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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32대 샤한샤 𐭠𐭥𐭲𐭧𐭱𐭲𐭥 |아르다시르 3세 | ||
제호 | 한국어 | 아르다시르 3세 |
중기 페르시아어 | 𐭠𐭥𐭲𐭧𐭱𐭲𐭥 | |
영어 | Ardashir III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621년 ~ 630년 | |
재위 기간 | 628년 ~ 6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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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제32대 샤한샤.2. 생애
카바드 2세와 동로마 여인 안조이(Anzoy)의 아들로, 628년 9월 6일 부친이 사망한 뒤 귀족들의 추대로 샤한샤가 되었을 때 7살이었다. 아랍의 역사가 알 타바리에 따르면, 유력한 대신 마아드후르 구슈나프가 섭정을 맡았다고 한다. 당시 사산 왕조는 동로마 제국과의 기나긴 전쟁을 치른 여파로 매우 피폐해졌고, 군대는 전장에서 모조리 소모되었다. 그나마 건재한 군대는 샤흐르바라즈 휘하 부대밖에 없었다. 아랍인과 튀르크인은 이 기회를 틈타 사산 왕조의 남부와 북부를 수시로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고, 629년엔 하자르족이 캅카스로 쳐들어왔다. 샤흐르바라즈는 직접 캅카스로 진군해 하자르족을 격파했다.이에 민심은 샤흐르바라즈에게 쏠렸고, 님루지 가문은 그를 샤한샤로 추대하기로 했다. 630년, 샤흐르바라즈는 이라클리오스 황제와 협약을 체결한 뒤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크테시폰으로 진군하여 도시를 포위했다. 그해 4월 29일 크테시폰은 함락되었고, 이제 9살이 된 아르다시르 3세, 마아드후르 구슈나프, 그리고 수많은 귀족들이 처형되었다. 샤흐르바라즈는 샤한샤를 칭했지만, 이스파부단 가문의 수장 파루크 호르미즈드는 이에 불복하여 호스로 2세의 딸이자 아르다시르 3세의 이모인 푸란도흐트를 샤한샤로 추대했다. 그 외에 각지에서 여러 인물이 샤한샤를 자칭하면서, 사산 공위시대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