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03 09:41:22

샤푸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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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2대 샤한샤
𐭱𐭧𐭯𐭥𐭧𐭥𐭩 | 샤푸르 1세
파일:샤푸르 1세.jpg
이란 카제룬의 샤푸르 동굴에 위치한 샤푸르 1세 동상
제호 한국어 샤푸르 1세
중기 페르시아어 𐭱𐭧𐭯𐭥𐭧𐭥𐭩
영어 Shapur I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270년
재위 기간 240년~270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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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제2대 샤한샤. 로마 황제를 포로로 잡아들이고 굴복시킨 샤한샤이며 페르시아의 부흥을 일궈낸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2. 생애

'샤푸르'는 고대 이란어 푸에라(puθra: 왕의 아들)에서 유래했다. 처음에는 칭호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서기 2세기 말에는 개인의 이름이 되었다. 사산 왕조의 초대 샤한샤 아르다시르 1세와 미로드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파르티아에 대항한 부친의 원정에 참여하였다. 그에게는 적어도 두 명의 형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르다시르 1세가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로부터 왕관을 수여받는 부조에 샤푸르와 다른 두 왕자들이 뒤에서 지켜보는 장면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다시르는 샤푸르를 "가장 온화하고, 현명하고, 용감하고, 재능이 넘치는 아들"로 여기고 유력인사들의 모임에서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한다.

230년 부친의 지시에 따라 메소포티마아를 침공해 로마군에 타격을 입혔으며, 이후 몇년간 로마의 중요한 도시들을 점령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의 전쟁 때도 부친과 함께 활약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쾰른 마니교 사본에 따르면, 아르다시르는 마니 24년(240년) 샤푸르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은퇴했다고 한다. 아르다시르 1세 말기에 주조된 동전에서도 벽화 왕관을 쓴 두 명의 수행자가 옆에 있는 제단에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242년 고르디아누스 3세는 안티오키아에서 원로원에 페르시아 왕"들"의 위협을 제거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근거들을 볼 때, 샤푸르는 아르다시르 1세의 치세 말기에 부친과 함께 샤한샤를 역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샤푸르는 수사 부근에 군데샤푸르(Gundeshapur)라는 대도시를 건설했으며, 그 안에 의사들을 전문적으로 길러내는 교육 병원을 세웠다. 또한 카른 강을 막아서 농경용 수리 공사를 완성하였다. 이는 페르시아 관개농업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고 여러 비문에 자신을 'mzdysn(마즈다 숭배자)'라고 지칭하였다, 하지만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가 궁정에서 자리를 잡고 백성들을 상대로 포교 활동을 벌이는 걸 허용했으며,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어 유대교 회당과 교회를 짓는 걸 허용했다. 마니교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마니는 242년 유일한 저작을 샤푸르에게 바쳐서 개종시키려 했지만, 샤푸르는 계속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했다고 한다.

이렇듯 내치에 힘쓰는 한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케메네스 왕조의 완벽한 부활을 위한 전쟁을 전개했다. 그는 먼저 카스피 해안의 갈란 인들을 정벌하고, 차남 바흐람(훗날 바흐람 1세)를 그들의 왕으로 삼았다. 이후 아버지 사망 후 조공을 바치지 않는 쿠샨족을 정벌하여 대부분의 영토를 빼았고, 아들 나르세스(훗날 나르세스 1세)를 사카스의 왕으로 삼았다. 그는 비문에서 자신의 제국이 페샤와르(Peshawar)까지 이르면서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동방 영토를 전부 탈환했다고 선포했다.

242년, 샤푸르는 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단행했다. 그는 로마의 동방 영토인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여러 도시를 함락시키고 안티오키아를 위협했다. 그러나 고르디아누스 3세가 장인이자 근위대장 티메시테우스와 함께 반격에 나서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242년, 로마군은 잃어버린 영토를 전부 탈환하고 레세나 전투에서 샤푸르를 격파했다. 고르디아누스는 원로원에 서한을 보내 "우리는 니시비스까지 침투하였으며, 곧 크테시폰까지 도달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런데 243년, 티메시테우스는 돌연 사망했다. 이질 때문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향간에서는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믿었던 장인의 허망한 사망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후임 근위대장으로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세우고 244년 2월 원정을 지속했다. 이후의 전개는 양측의 기록이 판이하게 다르다. 로마측 기록에 따르면, 필리푸스가 병사들을 선동하여 고르디아누스를 암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산 왕조측 비문에 따르면, 크테시폰을 사이에 두고 격전이 벌어졌는데, 로마군은 참패했고 고르디아누스는 낙마 후 전사했다고 한다.

로마군은 키르케시움 인근으로 후퇴한 뒤 필리푸스를 새 황제로 세웠다. 그는 어서 로마로 돌아가서 원로원의 승인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샤푸르와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로마군이 점령한 영토를 페르시아에게 돌려주고 아르메니아가 페르시아의 영향권 내에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또한 그는 금화 50만 데나리우스를 페르시아에게 배상금 명목으로 바치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필리푸스는 나중에 조약을 파기하고 아르메니아가 계속 로마의 영도하에 있도록 하였다. 이에 샤푸르는 아르메니아를 전격 침공해 타격을 입혔다. 당시 로마는 필리푸스가 배상금 지불을 위해 부과한 막대한 세금에 반발한 동방 주민들이 마르쿠스 요타피아누스의 지휘로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샤푸르를 막을 여력이 없었다.

250년, 샤푸르는 메소포타미아를 재차 침략하였고, 안티오키아의 사제 마리아데스채리엇 부대를 육성하기 위해 적립한 공금을 횡령했다가 추방된 뒤 자신을 찾아와서 안티오키아를 바치겠다고 제안하자, 즉시 군대를 일으켜 야밤을 틈타 안티오키아를 공략하고 약탈하고 불태웠다. 하지만 그는 마리아데스가 조국을 배신했다며 참수했다. 253년 바르바리소스를 기습하여 그곳에 주둔한 로마 군단을 섬멸했다. 사산 왕조측 기록에는 이때 로마군 6만 명이 섬멸되었다고 기술했지만, 역사학계는 이를 과장으로 보고 있다. 이후 로마의 시리아 속주와 그 주변 속국들을 파괴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254년, 샤푸르는 재차 침략을 개시했지만 우라니우스 안토니누스가 페르시아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우라니우스는 황제를 자칭하고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동전을 주조했다가 발레리아누스에게 토벌되었다.

258년, 샤푸르 1세는 아르메니아를 공략할 야심을 품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방비가 워낙 굳건하고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 제국의 견제도 심한 상황에서 무력으로는 공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호스로프 2세의 친척인 아낙에게 "왕을 시해하면 그의 지위와 재산을 그대가 갖는 걸 용인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아낙은 이를 받아들여 바그하르샤파트에서 호스로프 2세와 그의 아내를 살해했다.

아르메니아 귀족들은 이에 분노하여 아낙과 일가족을 몰살시켰다. 아낙의 어린 아들 그레고리만이 보모 소피아와 예브타그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하여 카파도키아의 카이세리아로 피신했다. 그 후 그는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훗날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는데 크게 기여해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샤푸르 1세는 호스로프 2세의 암살로 혼란에 빠진 아르메니아를 전격 침공해 별다른 저항 없이 공략하고 아들 호르미즈드 1세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혔다. 호스로프 2세의 아들 티리다테스 3세는 추종자들과 함께 로마로 망명했다. 아르메니아가 정복되자 조지아 역시 사산 왕조에게 굴복하고, 페르시아 관리의 감독하에 들어갔다.

발레리아누스는 그런 그에 맞서 시리아 속주 내에서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여러 전투를 벌였다. 257년, 그는 안티오키아를 탈환하고 시리아 속주를 로마의 지배하에 돌려놨다. 그는 원로원에게 승전보를 보냈고, 원로원은 '세계의 복구자'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파일:낙쉐 로스탐 샤푸르 1세와 무릎 꿇은 발레리아누스 황제.jpg
포로로 잡힌 발레리아누스 앞의 샤푸르 1세를 새긴 부조[1]

그러나 260년 초여름, 에데사에 집결한 로마군은 전염병의 창궐로 병력이 격감했고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졌다. 이때 샤푸르가 대군을 이끌고 에데사를 포위했다. 발레리아누스와 고위 참모들은 협상을 통해 군대를 빼내려 했고, 샤푸르가 소수의 수행원만 동반해 직접 대면하길 요구했다. 발레리아누스는 요구에 따라 소수의 수행원과 병사만 데리고 나섰다가 그대로 포박되었다.(에데사 전투) 사산 왕조가 낙쉐 로스탐에 세운 비문은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가 카르헤와 에데사를 포위하고 있을 때 발레리아누스 카이사르가 우리를 공격했고, 그와 함께 고트족과 게르만족에서 온 군대가 있었다. 그리고 카르헤와 에데사의 서쪽에서 발레리아누스 카이사르와 함께 대전투가 벌어졌다. 우리는 발레리아누스 카이사르와 이 군대의 지휘관인 근위대장(수케시아누스), 원로원 의원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장교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 페르시스로 끌고 갔다. 우리는 불을 지르고 황폐화시켰다. 시리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를 정복하고 로마인들을 포로로 잡았다. 우리는 로마제국, 즉 이란이 아닌 땅에서 온 사람들과 전리품을 가지고 떠났다. 우리는 그들을 페르시아, 파르티아, 우제스탄, 슈소리스탄에 정착시켰다.

4세기 이후 역사서 기록(특히 초기 기독교도 저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포로가 되어 지방 곳곳에 끌려 다니며 샤푸르 1세의 승리를 입증하는 살아있는 증거로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고 그 후로도 샤푸르 1세가 말에 올라탈 때마다 인간 발판이 되었다고 한다. 발레리아누스는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고 페르시아에서 사망했다. 기독교측 사료에 따르면, 발레리아누스는 사망 후 가죽이 벗겨져 그 속은 지푸라기가 채워지고 박제 인형이 되어 샤푸르 1세의 대승을 기념하는 증거로서 신전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전혀 아니며 샤푸르가 발레리아누스를 정중하게 대우해줬을 거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샤푸르는 발레리아누스를 사로잡은 뒤 시리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를 휩쓸고, 36개 도시를 모조리 파괴한 후 막대한 포로와 전리품을 끌고 크테시폰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팔미라의 지도자 오다에나투스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의 휘하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출진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던 적에게 타격을 입히고 많은 포로를 구출하였다. 그 후 마크리아누스는 두 아들 소 마크리아누스퀴에투스를 황제로 세우며 반란을 일으켰지만, 갈리에누스 황제가 파견한 아우레올루스에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갈리에누스는 동방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반란에 가담했던 오다에나투스를 사면하고, 그를 동방 총독에 임명했다. 오다에나투스는 갈리에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동방지역에서 여전히 갈리에누스에게 적대하는 반란군을 토벌했다.

그 다음에 오다에나투스는 사산 왕조를 공격했는데 샤푸르는 이에 맞서 싸웠으나 역으로 로마군에게 패하였다. 오다에나투스의 로마군은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했고, 샤푸르가 로마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모든 영토를 탈환했다. 264년, 오다에나투스는 크테시폰에 이르러 포위하였지만, 사산 왕조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데다 고트족이 소아시아 해안지대를 습격하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이후 샤푸르는 로마 제국을 상대로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2], 팔미라 제국을 건국한 제노비아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로마와의 전쟁을 일단락시킨 샤푸르는 말년에 가면 내치에 힘썻는데 로마군 포로들 중 장인들과 숙련된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페르시아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3] 270년 5월, 샤푸르는 비사푸르에서 병사한다. 사후 장남 호르미즈드 1세가 새 샤한샤로 등극했다.


[1] 이란 쉬라즈 근처의 나크쉐 루스탐 유적에 있는 다리우스 1세의 무덤 바로 옆에 새겨져 있다.[2] 애초부터 로마와 사산 왕조간의 국력 차이가 크기 때문에 장기전을 벌이면 사산 왕조에게 불리하다.[3] 물론 전쟁 안한건 아니고 쿠샨제국을 조져서 박트리아, 토하리스탄을 접수하고 페샤와르도 겸사겸사 접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