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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00201><colcolor=#fbe673> 로마 제국의 근위대장 레갈리아누스 Regalianus | |
출생 | 미상 |
사망 | 261년 |
직위 | 일리리쿰 방면 로마군 지휘관 |
반란 대상 | 갈리에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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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군인 황제 시대의 반란자. 로마 제국의 유례없는 혼란기에 황제를 자칭하고 주민들을 위해 외적과 맞서 싸웠으나 끝내 목숨을 잃었다.2. 생애
신뢰성이 많이 떨어지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레갈리아누스는 다키아 왕국의 군주 데케발루스의 후손인 다키아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소아시아 귀족층 여성인 술피키아 드리안틸라(Sulpicia Dryantilla)와 결혼한 것을 봤을 때,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밝힌 것과는 달리 원로원 계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더군다나 로마군 디폴마 밀리타리스(diploma militaris, 군사 졸업장 비문) 발견과 해석 속에서 202년 보결 집정관으로 원로원 의원이자 야전사령관 가이우스 카시우스 레갈리아누스가 확인돼,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주장은 설득력을 크게 잃었다.역사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황제의 시대를 기술할 때 잉게누우스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생존한 자들이 레갈리아누스에게 합류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잉게누우스와 레갈리아누스의 거병 시점의 공백이 상당한 걸 볼 때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본다.
260년 당시 로마 제국은 대혼란에 휩싸였다. 발칸 반도에서는 잉게누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갈리에누스에게 진압당했고, 동방에서는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 왕조의 샤푸르 1세와 대적하다가 에데사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후 동방의 잔여 로마군은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의 지휘하에 사산 왕조군을 격퇴한 뒤, 마크리아누스의 두 아들 소 마크리아누스와 퀴에투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게다가 갈리에누스가 잉게누우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라인 국경지대의 일부 병력을 차출한 틈을 타, 알레만니족이 대대적으로 침략하여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갈리에누스는 도나우 전선 로마군을 재정비하던 중 알레만니족이 이탈리아로 진격하고 있다는 급보를 접하고 급히 이탈리아로 달려갔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록솔라니족이 도나우 강을 건너 일리리쿰으로 쳐들어왔다. 일리리쿰 방면 로마군 지휘관 레갈리아누스는 이에 맞서 항전했지만 여의치 않자 카르눈툼으로 후퇴했다. 이때 주민과 병사들은 이탈리아를 구하는 걸 우선해 자신들을 위기에 빠뜨린 갈리에누스를 불신했고,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로잡혔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기에, 발칸 반도의 안위를 책임질 새 황제를 세워야겠다고 판단했다. 레갈리아누스는 이들의 간절한 부탁을 받아들여 황제를 칭하고, 아내 술피키아를 아우구스타로 삼았다.
그 후 레갈리아누스는 록솔리니족을 상대로 항전했으나, 261년 초 결국 전사했다. 이에 대해 일부 사료에는 레갈리아누스의 반란을 진압할 여력이 없었던 갈리에누스가 록솔라니족을 꼬드겨 그를 공격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사료의 신빙성은 거의 없다고 간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