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2 14:28:06

마르키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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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54대 황제
마르키아누스
MARCIANVS | Μαρκιανός
파일:Gold_Solidus_of_Marcian.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
(Flavius Marcianus)
출생 392년
로마 제국 트라키아 혹은 일리리아
사망 457년 1월 27일 (향년 65세)
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재위 기간 로마 황제
450년 7월 28일 ~ 457년 1월 27일 (7년)
전임자 테오도시우스 2세
후임자 레오 1세
배우자 아일리아 풀케리아
자녀 마르키아 유페미아
종교 그리스도교
1. 개요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까지의 삶2.2. 황제 즉위2.3. 환관 크리사피우스 숙청과 아틸라에 대한 대응2.4. 제국의 안정과 제4차 칼케돈 공의회2.5. 기독교 외 '이교'(Paganism) 금지 정책2.6. 사망
3. 한계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의 54대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의 제3대 황제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세운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그가 죽음으로써 테오도시우스 1세 이래 이어져 내려오던 왕조의 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재위기간은 450년부터 457년까지다.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까지의 삶

396년에 트라키아 지방[1]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집안에 대해서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성장해서 로마 군단에서 복무하며 직업군인으로서 살았다는 것이다.

직업군인으로 그는 사산조 페르시아반달족과의 전투에 참전했으며 431년 북아프리카히포 레기우스 근처에서 반달족과 싸우다가 포로가 된 경험도 있다. 생포되어 포로가 된 뒤,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 앞으로 끌려갔을 때 다시는 반달족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나서야 풀려나기도 했다. 그 뒤 그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 휘하의 실세이자 강한 세력을 가진 장군 아스파르가 거느린 군대에 들어갔고, 여기에서 고위직을 맡았다. 그리고 이어 원로원 의원이 되어 생활했다.

2.2. 황제 즉위

450년 7월 28일, 낙마사고로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장군 아스파르를 중심으로 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원로원 의원들과 황제의 누나 아일리아 풀케리아는 정적이자 실세환관 크리사피우스를 타도하기로 하고, 새로운 후계자 선정에 나섰다. 이들은 450년 8월 25일 아스파르 휘하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던 원로원 의원 마르키아누스를 후계자로 선정하고 그를 황제로 옹립했다. 이때 새 황제의 정통성을 위해, 테오도시우스 2세의 누나이자 테오도시우스 1세의 손녀인 풀케리아와 '형식상의 결혼(Pro Foma)'을 하여 왕조를 이었다[2]. 이렇게 황녀가 정통성을 갖고서 군주로서의 남편을 택군(擇君)하는 제위계승 메카니즘은 후대 레오 왕조의 아리아드네와 마케도니아 왕조의 조이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하지만 여제까지 오른 것은 조이뿐인데, 이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통치기간이 테오도시우스 왕조나 레오 왕조와는 달리 당시 기준으로 150년이 넘었을 정도로 오래되어서 정통성 내지는 통치정당성을 더욱 높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2.3. 환관 크리사피우스 숙청과 아틸라에 대한 대응

군인 출신이자 유능한 행정가였던 마르키아누스가 제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동로마인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모두에게 분노를 사고 있던 아틸라훈족에게 연례공물을 바치는 것을 폐지한 것이다.[3] 이러한 조치에 동로마인은 환호하였지만 그들은 아틸라의 침입을 걱정했다. 그러나 훈족과 아틸라는 너무 깊숙이 서방에 개입해 있었기 때문에 마르키아누스의 조치에 대해 응징을 할 수가 없었다. 더해서 아틸라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가 세운 제국은 급격하게 붕괴하고 훈족의 힘은 제국을 위협하지 못할 정도로 약화되었다.

동시에 마르키아누스는 연례공물 조공 폐지와 동시에 환관 크리사피우스와 또 다른 실세 노무스를 숙청하고 이들이 취한 세속 및 종교 정책을 취소했다. 또한 전임황제 때 훈족의 압력에 의해 포기해야만 했던 도나우 강 유역에 대해서도 다시금 제국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아틸라 죽음 이후의 기회를 틈타, 그는 도나우 강 유역에 동고트족을 다시 정착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한동안 도나우 강 유역을 안정화시켰고, 여러 연합 종족의 위협에서도 평화상태를 유지시키는 조치였다. 이어서 그는 국고 부담이 많이 드는 해외 원정을 조심스럽게 피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시리아와 이집트 남부 국경지역 주변에서 살던 유목민족 때문에 사소한 분쟁을 겪었음에도, 반달족이 북아프리카에서 일으킨 전쟁에 끼어들지 않았다.

2.4. 제국의 안정과 제4차 칼케돈 공의회

훈족에게 공납금을 지불해야 했던 부담을 덜어낸 마르키아누스는 자신을 지원해준 원로원 계층에 대해서 세금을 감면시켜 주었다. 또한 관직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경감해주는 조치를 취하고 관직 매매 등의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쐐기를 박으려고 노력했다. 동시에 황후 풀케리아와 함께 교황 레오 1세와 협력하여 451년 제4차 칼케돈 공의회를 개최했다[4]. 이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가 2가지 본성인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가졌다는 정통 그리스도교 교리를 확인하고 신성만을 갖고 있다는 단성론(單性論)을 부인했다. 또한 에우티케스와 이집트 주교들을 주축으로 한 지지자들을 단죄했는데, 이 조치는 동로마 제국의 통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왜냐하면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비록 단성론을 이단으로 규정했음에도 시리아나 이집트의 주교들이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단일한 본성을 계속 주장했기 때문이다.

2.5. 기독교 외 '이교'(Paganism) 금지 정책

이교의 세가 죽지 않자 즉위하고 다음 해인 451년에, 이교의식을 계속 수행하는 자는 재산 몰수와 죽음으로 다스리기로 하는 법을 발표했다. 또한 문을 닫은 이교사원은 다시 열지 못하게끔 엄히 금지했다. 일선에서 잘 이행되게 하기 위해, 지방의 실무자들이 이행하지 않은 것이나 혹은 그 지역에서 이교사원이나 의식이 적발되었을 경우, 그 실무자는 물론 그 위의 그 해당 지방의 총독 등 총책임자도 50파운드의 벌금을 내게 하는 연좌제를 도입했다.

2.6. 사망

온화한 성품을 가진 마르키아누스는 유능한 행정가였으므로 457년 병으로 사망할 당시 전임황제 때와 달리 7년 동안의 짦은 기간 동안에도 든든하게 채운 국고를 남겼다. 동시에 혼란스러웠던 서로마 제국과 달리 그의 치세기동안 동로마 제국은 평화기를 구가하며, 후세기에 '동로마의 황금시대'라고 평가받기도 했다[5].

그의 딸 마르키아 유페미아는 테오도시우스 2세 때의 유능한 섭정[6] 안테미우스의 외손자인 안테미우스와 결혼했다. 마르키아누스에게 아들은 없었기에 이 안테미우스는 사위로서 가장 유력한 후보였으나, 당시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스파르는 이 때까지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고 출신도 평범했던 레오를, 여러 황제 및 고위 귀족의 후손 및 인척이라서 자기가 실세 노릇을 하기 부담스러웠던 안테미우스 대신에 황제로 밀었다. 레오는 황제가 되고 위협적인 제위 후보였던 안테미우스를 반쯤 차도살인성으로 서로마 황제로 보냈다.

그는 사후 동방 정교회로부터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2월 17일을 그의 축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3. 한계

마르키아누스 치세기동안 동로마는 확실히 황금시대라고 불릴만 했다. 그러나 457년 마르키아누스가 사망할 당시, 테오도시우스가 죽은 이래로 제국이 서로마 제국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을 누려온 것은 심각한 수준으로 다시 흔들리게 되었다. 그의 조치로 정착한 동고트족은 끊임없이 도나우 강 접경 지대를 교란시켰고, 야만족 출신 장군들은 다시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킹메이커로써 자신들의 권한을 강화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 내에서 늘 문제가 되던 교리 분쟁 역시 분파 정신을 극도로 고조시켜 다시금 종교적인 논쟁에 빠지게 만들었다.

[1] 역사적, 지리적으로 발칸반도의 남동쪽을 부르는 지명이다. 전통적으로 흑해, 에게 해, 마르마라 해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져 있는 지역을 말한다. 현재 불가리아 남부(북부 트라키야), 그리스 북동부(서부 트라키), 터키의 유럽 영토(동부 트라크야)가 속한다.[2] 풀케리아는 이미 독신 서약을 한 몸이었으므로 마르키아누스는 단지 형식적인 남편에 불과하였다.[3] 이때 "아틸라에게 줄 쇠는 있어도 금은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다고 한다. 쇠는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므로 이는 계속 막대한 공물을 바치느니 차라리 전쟁을 하겠다는 뜻이다.[4] 여기에서 이들은 단성론을 이단으로 다뤘다.[5] 재정적으로도 동로마 제국을 튼튼히 하였기에 서로마 제국과 더욱 대비되었다.[6] 테오도시우스 성벽 건설을 진두지휘했던 사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