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모스 마이오룸(mōs maiōrum)은 고대 로마 시기 로마인이 전통적으로 추구한 도덕적, 사회적, 관습법적 가치관을 일컫는 용어이다. 로마 왕국부터 로마 공화국, 로마 제국까지 로마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 및 모범으로 추앙되었다.2. 정의와 기원
모스 마이오룸(mōs maiōrum)은 "우리 조상의 관습"이란 의미를 지닌 라틴어 용어다. 서기 2세기경에 활동한 로마 문법학자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페스투스에 따르면, '모스(mōs: 관습)'는 로마가 건국되기 이전에 라티움에 정착한 부족들이 거행한 종교 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를 준수하는 것은 순수하고 신들에게 경건한 태도를 보이던 조상들의 덕업을 물려받는 것이라고 밝혔다. 로마 법학자 가이우스는 모스 마이오룸의 시초는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했을 때 참여한 부족들의 관습이었다고 주장했다.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등 로마 역사가들에 따르면,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직후 로마인을 30개 큐리아(curiae)로 나누고 원로원을 구성하는 등 행정 체계 및 법률에 관한 내용이 담긴 '왕국법(leges regiae)'을 제정했고, 2대 국왕인 누마 폼필리우스가 여러 부족이 모여서 혼란스러웠던 로마의 종교를 하나로 통합하고 신들을 위한 종교 의례 방식을 정한 누마의 법(Liber Numae)을 제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두 법의 실존 여부를 의심하고 있으며, 설령 존재했더라도 로마를 구성한 부족들이 추구하는 관습을 보완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라 추정한다.
로마 왕국 시대엔 '모스'가 왕의 칙령과 더불어 로마법으로 기능했고, 로마 공화국 초기엔 로마 사회를 유지하는 유일한 규정이었다. 폰티펙스 막시무스로 대표되는 사제들은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외에도 특정 사건과 관련된 '모스'를 해석하여 원로원에 보고하는 의무가 있었고, 집정관 등 고위 행정관들은 모스에 따라 형벌을 집행했다. 그러나 고위 행정관과 사제직을 독점한 파트리키 입맛대로 해석했기 때문에 플레브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플레브스들은 성산 사건으로 대표되는 정치 투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귀족들 입맛대로 해석되는 '모스'를 대체할 성문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그 결과 십이표법이 제정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성문법이 제정되어 로마법의 근반이 되었다. 하지만 성문법이 다루지 못한 부분에서는 모스가 계속 적용되었고, 로마인들의 가치관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3. 도덕적 관념으로서
대 카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페스투스 등 로마 학자들에 따르면, 모스 마이오룸에는 다음의 도덕적 가치가 담겨 있다고 한다.- 피데스(fides): 시민간의 신뢰, 충실함, 선의 등을 포괄하는 개념. 구두 계약이 흔했던 로마 사회에서 약속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되었다. 피데스는 로마 다신교에서 신뢰, 성실, 선의의 여신으로 신격화되었으며, 카피톨리누스 언덕 언덕 꼭대기에 자리잡은 유피테르 신전 인근에 이 여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 세워지기도 했다.
- 피에타스(Pietas): 조국, 부모, 가족에 대한 충성, 경의, 사랑 등을 포괄하는 개념. 키케로는 피에타스를 "신들에 의거한 정의"라고 규정했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에서 트로이가 멸망했을 때 늙은 아버지와 아내 등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새 나라를 건국하라는 신들의 뜻에 충직하게 따른 아이네이아스를 피에타스의 화신으로 묘사했다. 피에타스 역시 로마 다신교에서 여신으로 신격화되었고, 피에타스를 모시는 신전이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건설되었다.
- 레릴기오(Religio)와 쿨투스(Cultus): 레릴기오는 라틴어 동사 레릴가르(religare: 묶다)와 연관된 용어로, '신들의 평화(pax deorum)'를 유지하기 위해 종교 의식을 거행함으로서 신과 인간 사이의 유대를 돈독히하는 것을 의미한다. 쿨투스(Cultus)는 종교의식을 적극적으로 준수하고 올바르게 실행함을 의미한다. 로마인들은 종교의례를 올바르고 성실하게 수행한다면 신들이 로마를 변함없이 지켜주리라 믿었다.
- 디스키플리나(Disciplina): 규율로 번역되는 개념. 젊은이들을 군사적으로 교육 및 훈련시켜서 규율에 엄중히 따르는 것을 중시한다. 로마 사회의 군국주의적인 특성이 드러나는 도덕 관념이다.
- 그라비타스(Gravitas)와 콘스탄티아(Constantia): 그라비타스는 위엄있는 자제력을 의미하고, 콘스탄티아는 꾸준함 또는 인내를 의미한다. 로마인은 어떠한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하며, 타인 앞에서 일절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주라고 요구받았다.
- 비르투스(Virtus): 용맹, 남성성, 용기 등 남성다운 면모를 강조하는 관념. 오직 로마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성만 이 도덕적 가치를 가질 수 있고, 이를 함양하여 위업을 달성한 뒤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로마 남성의 의무라고 여겼다. 로마 다신교에서 용맹의 남신 비르투스로 신격화되어 명예의 신 호노스(Honos)와 함께 한 신전에서 모셔졌다.
로마인들은 이 도덕적 관념을 충실히 따른 자는 디그니타스(Dignitas)를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디그니타스는 가치, 명예, 존중에 대한 평판을 가리키는 용어로, 로마인으로서 의무를 충실히 지킨 자는 동료들 사이에서 이 가치를 소유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디그니타스를 충분히 쌓으면 사회적 명예와 능력, 영적인 힘 등을 종합한 개념인 아욱토리타스(Auctoritas)를 얻을 수 있게 되며, 아욱토리타스를 얻은 자는 신들의 총애를 입어 자신은 물론이고 가문 대대로 복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겨졌다. 고대 로마 정치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아욱토리타스'를 얻는 것이었다.
4. 가정과 사회에서
로마인 가정(Familia)[1]을 이끌어갈 핵심 인물인 파테르 파밀리아스(pater familias)를 맡은 이는 단연 '아버지'로 대표되는 연장자 남성이었다. '모스'는 아버지에게 막대한 권한을 인정했다. 아버지가 잘못을 저지른 자식과 아내 또는 노예를 체벌하는 것은 합법적인 권한 행사로 간주되었으며, 심지어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더라도 간섭받지 않았다. 반대로, 자식이 아버지를 해칠 경우에는 사회 질서를 문란하게 만든 최악의 범죄자로 간주되어 극형에 처해졌다.다만 모스는 아버지가 이 권한을 적당히 행사해 가족의 행복을 지키고 가족을 대신하여 책임감있게 행동하는 것 역시 요구했으며, 이에 부응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사회적 질책과 압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 또한 남성은 전장에 나가거나 경작하는 데 전념하고, 여자는 직조와 집안일을 하거나 노인들을 돌보는 것이 권장되었으며, 남자들의 일에 여자가 나서거나 여자들의 일에 남자가 끼여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로 간주되어 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이러한 로마 가정에 대한 모스의 개념은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로마인들은 대부분 파트로누스(후원자)와 클리엔테스(피후원자) 사이의 쌍무적인 의무 관계를 맺었다. 파트로누스와 클리엔테스 모두 서로간의 의무를 준수해야 했다. 파트로누스는 클리엔테스를 보호해주고 클리엔테스가 행하는 사업 내지 가족사를 지원하며, 클리엔테스가 공직에 출마할 경우 그를 도와줘야 했다. 클리엔테스 역시 파트로누스가 선거에 출마할 경우 물신양면으로 지원해야 하며, 파트로누스가 전쟁에 나선다면 그를 따라 종군할 의무가 있었고, 파트로누스가 포로로 잡히면 몸값을 마련해야 했다. 이러한 관계는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후대로 세습되었으며, 해방노예는 이전 주인들의 클리엔테스로 포함되었다.
5. 공직 활동에서
공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고대 로마의 남성 시민들에게 있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었다. 공직에는 정치, 군대, 법률, 사제직 등 여러 분야가 포함되었다. 쿠르수스 호노룸(명예로운 경로)은 정치 활동에서 표준 절차로 자리잡았으며, 이 경로를 준수하는 것은 모스를 따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법학과 웅변술을 함양한 상류층 구성원들은 변호인, 검사, 판사의 역할을 수행하며 명성을 쌓아가는 것을 추구했다.로마 사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군대와 농업이었다. 로마 시민은 40세까지 평시에는 토지를 경작하고 전시에는 전쟁에 참여하는 의무를 지킬 것을 요구받았다. 이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 자는 모범적인 시민으로 추앙받았으나, 이를 회피하는 자는 모스를 위배한 자로서 로마 시민이 될 자격이 없다고 간주되어 노예로 강등되거나 사형에 처해지는 등 중벌에 처해졌다.
로마인들은 종교 관습을 국가에 대한 봉사와 분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집안에서는 가정의 수호자인 라레스를 숭배했고, 공적으로는 로마를 보호할 정도로 강력한 권능을 가진 유피테르 등 최고 신들을 숭배했다. 그럼으로써 신들의 은총을 얻는다면, 자연히 로마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아울러 로마가 지중해 전역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복속된 민족들의 신들 역시 존중받아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위한 신전을 세워줬다.
6. 기타
- 자살: 로마인들은 자살을 품위 없는 삶을 접고 죽음을 택한 고귀한 죽음의 한 형태로 여겼다. 로마 문학가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서다 도저히 승산이 없자 자살을 택한 소 카토, 네로 황제에 의해 자살을 명령받은 후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한 페트로니우스, 네로의 스승이었다가 은퇴 후 피소 음모에 연루되어 자살을 명령받고 목숨을 끊은 세네카를 '고귀한 죽음을 스스로 택한 전형적인 로마인'으로 묘사했다.
- 클레멘티아(Clementia): 패배자를 보복하지 않고 관대하게 대하거나 하급자의 고통을 바라보고 불쌍히 여기는 상급자의 다정함을 일컫는 용어로, 흔히 관용으로 번역된다. 로마 학자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권력을 쥐고 있지만 분노와 잔인함에 자신을 지배하지 않고 자비로운 마음을 품고 부정적인 충동을 극복하는 사람들만이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봤다. 키케로는 로마에 항복하고 복종하는 자들에게는 관대해야 하지만 반항하는 자들에게는 무자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오티움(otium): 여유를 즐기는 태도를 의미하는 라틴어 용어로, "하루종일 일만 하는 것은 노예나 하는 것이고 자유민은 여유 생활을 가져야 한다"고 여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로마 학자들에 의해 '모스'에서 추구해야 할 가치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키케로는 휴식을 취하면서 책을 읽거나 철학적 사고를 하는 것은 로먀 시민의 덕목이라고 주장했으며, 세네카는 부패한 사회에 매몰되지 않고 은퇴한 후 평온한 휴식을 맞이하는 것을 최고의 복이라고 밝혔다.
- 루스티키타스(rusticitas): 소박한 생활을 항시 유지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라틴어 용어. 로마 학자들은 사치품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소박한 시골에서 농사에 전념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 중 하나라고 여겼다. 대 카토는 로마가 동방에 진출한 이래 동방에서 흘려들어온 사치품으로 인해 퇴폐 풍조가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선조들의 소박한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7. 위상
대다수가 농민 출신이었기에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던 로마인들은 모스 마이오룸을 절대선으로 간주하고 이에 위배되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고 해도 가차없이 버려야 한다고 여겼다. 시인 엔니우스는 "로마는 고대 관습과 위인들 위에 세워졌다"며 모스 마이오룸을 끝까지 받들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대 카토는 기원전 155년 그리스에서 건너온 철학자들이 로마의 젊은 귀족들을 상대로 강연해 열띤 호응을 얻었을 때 이를 불쾌하게 여기며 "로마의 법과 선조들의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에토니우스의 저서 <문학과 수사학>에 인용된 기원전 92년 감찰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법령에는 다음 문구가 기재되었다.'라틴 수사학'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과목을 시작한 사람들이 세운 학교에 젊은이들이 가서 하루 종일 빈둥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우리 조상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어떤 학교에 갈 것인지를 정했다. 조상의 관습과 성질에 반하여 만들어진 혁신은 잘못되고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학교를 유지하는 사람들과 학교를 다니는데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것이 우리에게 반갑지 않다는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키케로 등 공화정 말기의 옵티마테스 측 학자들은 과거에는 선조들이 모스 마이오룸을 충실하게 지켰기에 로마가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지만, 로마가 세계의 주인이 된 뒤에는 사치품이 범람하고 악습이 각지에서 스며들면서 많은 로마인들이 모스 마이오룸을 지키지 않게 되었고, 이로 인해 로마는 혼란에 빠지고 공화정이 위태로워졌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무지한 민중을 선동하여 권력을 쟁취하려는 포풀라레스가 이러한 경향을 부추겼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많은 현대 학자들은 오히려 모스 마이오룸을 고수하는 기득권층의 완고함 때문에 공화정이 위태로워졌다고 본다. 가령 농지법을 밀어붙인 그라쿠스 형제의 정적들은 그들이 호민관에 재선하려 들자 모스 마이오룸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극렬하게 반대한 끝에 그라쿠스 형제와 추종자들을 학살했다. 또한 원로원 중심의 질서 수호를 목표로 삼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내전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뒤 수많은 이들을 살해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조치는 오히려 탄압당한 이들의 증오와 혜택을 입지 못한 민중의 불만을 불러일으켜 공화정의 입지만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했다.
공화정 말기의 내전을 수습하고 지중해 세계의 절대 권력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제정을 추진하면서도 이를 선조들의 관습을 부활시키기 위한 것으로 포장하는 술수를 구사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공화정을 위해 이런 정책을 추진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최측근인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의 후원을 받은 문인들은 그를 모스 마이오룸의 부활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위대한 로마인으로 포장했다. 또한 모스 마이오룸의 도덕적 관념에 팍스(Pax: 평화)를 추가하면서, 팍스를 구현함으로써 시민이 더 이상 전쟁의 위협을 받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고 현 체제의 정당성을 홍보했다.
다만, 아우구스투스는 이 과정에서 모스 마이오룸을 본인과 그 직계 일가에 대한 의무와 그들의 도덕성 기준으로도 제시해, 원로원과 일정부분 타협의 여지를 두고, 자신 역시 모스 마이오룸에 종속된 몸임을 설파했다. 이는 그의 외손자이자 양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한 이후, 그가 원로원에게 합법적으로 받아낸 아우구스투스 가문(도무스 아우구스타)에 명시하는 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따라서 원로원과 로마군 모두는 아우구스투스 가문에 명기된 5~6명의 인물들에게 모스 마이오룸의 신성한 수호자로 찬사를 하게 됐다. 이때 아우구스투스가 요청해 원로원이 통과시킨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5명[2]이란,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 정식 양자로 공동황제에 오른 티베리우스, 티베리우스의 친동생으로 리비아의 둘째 아들인 대 드루수스[3], 대 드루수스의 아들 중 장남인 게르마니쿠스, 티베리우스의 아들이자 대 드루수스의 사위인 소 드루수스인데, 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과 황족들은 그 정통성을 모스 마이오룸에 따라 행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배경 때문에 옥타비아누스 시절의 아우구스투스가 선사받아 팔라티노 언덕 내의 사저에 걸어둔 시민관, 그가 보관한 황금 방패, 황금 창은 모스 마이오룸의 상징적인 형태로 인식됐고, 아우구스투스 가문에 명기된 6명과 이들의 직계[4]는 모스 마이오룸의 수호자이면서 이를 가장 먼저 실천해야 될 의무 속에서 신성 불가침권을 사실상 보장받았다. 그러나 5대 황제 네로는 외삼촌 칼리굴라 생전부터 황족 지위를 받지 못했고,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사위가 되면서 이를 받았음에도, 아우구스투스 가문에 속한 아우구스투스 직계를 제거하면서 스스로 모스 마이오룸의 수호자라는 지위를 훼손시켰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특유의 정치적 술수와 고도의 판단력 아래에서 만들어낸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라는 이름의 보호장치 역할이 이중적이었기에, 아우구스투스 직계를 건든 네로가 자멸한 결과를 낳았다.[5] 따라서 네로는 양날의 칼과 같았던 이것을 스스로 어긴 황제가 됐고, 각지 총독, 로마군, 원로원에게 3번에 걸쳐 국가의 적 선고를 받게 됐다. 이때 네로는 몰락 과정에서 모스 마이로움의 훼손이 공통적으로 언급됐고, 사후에는 정통성 자체를 모스 마이오룸의 훼손자라는 이름 아래에서 사실상 부정받았다.
이런 모스 마이오룸 아래에서의 로마 황제와 황가는 네로를 끝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가 막을 내리고, 플라비우스 왕조 수립 이후 성문화된 제위 계승법과 연설을 통해 강조된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아래에서 로마 황제의 통치 덕목 중 하나가 된다. 이렇듯 모스 마이오룸은 로마 제국 수립 후에도 로마인들에게 절대선으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모스 마이오룸은 콘스탄티누스 1세 이래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종교로 자리잡으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서기 4세기의 이교도 학자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는 로마의 지속적인 번영과 안정이 모스 마이오룸의 보존에 달려있다고 주장했지만, 기독교 시인인 프루덴티우스(Prudentius)는 전통에 대한 이러한 맹목적인 집착을 "늙은 할아버지의 미신"(superstitio veterum avorum)이라고 폄하하면서 기독교의 새로운 진리가 고대 로마의 열등한 전통을 대체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지, 유피테르를 모실 것인지 양자택일하라"는 요구를 받은 원로원이 이교도 의식의 공적 수행을 위해 적립되었던 모든 국가 기금을 회수하고 다시는 이교도 의식의 공공 행사나 이교도 사원의 유지 보수를 위해 국고를 쓰지 않는다는 법안을 발표하면서, 모스 마이오룸은 기독교적 가치관에 자리를 넘겼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에 로마의 관습법을 종합한 다이제스트가 출간되는 등, 모스 마이오룸은 동로마 제국 시기에도 여전히 관습법으로 존중받았다.
[1] 고대 로마에서 가문 내지 가족이라는 것은 단순히 오늘날처럼 혈연적인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정에서 일하는 하인 내지 노예까지 포함했다.[2] 당시 살아있는 사람 기준으로 한 5명을 말한다. 이들은 모두 타인에게 모범이 되고, 도덕적이고 신실한 의무 아래 검소함의 미덕, 가족에 대한 사랑 등을 수호하는 역할 등으로 찬사받았다.[3] 기원전 9년 당시 요절한 상황이나, 게르마니쿠스, 리빌라, 클라우디우스의 정통성 확보와 그의 사위인 소 드루수스에게 이중적으로 정통성을 부여할 목적으로 명시됐다고 평가된다.[4] 일명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율리아 아우구스타) 부부와 그들의 적통 가계로 불렸다.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 외에도 요절해 대가 끊긴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도 포함됐다. 이들의 가계는 최종적으로 브리타니쿠스가 그 마지막 적통으로 공인됐다. 참고로 네로는 출생 당시 외삼촌 칼리굴라가 황족 지위와 아우구스투스 가문으로 불린 카이사르 가문의 상속 및 일원 선언 자체를 거부해 그냥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피가 흐르는 귀족 정도로 취급됐다.[5] 여기에서 더 크게 문제가 된 것은, 네로가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 처남이자 법적 형제 브리타니쿠스 등을 제거하면서,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조각상을 원로원 회의장에 세우고 본가를 강조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 행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