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26 20:20:11

도미티아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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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아누스 2세
테트리쿠스 1세
테트리쿠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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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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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도미티아누스 2세.jpg
이름 도미티아누스
(Domitianus)
출생 미상
사망 미상
직위 미상
반란 대상 테트리쿠스 1세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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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군인 황제 시대의 반란자. 갈리아 제국 황제 테트리쿠스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2. 상세

1900년, 프랑스의 오트 굴랭 지역의 레클레옹 포도원에서 고르디아누스 2세(238년)와 아우렐리아누스(270 ~ 275)의 치세 사이에 주조되었던 1,456개의 안토니아니 동전이 발견되었다. 이중 역대 갈리아 황제들이 주조한 동전들과 동일한 주조 형식을 갖춘 한 동전에는 이제까지 확인되지 않은 로마 황제의 초상화와 다음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IMP С DOMITIANVS PF AVG
"IMPERATOR CAESAR DOMITIANVS PIVS FELIX AVGVSTVS"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피우스 펠릭스 아우구스투스

당시 대다수 학자들은 이 동전이 위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이래로 그의 이름을 걸고 황제를 자처한 황제는 문헌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었고, 프라이노멘과 노멘이 적혀 있지 않으며, 동전 자체의 질이 조잡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화폐학자인 로도피코 라프란치(Lodovico Laffranchi, 1875 ~ 1952)는 테트리쿠스 1세의 동전을 임의로 조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동전이 발견된 포도원의 지주가 8,000 골드 프랑이라는 과도한 가격을 책정한 점도 이러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내각은 동전을 구입하지 않기로 했고, 동전은 낭트의 지역 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훗날 분실되었고, 이 동전에 대한 정보는 석고 모형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던 2003년, 옥스퍼드셔의 찰그로브에서 4,957개의 안토니아니 동전이 담긴 도기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이중에는 두 번째 '도미티아누스' 동전도 있었다. 학자들은 즉시 낭트 지역 박물관에 보관되었던 석고 모형과 대조했고, 그 결과 첫번째 동전이 개조되지 않았으며 스스로 황제를 자처한 도미티아누스가 실존했다는 게 분명해졌다. 여기에 2006년 불가리아 북서부의 비딘 지역에서 세번째 도미티아누스 동전이 발견되었다. 이 동전은 다른 두 개의 동전과는 달리 뒷면에 코르넬리아 여신이 아니라 라에티아 여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문헌 기록에는 270년대에 활동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언급이 단 두 가지뿐이다. 6세기 동로마 역사가 조시무스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통치 기간에 도미티아누스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벌받았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서 무슨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가 동방에서 갈리에누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뒤 서방으로 진군하다가 트라키아에서 아우레올루스와 "도미티아누스"에게 토벌되었다고 밝혔다. 이 저서는 도미티아누스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후손이라고 덧붙였지만,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아우레올루스가 268년 갈리에누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갈리아 황제 포스투무스를 주군으로 받들었던 점을 근거로 아우레올루스의 동지였던 도미티아누스가 포스투무스에게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갈리아로 보내졌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불충분하다.

도미티아누스가 언제 반란을 일으켰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다. 일부 학자들은 빅토리누스를 암살한 장교들이 갈리아 제국의 조폐국들 중 한 곳을 임시로 장악한 뒤 그를 황제로 받들었다가 테트리쿠스 1세에게 토벌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동전에 코그노멘만 기재하고 프라이노멘과 노멘은 생략된 까닭 역시 불분명하나, 황제로 옹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몰락했기 때문에 질 좋은 주화를 주조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