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6 17:53:54

아우렐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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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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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브리아 왕조 레온 3세 | 콘스탄티노스 5세 | 아르타바스도스 · 니키포로스 | 2차 재위 콘스탄티노스 5세 | 레온 4세 | 콘스탄티노스 6세 | 이리니
니키포로스 왕조 니키포로스 1세 | 스타브라키오스 | 미하일 1세 랑가베스 · 테오필락토스 · 스타브라키오스
- 레온 5세 · 콘스탄티노스
아모리아 왕조 미하일 2세 | 테오필로스 | 미하일 3세
마케도니아 왕조 바실리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 레온 6세 | 알렉산드로스 2세 | 콘스탄티노스 7세 | 로마노스 1세 · 흐리스토포로스 레카피노스 ·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 ·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 | 로마노스 2세 | 니키포로스 2세 | 요안니스 1세 | 바실리오스 2세 | 콘스탄티노스 8세 | 로마노스 3세 | 미하일 4세 | 미하일 5세 | 공동 즉위 조이 · 테오도라 | 콘스탄티노스 9세 | 2차 재위 테오도라
- 미하일 6세
콤니노스 왕조 이사키오스 1세
두카스 왕조 콘스탄티노스 10세 | 미하일 7세 · 콘스탄티오스 두카스 ·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로마노스 4세 · 레온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3세
콤니노스 왕조 알렉시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요안니스 2세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 마누일 1세 | 알렉시오스 2세 | 안드로니코스 1세
앙겔로스 왕조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3세 | 2차 재위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4세 | 알렉시오스 5세
니케아
라스카리스 왕조 테오도로스 1세 | 요안니스 3세 | 테오도로스 2세 | 요안니스 4세 | 미하일 8세
비정통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
동방
팔레올로고스 왕조 미하일 8세 | 안드로니코스 2세 | 미하일 9세 | 안드로니코스 3세 |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요안니스 6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안드로니코스 4세 · 요안니스 7세 | 3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7세 · 안드로니코스 5세 | 4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마누일 2세 | 요안니스 8세 | 콘스탄티노스 11세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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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렐리아누스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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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tablewidth=100%><tablealign=center> 라틴어 문구 색상 범례
  • ignotus: 불명
황제 겸 집정관 }}}
201년 202년 202년 보결 203년 204년
루키우스 안니우스 파비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무렌니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셉티미누스 카티니우스 아킬리아누스 레피두스 풀키니아누스
마르쿠스 노니우스 아리우스 무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레갈리아누스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라비우스 리보
204년 보결 205년 206년 206년 보결 207년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리베랄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푸블리우스 툴리우스 마르수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막시무스
ignotus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페트로니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파우스티누스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페르
208년 209년 210년 211년 212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파우스티누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테렌티우스 겐티아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카이사르 퀸투스 헤디우스 롤리아누스 플라우티우스 아비투스 아울루스 트리아리우스 루피누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
212년 보결 213년 214년 215년 216년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퀸투스 마이키우스 라이투스 푸블리우스 카티우스 사비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데키무스 카일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케리알리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눌리누스
217년 218년 218년 보결 219년 22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세베루스 마크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메시우스 엑스트리카투스 마르쿠스 오클라티니우스 아드벤투스 퀸투스 티네이우스 사케르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
221년 222년 223년 224년 225년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사비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비텔리우스 셀레우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알렉산데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로스키우스 아일리아누스 파쿨루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세르비우스 칼푸르니우스 도미티우스 덱스테르
226년 227년 228년 229년 23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퀸투스 아이아키우스 모데스투스 크레스켄티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아그리콜라
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마르켈루스 마르쿠스 라일리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이키우스 프로부스 카시우스 디오 섹스투스 카티우스 클레멘티누스 프리스킬리아누스
231년 232년 233년 234년 235년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루키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일리그니아누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파테르누스 마르쿠스 무나티우스 술라 우르바누스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티아누스
236년 237년 238년 239년 24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피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아프리카누스 막시무스 루키우스 뭄미우스 펠릭스 코르넬리아누스 폰티우스 프로쿨루스 폰티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베누스투스
241년 242년 243년 244년 24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아티쿠스 사비니아누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아리아누스 티베리우스 폴리에누스 아르메니우스 페레그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클로디우스 폼페이아누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레피두스 프라이텍스타투스 가이우스 케르보니우스 파푸스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가이우스 마이시우스 티티아누스
246년 247년 248년 249년 250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가비우스 누미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알리우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아퀼리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51년 252년 253년 254년 255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메시우스 데키우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발비누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256년 257년 258년 259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투스쿠스 (눔미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덱스테르)
마르쿠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뭄미우스 바수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260년 261년 262년 263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사이쿨라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눔미우스 알비누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도나투스 루키우스 페트로니우스 타우루스 볼루시아누스 눔미우스 파우스티아누스 덱스테르 (막시무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풀비우스 퀴에투스 아우구스투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호노라티아누스
264년 265년 266년 26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오비니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리우스 파테르누스
사투르니누스 루킬루스 사비닐루스 아르케실라우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268년 269년 270년 271년
아스파시우스 파테르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마리니아누스 파테르누스 비리우스 오르피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산크투스
272년 273년 274년 275년
티투스 플라비우스 포스투미우스 퀴에투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타키투스 또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벨둠니아누스 율리우스 플라키디아누스 카피톨리누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켈리누스
갈리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아우구스투스
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
276년 277년 278년 279년 280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풀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비리우스 루푸스 노니우스 파테르누스 (베티우스) 그라투스
281년 282년 283년 284년 284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루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빅토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카이소니우스 오비니우스 루피누스 마닐리우스 바수스 Ⅱ)
285년 286년 287년 288년
티투스 클라우디우스 아우렐리우스 아리스토불루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베티우스 아퀼리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폼포니우스 야누아리아누스
동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서방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
288년 보결 289년 289년 보결 289년 보결
… a 마르쿠스 마그리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움브리우스 프리무스 케이오니우스 프로쿨루스
… ivianus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퀸티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코엘리아누스 헬비우스 클레멘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89년 보결 290년 291년 292년
플라비우스 데키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아프라니우스 한니발리아누스
… ninius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시우스 디오 율리우스 아스클레피오도투스
브리타니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우사이우스 카라우시우스
293년 294년 295년 296년 29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눔미우스 투스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안니우스 아눌리누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298년 299년 300년
아니키우스 파우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
비리우스 갈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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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37대 황제
아우렐리아누스
Aurelianus
파일:아우렐리아누스두상.jpg
[1]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Lucius Domitius Aurelianus
출생 214년 9월 9일
로마 제국 판노니아 시르미움
사망 275년 9월 (향년 61세)
로마 제국 트라키아 카이노프루리움
재위 기간 로마 황제
270년 5월 ~ 275년 9월 (5년)
전임자 퀸틸루스
후임자 타키투스
배우자 울피아 세베리나
자녀 성명 미상의 딸
종교 로마 다신교
아우렐리아누스의 칭호
존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칭호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Germanicus maximus: 게르만족 정복자)[2]
고티쿠스 막시무스( Gothicus maximus: 고트족 정복자)[3]
레스티투토르 오리엔티스(Restitutor[4] Orientis: 동방의 재건자)[5]
레스티투토르 오르비스(Restitutor Orbis: 세계의 재건자)[6]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장군으로서의 경력2.3. 찬탈2.4. 황제 아우렐리아누스
2.4.1. 반달족 격퇴2.4.2. 알레만니족 격퇴 및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건설2.4.3. 고트족 격퇴 및 다키아 속주 포기2.4.4. 팔미라 제국 정복2.4.5. 갈리아 제국 정복2.4.6. 개혁
2.4.6.1. 솔 인빅투스(무적의 태양신)와 전제군주제 시행2.4.6.2. 화폐 개혁2.4.6.3. 경제 개혁
2.5. 암살2.6. 가족
3. 평가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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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37대 황제. 즉위 전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제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270년 3월 전임 황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다. 3세기의 위기 중 가장 위태로웠던 시기를 수습하고 제국을 재건한 인물이다. 역대 로마 제국의 황제 중 손꼽힐 정도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보였다.

즉위 직후 반달족, 알레만니족, 고트족 등의 게르만계 부족들을 시작으로 3세기의 위기 동안 로마 제국을 지속적으로 괴롭혀오던 이민족들을 일시적으로 섬멸하거나 격퇴시켰다. 이후 아예 나라를 세우고 떨어져나간 제국 동부의 팔미라 제국과 서부의 갈리아 제국도 병탄하여 제국을 재통합 시킨다. 이후 항구적인 제국의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내치와 제도 개혁에 골몰했으나, 개인 비서와의 사소한 트러블이 계기가 되어 암살당한다.

로마 멸망 후 오랜 시간 그저 군인 황제 시대의 지나가는 황제 1 정도로 취급받았으나 현대에는 그가 중간에 죽지만 않았더라도 로마 제국의 모습을 획기적으로 바꿨을 유능한 황제라는 데 대체적으로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아우렐리아누스는 서기 214년 또는 215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일리리아 출신인 것으로 짐작되지만 일부 사료는 그가 그리스에서 태어났다고 기술했다. 역사학계의 정론은 아우렐리아누스가 일리리아의 농민 출신이라고 보고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아우렐리아누스는 사실 로마 정착민 출신일 수도 있으며 사회적 지위가 더 높았을 수도 있다고 추정한다. 아우렐리아누스는 235년경에 로마군에 입대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발레리아누스 황제 휘하에서 게르만족에 맞서 싸웠고 갈리에누스 황제가 창설한 기병 군단의 장교로 복무했다.

2.2. 장군으로서의 경력

아우렐리아누스는 기병대 지휘관 아우레올루스의 휘하에서 여러 전공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참여한 기병대는 제국 서방과 동방을 오가며 게르만족과 사산조 페르시아에 맞서 싸웠고 제국 곳곳에서 횡행하는 반역자들 토벌에 앞장섰다. 그러던 268년 아우레올루스가 스스로를 갈리아 제국 황제 포스투무스의 대리인으로 자처하며 갈리에누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갈리에누스는 토벌에 나서 밀라노 근방의 폰티롤로 누에보에서 격전 끝에 아우레올루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우레올루스를 밀라노에 가둬놓고 포위 공격했다. 그런데 갈리에누스는 전투를 지휘하던 중 근위대장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에게 피살되었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아우렐리아누스가 갈리에누스 암살에 가담했다고 밝혔지만, 그가 정말로 암살에 동의한 게 맞는지, 암살에 얼마만큼 관여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새 황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치하에서 빠르게 승진했다. 그는 달마티아 기병대의 지휘권을 맡았고 뒤이어 마기스테르 에퀴툼(Magister equitum)에 임명되어 황제 다음가는 로마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269년 발칸 반도를 침략한 고트족을 토벌하러 출정한 클라우디우스는 나이수스에서 기병대를 매복한 후 고트족을 유인해 방심한 그들을 습격했다. 이때 아우렐리아누스는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맹활약했고 고트족 5만 명이 이 전투에서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어 노예 시장에 팔렸다. 살아남은 고트족들은 마케도니아로 탈출했지만 로마 기병대의 끈질긴 추격과 식량 부족으로 고통 받아 여러 전사들이 굶어죽자 하에무스 산맥으로 숨었다. 이에 클라우디우스는 하에무스 산맥을 포위했고, 고트족은 로마군에게 포위된 채 추운 겨울을 보내는 동안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린 끝에 대다수가 사망했다.

2.3. 찬탈

270년 3월, 고트족을 괴롭히던 전염병이 로마군에게도 퍼지는 바람에 클라우디우스가 병에 걸려 시르미움에서 사망했다. 원로원은 클라우디우스를 신격화한 후, 형 고티쿠스와 원로원의 명에 따라 본국 이탈리아 동북부의 아퀼레이아에서 후방을 방어하며 원정군의 병참을 관리한 퀸틸루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동생 퀸틸루스는 그나마 남아 있는 극소수의 기록들에 따르면 177일동안 재위를 지키는 동안 안정적으로 제국의 내정을 다스렸다. 그는 많은 양의 주화를 적정한 수준에서 관리하며 발행해 물가를 잡았고, 불필요한 숙청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형 고티쿠스와 달리 로마군에 입대해 원로원 의원, 총독까지 올랐음에도, 군사적 업적이 거의 없었다.

당시 아우렐리아누스는 다누비우스 전선에서 기병대장으로 있었다. 그는 다누비우스 방어선 일대의 로마군을 사실상 사병화하여, 이들의 지지 아래 새 황제로 추대되는 방식으로 황제를 선포했다. 이때 로마군은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면서, 아퀼레이아에 머물고 있던 퀸틸루스가 군율을 엄하게 함에도 그 능력이 자신들의 장군 아우렐리아누스보다 비루하고 업적이 전무해 불신임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원로원을 강하게 압박했다. 이런 가운데, 퀸틸루스는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승리할 가망도 없고, 자신이 제위를 지키겠다고 버티면 내전이 심화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자신의 주치의를 맡고 있던 안티오키아의 요한네스에게 자신의 정맥을 끊어 명예롭고 귀족적인 죽음을 주게 해달라고 명령하고 자결했다고 요안니스 조나라스 등은 기록했다.

이렇게 퀸틸루스가 죽자, 아우렐리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내전을 준비하다가, 유일무이한 황제가 됐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보내 원로원을 압박하고, 마치 퀸틸루스가 찬탈자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을 동원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사실은 전염병에 걸려 죽어간 고티쿠스에게 제위를 약속받았다는 논리 등을 강요하며, 원로원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원로원은 퀸틸루스 추대를 취소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무력을 앞세운 아우렐리아누스의 요청을 들어줬다.

2.4. 황제 아우렐리아누스

제위 등극 이후, 황제로 등극한 뒤부터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죽음에서 자신이 황제 서거를 본 사람이라고 재차 주장하며, 전임자 퀸틸루스를 찬탈자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아우렐리아누스의 과거와 그가 유일무이한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보인 행태 때문에, 원로원의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를 끝까지 강조했고, 이를 믿지 않은 이들을 불경, 반역으로 몰아 죽이거나 추방했다. 그러면서 그는 여러 선전을 통해 자신의 즉위가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이를 믿으라고 명령했다. 심지어 272년에는 자신이 거병했던 것은 퀸틸루스가 자신의 형을 독살했기 때문이라고 선전하면서, 자신이 정통임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에도 성과는 미미했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즉위 직후부터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에게 도움을 구했다. 이후, 그는 안티오키아누스를 집정관에 지명하면서, 그에게 재차 도움을 구했다. 이런 배경으로 안티오키아누스는 생애 두 번째 집정관에 올랐다. 그는 아우렐리아누스의 조치 아래 후기 로마제국에서나 볼 형태로 "집정관이자 수도 장관"이 되어 사실상 내각을 이끌게 됐다.[7]

이렇게 되자 아우렐리아누스는 여러 논란 속에서 불안했던 정통성을 안정시킬 수 있게 됐다. 그는 공권력 회복과 20년 동안 찬탈자와 반역자들에게 잠식된 국가를 되돌려놓겠다고 발표했다.

2.4.1. 반달족 격퇴

황제에 즉위한 아우렐리아누스는 먼저 발칸 반도와 이탈리아 북부 일대에서 날뛰고 있는 반달족을 축출하기로 했다. 그는 270년 말에 로마에서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이탈리아 북부를 휘젓고 있던 반달족을 격파했다. 그들이 발칸 반도로 달아나자, 그는 이듬해 판노니아로 진군해 반달족을 또 다시 격퇴하여 다뉴브 강 이북으로 내쫓았다.

2.4.2. 알레만니족 격퇴 및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건설

271년, 아우렐리아누스가 반달족을 축출하기 위해 발칸 반도로 간 사이 알레만니족이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급히 이탈리아로 돌아갔지만 플라켄티아 인근에서 매복에 걸려 패배했다. 그의 패배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절망에 빠진 로마인들은 앞다퉈 신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며 구원을 호소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포기하지 않고 군대를 수습한 후 파노의 메타우루스 강 근처에서 주둔하고 있던 알레만니족을 공격하여 파노 전투에서 그들을 물리쳤다. 이후 아우렐리아누스는 철수하고 있는 알레만니족을 추격하여 파비아에서 괴멸시켰다. 그는 이 공적으로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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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선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세르비우스 성벽
빨간 선 <colbgcolor=#FFF,#000>기원후 3세기에 지어진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하지만 게르만족이 로마를 위협했다는 사실은 로마인들에게 심히 큰 충격을 줬기 때문에, 위협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였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로마 주변에 새로운 성벽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르비우스 성벽을 허문 지 300년 만에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 세워졌다. 여기에 피사우룸과 파눔 포르투나이 등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도 요새화했으며, 조화와 단합의 여신 콩코르디아의 이미지를 새긴 주화를 주조하여 모든 로마인이 단합할 것을 촉구했다.

2.4.3. 고트족 격퇴 및 다키아 속주 포기

이탈리아를 침략한 알레만니족 섬멸에 성공한 아우렐리아누스는 다키아 속주를 침략한 고트족을 무찌르러 출격했다. 그는 우선 그들을 다키아 속주에서 축출하고 다뉴브강을 건너 고트족을 다시 격파하고 고트족 지도자 칸나바우데스를 주살했다. 그는 이 공적으로 고티쿠스 막시무스의 칭호를 얻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동방 제노비아를 상대로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나우강 전선의 안정화가 매우 중요하였고 그로 인해서 다키아 속주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이 결정이 영구적이었는지 임시적이었는지는 황제가 일찍 죽으면서 정확히 알 수 없게 되었다.[8][9] 이후 다키아 속주에 남겨진 부족들은 5세기까지 다뉴브 강을 건너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로마인의 정체성을 유지해 현재의 루마니아로 이어졌다.

한편 아우렐리아누스는 모에시아 수페리오르 속주를 개편, 다키아 아우렐리아나 속주를 편성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일대를 방어하게 했고, 세르디카를 다키아 아우렐리아나 속주의 수도로 정했다.

2.4.4. 팔미라 제국 정복

272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 로마 제국의 동방 영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팔미라 제국의 여왕 제노비아는 로마의 곡물 수출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로마는 몇주 만에 빵이 바닥나 기근의 위협을 받았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 제국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제노비아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녀는 자신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예라고 주장했고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와 자신을 비교했다. 하지만 제노비아의 용기와 군사적 역량은 클레오파트라를 능가했다. 그녀는 사냥을 즐겼고 군복을 입고 말을 탔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부대 맨 앞에 서서 도보로 수 킬로미터를 행군했다. 아우렐리아누스 이전에도 여러 로마 장군과 군대가 팔미라 제국을 제압하기 위해 접근했으나 제노비아는 그들을 쉽게 격파했다. 또한 제노비아는 행정 능력도 탁월하여 엄격한 절약 정책을 실시해 재정을 풍족하게 관리하면서도 꼭 필요한 경우에는 관대하게 베풀었다. 그리고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맹을 체결하고 위급 시에는 지원군을 파견하기로 약조했다.

아우렐리아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아시아로 진군하자, 제노비아는 이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그녀가 그동안 만난 상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로마 군대의 맨 앞에서 진군하여 안키라[10]를 함락시켰으며 끈질긴 공성전 끝에 티아나를 공략했다. 이때 티아나 시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자신은 복수할 생각이 없으며 그들에게 손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칙령을 내려 그들을 안심시키고 도망자들을 도시로 불려들었다.

이때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티아나 공성전이 생각보다 쉽게 진행되지 않자, 아우렐리아누스는 열받은 나머지 "도시를 함락하면 개 한 마리도 살려주지 않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막상 도시가 함락되자 생각을 바꿔 주민들을 해코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앞서 한 약속을 잊었나며 항의했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내가 개 한 마리도 살려주지 말라 한 건 사실이다. 그러니 개를 죽여라!"라고 답했고, 병사들은 박장대소하며 기분을 풀었다. 그 후 아우렐리아누스는 관대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하며, 전쟁에서 이기면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병사들은 기꺼이 따랐다고 한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여기에 더해 자의가 아닌 강요에 의해 팔미라 여왕의 병사로 근무했던 자들에게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러한 관대한 조치는 시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로마군은 에메사의 성문 앞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호응을 얻었다.

272년 6월, 로마군과 팔미라군은 안티오키아 근방과 에메사 근처에서 두 번에 걸쳐 격돌했다. 제노비아는 두 번의 전투 모두 참전해 병사들을 독려했고, 부하 자브다스도 탁월한 군략을 보였지만, 아우렐리아누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두 차례 전투 모두 패한 제노비아는 팔미라로 도주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프로부스를 이집트로 파견해 로마의 밀 공급지인 이집트를 확보함으로서 로마의 빵 부족 현상을 해결하게 한 뒤 본인은 팔미라를 포위했다. 제노비아는 팔미라에서 항전하면서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통치를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 공성전에서 친히 전열의 맨 앞에 서서 군대를 지휘하다가 창에 맞아 부상당했다. 이 시기 그는 원로원에 서신을 보내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로마인들은 여자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다며 나를 바보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제노비아의 성격과 위엄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 그녀가 전쟁을 위해 준비한 돌, 화살, 그리고 각종 원거리 무기의 종류를 모두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벽의 모든 구역에 두세 개의 발리스타가 설치되었으며, 그녀의 군용 무기에서 인위적인 불이 뿜어지고 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를 필사적인 용기로 무장시켰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관대한 항복 조건을 제노비아에게 제안했지만 제노비아는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거부했다. 그녀는 곧 기근이 돌아 로마군이 사막 지대에서 퇴각할 것이며 사산조 페르시아의 군대가 지원하러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아우렐리아누스는 탄탄한 보급로를 확보해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시켰고 사산조 페르시아는 마침 샤푸르 1세가 사망하는 바람에 팔미라에게 대규모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었으며, 그나마 보낸 소수의 병력은 아우렐리아누스가 급파한 기병대에게 격퇴되었다. 얼마 후 프로부스가 이집트 평정을 완료한 후 아우렐리아누스와 합류하자,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제노비아는 가장 날랜 낙타에 올라타 달아났다. 그러나 그녀가 유프라테스 강둑에 도착했을 때 로마군에게 생포되어 아우렐리아누스에게 끌려왔다. 팔미라는 곧 항복했고 아우렐리아누스는 특별히 약탈을 금지했다. 그 대가로, 팔미라는 막대한 양의 황금과 무기, 말, 낙타, 비단, 보석을 헌납해야 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에 600명의 병력을 남기고 에메사로 돌아가 승전에 따른 포상과 징벌을 실시했다. 이때 그는 제노비아에게 어떻게 로마의 황제들에게 감히 맞서 싸울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제노비아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우레올루스갈리에누스 같은 사람을 로마 황제라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폐하만을 나의 정복자, 나의 주군으로 인정할 뿐입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제노비아를 로마로 끌고 가 개선식에 참석시키게 한 뒤 자신 역시 귀국길에 올랐다가 도나우 강을 건너 약탈을 자행하고 있던 사르마티아인들을 토벌했다. 그런데 273년, 팔미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제노비아의 친척인 셉티미우스 안티오쿠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600명의 수비대가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1]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급히 군대를 이끌고 팔미라로 진군해 단숨에 함락시키고 도시를 사흘간 약탈하는 걸 허용했다.[12] 이때부터 동방에서 번영하는 도시였던 팔미라는 쇠퇴했고 나중엔 촌락으로 전락했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피르무스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에 대한 밀 공급을 또다시 끊었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이집트로 진격해 반란을 몇 주만에 평정하여 이집트의 소요를 잠재웠다. 이렇듯 동방 질서를 회복한 공적으로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동방의 재건자라는 뜻의 레스티투토르 오리엔티스(Restitutor Orientis) 칭호를 수여받았다.

2.4.5. 갈리아 제국 정복

274년, 아우렐리아누스는 갈리아 제국 정복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엔 외교를 통해 갈리아 제국을 복속시키기로 했다. 갈리아 제국의 황제 테트리쿠스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아우렐리아누스가 이끌고 온 로마군과 샬롱에서 대치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눈치채고 황위에서 물러나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로마 제국에게 귀속시키기로 했다. 그는 아우렐리아누스에게 밀사를 보내 신변을 보장해주면 귀순하겠다고 제안했고, 아우렐리아누스는 흔쾌히 수락했다. 274년 2월 또는 3월, 테트리쿠스는 아들 테트리쿠스 2세와 함께 로마군에 귀순했다. 그러나 갈리아 제국군은 테트리쿠스 부자를 배신자라고 비난하였고, 끝까지 싸울 의사를 표명했다. 결국 전투가 벌어졌고, 아우렐리아누스는 격전 끝에 갈리아 제국군을 섬멸했다. 이후 트리어에 입성하여 자신의 주화를 주조하게 하였고, 갈리아 제국의 관원들이 제 자리를 계속 유지하게 했다. 또한 여전히 복종하지 않던 루그두눔[13]을 점령하고 막대한 벌금을 매겼다.

이렇게 해서 갈리아 제국을 로마 제국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한 아우렐리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하여 거대하고 화려한 개선식을 열었다. 개선식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갈리아의 왕 테트리쿠스와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였는데, 각자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연도에 늘어선 군중은 환호성을 지르며 제국의 재통합을 환영했으며 원로원은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세계의 재건자라는 뜻의 레스티투토르 오르비스(Restitutor Orbis)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개선식이 끝난 뒤 제노비아를 로마 근교의 티볼리의 어느 저택에서 살게 해줬고 그녀의 세 딸은 로마 귀족들과 결혼했다. 또한 테트리쿠스와 그의 아들은 예전의 재산을 그대로 유지했고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테트리쿠스는 나중에 루카니아 총독을 역임했다.

2.4.6. 개혁

아우렐리아누스는 가공할 만한 군사적 업적을 남겼지만, 그가 로마 제국의 후임자들에게 남긴 최고의 업적은 바로 대대적인 내정 개혁과 황제권의 절대화였다. 실제로 이후 등장하게 될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1세의 대대적인 국가 개혁은 아우렐리아누스가 청사진을 그리고 추진했던 조치를 그들이 이어받는 형태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아우렐리아누스는 과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이은, 도미나투스(= 전제군주정)의 아버지와 같은 황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개혁 방법은 여러 부분에서 도미티아누스의 것과 많이 비슷했다. 따라서 권력 강화 방법은 과거의 티베리우스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연상될 정도로 냉혹한 측면이 많았고, 이는 그가 사후 프로부스보다 인격적으로 잔혹하고 교양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게 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의 개혁은 짧은 시간 동안 진행됐음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도미나투스 설계도 그 자체였다.
2.4.6.1. 솔 인빅투스(무적의 태양신)와 전제군주제 시행
모든 혼란을 수습한 아우렐리아누스는 솔 인빅투스(Sol Invictus)[14] 숭배 의식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그는 태양신 숭배를 통해 제국의 모든 민간인 및 군인들을 하나로 단합하여 외적에 맞서 싸우기를 희망했다. 이 숭배의 중심지인 신전은 274년에 아우구스투스 영묘 북부 지역에 지어졌고 12월 25일을 솔 인빅투스 기념일로 지정했다. 이는 강력한 통치권자가 없다면 구심점을 잃어 분열해 버리는 제국의 동부와 서부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황위를 찬탈해 선황의 권위를 활용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을 고려한 조치였다. 군인 황제 시대 이전에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제위를 계승한 황제들은 선황을 신격화하고 그와 자신의 연결 고리를 강조하는 것으로 권위를 쌓았는데, 아우렐리우스는 그럴 수가 없었던 것.

그래서 그는 동전에 자신의 모습을 새기면서 데우스 에트 도미누스 나투스(Deus Et Dominus Natus)[15]라는 문구를 덧붙이도록 하고, 황제의 모든 명령에는 하나의 강력한 신과 통치자의 위엄을 강조했다. 이는 훗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채택한 절대군주제에 그대로 재도입되어 굳어지게 됐다.

이어 후대 기독교도 사가들과 일부 역사가들의 기록처럼, 아우렐리아누스는 솔 인빅투스를 최정점으로 하는 로마 국교를 완성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그는 황제가 이 국교의 유일한 대리인이며 최고 사제에 올라 군대, 원로원, 관료 등을 계서제에 집어 넣고자 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그가 이를 시행하던 중 암살되면서 끝내 무산됐다.

그래서 후대의 기독교사가 락탄티우스는 그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충분했다면 기독교 박해를 실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그대로 재도입됐기 때문이다.
2.4.6.2. 화폐 개혁
파일:Aureus_of_Aurelian.jpg
아우렐리아누스의 초상이 그려진 화폐.

아우렐리아누스는 뒤이어 화폐 제도도 개혁했다. 그의 통치 초기, 로마에서 동전 주조를 맡았던 펠리키시무스가 노동자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펠리키시무스는 동전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원재료인 은을 빼돌리고 질이 떨어지는 동전을 주조해왔는데 아우렐리아누스가 이를 처벌하려 하자 반발한 것으로 보인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이 반란을 단호하게 진압하고 펠리키시무스를 재판에 회부해 처형했다. 이에 일부 민중이 폭동을 일으키자, 그는 군대를 투입해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했다.[16]

또한 황제는 이 반란과 연루된 원로원 의원 몇 명을 사형에 처했다. 이후 아우렐리아누스는 5%의 은을 함유한 안토니아니 동전을 주조하게 했고 모든 오래된 저질 동전을 회수했다. 그 결과 바닥을 드러내던 로마 정부의 재정이 개선되었다.

다만 기존의 동전을 회수하고 새 동전만 쓰게 하는 정책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이집트에서만 착실하게 진행되었고, 그 외의 속주에서는 옛날 동전이 거리낌없이 사용되었다. 또한 고대 이집트의 물가를 연구한 학자들은 274년 이래로 물가가 큰 폭으로 올랐음을 암시하는 파피루스 기록을 찾아냈다. 그들은 아우렐리아누스의 화폐 개혁이 사람들이 동전을 신뢰하지 못 하는 역효과를 야기하여 (정권이 바뀔 때마다 회수당할지도 모르니까) 화폐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결과를 야기했다고 주장한다.
2.4.6.3. 경제 개혁
화페개혁 단행 이후, 아우렐리아누스가 곧바로 손 본 것은 곡물가 인상과 황제들의 시혜책 폐단을 줄이는 일이었다. 그의 조치는 2세기 트라야누스가 한 실책을 뒤늦게 수습한 것인데, 이에 큰 영감을 준 황제는 놀랍게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였다. 이때 아우렐리아누스는 곡물 가격을 가지고 장난치는 중간업자들을 때려 잡고, 국가가 직접 감독하는 방법으로 제분용 밀을 제빵업자 조합에 파는 하나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또한 그는 여러 식료품, 생필품 조합들이 난립해 여러 권세가들과 장난치는 일을 막고자, 모조리 국가 통제 하에 두고 이들 조합들을 국가 기관 내지 국가 관리 조합으로 만들어 관리했다.[17] 따라서 이 조치 이후, 로마 황제들은 갑작스럽게 빵값이나 식료품 가격이 특정인의 장난질로 널뛰기하는 것을 쉽게 파악해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조치 못지 않게 아우렐리아누스가 신경 쓴 또 다른 조치는 바로 트라야누스가 인기영햡으로 벌여 널뛰기하는 빵값 문제와 무분별한 무상배급을 공식적으로 중단시키고 뜯어고친 부분이다. 이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치세 내내 신경쓴 부분인데, 아우렐리아누스는 아예 황제가 팔을 걷어 붙이고 법까지 뜯어 고쳤다. 그래서 이때부터 로마에서는 시민권자에게 누구나 무상배급을 하지 않고, 무상 배급 정기 배급자를 선별해, 그들에게만 매일 2파운드의 빵을 배급케하고, 정기적으로 돼지고기, 기름(올리브유), 소금, 포도주를 기초생활금으로 제공되게 된다.

2.5. 암살

이렇듯 군사와 내정면에서 가공할 업적을 남긴 아우렐리아누스는 군인 황제 시대에 출현한 로마 황제들 중 가장 유능한 황제였다. 하지만 그는 예전의 티베리우스가 연상될 정도로 본인과 타인 모두에게 지나치게 엄격했다. 따라서 그는 집권 이후, 군대의 엄격한 규율을 민간에도 그대로 적용했고, 군인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민간인보다 책임을 엄하게 묻도록 했다. 따라서 그의 치세동안 범법자가 된 이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법 그대로 처벌받았다. 여기에는 황제의 가족, 측근 혹은 친구라고 해도 예외가 없었다. 그 결과, 상관의 아내와 불륜을 맺었던 한 부하는 양 팔과 양 다리가 두 그루의 나무에 묶인 후 나무들이 잡아당겨지면서 온 몸이 찢겨지는 처벌을 받았고, 병사들도 범죄를 저지르면 가중처벌을 받았다. 당연한 말인데, 그는 티베리우스처럼 공공도덕심을 무척 강조한 까닭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공익이나 질서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 결과, 사형 집행인들은 수많은 이들을 처형했고 감옥은 미어터졌으며, 원로원은 눈 앞에서 동료들이 비리, 불륜 등으로 기소 후 처형되는 장면에 벌벌 떨었다.

이렇듯 매사를 엄격하게 처리하던 아우렐리아누스는 275년에 갈리아에서 발발한 반란을 진압하고 빈델리키아[18]에서 침략한 이민족을 격멸했다. 이후 과거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포로로 잡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게 복수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동방으로 출진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비서들 중 한 명인 에로스와 마찰을 빚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에로스에게 거칠게 화를 내며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공포에 질린 에로스는 사형 집행서를 위조하여 여러 고위 관료들의 이름을 적은 뒤 이 문서를 관료들에게 보여줬다. 아우렐리아누스가 매사를 엄격하게 집행한다는 걸 잘 알고 있던 노타리우스 무카포르를 비롯한 여러 관료들은 공포에 질렸고, 이내 황제를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275년 9월, 에로스와 노타리우스 등 관료들은 트라키아의 카이노프루리움[19]에서 아우렐리아누스를 암살했다. 향년 61살이었다.

나중에 에로스가 문서를 위조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암살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후회했고 일부 가담자들은 자살했다. 나머지도 모두 붙잡혀 에로스는 산 채로 찢기는 거열형을 받았고, 다른 가담자들도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2.6. 가족

아우렐리아누스는 울피아 세베리나와 결혼했고, 사이에는 딸 1명이 있었다.[20]

아내 울피아 세베리나는 274년 가을 아우구스타 직위를 받았으며 남편인 아우렐리아누스가 암살당한 이후 아우구스타 직을 유지하면서, 정숙하고 현명한 그녀는 자칫 내전에 빠질 제국을 안정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믿을 수 없는 사서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트라야누스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일가의 후손이라고 주장되기도 했다. 허나 그녀는 여러가지 증거상 다키아 태생으로 추정된다고 한다.[21] 다키아 태생 로마인인 울피우스 크리니투스의 딸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군 장교 시절 결혼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3. 평가

아우렐리아누스, 세계를 재건한 황제

원래는 아는 사람만 아는 명군에 가까웠으나,[22] 오늘날에는 5년이라는 짧은 시기에 대단한 업적을 이룬 그에 대해 대중적으로도 재조명이 이루어져서, 역대 최고의 로마 황제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아우렐리아누스가 집권한 270년 당시 로마 제국의 상황은 매우 암울했다. 밖으로는 사산 왕조고트족, 알레만니, 반달족, 프랑크족 등 여러 게르만족의 침략이 갈수록 심해졌고, 안으로는 수많은 반란이 일어나더니 포스투무스갈리아 제국제노비아팔미라 제국이 로마로부터 독립했다. 갈리아 제국 자체는 황제가 잇달아 암살당하고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기에 급급해서 로마에 그렇게 큰 위협을 가하진 않았지만, 갈리에누스의 최측근이었던 아우레올루스포스투무스의 대리인을 칭하며 반란을 일으킨 선례가 있어서, 언제라도 로마 내부의 반란 세력과 호응할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팔미라 제국은 제노비아자브다스 장군의 주도하에 시리아 속주와 이집트를 석권하고, 사산 왕조와 연합하여 로마 제국에 공동으로 대항했다. 특히 이집트는 제국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100만이 넘는 로마 시민이 매일 먹을 식량을 보급하고 있었기에, 그곳을 잃은 것은 제국의 안위를 송두리째 위협하는 중대사건이었다.

또한 제국 전반에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속주민들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였으나, 정작 도중에 관료들이 빼돌려서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펠리키시무스 등 화폐 주조인들은 은화에 들어가야 하는 은을 빼돌려서 사익을 채웠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은 갈리에누스 말기부터 아우렐리아누스 집권 초기까지 발행된 동전에 들어간 은 함유량이 2~3%에 불과하며, 심할 경우 1.5%도 안 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리고 인재 발굴의 원천이었던 원로원은 무력해진지 오래였고, 상인들은 식료품, 생필품을 고의로 숨겨서 가격이 폭등하게 유도하여 막대한 수익을 챙겼다. 또한 군대는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보다는 눈앞의 이득을 우선시하여, 돈만 주면 지휘관을 황제로 세우고 조금이라도 불리하다 싶으면 황제를 가차없이 제거했다. 여기에 도적떼가 각지에 창궐했으며, 역병마저 돌아 수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많은 백성들은 이러한 현실에 절망하여 종교에 빠져들었고, 로마 정부의 탄압을 받던 기독교 등 여러 종교가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신자를 급격히 늘렸다.

갈리에누스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갈리에누스는 야전 기동대를 창설하여 외적의 침략에 신속하게 대응하게 하고, 몸소 제국 전역을 돌며 반란을 토벌하고 외적에 맞섰으며, 헬라 문화를 대대적으로 후원하고 무능해진 원로원 계급 대신 기사계급 위주의 관료체계를 편성하고, 원로원 총독의 군사 지휘권을 박탈하고 군인 출신 총독들에게 지휘권을 맡겨서 외적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게 하는 등 각종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거듭된 반란과 외세의 끊임없는 침략, 연속된 불운으로 인해 좀처럼 상황을 개선시키지 못했고, 급기야 그동안 자신과 함께 반란을 토벌하던 아우레올루스의 반란을 토벌 직전까지 몰아가다가 부하들에게 암살당하고 모든 가족이 처형되는 비극을 맞이하고 말았다. 뒤이어 집권한 클라우디우스는 발칸반도를 유린하던 고트족을 나이수스 전투에서 대파하여 고티쿠스라는 칭호를 원로원으로부터 하사받았으나, 전염병에 걸리는 바람에 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 하고 2년만에 병사하고 말았다.

이렇듯 이전의 두 황제들이 사력을 다해 제국을 구하려 했지만 운이 따르지 않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는데, 아우렐리아누스 본인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사실 그도 클라우디우스의 친동생 퀸틸루스가 원로원의 추대를 받고 황위에 오르는 것에 불복하여 반란을 일으킨 전력이 있었으니, 조금만 삐끗해도 딴 마음을 먹은 장군이 들고 일어나 목에 칼을 겨눌 수 있었다. 어지간한 명군이라 해도, 이 정도로 암울한 상황을 감당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위기를 극복하고 파탄 국가였던 로마 제국을 정상화시켰다. 제국의 영역을 침탈하여 약탈을 자행하던 수많은 게르만족을 몰아냈고, 다키아 속주에서 철수하여 전선을 안정시키고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건설해 로마 시민들을 보호했으며,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을 도로 로마에 귀속시켰으며,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부정부패를 뿌리뽑았고, 화폐 개혁과 경제 개혁을 착실하게 시행해 바닥을 드러내던 국고를 채우고 피폐해졌던 경제를 되살렸다. 아울러 무적의 태양신 숭배 의식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제국의 단합을 도모하였고, 절대군주제를 정식으로 도입하여 훗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시행하는 도미나투스 체제의 기틀을 닦았다. 그는 이 모든 위업을 단 5년 만에 달성했다.

물론 그에게 운이 따르기도 했다. 갈리아 제국은 포스투무스 암살 이래로 황제가 잇달아 교체되고 반란이 빗발쳐서 이탈리아로 쳐들어갈 여력이 없었고, 게르만족은 오랫동안 침략 전쟁을 벌이느라 전력이 많이 손실되었으며, 팔미라 제국은 사산 왕조가 명군 샤푸르 1세의 붕어 후 혼란에 빠진 터라 제대로 된 구원을 받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갈리에누스 때보다 상대적으로 약해진 적을 상대할 수 있었다. 또한 갈리에누스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수많은 불운에도 굴하지 않고 반전을 꾀할 포석을 마련해둔 덕분에, 그는 이전 시대보다 강해진 군대를 이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찰나의 실책으로 나락에 떨어질 수 있는, 극도로 위험한 상황을 5년만에 극복한 건 분명 위대한 업적이었다.

만약 아우렐리아누스가 도중에 암살당하지 않고 사산 왕조와 전쟁을 벌였다면, 사산 왕조는 필시 참패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아우렐리아누스의 군사적 역량은 역대 로마 황제 중 최상위라 할만 했고, 사산 왕조 내부도 샤푸르 1세가 270년 사망한 뒤 호르미즈드 1세 (270년 ~ 271년), 바흐람 1세 (271년 ~ 274년), 바흐람 2세 (274년 ~ 293년)가 짧은 시기에 잇따라 재위하면서 혼란스러웠기에 아우렐리아누스를 상대로 전력을 다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가 사산 왕조를 멸망시킬 수 있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최소한 심대한 타격을 입혀서 향후 수십년간 로마 제국에 적대 행위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사망한지 7년만에 등극한 카루스 황제는 내분과 동방의 적 사이에 끼여 신음하던 사산 왕조를 어렵지 않게 격퇴하고 크테시폰을 점령한 바 있다. 그의 예상치 못 한 최후는 실로 로마 제국의 불행이었다.

다만 그도 사람인만큼 몇 가지 실책을 저질렀다. 화폐 개혁은 분명 반드시 해야 하는 과제였지만, 기존의 동전을 모조리 회수하고 최소한 5%의 을 함유한 새 동전만 유통시키도록 한 정책은 사람들이 동전을 믿지 못 하게 하는 역효과를 야기하여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였다. 또한 아우렐리아누스는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한다는 신념 하에 수많은 이를 인정사정 보지 않고 처벌하였는데, 설령 자신과 가까운 사이라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처단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간통 또는 부정부패 등의 혐의로 처단되었고, 감옥은 수감자로 꽉 찼다. 이러한 엄벌주의는 문란하던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그의 주변인들이 혹시라도 꼬투리를 잡혀 엄벌에 처해질까 불안감에 떨게 하였다. 급기야 비서 에로스의 농간에 속아 넘어간 관료들의 암살극으로 뜻을 다 이루지 못 하였고, 그로 인해 끝날 줄 알았던 군인 황제 시대는 10여 년간 이어졌다.

4. 여담

  • 프랑스 도시 오를레앙을 사실상 건설한 황제다. 오를레앙의 본래 이름은 케나붐인데, 이 도시는 갈리아에서 곡물 수송과 상업으로 번창했다. 그러나 3세기 당시 갈리아의 여느 도시들처럼 내전과 이민족들의 침공으로 초토화되고 방치됐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273년부터 재건을 명해, 274년 방어시설을 갖춘 신도시로 바꿨다. 이때 로마인들은 케나붐을 아우렐리아눔으로 개명해 아우렐리아누스의 업적을 기렸다고 한다.
  • 시오노 나나미 역시 로마인 이야기에서 아우렐리아누스를 높이 평가했다. 프로부스와 더불어 발레리아누스에 의해 발탁된 유능한 인재로 묘사되는데, 그 2명 중에서도 명분에 쫓겨서 전대 황제들의 이름으로 개명을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아닌, 자신의 능력을 믿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스타일이라고 평가했다.
  • 2017년 11월 발매된 토탈 워: 로마 2의 DLC 분열된 제국에서 주인공 팩션인 로마의 황제로서 등장한다. 황금색 가면을 쓰고 나온다. 그래서 다른 시리즈인 토탈 워: 워해머의 전설 군주인 발타자르 겔트가 이세계인 고대 로마에 강림했다는 드립이 흥했으며 제작진도 그것을 의도한 듯 분열된 제국의 업적에 Loremaster[23]라는 업적을 만들어놓았다.

    그에 대한 게임 내 전용 스토리 이벤트들이 나오는데, 허세로 충만해 있어서 큰 웃음을 선사한다. 특유의 태양신 마스크를 쓰고 한여름날 사열을 하는데 "얼굴 밑이 가려워서 미칠 것 같다. 근위대장이 괜찮냐고 묻는데 어떻게 할까?"하는 딜레마가 뜨질 않나... 시원하게 헬멧 벗고 긁기, 농담으로 무마하기, 굳건한 의지로 참아내기(...) 등의 선택지가 있으며 능력치 증감까지 있다.[24] 굳건한 의지로 참아내기를 선택하면 이 바보는 가려움 하나 참아냈다는 데 자신의 불굴의 의지력을 과시하고 더할 나위 없는 뿌듯함을 느끼며 zeal 능력치가 올라간다(...).

    대체역사적인 것도 있는데, 바로 겁에 질려 그를 암살한 비서 에로스를 적발해내는 이벤트이다. 그만 조용히 죽여서 시체를 처리하거나 가차 없이 잔인하게 공개처형할 수도 있지만, "내가 그깟 것 가지고 너를 잔인하게 대할 사람 같으냐! 살려줄테니 가서 일 보거라."하면서 관대하게 사면할 수도 있다. 그가 비통하게 죽은 데 대한 제작진의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이벤트다.
  • 문피아에서 연재 중인 대체역사물《로마 인빅투스》에서 암살당한 아우렐리아누스가 아폴론의 힘으로 제4차 십자군으로 무너진 13세기 제국의 그리스 지역에 회귀하여[25] 4차 십자군을 격파하고 제위에 올라 다시금 무너진 제국을 재건하고 있다. 특히 본인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 그리스 로마 다신교도인지라 원역사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 소멸한지 오래던 그리스 로마 다신교가 '델피파'라는 이름으로 다시 재건되기도 한다.[26]
  • 한국에서는 로마사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여전히 인지도가 바닥이지만, 로마사 덕후들이 많은 해외에서는 나름 인지도와 인기가 탄탄한 황제이다. 아우렐리아누스를 다룬 유튜브 영상의 댓글은 항상 그의 놀라운 업적을 찬양하는 댓글뿐이다.

[1]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두상이라는 말도 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확실한 조각상을 남기지 못했다.[2] 271년 반달족알레만니족을 격파한 뒤 원로원으로부터 수여된 칭호.[3] 272년 고트족을 격파한 뒤 원로원으로부터 수여된 칭호.[4] 영어로는 restorer, 일본어로는 修復者(수복자)로 번역된다. 영토 탈환에 쓰이는 표현인 收復과는 다르다.[5] 272~273년 팔미라 제국을 무너뜨리고 이집트를 평정한 뒤 원로원으로부터 수여된 칭호.[6] 274년 갈리아 제국을 무너뜨리면서 로마 제국의 재통합을 달성한 뒤 원로원으로부터 수여된 칭호.[7] 안티오키아누스는 이 직을 아우렐리아누스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제대로 수행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음모를 꾸미지 않고, 무기력해진 원로원을 잘 이끌었다. 따라서 아우렐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누스에게 황제 대리인 자격을 추가로 부여하고 271년, 272년, 274년에 걸쳐 수도 장관을 계속 맡게 했다.[8] 로마 제국은 전근대 국가들이 보통 그렇듯 장기적인 전략이 부재했고 관료제가 매우 부실했기 때문에 지속성이 떨어졌다.[9]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다시 전부 또는 일부 회복됐다가(콘스탄티누스의 고트족과 사르마티아 원정) 최종적으로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때 포기된 것으로 본다. 4세기에 만들어진 방책들이 발견되기 때문.[10] 지금의 앙카라[11] 반란자들은 처음에는 메소포타미아 총독 마르켈리누스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지만, 마르켈리누스가 이 사실을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알리자 안티오쿠스를 황제로 내세웠다.[12] 참고로 고대와 중세 전쟁에서 흔히 일컫는 약탈이란 단순히 물건을 빼앗는 정도가 아니라, 군사들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서 주민들을 상대로 마구잡이로 학살과 방화를 저지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대 그리스의 전쟁을 다룬 문헌인 일리아스오디세이아를 읽어보면, 고대 전쟁의 약탈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자비했는지가 생생히 묘사된다.[13] 현재의 리옹[14] 무적의 태양신[15] 태어나신 (神)이시자 주인님.[16] 일부 자료에서는 7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17] 일부 후대의 사회주의자들은 이 조치가 국가 사회주의 경제구축의 실현이라고 말하나, 하이켈하임, 벌리 등은 근대 이후 등장한 정치, 사회, 경제 개념과 거리가 먼 방법일 뿐이라고 단언하고 있다.[18] 오늘날 독일 님부[19] 지금의 터키 촐루.[20] 다만, 딸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21] 트라야누스 황제의 씨족명(성씨)인 울피아누스는 다키아 일대 로마인들이 많이 사용했고, 세베루스라는 성씨와 여성형인 세베리나 역시 로마 제국 안에서 흔한 성씨와 이름 중 하나였다.[22] 군인 황제 시대 자체가 집권자가 지나치게 자주 바뀌고 사료도 부족하다 보니 일관성 있는 정리가 힘들고, 다른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23] 워해머에서 나오는 용어로 호에스의 백색탑에서 마법을 익혀 마법에 능통한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당연히 로마와는 일절 관련이 없는 아우렐리아누스=겔트라는 일종의 드립... 달성조건은 모든 영웅 팩션으로(로마 제국, 팔미라 제국, 갈리아 제국, 사산 제국, 고트) 한번씩 영웅 이벤트를 완료하면 된다.[24] 근위대장에게 거꾸로 화를 내는 쪼잔한 선택지도 있는데, 자세히 보면 깨알같이 이 근위대장 이름이 그를 암살한 무카포르라고 쓰여 있다.[25] 빙의한 인물이 없이 20대의 본인 몸으로 왔기에 타임슬립으로도 볼 수 있다. 단 종전의 타임슬립 대체역사물들이 대체적으로 미래에서 과거로 슬립하는 것이라면 여기서는 과거에서 미래로 타임슬립을 했다는 것이 특이요소.[26] 그렇다고 "가톨릭정교회로 대표되는 기독교가 탄압당하고 있냐?"면 그건 아니다. 소설 세계상의 로마 제국은 아우렐리아누스가 제위에 올랐음에도 정교회를 국교로 유지하고 있으며 기독교를 비롯해서 카타리파, 보고밀파 등의 기독교 이단, 이슬람, 마니교, 유대교와 같은 그리스 로마 다신교 외의 이교도들도 종교적 다원주의와 제국내의 사람은 모두 로마 시민이라는 이념을 기반으로 포용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