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15:37:14

도나투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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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Donatism

1. 개요2. 시작3. 키프리아누스의 신학에 입각하여4.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적5. 진행

1. 개요

도나투스파는 기독교의 종파 중 하나이다. 중심은 카르타고의 주교 도나투스의 이론이다. 이 교파는 4~5세기 아프리카에서 번성했으나 7~8세기 이슬람카르타고 정복 이후 소멸되었다.

2. 시작

296년부터 305년, 로마 제국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통치할 때 교회에 대한 박해가 다양한 규모로 이루어졌다. 박해는 303년에 시작되었으며, 303년 2월에 나온 칙령은 기독교 서적을 불사르고 교회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자기네 책을 불태우도록 넘겨준 교회 지도자들은 '넘겨준 자'(traditores)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한 '변절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압툰가의 펠릭스로, 이 사람은 그 후 311년에 체칠리아누스를 카르타고의 주교로 임명했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자 배교자들의 처우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교황 측에선 배교자가 엄숙한 참회를 한 후 다시 성체성사를 할 수 있게 하였으나, 카르타고대주교 도나투스는 이런 배교자들이 성체성사를 하는 건 성령이 강림하지 않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그 지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압툰가의 펠릭스'와 같은 사람이 성직 임명에 개입한 데 대해 분노했으며, 그 결과 체칠리아누스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노라고 주장했다. 새 주교를 임명한 주교가 박해의 압력에 굴복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새 주교의 권위가 더럽혀졌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사태로 인해 가톨릭 교회의 성직 체계가 오염되었고, 교회는 마땅히 순결해야 하며 그러한 사람들이 섞이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388년, 아우구스티누스가 아프리카로 돌아왔을 때, 그 지역에서는 한 분리파가 아프리카 지역민들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주도적인 기독교 조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사회적인 쟁점들이 신학적 논쟁을 또한 뒤흔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이탈한 아프리카 교회의 지도자인 도나투스의 이름을 따라 이렇게 불렸다.)은 대체로 토착 주민들에게서 지지를 받았으며, 가톨릭 사상가들은 로마의 식민지 이주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3. 키프리아누스의 신학에 입각하여

이 일과 관련된 신학적 쟁점들은 매우 중요하고, 또 3세기에 아프리카 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카르타고키프리아누스의 신학에서 발견되는 긴장과도 직접 관계가 있다. 키프리아누스는 《보편 교회의 단일성》에서 서로 연관된 두 가지 중요한 신념을 옹호하였다.
  • 1. 교회의 분열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다.
    • 교회의 통일은 그 어떤 구실로도 깨뜨려서는 안 된다. 교회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구원의 가능성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다.
  • 2. 따라서 타락하거나 떨어져 나간 주교들은 성사를 거행하거나 교회의 성직자로 일할 모든 자격을 박탈당한다.
    • 그들은 교회의 테두리를 벗어남으로써 영적 은사와 권위를 상실했고, 그런 사람들을 사제주교로 임명해서는 안 되며, 그들에게 임명받은 사람은 부당하게 임명된 것이며, 그들에게 세례 받은 사람은 그릇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여겨야 한다.

그런데 어떤 주교가 박해를 받아 배교하고서는 곧바로 회개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키프리아누스의 이론은 서로 다른 두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 1. 그 주교는 타락함으로써 배교의 죄를 지은 것이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교회의 울타리 밖으로 나간 것이며 이제는 더 이상 성사를 온전히 거행할 수 없다.
  • 2. 그 주교는 회개함으로써 은총에로 회복되었으며, 따라서 계속해서 성사를 온당하게 거행할 수 있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첫 번째 견해를 따랐으며, 가톨릭 신자들은 두 번째 견해를 받아들였다. 정상적인 신학 논쟁에 4세기 초의 정치적 문제가 얽히고 부차적 의미가 더해져 훨씬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도나투스파는 토착의 베르베르인들로 이루어지고, 그에 반해 가톨릭파는 로마의 식민지 이주자들로 채워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비해 훨씬 더 확고하게 신약성경에 근거했다고 생각한 교회론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도전에 대응하였다. 그는 특히 기독교인의 죄성을 강조하였다.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인 '순수한 몸'이 아니라, 신자와 죄인들이 '섞인 몸'이라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복음서에 나오는 물고기 잡는 그물의 비유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근거로 이 이미지를 설명한다.

4.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적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거룩하다고 불릴 수 있는 걸까? 아우구스티누스가 볼 때 그 거룩함이란 교회 구성원들의 거룩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함이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는 성인(聖人)들의 모임일 수가 없는데, 그 구성원들이 원죄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거룩해지며, 이 거룩함은 최후의 심판 때에 완전해지고 최종적으로 실현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거룩함을 신학적으로 분석하면서 그에 덧붙여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내세우는 고결한 도덕 기준에 맞추어 살지 못한다고 비꼬았다. 그들도 자신이 공격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5. 진행

이 도나투스파로 인하여 카르타고에서는 폭동이나 집단 자살이 빈발했다. 도나투스파들은 주로 가난한 소작농들이 많았으며 지주들이 주로 믿는 정통파 기독교에 박해를 받았다. 도나투스파 신도들은 이 와중에 황제에게 중재를 청하게 된다. 그러나 첫번째는 도나투스 파가 져서 항소를 했고 결국 아를 협의회가 카르타고로 출발하게 된다. 그러나 도나투스파는 협상안이 가톨릭에게 유리하다고 생각되자 이를 거부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결국 황제는 평화를 위협하는 이에 대한 사형과 도나투스파 재산 몰수를 요구하여 많은 도나투스파가 추방되고 몇몇은 사형당했다. 그러나 교외에선 여전히 세력을 떨쳐 교회 봉합은 실패하였고 이들을 이단시하는 법률이 발렌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제정되었다.

반달족의 북아프리카 침략 당시 많은 도나투스파 신도들이 아리우스파인 반달족 군대를 쌍수를 들고 환영하였다 한다. 그러나 반달 왕국의 2대 군주인 후네리크가 아리우스파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박해하고, 이후 지도자들 일부가 보편 교회로 갈아탐으로서 이들은 다시금 박해의 대상이 되어 사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