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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7대 샤한샤 𐭭𐭥𐭮𐭧𐭩 |나르세스 1세 | ||
제호 | 한국어 | 나르세스 1세 |
중기 페르시아어 | 𐭭𐭥𐭮𐭧𐭩 | |
영어 | Narseh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 |
재위 기간 | 293년~30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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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제7대 샤한샤. 샤푸르 1세의 아들로, 20여 년간 샤한샤가 될 야망을 키우다가 바흐람 3세를 몰아내고 샤한샤가 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여 한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았으나, 이내 갈레리우스 황제의 대반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굴욕적인 평화 협정을 체결한 후 아들 호르미즈드 2세에게 양위했다.2. 생애
나르세(Narseh)라는 이름은 고대 이란 신화에서 등장하는 이름인 'naryasa(n)ha-'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인간의 찬미"를 의미한다. 중세 페르시아어에는 nrshy, 파쿨리 비문과 나크쉬 로사탐에는 nryshw로 기록되었다. 일부 그리스어 비문에서는 나르사이오스(Narsaiēs) 또는 나르세이오스(Narsaios)라고 적혔지만 대다수 그리스 문헌은 그를 일관적으로 나르세스(Narsēs)라고 지칭했다.샤푸르 1세가 낙쉐 로스탐에 세운 기념비와 파쿨리 비문, 그리고 샤푸르의 비문에 새겨진 계보에 그의 신상 정보를 어느정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샤푸르 1세의 황후 우두르-아니히드, '아르메니아의 위대한 왕' 호르미즈드 1세, 메산의 왕 샤푸르에 이은 4순위의 서열이었으며, 사카스탄의 왕을 역임했다. 그는 아마도 샤푸르 1세의 가장 어린 아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출생년도는 228년에서 233년 사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부친이 서방 전선에서 로마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동안 동방 전선에서 제국의 패권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샤푸르 1세는 그런 그를 무척 신뢰했고, 사카스탄 뿐만 아니라 힌두, 투룬, 쿠샨 등 광대한 영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270년 샤푸르 1세가 사망한 뒤, 진작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호르미즈드 1세가 새 샤한샤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1년만에 사망했고, 그동안 천대받던 바흐람 1세가 수석사제 카르티르(Kerdīr)의 추대를 받고 샤한샤에 등극했다. 바흐람 1세는 나르세스의 반발을 잠재우고자 그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혔다. 나르세스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마음 속으로는 바흐람을 찬탈자로 여겼던 듯하다. 그러다 274년 9월 바흐람 1세가 사망한 뒤, 10대의 바흐람 2세가 부친의 뒤를 이어 샤한샤가 되었다. 이에 나르세스는 동전을 독자적으로 주조하며 사실상 독립선언을 하였다. 바흐람 2세는 그를 응징할 여력이 없어서 내버려뒀다.
283년 로마 황제 카루스가 쳐들어와서 메소포타미아를 파괴하고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했다. 당시 바흐람 2세는 동방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주력군을 동방 쪽으로 보낸 터라 로마군의 침략을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카루스는 내친김에 티그리스강을 건너 사산 왕조를 완전히 정복하려 했으나, 도중에 벼락을 맞아 사망했다. 그 후 로마군은 철수했고, 바흐람 2세는 간신히 메소포타미아를 회복했다. 이후 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의 평화 협상 때, 바흐람 2세는 아르메니아를 둘로 쪼개서 서부 아르메니아는 친 로마 성향의 티라다테스 3세가 통치하도록 허용했고, 나머지는 나르세스가 다스리게 했다. 이는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는 나르세스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나르세스는 아마도 샤한샤의 이같은 조치에 분노했을 것이다.
293년 바흐람 2세가 사망한 뒤, 어린 아들 바흐람 3세가 타르투스의 아들 바넘과 메샨의 왕 아두르파로바이의 지원으로 샤한샤가 되었다.그러나 대사제 카르티르(Kerdīr)를 비롯한 귀족들은 로마 제국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에서 미숙한 통치자가 샤한샤를 맡아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들은 아르메니아의 왕 나르세스에게 크테시폰으로 와서 샤한샤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황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20여 년간 칼을 갈아왔던 그는 마침내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즉시 군대를 일으켰고, 4개월 만에 크테시폰 외곽까지 이르렀다. 카르티르와 귀족들은 가르메칸 지방의 바쿨리에서 나르세스를 접견한 뒤 샤한샤로 추대했다. 나르세스는 바흐람 3세와 바넘에게 즉시 항복한다면 신변을 보장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고 판단한 두 사람은 동의했고, 나르세스는 수도에 입성했다. 그 후 바넘은 긴급 체포된 뒤 처형되었고, 바흐람 3세는 기록이 미비해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아나히타로 추정되는 여신에게 제위의 상징을 받는 나르세. 제위를 찬탈한 나르세는 대규모 마애상과 비문을 남겨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했는데, 이 명문이 보존되어 초기 사산 왕조 역사 연구에 도움이 되었다. |
나르세스는 샤한샤가 된 직후 비사푸르에 세워진 바흐람 1세의 부조에 새겨진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꾸고, 왕의 말 아래 쓰러진 적의 엎드린 형상을 추가하도록 하였다. 이 '엎드린 적'은 바넘일 수도 있고, 바흐람 3세일 가능성도 있다. 한편, 그는 귀족 회의를 소집한 뒤 '왕실의 선거' 의식을 치렀다. 이를 통해 자신이 찬탈자가 아니라 합법적인 통치자로서 모두에게 받아들여지길 희망했다. 투표 결과 그는 통치자로 공인되었고, 아후라 마즈다의 은총을 받아 적합한 샤한샤로 공인되었다. 또한 여러 곳에 부조와 비문을 세워서, 자신이 신들의 인정을 받았음을 백성들에게 과시하였다.
이렇듯 정통성을 세우고자 노력하는 한편, 일전에 빼앗긴 아르메니아를 탈환하고 샤푸르 1세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다. 296년, 나르세스는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가 티리다테스 3세를 축출했다. 또한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동방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부제 갈레리우스에게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 왕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명령했다. 296년 말이나 297년 초, 갈레리우스는 카라에와 칼리니쿰 사이의 지역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사산 왕조군과 격돌했다.양측은 2차례 접전을 치렀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하지만 칼리니쿰에서 벌어진 세번째 전투에서, 갈레리우스는 크게 패하여 시리아로 퇴각했다.
동방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 패배에 분노했다. 그는 시리아에서 갈레리우스와 티리다테스를 접견했는데, 티리다테스를 왕으로서 정중하게 대했지만, 갈레리우스에겐 말을 타지 말고 자신이 탄 병거 옆에서 달리게 하는 굴욕을 줬다. 하지만 그는 갈레리우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하고, 다뉴브 전선의 고트 용병대를 모집한 뒤 다시 시리아로 오도록 하였다. 297년 늦여름, 갈레리우스는 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번째 군단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여 사산 왕조에게 빼앗겼던 영역을 되찾고 갈레리우스의 남쪽 측면을 보호했다. 그런데 297년 7월,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도미티아누스와 아우렐리우스 아킬레우스가 이집트 속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11월경 알렉산드리아 주조소에서 도미티니아누스 황제의 즉위 기념 주화를 발행했다. 보피스쿠스의 '프로부스의 생애'에 따르면, 사산 왕조의 샤한샤 나르세스 1세가 이집트의 반란에 호응하여 시리아를 침공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집트 반란 세력과 사산 왕조는 모종의 밀약을 맺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집트 속주는 동방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며 대표적인 밀 생산지였기에, 그곳을 잃는다면 로마 제국의 국력은 심각한 손상을 입을 게 자명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대를 돌려 이집트로 향했고, 갈레리우스는 아르메니아 전선에 홀로 남겨졌다. 나르세스는 기회를 포착하고 298년 아르메니아로 진격하여 고립된 갈레리우스의 로마군을 섬멸하려 하였다. 갈레리우스는 카파도키아로 퇴각했고, 나르세스 1세는 이들을 추격하여 카파도키아에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다 겨울이 찾아오자, 사탈라 인근에 겨울 숙영지를 세우고 이듬해에 있을 군사 작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갈레리우스는 병력이 열세한 상황이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가까운 시일에 복귀할 가망이 없으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게 불리해질 거라 판단했다. 그는 겨울의 강추위를 무릅쓰고 기습공격을 하기로 마음먹고, 군대를 극비리에 인솔하여 사산 왕조군의 진영에 접근했다.
고대 역사가 에우트로피우스와 파우스토스에 따르면, 갈레리우스 본인이 농부 복장을 한 채 아르메니아 귀족 2명과 함께 사산 왕조군의 진영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들은 적군 진영 안에 들어가서 태연히 채소를 팔면서 적군의 약점을 파악했다고 한다. 이게 사실일 가능성은 불확실하지만, 갈레리우스가 공격하기 전에 정탐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는 사산 왕조군이 완전히 방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어느 겨울 밤에 야습을 감행했다.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산 왕조군은 삽시간에 무너졌고, 나르세스 1세는 아내 아르사네와 후궁, 상당량의 보물을 남기고 탈출했다.(사탈라 전투) 그 후 갈레리우스는 도주하는 나르세스 1세를 맹렬히 추격하였다. 그는 페르시아로 쳐들어가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더 깊숙이 진격하려는 부제를 제지하고, 나르세스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크테시폰을 돌려줄 테니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 왕으로 복위하는 걸 용인하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조지아의 이베리아 왕국도 로마의 속국이 되었으며, 티그라노케르트, 사이르드, 마티로폴리스, 발라레사, 목소스, 다우디아, 아르잔 등 티그리스 강 너머의 메소포티미아 상류 지대까지 로마의 영역으로 귀속하는 데 동의하라고 압박했다.
나르세스는 아파르반을 갈레리우스에게 보내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겠으니 아내들과 자녀들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갈레리우스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299년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양국은 40여 년간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이 일로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데다 개인적으로도 실의에 빠진 그는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바흐람 1세와 바흐람 2세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마니교 박해 정책을 중단하고 마니교가 포교할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해줬으며, 기독교, 유대교 등 다른 종교들에게도 관용을 베불었다. 303년경 아들 호르미즈드 2세에게 샤한샤 자리를 넘기고 은퇴했다.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확실하지 않으나, 309년 호르미즈드 2세가 사망하기 전에 이미 죽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