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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알레포 고대 도시 مدينة حلب القديمة | 2006년 기사의 성채와 살라딘 요새 قلعة الفرسان وقلعة صلاح الدين | 2011년 북시리아의 고대 마을 القرى القديمة في شمال سوريا |
상징적인 대열주 거리
바알 (벨) 신전과 대열주. 뒤로 지명의 유래인 오아시스의 종려나무 (대추야자) 숲이 보인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000> | 유네스코 세계유산 UNESCO World Heritage | |
|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2013~ )[1] | |||
|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 한국어 | 팔미라 유적 | |
| 아랍어 | موقع تدمر | ||
| 영어 | Site of Palmyra | ||
| 프랑스어 | Site de Palmyre | ||
| 국가·위치 | 홈스 타드모르 |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 지정번호 | 23 | ||
| 등재연도 | 1980년[2] | ||
| 등재기준 | (ⅰ)[3], (ⅱ)[4], (ⅳ)[5] | }}} | |
1. 개요
- 팔미라어: 𐡕𐡃𐡌𐡅𐡓 (타드모르)
- 아람어: ܬܕܡܘܪܬܐ (테드무르타)
- 고전 그리스어: Παλμύρα (팔미라)
- 아랍어: تَدْمُر (타드무르)
- 라틴어: Palmyra
- 프랑스어: Palmyre (팔미흐)
시리아 홈스 주에 위치한 고대 오아시스 도시.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에서 북동쪽으로 214km 떨어진 시리아 사막 한복판의 오아시스에 위치하고 있다. 팔미라는 북쪽으로는 산맥을 등지고 동쪽과 남쪽은 사막이 펼쳐진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인구는 약 5만명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수니파 무슬림이고, 소수의 시리아 가톨릭 기독교도가 있어 성당도 한 곳 있다.
실크로드에 위치한 중계도시 중 하나였는데, 20세기 초엽 이곳에서 발견된 한금[6]이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실크로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계속된 연구로 단순히 중국산 비단같은 동서양의 사치재 중계 무역만 했던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비단, 울, 면직물 같은 원단류도 생산하고, 대추야자 같은 관개농업도 어느 정도 이루어졌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고대 팔미라어/현재 아랍어의 지명은 각각 '타드모르'와 '타드무르'[7]로 와디와 오아시스 덕분에 관개농업이 발달하여 발굴된 유물로 추정하면 신석기 시대부터 군락을 이루며 산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고대 시기 번영하던 도시는 273년 로마 제국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점차 재건되어 중세 이슬람 제국기에도 번성했다. 10-12세기 부침을 겪던 도시는 군사적 요충지로 일정 규모를 회복해 현재에 이른다.
조금씩 변동은 있었지만 2천년 이상 현재의 유적지 (중세 들어서는 바알 신전 일대)가 시가지였으나 1929-32년에 유적 동북쪽의 현 시가지로 이전되었다. 역사적 가치 외에 근처에 유전도 있어 전략적 가치도 있다. 198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유적지는 2010년대 시리아 내전을 거치며 일부가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고, 현재 복원이 진행 중이다.
2. 역사
로마 시대의 대열주와 뒤에 보이는 중세 성채
고대 유적 중 가장 유명한 개선문
실질적으로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청동기 시대로서 이미 아시리아 때부터 지중해 쪽으로 나가기 위한 무역의 중계 도시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이는 에마르에서 발견된 점토에서도 '2명의 타드모르인을 증인으로 삼았다'라는 기록과 아시리아의 왕 티그라트- 필레세르1세가 '타드모르의 아람인을 복속시켰다'라는 기록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현지인들의 무역 거래장에 불과했던 팔미라는 헬레니즘 제국 시절인 기원전 217년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치하에 들어가면서 역시 이 도시의 지리적 이점을 보고 그리스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현재 팔미라 유적지인 벨 신전, '무덤의 계곡'에 건설된 묘탑 등이 건설된 것도 이 시기의 건축뿐 아니라 신앙적인 면에서도 시리아의 토착적인 문화와 그리스 문화로 대표되는 헬레니즘 문화가 결합한 독특한 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기원전 62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가 셀레우코스 왕조를 병합하면서 시리아 속주를 만들었지만, 팔미라는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며 여전히 정치적으로 독립된 하나의 지역으로서 남게 되었다. 기원전 41년 두 세력 사이에서 물타기를 하는 팔미라에 대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기사들에게 이익을 나누어 주기 위해' 이 도시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미 그가 온다는 소식을 알고있던 시민들은 전 재산을 싸들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파르티아로 도망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안토니우스를 맞이한 것은 아무것도 안 남은 텅 빈 도시뿐이었고, 결국 빈손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2.1. 로마 제국령 시리아
팔미라의 상징인 대열주
로마 시대 극장 유적
서기 1세기 티베리우스 대에 이르러서야 시리아 속주의 도시로서 로마 제국에 편입이 된다.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로마의 영향력은 적었지만 파르티아와 친선을 맺으려던 게르마니쿠스가 이 지역 인사를 사절단으로 보내고 로마의 제10프레텐시스 군단이 들어오고 세금 징수원들이 거주하게 되는 등 차츰 로마의 도시로 바뀌게 된다. 로마의 지배로 인해 이 지역은 점점 안정되면서 일대의 무역을 지배해 나갔으며, 특히 로마의 페트라 정복 이후에는 아라비아 반도의 무역 루트가 전부 팔미라 쪽으로 바뀌게 되면서 급성장을 하게 된다.
서기 129년에 로마 제국의 전역을 돌고 있던 하드리아누스가 이 도시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하드리아네 팔미라'로 불리며 자유도시로 선포되었으며, 이때 그리스 문화들이 대거 확산되었다. 카라칼라에 이르러서는 식민시로 또 다시 승격하게 된다. 이는 로마와 파르티아 간의 전쟁, 그리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대상들을 습격하는 비적들의 증가에 따라 팔미라가 자체적으로 군대를 키우기 시작함으로써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로마 제국의 동쪽 국경을 담당하는 일부로서 그 중요도가 엄청나게 증가하게 되었다.
3세기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 혼란과 사산 왕조의 증흥으로 팔미라의 무역로는 위협을 받기 시작한다. 샤푸르 1세가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붙잡은 기세를 몰아 팔미라까지 공격했지만 당시 팔미라의 지배자였던 오다에나투스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저항했으며 결국 샤푸르는 철수를 하게 되었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 황제 갈리에누스를 지지하며 이러한 공적을 인정 받아 오다에나투스는 갈리에누스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동방 속주의 방위까지 담당하게 된다.
2.2. 팔미라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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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팔미라 제국#|]] 부분을 참고하십시오.파일:팔미라 대신전.jpg
페르시아 양식이 가미된 바알 신전
낙타를 끌고 있는 팔미라 상인들의 부조
샤푸르 1세를 격퇴한 오다에나투스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을 받아 '동방의 수호자'라는 호칭을 얻고 스스로 팔미라 왕에 오른다. 그러던 와중 262년 아나톨리아 원정이 끝난 후 오다에나투스는 그의 첫째 아들이자 공동 통치자인 하이란 1세와 함께 암살당하게 되고 이후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제노비아가 아들 바발라투스를 왕위에 올리고 섭정으로서 팔미라를 통치하게 된다. 제노비아는 여전히 (269년의 전쟁 등) 사산 왕조에게서 국경을 방어하고 하우란의 타누크 부족을 견제하며 오데에나투스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던 270년 초에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가 사망한 후 로마 제국이 내전에 돌입하자 제노비아는 타누크 부족을 토벌한다는 명목 하에 거병하여 돌연 아라비아 속주를 정복했고, 10월에는 이집트까지 침공해 정복하여 파라오 칭호까지 얻었다.
271년 팔미라 군대는 아나톨리아까지 침공해 앙카라까지 진격했고, 사실상 로마 제국의 동방 대부분을 통치했다. 그러면서도 로마 제국 통합을 시도하던 황제 아우렐리아누스를 주화에 황제로 명시하며 대립을 최소화하려 하던 제노비아는 그해 말엽, 바발라투스를 아우구스투스 (황제)로 선포하며 자신을 아우구스타 (황후)로 칭했다. 분노한 아우렐리아누스는 272년에 아나톨리아로 진격했고, 로마 장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는 이집트를 수복했다. 안티오크 인근에서 아우렐리아누스에 패배한 제노비아는 에메사 (홈스)를 거쳐 팔미라로 철수했고, 로마 군은 도시를 포위했다. 직접 성을 나와 항복하라는 제안을 거부한 채로 버티던 제노비아는 바발라투스와 빠른 낙타에 올라 사산 왕조에 군사 원조를 청하기 위해 도시를 빠져나왔으나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사로잡혔다.
이에 도시 수비를 맡았던 장군 자브다스가 로마에 항복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막대한 양의 황금과 무기, 말, 낙타, 비단, 보석을 헌납하는 조건으로 도시를 약탈하지 않았다. 또한 제노비아와 바발라투스를 잡아가고 자브다스 등의 관료들만을 처형하는 선에서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아우렐리아누스가 떠난 후 273년에 셉티미우스 압사이오스의 주도 하에 봉기하여 그가 남겨둔 6백의 로마 궁병들을 죽이고 제노비아의 어린 아들 셉티미우스 안티오쿠스 황제로 옹립했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로 돌아와 재차 도시를 함락했고, 이번에는 3일간 약탈을 허용했다. 바알 신전도 약탈되었고, 주민들은 학살되었으며 여러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에서의 가장 값비싼 전리품으로 자신의 태양신 신전을 장식했다. 따라서 번영하던 팔미라는 폐허가 되어 쇠퇴했다.
2.3. 중세
로마 군단 기지인 디오클레티아누스 병영
병영을 두른 성벽
파괴된 후 팔미라는 북부 시가지 위주로 일부 재건되었고, 아우렐리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에 조성된 서부의 군단 기지에 성벽이 둘러져 제1 일리리쿰 군단이 주둔하는 군사 거점으로 이어졌다. 비록 도시는 이전처럼 번성하지 못했지만 시리아와 이라크를 잇는 무역로가 지나는 중요한 무역 거점이었고, 4세기에는 기독교가 전래되었다. 527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라흠 왕국의 공격에 맞서 팔미라의 성벽을 보강하고 성당 등 공공 건물들을 복구하게 했다. 도시는 634년 이슬람 제국군 사령관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포위 끝에 항복했다.[8] 이슬람 제국 시기 팔미라는 셈계 지명인 '타드무르'로 불리게 되었고, 홈스 (힘스) 군관구에 편성되었다. 우마이야 왕조 들어 안정을 되찾은 도시는 동서 교역과 큰 시장이 열리며 번성했고, 바알 신전의 일부는 모스크로 전환되었다.
2.3.1. 바누 칼브의 거점
한편 이슬람 정복 이후부터 타드무르는 우마이야 왕조의 친위 베두인 세력인 바누 칼브가 정착해 그 중심 거점 중 하나였다. 2차 피트나 시기 우마이야 왕조가 존망을 다툴 때에도 칼리파 마르완 1세가 처음으로 칼리파위를 주장한 곳 역시 타드무르였다. 3차 피트나 시인 744년에는 칼리파 이브라힘 이븐 알 왈리드와 그의 사촌 술라이만 빈 히샴이 새로 칼리파에 즉위한 마르완 2세를 피해 타드무르로 피신했다가 결국 후자의 관용에 항복했다. 다만 745년 술라이만은 킨나스린에서 재차 반란을 일으켰고, 이번에도 마르완 2세에 패하여 타드무르를 거쳐 이라크로 도주했으나 결국 토벌되었다. 계속해서 마르완 2세에 저항하던 타드무르 주민들도 같은해 칼브 부족장 알 아스바그 빈 둘라아가 항복하자 뒤따라 항복했고, 마르완 2세는 다른 시리아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타드무르의 성벽을 허물었다. 마르완 2세가 살해되며 압바스 왕조가 세워진 후에도 친우마이야 성향이 강하던 타드무르 주민들은 무아위야 2세의 조카 아부 무함마드 지야드가 750년에 반란을 일으킨 후 피신해오자 수용했다. 압바스 군대의 포위에 맞서던 주민들은 지야드가 도피한 후에야 항복했다. 압바스 시기에 시리아의 경제력이 쇠퇴하고 해상 교역이 활성화되며 타드무르는 9세기 들어 중요성을 잃고 쇠퇴했다. 955년 알레포 함단 왕조의 사이프 앗 다울라가 인근 베두인들을 격파한 후 바위 산 위에 요새를 세워 베두인들과 시리아 북부를 노리는 동로마 제국을 견제했다. 10세기 후반 파티마 왕조 하에서도 팔미라 오아시스에서 곡물 등 세금을 거두며 유지로 이어지던 바누 칼브는 10세기 말엽 일대를 떠나 다마스쿠스, 베카 협곡, 하우란 등지로 이주했다. 이로써 도시의 인구는 더 줄었다.2.3.2. 10-12세기의 쇠퇴
로마 시대 병영 유적과 요새
산 위의 시르쿠 (이븐 마안) 요새
여기에 1068년, 1089년에 지진으로 타드무르는 파괴되며 더욱 쇠락했다. 1082년 홈스를 장악한 아랍 군벌 칼라프 빈 물라이브는 살라미야, 타드무르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나 1090년 셀주크 제국의 술탄 말리크샤 1세에 의해 사로잡혀 투옥되었다. 12세기 들어 얼마 남지 않은 주민들은 공동화되던 시가지를 포기하고 바알 신전 일대를 요새화하고 들어가 거주했다. 십자군 전쟁기 타드무르는 다마스쿠스를 지배하는 부리 왕조에 속했고, 아타베그 (섭정 군주) 툭테긴은 자신의 조카를 타드무르 태수에 봉했다. 다만 얼마 뒤 후자는 반란으로 살해되었지만, 1126년 툭테긴은 도시를 수복한 후 손자 쉬하브 앗 딘 마흐무드를 봉했다. 1128년 후자는 부친 부리가 아미르가 되자 함께 다마스쿠스로 향했고, 유수프 빈 피루즈가 타드무르 태수가 되었다. 1132년 바알 신전은 성채로써 더욱 요새화되었다.
1135년 부리 왕조는 홈스의 빈 카라자 가문을 타드무르로 옮겨 지배권을 주고 도시를 지키게 했다. 12세기 중반 장기 왕조 시기에도 일대는 홈스 주에 속했고, 1168년 누르 앗 딘 마흐무드는 부관 시르쿠를 타드무르에 봉했다가 이듬해 후자가 사망하자 다시 직할령으로 삼았다. 1174년 시리아 대부분을 정복한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 딘 유수프는 이듬해 시르쿠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촌인 나시르 앗 딘 무함마드에게 홈스, 타드무르, 라흐바 일대를 영지로 주었다. 무함마드의 아들 알 무자히드 시르쿠 2세는 1230년 바위 산 위의 요새를 증축해 현재의 성채를 세웠다. 1235년 지리가 야쿠트 알 하마위는 타드무르 주민들이 강력한 성벽으로 둘러진 성 내에 거주한다고 기록했다. 1248년에는 시르쿠 2세의 손자 알 아슈라프 무사가 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에 홈스를 넘기고 타드무르로 물러났다.
2.3.3. 파들 가문의 거점
타드무르의 상징 중 하나인 종려나무 숲
1260년 몽골 제국의 훌라구 칸에 복속한 무사는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 군에게 패한 후 타드무르로 피신했는데, 맘루크 술탄 쿠투즈의 사면을 받고 홈스의 아미르로 복귀했다가 3년 후 자손 없이 사망하며 일대는 맘루크 왕조령이 되었다. 1281년 술탄 칼라운은 타이 부족의 일파인 알 파들 가문의 수장 이사 빈 무한나를 아미르 알 아랍 (베두인 지도자)으로 삼으며 타드무르에 봉했다. 1284년 이사가 사망한 후 계승한 아들 무한나는 1293년 술탄 알 아슈라프 칼릴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2년 후 술탄 알 아딜 키트부가에 의해 복권되었다. 1312년 무한나는 일 칸국의 올제이투 칸에게 복속을 선언했다. 이에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는 무한나를 폐하고 동생 파들을 아미르로 삼았다가, 1317년 무한나를 용서해 복권시켰다. 하지만 1320년 그가 다시 일 칸국과 연락하자 파들 가문을 축출했다. 이후 앗 나시르 무함마드는 다른 부족장 무함마드 이븐 아비 바크르를 아미르로 삼았다가 1330년 무한나를 다시 용서하고 복권시켰다. 1335년 무한나는 51년의 긴 수장 직위를 뒤로 하고 사망했다. 당대의 역사가 이븐 파달라 알 우마리는 타드무르에 대해 넓은 정원이 있고 무역이 번성하며 신기한 기념물들이 있다는 묘사를 남겼다. 파들 가문은 무역로와 도시를 베두인 습격에서 보호했고, 다른 도시들을 습격했으며 가끔 내분을 벌이기도 했다. 맘루크 당국은 종종 군사적으로 개입해 아미르를 해임, 구금, 축출하며 세력을 과시했다. 1400년 티무르의 시리아 침공 시에 아미르 누아이르는 사막으로 도주했다가 돌아와 알레포에서 술탄을 칭한 사이프 앗 딘 자캄과 맞섰다. 하지만 1406년 누아이르는 자캄에게 패해 알레포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이로써 120여 년에 걸친 파들 가문의 지배는 종식되었다.[9]
2.4. 오스만 제국
1693년 영국 레반트 회사가 유적을 답사한 후 제작한 판화
1516년 시리아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령이 된 후로도 타드무르 일대는 애매하게 남았다가 1534-35년 쉴레이만 1세의 이라크 정복 시에야 완전히 오스만 령이 되었고, 1560년경 타드무르 산작이 설치되었다. 오스만 시기 타드무르는 소금 산지로 중시되었고, 1568년에 산작베이 (총독)가 산 위의 요새를 보수했다. 이후 오스만 당국은 베카 협곡의 아랍계 하르푸쉬 부족장인 알리 빈 무사를 산작베이로 삼았으나 1584년 불복종을 이유로 해임했다. 1630년 일대는 레바논 마안 가문의 군벌 파크르 앗 딘 2세의 영향력 하에 놓였다.
파크르 앗 딘 2세는 요새를 대대적으로 증축했다. 비록 그는 1633년에 토벌당해 처형되지만, 이후로도 요새는 파크렛딘 혹은 이븐 마안 성채로 불렸다. 샴 (에얄레트) 산하에 있던 타드무르 산작은 1857년,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독립적인 조르 (데이르에조르) 산작에 흡수되었다. 1867년 시리아 총독 메흐메드 라쉬드 파샤는 타드무르에 수비대를 두어 베두인의 공격에 대비했다. 1900년 기준 인구는 약 6천명이었다. 1차 대전 말엽인 1918년 11월, 오스만 군대는 조르 산작에서 전투 없이 철수했고 12월에 헤자즈 왕국군이 진주했다.
2.5. 근현대
| 바알 신전과 바로 옆의 버려진 옛 시가지 (1935년 촬영) | 팔미라 유적에 진주한 영국군 (1941년) |
전후 타드무르 동쪽에 비행장을 세우고 주둔하던 영국군은 일대를 영국령 이라크에 포함시킬 계획도 세웠지만 결국 에드먼드 앨런비 장군은 1919년 12월에 조르 산작의 주둔군을 철수시켰다. 1920년 잠깐 파이살 1세의 시리아 아랍 왕국이 들어섰지만 프랑스의 공격으로 멸망했고, 프랑스령 시리아로 개편되었다. 프랑스 당국은 시리아 사막 지역의 관리를 위해 1921년 바알 신전 옆에 군사 기지를 설립했다. 1929년 프랑스 고고학자 앙리 세리그는 주민들을 설득해 동북쪽에 새로 세워진 시가지로 이주시켰고, 이는 1932년에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기존 시가지는 발굴 현장이 되었다. 2차 대전 들어 비시 프랑스가 설립되며 1940년부터 나치 독일이 비행장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1941년 7월 트란스요르단에서 북상한 1천의 영국군이 3백의 비시 프랑스 군과 양측 합산 2백이 넘는 전사자를 낸 격전 끝에 점령했다.
2.6. 현대
유적지를 가로질러 세워진 도로
전쟁 전의 타드무르 시가지
1946년 시리아의 독립 후 타드무르는 팔미라 유적을 기반으로 주요 관광 도시가 되어 많은 유럽인 관광객이 방문했다. 1980년 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후로는 매년 팔미라의 세계문화유산 지정 기념 축제가 열리고 있다. 관광업 외에 근처에서 천연가스가 나며, 이라크와의 송유관이 지나가는 데다 오아시스를 통한 농업까지 가능하기에 시리아 동부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발전했다. 2004년 기준 인구는 5만을 돌파했다. 한편 바트주의 시리아 시기 타드무르의 옛 프랑스 병영은 타드모르 감옥으로 개조되었고,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다. 1980년 6월, 하페즈 알 아사드에 대한 암살 기도 후 친정부 민병대가 헬기에서 난사하는 방식으로 감옥에 수감자 대부분인 1천여 명을 학살하는 사건도 벌어져 타드모르 감옥은 악명을 떨쳤고 2001년에 폐쇄되었다.
2.6.1. 시리아 내전기
내전으로 파괴된 타드무르 시가지
타드모르 감옥은 2011년 반정부 시위대를 수감하며 재차 기능했다. 뒤이은 시리아 내전 초기 반군은 오아시스 대추야자 숲에서 게릴라 전을 전개했고, 그 과정에서 바알 신전과 대열주 일부가 포탄과 수류탄에 맞아 일부 파괴되었다. 한편 도시 자체는 안정을 유지했고, 시리아 각지의 난민이 대거 유입되면서 2015년 기준으로 인구가 14만명까지 증가했다.[10] 그러나 같은해 5월, 타드무르의 시리아 정부군 일부가 이들리브 방면으로 재배치 된 틈을 타 ISIL (다에시)이 도시를 공격했다. 시리아 정부군과 2주 가량 수차례 중요 거점들을 뺏고 뺏기는 공방전을 벌인 끝에 IS는 도시를 점령했고, 양측 합산 5백여 명이 전사했으며 1백여 민간인이 살해되었다. 뒤이어 타드모르 감옥이 파괴되었다. 뒤이어 1년 가까운 기간동안 도시는 IS 치하에 있었고, 팔미라 유적은 신전들과 대열주 상당 부분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박물관에 소장 중인 여러 유물들도 우상이란 이유로 파괴되었고, 로마 시대 극장은 공개 처형장으로 쓰였다. 그러다 2016년 3월 수헤일 알 하산 대령(이후 소장)이 이끄는 6천여 시리아군이 진격, 러시아 공군의 도움과 함께 2주가 넘는 전투 끝에 타드무르와 유적지를 탈환했다. (3월 27일) 관련 기사 그 과정에서 양측 합산 8백여 명이 전사했다. 탈환 후 시리아-러시아 군인들은 유적지와 시내에 설치된 폭탄과 지뢰들을 제거했다. 하지만 2016년 12월, 시리아 군이 알레포 전투에 집중한 틈에 IS는 재차 타드무르 공세에 나섰다. 양측의 여러 장교들을 포함하여 3백여 명이 전사하는 2주 간의 격전 끝에 IS는 결국 연말에 도시와 유적을 재점령했다.관련 기사
2016년에 촬영된 대열주와 극장 일대의 항공사진.
IS는 기세를 타고 타드무르 서쪽의 티야스 공군 기지까지 공격했으나 격퇴되었고, 2017년 1월 중순 들어 시리아 정부군은 러시아 공군과 함께 타드무르 탈환전에 나섰다. IS는 과수원과 유전 일대에서 격렬히 저항했으나 2월 들어 IS의 아미르 아부 샤헤르 알 하산이 전사하는 등 정부군으로 전세가 기울자 자폭 결사대와 지뢰들을 남기고 철수했다. 이로써 3월 2일에 정부군이 팔미라를 최종적으로 탈환하며 2년에 걸친 전투를 마무리했다. # 마지막 전투에서 양측 합산 4백여 명이 전사했고, 그간 큰 피해가 없던 극장 유적이 일부 파괴되었다.
이후 타드무르는 정부군 수중에서 안정을 유지한다. 그러다 2024년 12월의 반군의 총공세 당시 미군의 도움을 받은 자유 시리아군이 별다른 전투 없이 도시를 점령했으며, 이후 다마스쿠스까지 진격하며 아사드 정권을 붕괴시켰다.[11] 시리아 과도 정부는 유적 복원과 함께 타드무르에 정유 시설을 세우고 철도를 놓아 개발하려 하고 있다. 또한 튀르키예는 비행장을 활용하려 한다.
3. 주요 유적
유적 지도
3.1. 목록
페르세폴리스 궁전과 유사한 양식으로 세워진 바알 신전
바알 신전 서벽의 정문
바알 신전의 장대한 외벽
- 벨 신전
팔미라의 대열주 거리의 오른쪽 끝에 있으며 이 지역에서 숭배되었던 벨(바알 혹은 마르두크)을 중심으로 태양신 야르히볼과 달의 신 아그리볼과 같이 모셔 놓은 신전으로 로마 시대 이전에 세워졌지만, 서기 32년에 와서야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서아시아와 그리스-로마 양식이 섞인 건물로 메인 신전의 북동쪽에는 황도 12궁이 새겨진 지붕으로 덮인 지성소가 있으며, 이 신전을 중심으로 제물을 바치는 제단과 몸을 씻는 거대한 수조 등의 부속 건물들이 딸려 있다. 동로마 제국 시절에는 교회로 쓰였으며 이후 1132년 이슬람 세력이 들어오면서 약간의 개조를 거쳐 1920년대까지 모스크 겸 성채로 사용되기도 했다.
2011년부터 시작된 시리아 내전 때 ISIS에 의해 복원되었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으나 신전의 입구는 무사하게 남아 있는 것을 BBC의 드론 사진을 통해 확인되었다. 팔미라를 탈환한 시리아 정부군이 신전 주변에 계속 머물고 있으며 바알샤민 신전과 같이 남아 있는 잔해로 재복원에 들어갈 예정.
카르도 막시무스 (대로)의 상공 사진
대열주와 기둥 중간의 조각상 받침대
2017년에 찍은 테트라필론 (카르도 막시무스의 조형물)
- 개선문과 대열주 거리
팔미라 시가지의 서쪽 끝에 있는 장제전에서 동쪽의 개선문과 밸 신전을 이어주는 약 1.2km 길이의 메인 거리와 거기에서 나온 대열주 거리로 2~3세기에 완성되었다. 팔미라 유적지를 동쪽, 서쪽, 중심가 세 구역으로 나누어 지난다. 동쪽으로는 개선문과 벨 신전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장제전을 비롯해 남쪽인 다마스쿠스의 문으로 이어지는 가로진 길이 있다. 중심에는 '테트라필론'이라 하는 사거리에 세워진 건축물이 있으며 이 중심가에는 나부의 신전을 비롯해 극장, 아고라, 원로원과 목욕탕 등의 공공건물들이 들어선 것이 특징이다. 이 중 극장가에 있는 기둥에서 제노비아와 오데나투스의 봉납문이 팔미라어와 그리스어로 같이 새겨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내전 이전의 극장
내전기를 지나며 일부 파괴된 모습
- 극장
대열주 서남쪽에 위치하며, 2세기 말엽 세베루스 왕조 시기에 세워졌다. 너비는 92m고 2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중세 들어 모래에 덮혀 있다가 1950년대에 정비되었다. ISIL (다에시) 점령기 직후인 2015년 6월, 25명의 성인 남성들이 극장에서 공개 총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세계유산을 처형장으로 쓴 것에 대해 시리아 내외에서 비판이 잇달았다.
- 바알 샤민 신전
가나안의 신 바알 샤민을 모신 신전으로 기원전 2세기에 처음 세워지고 제단은 서기 151년에 이르러 완성이 되었다. 고대 시리아와 로마의 건축 양식이 뒤섞인 양식으로, 이 신전에는 로마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가 방문했을 때 '아그리파'라는 이 지역의 부유한 공직원이 황제 일행의 경비를 부담했다는 것과 신전 건립의 후원자였다는 사실이 그리스어와 팔미라어로 새겨져 있다. 팔미라의 멸망 후 5세기에는 동로마 제국 아래 들어가 교회로 쓰이다가 이후 이슬람의 모스크로 쓰이기도 했다. 1954년 스위스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과 복원이 되었고 1980년대에 팔미라 유적지와 같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011년부터 시작된 시리아 내전 때 ISIS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이에 유네스코는 이를 전쟁범죄로 규정, 그리고 재복원을 위해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하버드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의 주체가 된 디지털 고고학 팀이 파괴 상황과 잔해 탐색을 위해 약 5,000대의 3D 카메라를 현장으로 보낼 계획을 세웠다. 팔미라를 탈환한 현장에 남은 파편들을 중심으로 재복원 작업을 하였으며, 이탈리아에서 복원됐다.
- 제86 장례 신전
팔미라 곳곳에 남아있던 장례 신전 중 가장 보존이 잘 된 곳으로, 대열주 서쪽에 위치한다.
병영 중심부의 열주
병영 내의 군단기 신전
- 디오클레티아누스 병영
3세기 말엽 시가지 서부의 언덕에 조성된 로마 군단 기지로, 쇠퇴한 도시가 군사 거점으로 변모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병영은 일반 시가지와 낮은 성벽으로 분리되었고, 2개의 열주 거리로 구성되었다. 중심부에는 군단의 상징인 아퀼라를 모셔 두는 신전이 있었는데, 본래 현지 신인 알라트 신전이었다 한다.
- 팔미라 성벽
사막 베두인들의 침공을 막기 위해 1세기에 부분적으로 시가지와 오아시스를 두르는 성벽이 세워졌고, 270년대 팔미라 제국의 제노비아와 도시를 재정복한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남부를 제외한) 시가지 전부를 두르는 성벽을 세웠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대에 성탑이 더해진 성벽 내에는 제1 일리리쿰 군단이 주둔했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에 성벽은 보강되었다.
내전 전의 모습
내전 후의 일부 파괴된 모습
- 시르쿠 2세 요새 (이븐 마안 요새)
관광객들이 잘 찾지 않는 산 위의 13세기 요새이다. 아이유브 왕조의 홈스 아미르 (제후)인 시르쿠 2세가 건설했다. 1630년경 시리아의 호족 파크르 앗 딘 2세가 보수하여 파크렛딘 혹은 이븐 마안 요새로 불리기도 한다.
| 엘라벨 탑형 무덤과 내부의 장식 | |
- 무덤의 계곡
팔미라 서쪽에 존재하는 층별로 나뉜 탑 모양의 팔미라 주민들의 무덤군.이 중에서 엘라벨(Elahbel)이라는 사람의 무덤에서 중국 한나라 시대의 비단이 발견된 것으로 팔미라는 일약 주목을 받게 되었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가족 단위의 무덤으로 구성되었고 이에 다량의 초상 조각들도 발견되었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른 주민들의 차림새와 생활 양식의 변화 등을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연구 자료로써 쓰이고 있다.
3.2. IS 점령기 (2015-17)의 유적 파괴
| 파일:바알 신전 파괴.webp | |
| 바알 신전의 파괴되기 전과 후 비교 | 바알샤민 신전의 파괴되기 전과 후 비교 |
| IS가에 의해 파괴된 타드무르 박물관의 팔미라 석관 | |
위의 비교 사진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팔미라의 상징이던 열주가 기둥 몇 개만을 남긴 채로 사라졌고, 신전들은 완파되었다.
팔미라 유적지는 2015년 5월 IS가 점령한 후 조직적인 파괴에 시달렸다. 2015년 9월 2일 2,000년이 넘은 팔미라의 고대 신전을 IS가 파괴한 것이 위성 사진으로 확인되었다. # 이에 많은 고고학자들은 시리아 내전이 종식되어 안정을 되찾을 때를 대비하고자 팔미라의 유적을 3D로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16년 3월 시리아 정부군이 팔미라를 탈환한 후 실시한 조사에서, 예상대로 유적지 일부가 크게 파괴되었으나 복구는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드론으로 촬영한 팔미라 유적 상공. 비록 10월에 IS가 팔미라에 재진입했으나 2017년 3월 시리아 정부군이 재반격하여 재탈환에 성공했다.
2021년 기준으로 IS를 사실상 축출했지만 아직도 내전으로 인해 불안정한 상태여서 대규모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시리아 정부와 러시아 정부간에 유적 복원을 위한 협정을 맺어 현재 러시아에서 3D 프린팅 모델로 복원도를 제작 중이고 시리아 내에서도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황금기 시절 옛 팔미라 전체의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서 복원 모형을 만드는 중이다. 링크. 2022년 초 기준으로 사실상 치안은 많이 안정되어 레바논, 이탈리아 등 이미 주변국으로 대피했거나 내전으로 파괴되어 복원차 해외로 나갔던 유물들이 속속 돌아오고 있다. 2025년 들어 시리아 내전이 사실상 마무리 된 후로는 복원이 더 속도를 내고 있다.
[1] 시리아 내전[2] 2017년 부분 수정[3]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4]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5]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6] 漢錦, 한나라의 비단[7] 그리스어, 라틴어의 팔미라(Palmyra)와 아랍어와 팔미라어의 '타드모르(Tadmor)' 모두 '종려나무 (대추야자)의 도시'라는 의미. 영어로도 종려나무는 palm 이다.[8] 칼리드는 이후 18일간 시리아 사막을 횡단하여 다마스쿠스 등 시리아를 정복하게 된다.[9] 역사가 이븐 하자르 알 아스칼라니의 평가[10] 이는 화산으로 묻혀버린 이후로도 근방에 신도시가 건재한 폼페이와 비슷하다.[11] 또한, 러시아군 일부가 이 인근에 고립된 것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