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아 고대 지명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흑해 | ||||||
마르마라해 | 트로아스 | 미시아 | 비티니아 | 파플라고니아 | 폰투스 | ||
페르가몬 | 리디아 | 프리기아 | 갈라티아 | ||||
에게해 | 이오니아 | 리카오니아 | 카파도키아 | 아르메니아 | |||
카리아 | 피시디아 | 이사우리아 | |||||
리키아 | 팜필리아 | 킬리키아 | 콤마게네 | ||||
지중해 |
Cilicia[1]
1. 개요
아나톨리아 반도 남부의 타우루스 산맥과 누르 산맥 사이에 위치한 평야 지대로, 현재 튀르키예의 추쿠로바 (Çukurova) 지역 (주도 : 아다나)에 속한다. 과거 시리아와 소아시아 간의 교통로 상에 놓인 지리적 이점을 통해 번영하였으며, 사도 바오로의 도시로 유명한 타르수스가 그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시리아와 아나톨리아를 잇는 고갯길을 킬리키아 관문 (Cilician gate)라고 부른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킬릭스라는 페니키아계 인물에게서 유래한 이름으로 나온다. 한국의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길리기아'라고 불린다.2. 역사
2.1. 상고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킬리키아 평원은 알레이아 평야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히타이트와 미탄니 간의 각축을 틈타 킬리키아에는 독자적인 국가가 형성되어 번영하였다. 하지만 히타이트가 미탄니를 마침내 정복하자 킬리키아도 다시 히타이트에게 다시 복속되었다.기원전 13세기, 레반트 일대는 정체불명의 바다 민족들에게 습격을 받아 혼란에 빠졌고 킬리키아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인구가 급감한 킬리키아에 시리아 인의 기원이자 미탄니를 이루었던 후르리 인들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2]
여러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어 있던 킬리키아 일대는 기원전 9세기 경에 현재 아다나를 중심으로 한 몹소스[3] (후일의 모프수에스티아) 라는 국가 하에 통합되었다. 그는 다민족 국가로서, 인도-유럽어계 문자와 페니키아-셈계 문자를 병용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다음 세기에 아시리아 제국에게 포함되며 멸망하였다. 아시리아가 멸망한 이후 킬리키아[4] 왕국이 세워졌다가 페르시아 지배를 받는다.
2.2. 고대
기원전 60년 무렵 로마 제국령이 되었는데, 처음부터 직접 지배가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제후국이 세워졌다. 이러한 킬리키아 왕국은 종종 폰투스 왕국이나 카파도키아 왕국과 합쳐졌다가 서기 74년경 킬리키아에 분봉된 폰투스의 마지막 군주 폴레몬 2세가 사망한 후 로마 제국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뜬금없지만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팔레몬 왕가가 폴레몬 2세를 시조로 삼는다. 로마 속주 시절 킬리키아의 주도는 타르수스였고, 12세기 아르메니아 왕국이 시스를 수도로 정할 때까지 타르수스가 킬리키아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킬리키아 전반의 역사를 알려면 타르수스 문서를 참고하면 좋다.2.3. 중세 이후
7세기경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받아 10세기까지 이슬람 지배하에 있다가 다시 동로마 제국이 탈환한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동로마는 이 지역의 통제권을 상실하고 킬리키아 지역에는 소 아르메니아 왕국(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이 세워진다. 킬리키아 왕국은 맘루크에 의해 멸망하고, 라마잔 토후국이 들어섰다가 16세기경 오스만에 의해 복속된다. 튀르키예 독립 전쟁 때 프랑스군이 쳐들어오기도 했으나 국민군이 격퇴한 뒤 지금까지 튀르키예 땅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1] 워낙 영어의 위상이 높다보니 외국 학계로 가도 틀린걸 알면서도 익숙한 발음인지라 '실리시아'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고 이걸 또 워낙 영미권의 영향력이 강하다보니 종종 무비판적으로 따라하는 한국인들이 있는데 분명 발음상 킬리키아다.[2] 이후 카파도키아로 재차 이주했다고도 한다.[3] Μοψουεστία[4] 현지어로는 힐락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