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color: #4A3800,#FFF; margin: -5px 0px" | 키리아데스 | 포스투무스 | 소 포스투무스 | 라엘리아누스 |
빅토리누스 | 소 빅토리누스 | 마리우스 | 잉게누우스 | |
레갈리아누스 | 아우레올루스 | 마크리아누스 | 소 마크리아누스 | |
퀴에투스 | 오다에나투스 | 헤로데스 | 마에오니우스 | |
발리스타 | 발렌스 | 대 발렌스 | 피소 | |
아이밀리아누스 | 사투르니누스 | 테트리쿠스 1세 | 테트리쿠스 2세 | |
트레벨리아누스 | 헤렌니아누스 | 티몰라우스 | 켈수스 | |
제노비아 | 빅토리아 | 티투스 | 켄소리누스 | }}}}}}}}}}}}}}} |
<colbgcolor=#a00201><colcolor=#fbe673> 황제 직할 야전기병대 지휘관 아우레올루스 Aureolus | |
출생 | 미상 |
사망 | 268년 |
반란 대상 | 갈리에누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군인 황제 시대의 반란자, 갈리에누스 황제와 함께 여러 반란을 진압했으나, 268년 갈리에누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다.2. 생애
다키아 속주 출신이며, 군대에 입대하기 전에는 목동과 말 관리인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그는 군대에 입대한 뒤 기병대 장교로서 경력을 쌓다가 갈리에누스 황제가 창설한 야전 기병대 선임 지휘관에 부임했다. 이 기병대는 메디올라눔(현재 밀라노)에 근거지를 두고, 황제의 지휘하에 전선으로 달려가서 적을 무찌르는 임무를 수행했다. 260년경, 아우레올루스는 갈리에누스의 지휘하에 기병대를 이끌고 판노니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잉게누우스를 토벌하는 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또한 261년 동방 로마군의 추대를 받고 두 아들을 황제로 세운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의 군대와 일리리쿰에서 격돌하여 대승을 거두고 마크리누스와 장남 소 마크리아누스를 처단했다.265년, 아우레올루스는 갈리에누스의 지휘하에 갈리아 제국을 건국한 포스투무스를 토벌하러 출진했다. 이 원정을 통해, 로마 제국은 라이티아 속주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포스투무스를 어느 알려지지 않은 도시에 가두고 포위 공격하던 중, 갈리에누스가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결국 포스투무스 토벌을 실패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아우레올루스가 도시로 도주하는 포스투무스를 추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도중에 매복한 적을 만날 걸 우려해 추격하지 않았던 것이 패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일로 신뢰를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268년, 고트족과 헤룰리족이 다키아 속주를 휩쓸고 도나우강을 건너 발칸 반도로 밀려들어왔다. 이에 갈리에누스는 이들을 토벌하러 출정했는데, 이때 기병대 지휘관을 아우레올루스가 아닌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에게 맡겼다. 아우레올루스는 라이티아 속주 수비대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이 좌천에 격노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작정했다. 메디올라눔에 있는 조폐국을 사용하여 포스투무스의 초상화가 새겨진 동전을 주조했고, 자신을 포스투무스의 대리인으로 자처했다. 이는 포스투무스가 이탈리아로 들어와서 자신과 함께 갈리에누스를 쳐부수길 희망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포스투무스는 이를 무시했고, 아우레올루스는 혼자서 갈리에누스를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네스토스 전투에서 고트족을 격퇴한 갈리에누스는 아우레올루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고 즉시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이후 메디올라눔 근처의 폰티롤로 누에보에서 양군이 격돌했는데, 결과는 갈리에누스의 승리였다. 아우레올루스는 잔여 병력을 수습해 메디올라눔에서 농성했고, 갈리에누스는 도시를 에워싸고 공격을 퍼부었다. 그런데 갈리에누스는 포위 공격 도중 부하들에게 살해당했고, 갈리에누스의 동생이자 발레리아누스의 차남 소 발레리아누스까지 암살됐다. 아우레올루스는 갈리에누스 사후 새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에게 항복했고, 클라우디우스는 아우레올루스 일당을 모조리 처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