끝났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제노바인들이 있는 갈라타로 도주하여 그곳에서 머무르다가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테네도스 섬을 공유하기로 합의한 덕분에 2년 뒤 궁성에 복귀할 수 있었다.
3. 제17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390~1402년)
요안니스 5세와 그의 아들 마누일 2세 vs 요안니스 5세의 큰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와 손주 요안니스 7세는 일단 대립을 마무리했지만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형이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대다 쫓겨나서 황위 계승권자가 된 마누일 2세에게 자식이 태어나자 요안니스 7세는 영원히 동로마 제국의 황위에 앉을 길이 막혀 버렸다. 요안니스 7세는 자신의 황위를 무력으로 얻어내려 했고, 그 무력을 얻어낼 곳은 오스만 술탄국이었다. 1389년 4월 13일, 요안니스 7세는 바예지드 1세가 제공한 소규모 군대의 도움을 받아 할아버지 요안니스 5세를 타도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황제는 아들 마누일 2세와 자신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을 대동하고 황금문의 요새로 들어가 그곳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마누일 2세는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주변을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노력한 끝에 8월 25일, 로도스의 구호 기사단에게서 빌린 갤리선 2척과 여러곳에서 마련해온 소형선박 7척과 함께 돌아왔다. 이를 바탕으로 9월에 요안니스 5세는 손자를 도시 밖으로 몰아내고 제위에 복귀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요안니스 7세와 타협에 도달했다.하지만 마누일 2세의 제위를 향한 길은 아직도 멀었다. 요안니스 7세의 배제를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 아나톨리아의 술탄은 마누일 2세에게 자신에게 참배를 명하였으며, 요안니스 7세에게도 마찬가지로 참배를 명했다. 삼촌과 조카 사이인 두 명의 황제들은 술탄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소아시아에 남은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요새인 필라델피아의 공격에도 동원되었다. 술탄의 명령으로 동로마 제국 황제들이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치욕을 겪었으며, 그에 더해서 술탄은 요안니스 5세에게 지난 번 반란에서 목숨을 구해준 황금문의 요새를 파괴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황금문 요새를 수도원의 석재로 보강하려던 무엄한(?) 시도에 대한 술탄의 명령에 거역했다가는 눈을 뽑히고 투옥당할 것이었다. 요안니스 황제는 굴욕적으로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 치욕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1391년에 한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 후 마누일 2세 재위 시절. 바예지드 1세가 룸의 술탄을 자칭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으나, 성과가 없자 공격을 멈추고 10년 동안 봉쇄상태만 유지했다. 구원군으로 온 십자군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구원은 동방에서 왔다.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가 바예지드를 격파하고 그를 새장에 가둔 뒤, 술탄의 아내에게 벗방을 시키는 굴욕을 주면서 오스만 공위기가 열리자 동로마 제국은 갑작스러운 해방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