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44대 황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VALERIVS SEVERV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Flavius Valerius Severus) |
출생 | 미상 |
로마 제국 일리리아 | |
사망 | 307년 9월 |
로마 제국 트레스 타베르나에 | |
재위 기간 | 서방 부제 |
305년 5월 1일 ~ 306년 7월 25일 (1년 2개월) | |
서방 정제 | |
306년 7월 25일[1] ~ 307년 4월 (9개월) | |
전임자 | 콘스탄티우스 1세 |
후임자 | 리키니우스 |
아들 | 플라비우스 세베리아누스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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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의 부하. 세베루스 2세라고도 한다. 305년 갈레리우스로부터 서방 부제로 발탁되어 이탈리아 및 북아프리카를 통치하였다.2. 생애
2.1. 서로마 제국 부제
서기 3세기 중반, 로마 제국의 일리리아 북부 지방에서 태어났다. 변방 출신인데다, 출신 가문 역시 미천했다고 한다. 따라서 출세를 위해 로마군에 입대했다고 하며, 이때 능력을 인정받아 군대 내 요직을 두루 거쳐 고위장교까지 승진했다. 군생활 중 갈레리우스와 인연을 맺은 것은 큰 도움이 되었고, 오랜 기간동안 갈레리우스의 부하로 남았다. 이후 동방 정제였던 갈레리우스는 305년 그를 새로운 서방 부제에 임명했다.동시대 사람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초빙돼 황궁 수사학자를 지낸 락탄티우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갈레리우스가 자신의 친구이자 부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서방 부제로 임명할 당시, 갈레리우스의 장인이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 결정에 화를 냈다고 한다. 락탄티우스는 이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위 갈레리우스에게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카이사르로 삼아 서방 부제로 임명하겠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강하게 그 제안에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참다 못해
"뭐라고 했느냐! 그 춤추는 사람?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바꾸는 습관적인 술주정뱅이 말이냐?"
라고 말하면서,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갈레리우스는 세베루스가 자신의 밑에서 군대 고위장교까지 오르는 동안 행정과 병참 관리와 관련된 행정가이자 조달자로 충실히 국가에 봉사했다며 고집을 피웠고, 이를 밀어 붙였다고 한다.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의 고집을 꺾지 못했고, 세베루스는 305년 5월 1일에 카이사르의 자리를 이어받게 했다.그렇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판단처럼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는 부제는커녕 제국의 고위직에 올라 보여줄 역량에 의문이 가득한 인사였다.
2.2. 서로마 제국 정제
306년 공동황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사망하자, 순번에도 없던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휘하 군대에 의해 추대되었지만, 갈레리우스가 부제였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서방 정제로, 콘스탄티누스는 서방 부제로 각각 인정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 되었다.2.3. 폐위
306년 10월, 로마에서 전임황제인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여기에 격분하여[2] 원로원과 일반 시민[3] 그리고 근위대(프라이토리아니)의 정책적 불만[4]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키자(사두정의 내전), 이를 진압하기 위해 로마로 진격했으나 패배하고 라벤나로 퇴각했다.(307년 2월) 이후 라벤나의 요새를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막시미아누스의 계략에 속아, 원래는 제대로 대우받기로 약속을 받고 항복했지만 포로가 되어 307년 9월 16일 처형당했다.3. 아들 세베리아누스
락탄티우스에 따르면,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에겐 플라비우스 세베리아누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처형될 당시 어린 나이였는데, 목숨을 장담할 수 없어, 급히 갈레리우스에게 보호받고자 서방 영역을 탈출했다고 한다. 이후 갈레리우스에게 보호를 받았는데, 갈레리우스가 311년 사망하자, 세베리아누스는 리키니우스가 동부를 통치하려는 야망 속에서 잠재적인 라이벌인 자신을 여러 가지 정황상 분명히 해치려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갈레리우스가 죽은 뒤,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던 막시미누스 다이아에게 도망쳤다고 한다. 이때 다이아는 세베리아누스를 보호해주면서 그를 아사우리아 지역의 주지사에 임명했다.2년 뒤인 313년 4월, 트라키아에서 다이아와 리키니우스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다. 세베리아누스는 다이아 휘하에서 그와 동행했는데, 이 대결은 치랄룸에서 다이아 측의 패배로 끝났고, 다이아는 니코메디아를 거쳐 그 해 8월, 소아시아 남동부의 타르수스에서 향년 만 42세로 죽었다. 다이아가 죽은 직후, 리키니우스는 세베리아누스 신변을 확보한 다음, 세베리아누스가 직접 황제 직위를 맡을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를 처형했다.
[1] 정제,Augustus,시기, 서방 정제 콘스탄티우스 1세가 사망한 7월 25일부터 제위를 계승할 수 있었지만, 클로루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제위를 요구하면서 늦어졌다.[2] 막시미아누스는 서방정제로만 286~305로 20년 가까이 있었고, 자기는 그 적자이지만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비해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는 그 20년 내내 아버지의 부하인 부제였고, 정제는 꼴랑 1년 하고 죽었는데(그것마저도 막시미아누스가 죽은 것도 아니었고, 자의로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물귀신마냥 같이 용퇴하자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내려간 결과인데) 그의 서자[5]인 콘스탄티누스는 그 1년 사이에 아버지 군대 안에서 뒷공작과 큰 그림을 그려 추대받아서, 먼저 정제로 흥정을 했고 결국 정제는 아니지만 부제를 받아냈으니까. 빡치려면 빡칠 만 하다. 4두정치에 내재된 문제점이 이것이다.[3]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정제 및 부제위를 장군, 총독들끼리만 주거니 받거니 하니까. 시민들에게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문서에 써 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탈리아를 본국의 위치에서 격하시켜 일반 속주와 동등하게 했고, 면제되던 세금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로마 시는 예외라 계속 면세의 특권이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정부(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로마 시에서마저도 특권을 폐지해 세금을 걷으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4] 프라이토리아니의 로마 시내 주둔기지를 정리하는 작업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로 계속 차근차근 시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