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52대 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 CONSTANTIVS III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 (Flavius Constantius) |
출생 | 미상 |
로마 제국 | |
사망 | 421년 9월 2일 |
로마 제국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421년 1월 8일 ~ 421년 9월 2일 (8개월) | |
전임자 | 그라티아누스 |
후임자 | 호노리우스 |
종교 | 그리스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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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제국의 52대 황제이자 분할통치된 서방제국의 제1대 공동황제[1].2. 생애
테베의 올림피오도로스에 따르면, 나이수스(현재의 세르비아 니시)의 로마인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테오도시우스 1세 시절 군대에 입대했고, 서방의 참칭 황제 에우게니우스에 맞선 원정에 참여한 뒤 서로마군으로 보직을 이동한 후 호노리우스 치하의 장군으로 활동했는데 실은 아이티우스 그리고 아이티우스의 아버지 가우덴티우스 등과 함께, 말기 서로마 제국 스틸리코의 휘하에서 오랫동안 활약한 장군이다. 올림피오도로스는 그가 장난을 즐기고 익살스러운 행동을 서슴지 않는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기술했다.알라리크의 로마 약탈이 벌어진 직후 호노리우스의 최측근으로 부상한 그는 알로비시우스가 찬탈자 콘스탄티누스 3세와 내통했다고 비난하여 가차없이 처단했다. 411년 마기스테르 밀리툼에 올라 서로마군 총사령관을 맡게 된 그는 플라비우스 스틸리코를 처형하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한 올림피우스를 체포해 귀를 자른 뒤 처형했다.[2]
이후 갈리아 및 히스파니아를 되찾기로 결심한 그는 먼저 아를에서 콘스탄티누스 3세를 포위 공격했다. 도시가 함락된 후 사로잡힌 콘스탄티누스는 신변의 안전을 약속받고 이탈리아로 보내졌지만, 라벤나로 향하던 중에 살해되었다. 417년 콘스탄티누스의 부하였지만 히스파니아에서 자립한 게론티우스를 격파해 자살로 몰아넣었고, 게론티우스가 황제로 옹립했던 히스파니아의 막시무스는 이민족에게 투항했다.
한편, 알라리크의 후계자인 아타울프가 이끄는 서고트족은 남이탈리아에서 약탈을 일삼다가 식량 부족 현상으로 인해 군대를 유지하기 힘들어지자 호노리우스와 협상하여 이탈리아를 떠나는 대가로 빵을 공급받았다. 그 후 412년 갈리아로 들어선 그는 콘스탄티누스 3세에 이어 갈리아에서 황제를 칭하고 있던 요비누스와 협상하여 거주지를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요비누스가 아타울프의 경쟁자 사루스와 손을 잡자, 아타울프는 사루스를 제거했다. 요비누스는 이에 맞서 사루스의 동생 세바스티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다. 이에 아타울프는 콘스탄티우스 3세의 군대와 연합해 요비누스-세바스티아누스를 공격하여 413년 발렌티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요비누스와 세바스티아누스는 포로로 집한 뒤 나르보로 끌려가 참수되었고, 그들의 수급은 8월 말 라벤나에 거주하는 호노리우스에게 보내졌다.
413년 초 아프리카 총독 헤라클리아누스가 호노리우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식량을 실은 수송선들에 병사들을 숨겨놓고 라벤나로 출진했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이때 동원된 수송선이 3,700척에 달했다고 한다. 헤라클리아누스는 로마에 상륙한 뒤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라벤나로 행진했다. 그러나 도중에 콘스탄티우스 3세가 급파한 진압군에게 참패하여 카르타고로 도망가다가 3월 7일 에데스 메모리에서 암살당했다. 이 일로 인해 아프리카의 식량 수송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호노리우스는 서고트 족에게 더 이상 식량을 공급할 수 없었다. 아타울프는 414년 1월 1일 갈라 플라키디아와 결혼했고, 플라키디아가 아들을 낳자 테오도시우스라는 이름을 붙인 뒤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로마 황제로 추대한 후 지중해 연안으로 이동하여 나르보를 점령했다. 콘스탄티우스 3세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나르보를 해상에서 봉쇄하고 그들과의 교역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로 인해 기근이 심해지자, 서고트족은 바르셀로나로 도망쳤지만 그곳에서도 봉쇄가 계속되었다. 이에 아타울프는 호노리우스와 협상하여 상황을 해결하려 했지만 415년 9월 바르셀로나의 궁전에서 목욕을 하던 중 수하였던 시게리크에게 암살당했다. 잠시 권력을 장악한 시게리크는 과부가 된 갈라 플라키디아를 모욕하기 위해 그녀에게 포로들과 함께 12마일을 걸어갈 것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 시게리크를 제거하고 서고트의 왕으로 등극한 왈리아가 서로마 제국과의 평화 협정을 맺고 갈라 플라키디아를 넘기고 로마의 동맹 부족으로서 히스파니아의 다른 이민족과 싸울 것을 약속하는 대가로 60만 톤의 곡물을 받기로 하면서, 갈라 플라키디아는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또한 참칭 황제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도 로마군에 넘겨진 뒤 리파리 제도로 유배되었다.
417년, 콘스탄티우스는 갈라 플라키디아와 결혼했고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418년 서고트족을 히스파니아에서 불러내어 아키텐 일대에 정착시켜서 갈리아의 여러 이민족으로부터 로마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겼다. 이후 바가우다이(농민) 반란을 진압하고 갈리아 북서부를 제국의 영역으로 되돌렸고, 420년 카스티노를 파견해 프랑크족을 정벌했으며, 반달족을 압박해 베티카로 이주하게 했다. 그해 집정관에 다시 한 번 선출되었고, 421년 2월 8일 호노리우스와 공동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황제가 된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올림피오도로스에 따르면, 그는 보라색 휘장을 착용하면서 이전처럼 쇼나 경기에서 실컷 즐길 자유를 상실했다고 불평했고 무척 우울해 했다고 한다. 또한 갈라 플라키디아와 결혼하기 전에는 금에 대한 욕심이 없었지만, 결혼 후에는 욕심이 많아져 많은 이들의 재산을 몰수해 사방에서 그를 비방하는 목소리가 커졌다고 한다.
그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인정받길 원했지만, 테오도시우스 2세는 그럴 의사가 없었다. 이에 분개하여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려 했지만, 9월 2일 라벤나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올림피오도로스에 따르면, 흉막염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