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24 10:55:07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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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염수정 안드레아 당시 대주교(現 추기경). 수단 색상의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예.

1. 개요2. 역사
2.1. 초대 교회(A.D. 30~70)2.2. 고대 교회(70~476)2.3. 중세 교회(476~1517)
3. 가톨릭
3.1. 명의 주교
4. 정교회5. 성공회6. 나무위키에 항목이 있는 주교

1. 개요

/ Bishop / Episcopus[1]

기독교의 고위 성직자 중 하나로 성경에는 '감독'이라고 번역되어 있다.[2] [3] 한글 성경에서의 번역은 주교의 기능을, 천주교 내에서의 호칭은 주교의 지위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다. 즉 주교는 감독하는 성직자로서, 사제의 사목을 감독하고 교구를 대표, 총괄하며 이끄는 직책이다.

주교에 대한 경칭은 각하(閣下, Your/His Excellency)[4]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나 실제로는 외교 문서 외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 보통 주교님이라고 부른다.[5]

주교를 상징하는 색은 서방 교회 한정 자주색(Amaranth purple)이다.[6]

최초의 한국인 주교는 노기남 바오로 주교이다.

보편교회를 주장하는 가톨릭·정교회·오리엔트 정교회는 이 직책을 가지고 있으며, 신학적으로는 주교들이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해석된다. 즉 한국의 A주교를 임명한 주교는 한국 최초의 주교인 B주교일 것이고, 그 B 주교를 임명한 사람은 프랑스의 C 주교고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초대교회의 지도자였던 사도들이 나온다는 말. 이를 사도전승이라 한다.[7] 가톨릭정교회는 서로의 사도전승을 모두 인정한다. 이들 종파들은 주교단을 가지고 있으며 이 주교단들의 우두머리가 바로 해당 종파의 으뜸이 되는 구조이다. 구체적으로 주교단들의 우두머리는 다음과 같다.

개신교 중에는 성공회가 사도전승을 주장하며[8] 이에 따라 주교가 존재하고, 감리회에서는 주교에 해당하는 직책이 감독이라는 명칭으로 존재한다.[9] 루터교회는 각 관구에 따라 교회의 형태가 달라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힘드나, 북유럽의 루터교회에는 주교가 있다. 장로회도 원산지이자 본산인 스코틀랜드 국민교회에는 주교란 직위가 있기는 한데, 이는 그냥 청년회 감독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가톨릭교회정교회, 그리고 성공회의 성직자는 부제[10], 사제(신부), 주교 셋으로만 나뉜다. 즉 흔히 생각하는 주교 위의 성직자들, 곧 교황, 추기경, 총대주교, 수석 대주교, 대주교 등은 모두 주교품에 해당하는 성직자들이며 계급의 차이만 있는 것이다. 사실 이들을 뭉뚱그려서 죄다 주교라고 칭하면 지나치게 의미가 애매모호해진다. 교황과 보좌주교는 같은 주교품 성직자라도 하늘과 땅 차이다. 그렇다고 각 계급의 주교를 전부 구별해서 각자의 호칭대로 부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서[11] 주요한 계급만을 칭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것이 바로 교황(Pope), 추기경(Cardinal), 대주교(Archbishop), 주교(Bishop)이다.

정교회도 세계 총대주교(Ecumenical Patriarch), 각 교회의 총대주교(Patriarch), 대주교(Metropolitan), 관구장 주교(Metropolitan bishop), 주교(Bishop)로 직책 구조가 있다. 정교회에서 대주교에 해당되는 직책은 Metropolitan이지, Archbishop이 아니다.[12] 다만 일단 각 교회들이 스스로 교회들을 꾸려나가야 하다 보니 일단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세계 총대주교로서 존재하되 가톨릭교황보다는 그 권력의 세기가 약하다. 동로마라는 막강한 권력이 무너진 이상 옛날과 같은 수위권 분쟁이 다시 일어날 일이 없게 되었기도 하고. 성공회는 대주교(Archbishop)과 주교(Bishop)으로만 나눈다. 보통 관구장 주교를 대주교라 칭한다. 그리고 39개 관구는 서로 평등하기 때문에 39명의 대주교는 모두 평등하다. 다만 켄터베리 대주교가 모든 대주교와 '평등한 가운데 첫째'라고 불린다.

신부에서 주교급으로 올라가게 되면 하나의 정식 교구의 총책임자가 될 수 있다 대개 정식으로 설치된 교구는 주교가 교구장이 되긴 하지만, 면속구(고위성직자치구, 자치수도원구)의 경우에는 주교가 교구장이 아니다. 대목구나 지목구(가톨릭) 혹은 주교대리구(정교회)의 경우에는 공식적인 교구장은 대리구장을 파견한 교구의 교구장이 된다. 주교는 미사를 집전하는 것, 축성,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등의 권한을 가진다. 이와 같은 의식을 신부가 행할 때에는 전부 '신부가 속한 교구의 교구장 주교를 대리해서' 하는 것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아예 견진성사성품성사처럼, 원칙적으로는 주교만이 직접 집전할 수 있는 성사도 있다.

교황의 경우 그 자격 중의 하나가 바로 '로마 주교'이므로, 상징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이탈리아 로마교구는 다른 주교가 아닌 교황이 직접 주관한다.

신부가 되는 것만 해도 힘든 마당에 주교품 성직자에 오른다는 건 가톨릭이든, 정교회든, 성공회든, 꽤나 대단한 거다.[13] 가톨릭의 보좌 주교만 보더라도 일단 웬만한 엘리트 못지 않게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며, 최종적으로 교황의 재가를 얻어 서품되기 때문에 교황청 공식 기관지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에 서품 소식이 실린다.

가톨릭 교회법에서는 주교를 서품하는 데에[* 일반 평사제가 [주교, 대주교, 추기경 혹은 교황을 비롯한 주교 품위의 성직자로 서품받는 모든 경우를 말한다.] 적어도 주교 3명의 안수가 필요하다. 교회법 제1014조에는 "주교 축성식에서는 사도좌의 관면이 없는 한 축성 주례 주교는 적어도 2명의 축성 주교들과 함께 거행하여야 한다. 축성식에 참석한 모든 주교들이 이들과 함께 주교 피선자를 축성하는 것이 매우 적합하다."고 명시되어 있다.

주례주교이던 축성주교이던 교회법상 합법적으로 서품되고 그 직위를 유효하게 가진 주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 어떤 주교품을 받지 않은 평사제가 교황에 당선된다면, 즉위식에 주교서품식도 해야 하는데, 그 주례자는 오스티아 명의의 주교급 추기경이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가령 교구장 주교로 임명된 사람이 평사제여서 주교로 새로 서품해야 한다면, 전임자가 주례 주교가 되는 것이 일반이지만, 어떤 사정이 있어서 인접 교구의 주교나 교황대사가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주교구의 전 교구장이었던 김지석 야고보 주교의 경우 서품 주례 주교가 전임자였던 지학순 다니엘 주교였고, 축성 주교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과 이반 디아스 대주교였다. 광주대교구 옥현진 시몬 보좌주교의 경우 서품 주례 주교는 현 교구장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였고, 축성주교는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와 최창무 안드레아 대주교였다. 두 사람은 광주대교구의 전임 교구장이었다. 마산교구배기현 콘스탄틴 주교는 전임 교구장인 안명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와 박정일 미카엘 주교가 생존해 있음에도 춘천교구의 전임 교구장이었던 장익 십자가의 요한 주교에게서 주교 서품을 받았다.

한 주교가 서품 때 받은 안수를 준 주교, 또 그의 서품 때 안수를 준 주교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전세계의 가톨릭 주교단이 나뭇가지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14]

이 때문에 보좌 주교를 포함한 가톨릭 주교 서품식에는 경사스러운 일이어서 현역 주교들은 물론 은퇴 주교들도 참석해 축복해 준다. 임명장은 교황청이 해당 국가에 파견한 교황대사가 교황을 대신해 전달한다.

어떤 성직자가 관구장 대주교[15]로 임명되었다면, 견대라고 불리는 팔리움을 받는다. 옛날엔 교황대사가 바티칸에서 팔리움을 받아 대주교에게 걸어 주었는데, 베네딕토 16세 이후 6월 29일베드로,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바티칸으로 관구장 피명자를 불러 교황이 직접 걸어주는 것으로 제도가 바뀌었다.

이렇게 특정 국가에 국한하지 않고 전세계 가톨릭의 최고위 기관에서 인정하는 직위인 만큼, 주교라는 칭호가 붙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 성직자는 비범한 거다.

정교회에서도 신학대학원 이상 수료자에 수도사제[16]라는 조건이 붙는다. 모든 주교들은 공식적인 자기 소속의 수도원이 있다. 선출은 재치권과 최고 상소심권을 가진 총대주교(혹은 대주교)를 의장으로 한 지역 시노드에서 실시한다.[17]

가톨릭의 경우, 주교가 되면 자신만의 고유한 문장(紋章)을 갖게 된다. 이는 주교가 한 지방의 영주를 겸하던 중세 유럽[18]에서 비롯된 것으로, 특히 신성로마제국주교공이 유명하다. 보통 소속 교구나 사목 방침을 상징하는 도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단의 술이 달린 모자[19]를 그려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를 생략한 간략한 형태의 문장을 사용하는 주교도 있다. 1983년 교회법전에서는 주교의 문장 사용을 의무화하였는데, 그 이전에 서품된 주교는 아예 문장을 갖지 않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두봉(René Dupont) 주교(초대 안동교구장)는 "문장은 귀족이나 갖는 것이지, 나 같은 시골 신부에게는 필요치 않다"며 문장 사용을 사양하였다.

주교의 경우, 주요 사목행사에 참석할 때 쓰이는 성가가 따로 있다. "보아라 우리의 대사제"(Ecce Sacerdos Magnus. 성가 번호 304번)라는 노래인데, 주교가 친히 집전하는 중요 미사(예: 예수부활대축일, 예수성탄대축일, 성모승천대축일)나 주교 서임 및 교구장 착좌식, 주교가 집전하는 교회 내 의식(예: 부제, 사제 서품식, 신자 견진성사) 등의 입당송으로 즐겨 쓰인다. 때문에 '주교 영접가'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2. 역사

2.1. 초대 교회(A.D. 30~70)

열두 사도들과 바울로, 이외 부활의 증인들이 활동하던 초대 교회 시기에는 주교 제도가 없었다. 초대 교회 시기에는 지금과 같이 직분이 체계적으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바울편지에는 후일 사제부제로 일컬어지는 장로 또는 집사를 ‘감독자’라고 부르는 구절들이 있다.[20] 뿐만 아니라 제 2 바울 서신을 제외한 바울 서신[21]에서 직분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감독’은 등장하지 않고, 대신 신분적인 직분이 아닌 ‘은사(charisma)’에 따른 다분히 기능적인 직분이 등장한다[22].

아울러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는 교회가 무질서를 겪고 있었음에도 지도자들에게 호소하거나 책망하는 언급이 전혀 없으며 성찬을 주재하거나, 무질서한 예배를 바로잡을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데 만일 고린도 교회에 지도자들이 존재하였다면 그런 지도자들에게 호소하거나 책망하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23] 고린도 전서 끝에서는 스데바나와 그의 가족 등 교회의 유력 인사들이 언급되나 바울은 그들의 성도 섬기기가 스스로 맡은(etaxan heautous) 것이라 명시하며 바울은 그들을 그러한 지위에 임명한 적이 없었다.[24][25] 그 뿐만 아니라 바울의 친서로 인정되는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선처해 주기를 호소하면서 후대 교회에서 행사되었던 교도권에 따라 명령하지 못하고 신중한 수사를 통해 설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26]

심지어 제 2 바울 서신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기록된 에베소서에서도 감독은 등장하지 않고 사도예언자, 목사교사가 등장할 뿐이다.[27] 또한 바울을 파송했던 안티오키아 교회에서도 감독은 나타나지 않고 선지자와 교사들이 교회를 이끌었으며, 로마서를 수신한 로마 교회에서도 당시 감독은 존재하지 않았다.[28] 요컨대 초대 교회에는 위계적인 직분이 부재했고 교회의 운영은 예수로부터 직접 가르침 받은 이들과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 예수의 형제들, 그리고 은사를 소유한 이들에 의해 다분히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주교가 없었던 만큼 교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열두 사도들과 바울은 경계에 제약을 받지 않고 모든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웠고, 세운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돌보았다.

2.2. 고대 교회(70~476)

이러한 상황이 변화하는 것은 첫 세대 지도자들이 사망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초대 교인들이 하나 둘 씩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이들의 증언을 수록한 문서(훗날 신약성경이 되는)들이 기록되기 시작했듯, 초대 지도자들의 공백을 채울 변화된 제도 또한 교회에 필요했다. 이 과도기에 해당하는 100년경에 기록된 디다케(Didache)에서는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성찬을 나눈 후에야 비로소 감독들과 집사들을 선출했다고 증언한다[29]. 또한 감독들은 다른 감독에 의해 임명되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의 신자들이 스스로 감독을 선출[30] 하라고 지시하고 있어 선임 주교의 안수에 의한 임명을 전제하는 사도전승의 개념은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클레멘트의 서신에서는 발신자를 복수형으로 표기하여, 당시 로마에 복수의 감독들이 존재하였음을 암시한다.

이후 발생한 것이 1인 감독(주교)제도이다. 오늘날과 같이 지위 개념의 주교가 등장하는 가장 이른 문헌은 안티오키아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서신이다.[31] 로마를 비롯한 일곱 교회에 보내는 이그나티우스의 서신에는 성직자의 삼중직, 즉 감독(주교), 장로(사제), 집사(부제)가 등장하는 것이다(The Westminster Dictionary of Church History, 1971).[32] 이보다 늦은 신약의 목회서신(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에서도 이와 같은 삼중직이 등장하여 2세기 초중반에 이르러서는 주교를 위시로 한 교회 제도가 정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주교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에서 태동하였고 발전, 정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Bishop, The Westminster Dictonary of Church History, 197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교제가 당대 지역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나타난 제도는 아니었지만 곧 교회의 표준 제도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주교는 등장하자마자 오늘날과 같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지만 점점 교회의 핵심적인 지도자로 부상했다. 특히 박해와 맞물려 주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보존, 계승하고, 교회를 변증하는 일을 하면서 중요성이 더해졌다. 2세기에 등장한 주교들을 흔히 ‘속사도 교부(Post Apostolic Fathers)’, 혹은 ‘사도적 교부’라고 부른다. 이 시기 박해와 더불어 이단이 등장한 것도 주교들의 권한을 강화한 계기가 되었다. 마르키온(Marcion)과 몬타누스(Montanus), 영지주의(Gnoticism)의 도전으로 그리스도교의 경전과 교리를 체계화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 역할이 자연스레 주교에게 맡겨진 것이다. 이로써 주교는 단순히 감독(監督)을 넘어 명실상부한 교회의 우두머리[主敎]가 된 것이다.

고대 교회 시기 주교제가 크게 변화한 것은 역시 콘스탄티누스 대제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절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고 국교화 되면서부터이다. 오랜 분열을 수습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교회의 통일 또한 간절히 바라며 아리오스(Arios)에 의해 빚어진 삼위일체 논쟁을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일단락했다. 그리고 황제공의회 기간 동안 국가 행정구역교회의 행정구역을 일치하도록 조정하여 비로소 오늘날과 비슷한 교구(diocese) 제도가 완비되었다. 또한 제국교회 내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특정 교구가 다른 교구보다 우위가 되었다. 모든 교회의 어머니인 예루살렘 교구,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수도이자 로마 제국의 대도시인 안티오키아 교구,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이자 역시 로마 제국의 대도시인 알렉산드리아 교구, 옛 수도 로마 교구, 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가 바로 그러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교구 간의 차이가 발생하여 대교구와 총대교구가 나타났다. 앞서 언급한 로마 제국 내 주요 대도시에 위치한 5대 교구는 5대 총대교구로 불리며 교회 내에서 막강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는 총대주교대주교를, 대주교가 주교를 압도하는 교권주의가 나타나지 않았다. 주교가 자신이 맡은 교구 내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긴 했어도 주교들 사이에서 종속 관계가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정교회에서 주교 간 독립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것처럼, 고대 교회의 주교제가 그러했던 것이다.

고대 교회 시기에 주교를 선출할 때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의견이 조화롭게 반영되었다. 성직자들이 평신도의 의중을 파악한 뒤 해당 인원을 주교로 선출했던 것이다. 이로써 성직자들의 입맛대로 주교를 선출하지도, 평신도들의 인기로만 주교를 선출하지도 않을 수 있었다.[33] 그리고 주교를 서품할 때는 인근 3개 교구의 주교들이 찾아와 안수를 해야 했다. 이로써 고대 교회는 성직자와 평신도, 교구와 교구 간에 조화가 잘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대 교회 시기부터 로마 교구가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는 주장이 천주교인들로부터 흘러나오고 이전의 문서에서도 그런 식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일정 부분 맞는 측면도 있다. 동방의 총대주교들은 로마 총대주교를 모든 총대주교 중 첫째라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로마 총대주교가 다른 총대주교를 압도하는 지위에 있다거나 종속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로마를 첫째라고 인정한 까닭은 특별한 성경적인 ‘약속’이나 법적인 ‘권위’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묘지가 로마에 있었기 때문이다[34]. 게다가 도시 로마 제국 로마에 있어서 갖는 의미가 특별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에 있는 교회가 지방에 있는 교회보다 더 많은 힘을 떨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2.3. 중세 교회(476~1517)

사실상 로마 제국의 마지막 1인 통치자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그의 두 아들이 각각 동부와 서부를 다스리는 황제가 되었고, 서부(통칭 서로마 제국)가 동부에 비해 이민족들의 침입에 시달리며 멸망하자 주교제에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세속 정부가 무너진 상황에서 로마 서부에서 유일한 총대교구였던 로마의 주교가 급부상한 것이다. 451년 훈족 아틸라로마로 침공하자 로마 주교 레오 1세아틸라와 협상을 벌인 결과 훈족로마를 약탈하지 않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한 세기 후의 인물인 로마 주교 그레고리오 1세 또한 권력의 공백기 동안 로마 교구의 위상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로마 서부 지역에서는 고대 시기 각 교구 간 독립성을 무시한 채 로마 교구가 우월성을 주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이 장차 동서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 로마 주교들이 자신들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이미 3세기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로마 주교 빅토르 1세(186/9~197/201)는 각 교구 간 차이를 보이던 부활절 날짜를 로마식으로 강제 통일을 시도하였으나 리옹이레네오에 의해 저지 되었다.[35] 기독교가 공인, 국교화된 4세기에는 더욱 노골적인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율리오 1세(337~352)는 로마 교회는 주교의 지도 아래 모든 탄원을 심사하는 곳이라고 주장했다. 다마소 1세(366~384)는 마태복음서 16장 18절을 처음 로마 주교의 권위 강화에 사용하였다. 다마수스는 로마 주교좌만이 ‘사도 전승의 보좌’라고 칭하기까지 했다. 시리치오(384~399)는 ‘교황(Papa)’이라는 호칭을 로마 주교에만 국한시켜 사용하게끔 했다. ‘파파’라는 말은 본래 동방에서는 주교들을 일컫는 일반 명사였으나 서방에서는 로마 주교를 일컫는 고유명사로 변화하였다.[36] 인노첸시오 1세(399~417)는 모든 중요 사항을 주교 회의에서 검토한 후 로마 주교가 이를 최종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보니파시오 1세(418~422)는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영원한 효력을 가진다고 주장하면서 항소를 금지하려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레오 1세(440~461)와 그레고리오 1세(590~604) 같은 교황들이 나올 수 있었고, 서유럽의 다른 교구는 독립성을 잃고 로마 교구 밑에 예속되기 시작했다. 권력 독점을 향한 로마 주교들의 노력은 훗날 위서로 판명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와 ‘이시도르 문서’를 통해 문헌적으로 뒷받침되었다. 위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와 제국 서쪽을 교황 실베스테르(314~335)에게 증여하였으며 교황이 황제의 표장, 자색 도포 및 궁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고 다른 총대교구에 대한 지상권을 허락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문서이다. 그러나 사실 이 문서는 로마 주교를 모든 교회의 으뜸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위서의 여부는 비평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오랫동안 사실로 받아들여졌다.[37] 또한 로마 주교는 800년 샤를마뉴서로마 황제로 대관하였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동로마 황제를 비롯한 동방 교회의 반발을 샀다. 교황에 의한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은 동로마 제국프랑크 왕국 사이의 전쟁으로 번질 만큼 심각한 교황의 월권 행위였다.

이와 같은 로마 주교수위권 주장과 행동은 필연적으로 동방 교회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로마 제국의 동부와 서부 사이에는 이전부터 크고 작은 갈등이 있어왔다. 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교회로 국한시킨다면 전례 문제와 교리[38] 심지어 옛 수도 로마와 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간의 미묘한 신경전도 있어왔기 때문이다.[39] 결국 1054년 교황이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파문하고, 역으로도 파문이 이루어짐으로써 동서 교회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야 말았다.

중세 시대에도 동방 교회는 고대 교회 시기처럼 교구와 교구, 주교와 주교는 서로 동등한 권위를 지녔고 선출 방식도 고대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 받았으나 서방 교회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교황의 지원 아래 황제의 위에 오른 프랑크 왕국샤를마뉴는 서방 교회의 다양한 전통과 관습을 로마를 기준으로 정비시키기 시작했다. 미사는 로마 양식에 따라 부활절 날짜를 비롯하여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였던 교회력도 로마를 기준으로 맞춰졌다. 1077년에 이르러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주교의 서임권이 교황에게만 있다고 천명했다. 그러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발했다. 여기서 황제가 주교 서임권 문제에 반대 의견을 표명한 것이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의아할 수 있지만 고대의 주교 서임 과정을 보면 그렇지 않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이래 기독교는 사회와 동떨어지지 않았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곧 제국의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첫 에큐메니컬 공의회인 제 1차 니케아 공의회는 성직자가 아닌 세례도 받지 않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했다(물론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만 하더라도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는 아니었다). 즉 고대 교회 시기 교회의 문제는 성직자만의 몫이 아닌 평신도의 것이기도 해서 사회와 교회가 긴밀히 소통될 수 있었다. 여기서 '교회의 문제'에는 주교 서임도 포함되어서, 주교는 앞서 언급했듯 오늘날과 달리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의 의중에 합한 이로 선출될 수 있었다. 그런데 1077년에 이르러 교황은 주교를 자신의 의중으로만 뽑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이에 황제가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 카노사의 굴욕으로 하인리히 4세그레고리오 7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그레고리오 7세를 교황위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위를 둘러싼 갈등으로 황제의 권위가 추락하여 일방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없게되자 하인리히 4세의 뒤를 이은 하인리히 5세는 1122년 보름스 협약(Concordat of Worms)을 통해 교황에 의한 주교 서임을 인정하였고 대신 교회 재산은 세속 군주가 하사하는 내용으로 이 문제에 합의를 보았다. 이 협약에서 애매한 부분은 1139년 제 2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좀 더 다듬어져, 서방교회에서는 교황이 주교를 서임하는 전통이 확립되었고, 각 교구는 로마 교구 밑에 확실히 종속되었다.[40]

이후 서방에서의 주교 제도는 중세 후기, 십자군 전쟁흑사병 발발 등으로 교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타락함으로써 1인 주교가 복수의 교구를 담당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교구에서 나오는 성직록을 얻기 위해 실제로 임지에 부재하면서도 해당 교구를 관할할 권리를 받았는데, 이는 교회의 타락을 가속화했다. 예를 들어 1517년 종교개혁 당시 면벌부 판매를 종용했던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자그만치 교구를 3개나 겸임했다. 결국 이와 같은 행태는 종교개혁을 야기하여 서방 교회를 분열시켰다. 로마 가톨릭 자체 내에서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 나머지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한 주교의 복수 교구 겸직을 폐지하여 종전처럼 1인 주교가 1개 교구만을 맡도록 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3.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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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한국 천주교 주교단의 단체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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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의 문장 대주교의 문장
“주님께서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에게 특별히 맡기시어 그 후계자들에게 전수되는 임무가 영속하듯이, 사도들의 교회 사목 임무도 영속하며 주교들의 거룩한 품계에서 끊임없이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공의회는 주교들이 신적 제도에 따라 사도들의 자리를 계승하였다고 가르친다. 주교들은 교회의 목자들이므로, 주교의 말을 듣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고 주교를 배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가톨릭 교리서 862항


교황의 주교 서임식

한국 가톨릭에는 서울대교구, 광주대교구, 대구대교구를 포함한 16개 교구에 군종교구를 합친 총 17개 교구에 현직 26명[41] , 전직[42] 14명을 합쳐 총 40명(2016. 06. 현재)이 소속되었다. 여기엔 주교뿐 아니라 대주교, 추기경 등 역시 포함된다. 한편 한국 가톨릭의 대교구 교구장 주교(추기경 또는 대주교)들은 각각 서울관구, 대구관구, 광주관구의 관구장을 겸한다. 자세한 내용은 교구 문서를 참고.

교구는 17개이지만, 교구마다 1명씩의 현직 주교(교구장)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교구장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존재하는데, 2016년 6월 현재 북한에 속하는 세 교구인 평양교구함흥교구, 덕원자치수도원구의 주교는 각각 서울대교구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과 춘천교구김운회 루카 주교,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장인 박현동 블라시오 아바스[43]가 겸직하고 있다. 단, 종교의 자유가 사실상 봉쇄된 북한 지역에서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에 '교구장 서리'라는 직함으로 표기된다.

반대로 한 교구에 2인 이상의 주교가 있는 경우도 있다. 서울대교구의 경우 2013년까지 교구장인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과 보좌주교인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2인만 현직으로 존재했으나 2014년 1월 유경촌 디모테오 신부 및 정순택 베드로 신부, 2015년 7월 14일에는 손희송 베네딕토 신부가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되어(서품식 2015년 8월 28일) 주교급 성직자가 5인으로 늘어났다.

그 후 2016년 3월 서울대교구 총대리직을 수행하던 조규만 바실리오 보좌 주교가 은퇴하는 김지석 주교의 후임으로 원주교구장으로 임명함으로써 다시 주교급 성직자가 4명으로 줄어들었다가, 2017년 7월 구요비 욥 신부가 보좌주교로 임명되며, 은퇴한 정진석 추기경을 포함하면, 서울대교구에는 총 6명의 주교급 성직자가 소속되어 있다.

서울대교구 다음으로 규모가 큰 수원교구의 경우에도, 2015년 6월까지 교구장인 이용훈 마티아 주교와 보좌 주교인 이성효 리노 주교 2인만 현직으로 존재하였으나, 문희종 세례자 요한 신부가 보좌주교로 임명되어(서품식 2015년 9월 10일) 주교급 성직자가 3인으로 늘었다.

광주대교구, 대구대교구[44], 대전교구에는 각각 교구장 1인, 보좌주교 1인의 2인의 현직 주교가 존재하며, 인천교구의 경우에도 2명의 현직 주교가 존재했으나 2016년 5월 30일 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의 갑작스런 선종으로 보좌 주교인 정신철 세례자 요한 주교가 교구장 서리를 거쳐 2016년 12월 26일 제 3대 교구장에 착좌식을 가지고, 교구장이 되었다. 부산교구 역시 황철수 교구장의 사임으로 교구장 서리인 손삼석 주교만 현직 주교로 있다.

위 내용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교구에는 교구장 주교 1명이 존재한다. 보좌주교는 교구장 주교의 보좌역이며 보좌주교는 과거 존재했던 폐쇄교구의 주교 명의를 사용하며, 자신이 현재 봉직한 교구에 실권이 없다. 교구장 주교 명의로 업무를 본다. 아래 명의 주교 참조.

추기경도 자신이 교구장으로 있는 교구의 주교(대주교)가 될 수 있다. 유의할 점은 추기경직만으로 교구장을 자동적으로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주교직(교구장직)을 은퇴한 추기경은 일선을 떠난 원로 사제일 뿐이다. 물론 추기경직은 종신이다.

한국 가톨릭의 전, 현직 주교들은 물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같이 이미 선종한 주교들까지 모두 합치면 총 79명이 있었으며, 그 명단은 이곳에서 확인 가능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7년 6월 28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구요비 욥 신부를 천주교 서울대교구 신임 보좌주교로 하고, 천주교 제주교구 문창우 비오 신부(54세, 1996년 사제 수품)를 제주교구 부교구장 주교[45]로 임명했다.

http://www.gcatholic.orghttp://www.catholic-hierarchy.org에서 전세계의 가톨릭 주교 목록을 볼 수 있다.

3.1. 명의 주교

名儀 主敎, Titular Bishop, Episcopus titularis

주교로 서품되었으나 특정 교구를 교구장으로 책임지지 않는 주교. 교황청 각 부서의 직책에 종사하는 주교(ex) 교황청 궁내원장(Prefect of Pontifical Household)인 게오르크 겐스바인 대주교(Archbishop Georg Gänswein). 현재 이탈리아 마츠게주의 마체라타 현에 있는 폐쇄 교구인 Urbs salvia의 명의 대주교), 보좌 주교 등이 명의 주교로 임명된다. 즉, 명의 주교들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는데, 예를 들어 구요비 욥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는 북아프리카 알제리에 있던 옛 로마 제국의 속주 도시인 스파스페리아의 명의 주교이다.

한편,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로부터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임명받아 2017년까지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재직했던 게르하르트 루드비히 뮐러 추기경은 현재도 독일에 존재하는 레겐스부르크 교구의 명예 주교이다.

이는 "가톨릭 교회법 제 2권 하느님의 백성 제 2부 개별 교회와 그 연합 제 1장 개별 교회와 그 안에 설정된 권위 제 2절 주교 제 2관 교구장 주교 제 402 조 ① 직무의 사퇴가 수리된 주교는 자기 교구의 명예(퇴임) 교구장의 명의를 보존하고, 본인이 원하면 그 교구 내에 거주지를 보존할 수 있다. 다만 특수한 사정 때문에 사도좌가 달리 조처하는 특정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에 따른 것으로 실제로 뮐러 추기경은 레겐스부르크 교구장직 사임 이후 다른 교구의 명의 주교로 임명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전임교황 베네딕토 16세는 1977년 3월 바오로 6세 교황으로부터 뮌헨-프라이징 대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가 그해 6월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뮌헨-프라이징 대교구장직은 사임했으나 명의로 남았고, 1993년 주교급 추기경에게 주어지는 Velletri-Segni의 명의 주교가 되면서 '사도좌가 달리 조처하는 특정한 경우'가 되었다. 2002년 주교급 추기경단장에게 주어지는 오스티아의 명의 주교가 되었다.

4. 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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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교회의 대주교인 암브로시오스 아리스토텔리스 조그라포스 대주교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주교들을 세우셔서 교회들을 이끄는 지도자요 목자로 삼으셨다… 주교의 위엄은 교회에서 무척 필요한 것이, 주교 없이는 교회나 신자들도 없는 것이다. 사도들의 계승자인 주교는 안수를 통해 주님께서 베푸셨던 푼 것을 매고 맨 것을 푸는 성령의 은혜를 이어받은 것으로 지상에서 하느님의 살아있는 형상이라 할 수 있다.”
도시테오스의 신앙고백 제10조.

대한민국 전체를 관할하는 '정교회 한국 수도 대교구(Metropolis of Korea)'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교구 산하의 지역 교구[46]이며, 현재 교구장은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겸하고 있는 '암브로시오스 아리스토텔리스 조그라포스(한국명 조성암)' 수도 대주교로 제2대 교구장이다.

초대 교구장은 대교구 설정 전까지 한국을 관할하던 뉴질랜드 대주교의 보좌 주교 겸 질론의 주교(명의) 아르히만드라이트 소티리오스 트람바스가 재임했다. 이후 2008년 아르히만드라이트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는 은퇴하여 가평 수도원에 머물며 피시디아의 대주교(명의)로 재임하고 있다. 한편 현 암브로시오스 수도 대주교 역시 소티리오스 수도 대주교 재임기간 동안 질론의 주교직을 승계받아 보좌 주교로 봉직한 경력이 있다.

5. 성공회

파일:이경호 베드로 주교.jpg파일:케이 골즈워디 주교.jpg
대한성공회 서울 교구의 주교인 이경호 베드로 주교 성공회의 첫 여성 주교인 호주 성공회 소속 케이 골즈워디 주교

대한성공회에서는 3개 교구(서울, 대전, 부산)가 존재하며 성공회는 사제단 중에서 후보를 등록하여 사제단, 평신도 대표로 이뤄진 선거를 통해서 교구장 주교가 선출된다. 주교 선출에 평신도까지 참여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가장 민주적 절차로 주교를 선출하고 있는 셈이다.

주교는 본인이 물러나지 않는 이상 종신직이 원칙이고 성공회에서 역시 이 점은 유지된다. 하지만 정년이 65세로 75세인 천주교보다 10년이나 정년 나이가 낮다보니 교구장 교체가 빨라서 임기제로 종종 오해하곤 한다.[47]

성공회에서는 여성이 성직을 수행하는 것을 제한하지 않으므로 여성도 주교가 될 수 있으며, 호주 성공회에서 케이 골즈워디 주교가 첫 여성 주교로 서품되었다.

원래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 관할에 있었던 대한성공회에서는 주교가 가장 높은 직위였으나, 1990년 서울교구장이었던 김성수 시몬 주교가 대주교로 승품하면서 한국인 최초의 성공회 대주교가 되었고, 1993년 대한성공회가 캔터베리 대교구 관할에서 벗어나 세계성공회 독립 관구가 되어 관구 의장 주교가 대주교로 승품되기 시작하였다. 관구의장을 맡는 대주교는 교세가 가장 강한 서울교구에서 주로 나오나 다른 교구에서도 나올 때도 있다. 현재 한국 관구의 의장 주교는 대전교구의 유낙준 모세 대주교이다.

6. 나무위키에 항목이 있는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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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틴어. 영어에서도 Bishop의 형용사 표현은 episcopcal이다.[2] 이는 천주교가 번역에 참여한 공동번역 성서와 천주교 단독으로 번역한 가톨릭 성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3]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천주교 문헌에는 종종 '감목'이라는 표현도 보인다.[4] 가톨릭에서는 대주교는 주교와 같이 각하를 쓴다. 성공회에서 대주교(Archbishop)의 경우에는 은하(恩下 = Your Grace, 각하라고도 번역됨)라고 특별히 칭하기도 한다.[5] 교황 역시도 공식적인 경칭은 '성하'이지만, 보통은 교황님이라고 부른다. 이는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경칭도 각하에서 '대통령님'으로 바뀌었다.[6] 동방교회 전통에서는 주교가 검은 의복을 입는다.[7] 정확히 말하면 이건 사도계승이라고 해야 옳다. 사도전승은 엄밀히 말해서 사도계승 안에 포함된 내용(전승, 교리 등등)을 뜻한다.[8] 가톨릭정교회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9] 영어로는 주교나 감독 모두 'bishop'으로 같다.[10] 정교회가톨릭+성공회가 서로 다른 이름을 쓰긴 하는데, 라틴어그리스어냐로 차이가 갈려, 서로 다르지만 직책의 유례는 똑같으며 의미도 같다. 한국어 번역도 유사하다. 가톨릭과 성공회는 '부제'라고 하며, 정교회에서는 '보제'라고 한다. 이후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가톨릭/성공회의 용어를 따름.[11] 기본 계급만도 10여 개에 이른다![12] 단 슬라브 계통 정교회에서는 총대주교, 관구장 주교, 대주교, 주교 순으로 직책이 이루어진다.[13] 되기가 어려운 것과 된 후 많은 것이 바뀐다는 것 등이, 장교가 별을 다는 것에 비유되곤 한다.[14] 이러한 논리는 평사제 즉, 일반 신부에게도 적용된다.[15] 일반 교구장 주교도 교회에 공로를 세우면, 추기경 품위를 주는 경우도 있지만, 개인 명의의 대주교로 임명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이런 고위 성직자를 개인 명의의 대주교(archbishop of personal title)라고 부른다. 경성감목구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가 일례. 이들은 관구장 대주교가 아니어서, 팔리움을 두르지 않는다.[16] 교구 사제가 주교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혼한 남자가 성직자가 되는 것이 가능한 정교회에서도 주교만큼은 결혼하지 않은 사제를 선출하는 것이 불문율인지라, 상당수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교구 사제는 주교가 되지 못한다. 정작 신자들 가까이에서 사목하는 교구 사제들이 주교가 되지 못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교회에서도 꽤 골치 아픈 논쟁거리인데, 그렇다고 유부남이 주교가 되는 걸 허용하기도 뭐한지라(…), 이 불문율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17] 참고로 정교회의 경우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을 제외하면, 국교로 공인된 교회인 경우, 각각의 독립 교회들의 총대주교를 해당 국가의 왕이 임명했거나 선출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제정 러시아 시절의 러시아 정교회의 총대주교는 차르가 임명했는데, 차르가 총대주교를 지명하지 않아서 100년 간 총대주교좌가 공석이었던 적이 있었다.(...)[18] 오늘날에도 스페인 우르헬(Urgell, 카탈루냐어로는 우르젤)의 주교는 안도라 공국의 대공(Prince)을 겸하고 있다.[19] 대주교는 4단, 추기경은 5단의 술이 달린 모자. 교황의 문장에는 삼중관과 교황권을 상징하는 열쇠 도안을 그려 넣는다.[20] 사도행전 20장 28절, 빌립보서 1장 1절[21] ‘제 2 바울 서신’이란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되었지만 비평에 의해 후대의 누군가가 바울의 권위를 빌어 썼다는 것이 밝혀진 편지이다.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가 해당된다.(다만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는 논란이 있다) 제 2 바울 서신의 저작 연대는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특히 목회서신이라 불리는 디모데전후서, 디도서는 기록 연대가 2세기로 넘어감). 반면 바울이 직접 기록한 ‘바울 서신’은 50~60년대에 기록되어 역사적 가치가 훨씬 높다.[22] 고린도전서 12장 9절, 28절[23] 제임스 D. G. 던, 크리스챤다이제스트, 바울신학. 21장[24] 제임스 D. G. 던, 크리스챤다이제스트, 바울신학. 21장[25] 해당 책 각주 102번에서 이를 클레멘트 1서의 "그들의 첫열매들을...장래의 신자들의 감독들과 집사들로 임명했다"는 구절과 대비시키고 있다[26]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도주한 노예가 주인의 친구에게 자신을 선처해 줄것을 부탁해 달라고 호소하는 사례가 있었는데, 바울 역시 이러한 관행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데일 마틴, 문학동네, 신약 읽기[27] 물론 성경에서 ‘목사’가 등장하는 곳은 에베소서 하나 뿐이다.[28] 한스 큉, “가톨릭의 역사, 을유문화사, 2003, 48[29] Didache, 15:1[30] 손희송, 일곱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지, 가톨릭대학교출판부[31] 통상 이그나티우스 서신의 집필 연대는 107~110년으로 보고 있으나 H.R. 드롭너(2001)에서는 135년 경을 가설로 제시하였다.[32]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는 주교의 존재 및 이후에 중시되는 베드로의 주교직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 시기 로마 교회에 1인 주교가 없었음을 반증하는 근거이다.[33] Institution IV. 4. 12.[34] 한스 큉, 가톨릭의 역사, 93[35] 한스 큉, "가톨릭의 역사, 70-71.[36] 비슷한 예로 '각하'가 있다. 제2공화국 시기까지 '각하'는 고위 관료들에게 두루 사용되던 일반 명사였다. 그러나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각하'를 대통령에게만 쓰게 강제하였고, 이후 '각하'는 대통령을 일컫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37] 한스 큉, "가톨릭의 역사", 72-74.[38] 754~787년에 일어난 성상 논쟁, 867년 필리오케(Fillioque) 논쟁. 이미 필리오케 논쟁으로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파문한 적이 있었다.[39] 고대 교회의 5대 총대교구 중 예루살렘,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세 곳은 이슬람 세력의 영향 하에 들어가 있었기에 동방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은 총대교구는 콘스탄티노폴리스밖에 없었으며, 이는 자연스레 서방의 유일한 총대교구였던 로마와의 경쟁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40] 제2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엄연히 또 한 사람의 주교인 교황을 선출하는 방식도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확립되었다. 교황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추기경에게만 부여한 것이다.[41] 덕원자치수도원구 대수도원장 서리 박현동 블라시오 아빠스 포함[42] 사목활동에서 물러난 은퇴 주교를 가리킨다. 교구장은 교회법에 따라 만 75세 이상일 경우 사임을 청하도록 권고하고 있다.[43] 베네딕토회 계통 수도회의 대수도원장 호칭.[44] 2016년 5월 31일 장신호 요한 보스코 신부를 새로운 보좌주교로 임명한다고 교황청이 발표했다.[45] 부교구장 주교(Coadjutor Bishop)는 교구장 승계권이 있어, 교구장좌가 공석이 되면 그 즉시 교구장이 된다(교회법 제409조 ①항)[46] 즉, 세계 총대주교구에 속한 자치 교회이다.[47] 성공회 내에서도 성직자의 정년을 연장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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