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7 22:39:43

카이사르(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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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와 황후의 대표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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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영향4. 역대 카이사르

1. 개요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에서 황제와 후계자들을 칭하는 호칭. 카이사르의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제정의 기초를 닦은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칭호다.

2. 역사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대중에 공개된 유언장에 따라 카이사르의 양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신참자 가문인 본가보다는 로마에서 손꼽히는 귀족 가문 출신이자 갈리아 전쟁카이사르의 내전의 승리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임을 내세우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전체 이름을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에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하고, 본인을 늘 카이사르라고 지칭하고 주변인들에게도 자신을 카이사르라고 부르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지지자들만 그를 카이사르라고 불렀고, 반대파 정치인들은 카이사르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옥타비아누스', '투리누스'라고 불렀다.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로마의 압도적인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 모든 권력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내전기 때 부여된 임시 권한만 포기하고, 프린켑스이자 임페라토르로서 정치와 군사 모두에서 제1인자로 군림했다. 원로원은 그런 그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선사했는데, 이는 '존엄한 자'를 의미한다. 그 후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상징하는 칭호가 되었고, 후대 황제들은 제호명에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언제나 덧붙였다.

그렇지만, 카이사르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가문명'으로 사용되었을 뿐 칭호로 쓰이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와 혈연 관계이거나 인척 관계를 맺은 이들의 코그노멘이 '카이사르'이었기 때문에, 로마 황제나 남성 황족의 칭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 일가 아래에서, 남성 황족들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받고 이후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받아 선포된 프린켑스 유벤투티스가 해당 왕조 시절엔 제위계승자, 남성 황족 칭호 역을 일부 대신했다. 아니면 따로 "남들보다 최소 5년 이상 공직에 우선 취임한다."라는 특별법을 받거나, 황제가 후계자에 낙점한 일가 혈육을 봉헌하면서 공화정 아래에서의 홍보 형태로 이를 대신했다. 이는 율리우스 씨족의 카이사르 가문에서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카이사르 가문(네로 가문)으로 개념이 재정립된,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 아래에서도 비슷했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가 네로를 입양하면서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 역시 그에게 특별칭호를 내림이 아닌, 가문명으로 내준 조치였다.

이런 카이사르를 처음으로 칭호로 사용한 황제는 네로가 몰락한 후 황위에 오른 갈바였다. 자신의 제위명을 "임페라토르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고 정했다. 이는 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유지를 따라 로마를 이끌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음을 암시한다. 69년 1월 갈바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역시 제호에 '카이사르'를 추가했다. 오토를 꺾고 황제에 오른 비텔리우스는 카이사르를 쓰는 대신 '게르마니쿠스' 칭호를 사용했으며, 8살된 아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에게 게르마니쿠스 칭호를 수여해 자신의 후계자로 공인했다.

69년 12월 비텔리우스를 꺾으면서 네 황제의 해 최종 승자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제호로 사용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장남 티투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내렸다. 이 조치는 아우구스투스 치세 시절부터 임페라토르 직을 세습 형태로 받은 남성이 원로원, 로마인에게 상식적으로 "카이사르"로 불림을 모스 마이오룸 아래에서 인정함과, 그와 아들들의 정통성을 명문화하면서, 형식상 카이사르 가문의 후계를 자처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오현제 시대로 통칭화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무너진 뒤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자신과 두 아들을 스스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정치적 양자로 선포하면서, 안토니누스를 세베루스 왕조의 남자 후계자의 이름 겸 칭호 개념으로 활용함과 비슷한 선례였다.

따라서 카이사르라는 칭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인위적으로 자기 성씨를 황제의 동일 개념으로 삼았다고 볼 수 없고, 플라비우스 왕조의 제위계승법과 그들의 정통성과 연계됨 아래에서 만들어진 개념적 칭호였다.

그리고 플라비우스 왕조부터는 애매모호한 로마 황제 개념이 가족주의적 세습 개념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로마 황제가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쓰고 후계자는 카이사르를 쓰는 관례가 도입되었다. 이때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은 후계자를 기리기 위해 발행된 동전에는 "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NOB CAES: 가장 고귀한 카이사르)"라는 문구가 새겨졌는데, 때로는 'CAES'로 약칭하기도 했다.

군인 황제 시대에 등장한 황제들은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자식들을 조기에 카이사르로 지명했고, 때로는 장남을 처음부터 아우구스투스로 지명하여 분할 통치하고 차남 이하에겐 카이사르 칭호를 내렸다. 갈리아 제국 황제 테트리쿠스 1세는 아들 테트리쿠스 2세를 카이사르로 임명하고 동료 집정관으로 삼았지만, 274년 아우렐리아누스에게 토벌되면서 무의미해졌다.

293년 3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두 명의 상급 황제와 두 명의 하급 황제에 의한 통치 체제인 사두정치를 도입했다. 두 상급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로서 각각 서방과 동방에서 통치를 행사하고, 두 하급 황제는 카이사르로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관할 구역을 부여받고 아우구스투스가 맡긴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나중에 아우구스투스가 퇴위하면 아우구스투스로 승격한 뒤 새 카이사르를 지명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306년부터 사두정의 내전이 발발하면서 붕괴되었다.

사두정의 내전의 최종 승리자인 콘스탄티누스 1세는 초기엔 장남 크리스푸스를 카이사르로 삼고 여러 군사적 임무를 맡겼다가 자신의 아내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와 간통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처형해버린 뒤 세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그리고 조카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를 카이사르로 두었다. 그는 337년 사망하면서 세 아들을 아우구스투스로 승격시키고 제국을 삼분할하고,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는 카이사르 직위를 유지하고 특정 구역을 맡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달미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는 337년 여름에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병사들의 폭동으로 피살당했고(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세 아들 만이 제국을 물려받았다.

350년대에 콘스탄티우스 2세는 사촌인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율리아누스를 차례로 카이사르로 지명해서 자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동안 대리 통치하게 했다. 이후 황제들은 새 황제를 지명할 때 카이사르를 거쳐 아우구스투스로 승격시키는 기존 방식보다는 아우구스투스로 바로 승격시키는 것을 선호했다. 이는 로마 제국의 내우외환이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에서 자신이 미처 관리하지 못하는 구역을 대신 맡아줄 이가 과도기를 거치게 하는 것보다는 바로 공동 황제로 삼아서 무게를 실어주는 편이 낫다고 봤기 때문이다. 다만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조카 발렌티니아누스 3세요안네스를 물리치고 서로마 제국 황제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전에 카이사르로 선임했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 카이사르를 나타내는 동전에는 십자가가 없는 왕관 문양이 새겨졌다. 이 시대의 대다수 황제들은 후계자들이 카이사르를 거치도록 하지 않고 곧바로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하사해 공동 황제로 삼음으로써 후계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그 대신 카이사르는 차남 이하의 자식들이나 황제의 친척 또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에게 자주 수여되었다. 테오필로스는 자신의 막내딸 마리아와 결혼한 알렉시오스 모셀레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했으며, 미하일 3세는 삼촌 바르다스에게 카이사르를 수여했고, 니키포로스 2세는 아버지 대 바르다스 포카스에게 카이사르를 수여했다.

심지어 외국의 군주에게 카이사르 칭호가 수여된 경우도 있었다. 705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복위될 수 있게 해준 불가리아 제1제국의 칸 테르벨은 유스티니아노스 2세로부터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았다. 또한 1081년 알렉시오스 1세는 선대 황후 알라니아의 마리아의 형제이자 조지아 왕인 기오르기 2세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함으로써 셀주크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공동 대응하기를 희망했다.

이렇듯 카이사르 칭호를 쓰는 이들의 범위가 늘어나면서 권위가 떨어지자, 알렉시오스 1세는 형제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에게 특별히 세바스토크라토르(Sebastokratôr: 장엄한 통치자)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또한 마누일 1세 치세 부터는 제국의 특정 영토를 관리하는 황자에게 데스포티스 칭호가 부여되었다. 데스포티스 칭호를 수여받은 황자는 카이사르 및 세바스토크라트로와는 달리 황제의 지시 없이 자율적으로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메호메트 2세는 자신의 칭호에 "로마 제국의 카이사르"를 추가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들은 국가가 멸망할 때까지 대대로 카이사르 칭호를 쓰면서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진정한 후예라고 강조했다.

3. 영향

'카이사르' 칭호는 후대 유럽 국가들의 군주들에게도 변형된 형태로 사용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자리잡은 독일권에서는 카이사르를 독일어로 변환한 '카이저'를 황제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고,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를 이어받은 불가리아, 러시아 제국 등 동유럽권은 카이사르를 슬라브어로 변환한 '차르'로 사용했다. 이 외에도 폴란드에서는 카이사르를 폴란드어로 변환한 체사르쉬(cesarz)'를 황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했다.

4. 역대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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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았지만 모종의 사유로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지 못했거나 인정받지 못한 인물들만 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