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 제국 초대 황제 | |
<colbgcolor=#a00201><colcolor=#fbe673> 로마 제국의 집정관 포스투무스 Postumus | |
본명 |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 Marcus Cassianius Latinius Postumus |
출생 | 미상 |
사망 | 269년 |
직위 | 갈리아 방면 로마군 지휘관 |
반란 대상 | 갈리에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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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군인 황제 시대의 반란자, 갈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 갈리에누스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10년간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를 통치했다.2. 생애
포스투무스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다만 그가 갈리아 제국 황제의 자격으로 주조한 동전에 바타비아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헤라클레스 마구사노스와 헤라클레스 데우소니엔시스 같은 신들이 많이 있는 걸 볼 때 바타비아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구사노스(Magusanus)는 게르만 신화의 'Þunraz'를 라틴어로 번역한 용어로 추정되며, '데우소니엔시스(Deusoniensis)는 바타비아 지역 내에 있는 데우소(Deuso)[1]에서 딴 용어였을 것이다.그는 일찍이 로마군에 입대하여 라인 전선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직함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발레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사령관으로 승진되었던 듯하다. 그는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부자의 신임을 굳건히 받았다. 갈리에누스는 발칸 반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잉게누우스를 토벌할 때 차남 살로니누스를 포스투무스와 실바누스에게 맡겼다. 그러던 260년 여름, 포스투무스와 실바누스는 약탈을 한껏 벌인 뒤 본거지로 귀환하던 유퉁기족(Juthungi)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전리품을 확보했다. 두 사람은 곧 전리품 분배 문제를 놓고 다투었다. 포스투무스는 부하들에게 전리품을 나눠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바누스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원칙이라며, 일단 갈리에누스의 차남 살로니누스에게 넘긴 뒤 살로니누스가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책무를 수행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병사들은 목숨 걸고 싸워서 쟁취한 전리품을 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들은 곧 반란을 일으켰고 포스투무스를 지휘관으로 추대했다. 포스투무스는 즉시 살로니누스와 실바누스가 숨은 쾰른을 포위했고, 쾰른 수비대는 두 사람을 넘겨줬다. 포스투무스는 두 사람을 곧바로 사형에 처한 뒤, 갈리아 제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황위에 올랐다. 갈리아 제국에 소속된 지역은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 라이티아, 루그두넨시스 남부와 나르보넨시스를 제외한 갈리아 전역이었고, 261년에는 포스투무스가 직접 브리타니아 섬을 찾아가 설득하여 충성을 받아냈으며, 히스파니아 속주도 뒤따라 가담했다. 포스투무스는 트레베로룸(트리어)를 수도로 정하고 원로원을 개별적으로 신설했으며, 집정관 2명을 선출하고 원형극장을 세우고, 프라이토리아니까지 신설했다.
갈리에누스는 차남이 살해되고 갈리아 제국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당장 반란을 진압하러 가기엔 여건이 너무 좋지 않았다. 알레만니족이 라인강 하류 방어선을 돌파하여 이탈리아로 물밀듯이 진격했고, 록솔라니 족이 발칸 반도에 쳐들어오고 레갈리아누스가 이에 맞서고자 황제를 자칭했으며, 동방에서는 부친 발레리아누스가 사산 왕조의 왕중왕 샤푸르 1세에게 붙잡혔고,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가 잔여 로마군을 수습하여 사산 왕조군을 격퇴한 뒤 자신의 두 아들 소 마크리아누스와 퀴에투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여기에 이집트 총독 루키우스 무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까지 마크리아누스의 반란에 동참했다. 갈리에누스는 이 난리를 당장 수습해야 했기에, 갈리아 쪽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포스투무스는 이 틈을 타 갈리아에서의 지배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로마로 쳐들어가지는 않고, 붕괴 직전에 있던 갈리아의 피해복구에 공을 들였으며, 라인 강 전초기지를 요새화하고 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의 침입을 물리쳤다. 그는 이를 통해 병사와 주민들의 확고한 지지를 얻고, 261년 12월 10일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의 칭호를 얻어냈다.
265년, 갈리에누스는 군대를 일으켜 갈리아로 쳐들어갔다. 포스투무스는 이에 맞서 어느 알려지지 않은 도시에 들어가 항전했다. 갈리에누스는 도시를 포위하고 맹공격을 퍼부었지만, 도중에 화살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고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로 철군했다. 265년 말 포스투무스가 주조한 승리를 기념하는 특별주화가 출토되기도 했다. 이후 갈리에누스는 갈리아 제국을 일단 용인해주기로 하고 포스투무스가 이탈리아로 공격하지 않고 갈리아에 쳐들어온 게르만족을 대신 격퇴하는 조건하에 그가 갈리아 제국 황제를 칭하는 것을 묵인했다. 포스투무스는 이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268년 갈리에누스의 기병대 지휘관 아우레올루스가 자신을 포스투무스의 대리인으로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포스투무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던 것으로 보이나, 포스투무스는 그를 전혀 돕지 않았다.
포스투무스는 나름대로 제국을 잘 이끈 것으로 보이나, 268년경 주조된 동전의 질이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을 보면 경제 사정이 안 좋아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데키우스 시기에 제조된 2 세스테르티우스화를 녹이지도 않고 자기 얼굴도장을 망치로 내리쳐서 갈리아 제국 통화로 쓰기까지 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심각한 기근과 역병이 발생했거나 로마로 진격하지 않는 그에 대한 부하들의 반발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권력을 확고히 했다. 268년 말에 10년 임기를 축하하는 의미가 담긴 기념 주화를 발행하였고, 269년 1월 1일 다섯 번째 집정관에 취임했다.
269년 초, 모군티아쿰(지금의 마인츠)에서 라엘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라엘리아누스의 직위가 무엇이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확실하지 않으나,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사령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스투무스는 즉시 모군티아쿰을 공략하고 라엘리아누스를 붙잡아 처형했다. 그러나 모군티아쿰을 약탈하려는 부하들을 막았다가, 격분한 그들에게 피살되었다. 포스투무스를 살해한 부하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리우스를 갈리아 제국의 새 황제로 선출했다.
[1] 오늘날 독일 디셴(Diess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