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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12대 샤한샤 𐭱𐭧𐭯𐭥𐭧𐭥𐭩 |샤푸르 3세 | ||
제호 | 한국어 | 샤푸르 3세 |
중기 페르시아어 | 𐭱𐭧𐭯𐭥𐭧𐭥𐭩 | |
영어 | Shapur III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388년 | |
재위 기간 | 383년~38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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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제12대 샤한샤.2. 생애
샤푸르 2세의 아들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379년 부친이 사망했을 때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삼촌인 아르다시르 2세가 대신 샤한샤로 지명된 점을 볼 때 370년대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샤푸르 2세는 이복형제에게 샤한샤를 물려주는 대신, 아들이 장성하면 다시 샤한샤를 넘기겠다는 서약을 받아냈다. 383년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에서 거듭 패하면서 입지가 매우 좁아진 아르다시르 2세는 일전에 맺은 약조에 따라 샤푸르 3세에게 자리를 물려줬다.385년 또는 386년 사산 왕조군을 상대로 잇따라 승리를 거뒀던 마누엘이 사망한 뒤, 아르메니아 귀족들은 국왕 아르사케스 3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샤푸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샤푸르는 호스로프 4세를 왕으로 옹립하고, 그의 누이인 수르반두흐트(Zurvandukht)와 호스로프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 후 아르메니아에 군대를 파견해 대다수 영역을 확보했다. 아르사케스 3세는 서쪽으로 후퇴한 뒤 로마군이 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당시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방의 참칭자 마그누스 막시무스와 일전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어서 아르메니아에 군대를 보낼 겨를이 없었다. 그는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사산 왕조에 협상을 제안했다.
사산 왕조 역시 로마 제국과 정면 대결하길 원하지 않았기에 협상에 응했고, 양측은 아르메니아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이리하여 아르메니아는 북쪽의 테오도시오폴리스와 남쪽의 아미다까지 이어지는 경계에서 분열되었다. 또한 로마는 500파운드 가량의 금을 이란에 지불하기로 하였고, 이베리아에 대한 사산 왕조의 영도권을 인정하였다. 390년 아르사케스 3세가 사망하자, 로마는 왕가를 페하고 서아르메니아 속주를 신설했다.이렇게 분할이 이뤄진 후, 아르메니아 일대는 36년간 평화로웠다.
샤푸르 3세는 케르만샤 근방에 위와 같은 대형 조각상을 남겼다. 아치형태의 지붕 아래에 두 개의 비슷해 보이는 조각이 서로 쳐다보는 형태이다. 조각상에 새겨진 팔라비어는 이것이 각각 샤푸르 2세와 3세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오른편엔 '샤푸르, 호르미즈드, 나르세스'라고 써 있으며, 왼편엔 '샤푸르, 샤푸르, 호르미즈드'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리하여 오른편의 것은 샤푸르 2세의 상이며, 왼편은 샤푸르 3세의 상인 것으로 추측한다. 그리고 전체의 모습으로 따져서 아치까지 해석한다면 하나의 제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러한 조각상은 사산 왕조 역사상 매우 드문 것으로 샤푸르 2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측면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388년, 귀족들이 궁궐 뜰에 세운 큰 천막의 밧줄을 베어버리는 바람에, 장막이 머리 위로 떨어지면서 즉사했다. 이후 아들 바흐람 4세가 샤한샤로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