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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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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4대 대성당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14px-Coat_of_arms_Holy_See.svg.png
산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당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
파일:external/img03.deviantart.net/basilica_di_san_pietro_by_lesogard-d36et3w.jpg
정면 사진[1]
파일:external/sv6.postjung.com/270847-53edfd203c4d8.jpg
하늘에서 내려다 본 사진
파일:external/c1.staticflickr.com/8645294469_53637ea3c8_b.jpg
실내 전경
파일:external/www.wuyueart.com/11-140G91H502560.jpg
위 사진의 가운데 보이는, 교황미사를 집전하는 제대와 발다키노(천개, 天蓋)[2]
건설과거의 대성당현재의 대성당
착공(정초식)326년 11월 18일(실베스테르 1세)1506년 4월 18일(율리오 2세)
완공(축성식)360년1626년 11월 18일(우르바노 8세)
기본 정보
위치 바티칸
종교 가톨릭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지위 대성전(Major Basilica)
수석사제 안젤로 코마스트리 추기경
건축 정보
축성 1626년 11월 18일
건축가
(공사기간)
도나토 브라만테(1506~1513)
줄리아노 다 상갈로(1513~1515)
프라 조콘도(1513~1515)
라파엘로 산치오(1514~1520)
발다사레 페루치(1520~1527)
안토니오 다 상갈로(1520~1546)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547~1564)
자코모 델라 포르타(1585~1602)
카를로 마데르노(1602~1629)
잔 로렌초 베르니니(1629~1674)
양식 르네상스, 바로크
착공 1506년 4월 18일
완공 1626년 11월 18일
건축 내역
전체 길이 220 m
전체 너비 150 m
전체 높이 138 m
전체 면적 21,095 m²
내부 면적 15,160.12 m²
신랑 너비 27.5 m
후진 너비 24 m
정면 너비 114 m
정면 높이 51 m
외부 돔 직경 42 m
내부 돔 직경 41.5 m
드럼 둘레 190 m
드럼 높이 20 m
채광탑 높이 19 m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이름 한글 바티칸
영어 Vatican City
프랑스어 Cité du Vatican
국가·위치 바티칸 시국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4년
등재기준 (i)[3], (ii)[4], (iv)[5], (vi)[6]
지정번호 286

1. 개요2. 지위3. 역사
3.1.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3.2. 과거의 대성당
3.2.1. 연혁3.2.2. 신성 로마 황제의 대관식3.2.3. 옛 대성당에 있던 교황들의 무덤
3.3. 건축가들의 개축 계획
3.3.1. 도나토 브라만테3.3.2. 줄리아노 다 상갈로, 프라 조콘도, 라파엘로 산치오3.3.3. 발다사레 페루치3.3.4. 안토니오 다 상갈로3.3.5.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3.3.6. 자코모 델라 포르타3.3.7. 카를로 마데르노3.3.8.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
3.4. 보수 공사
4. 주요 건축5. 역대 수석사제6. 관람 시 주의사항7. 관련 건축
7.1. 크기 경쟁7.2. 외관을 본뜬 경우7.3. 이름만 같은 경우
8. 기념 화폐9. 기타10. 대중 매체


한국어 성 베드로 대성전
라틴어 Basilica Sancti Petri(바실리카 상티 페트리) / Basilica Vaticana(바실리카 바티카나)
이탈리아어 Basilica Papale di San Pietro in Vaticano(바실리카 파팔레 디 산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
영어 Papal Basilica of Saint Peter(페이펄 바실리카 오브 세인트 피터) / St. Peter's Basilica(세인트 피터스 바실리카)
프랑스어 Basilique Saint-Pierre(바질리크 생 피에르)
스페인어 Basílica de San Pedro(바실리카 데 산 페드로)
포르투갈어 Basílica de São Pedro(바실리카 디 상페드루)
독일어 Petersdom(페터스돔)
중국어 聖伯多祿大殿(셩보더루따띠엔)
일본어 サン・ピエトロ大聖堂(산 피에토로 다이세도)
에스페란토 Baziliko Sankta Petro de Romo(바질리코 산크타 페트로 데 로모)
파일:external/wp.patheos.com.s3.amazonaws.com/Tu-es-Petrus.jpg
TV ES PETRVS(Tu es Petrus, 너는 베드로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져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져 있을 것이다.

et ego dico tibi quia tu es Petrus,
et su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 et portae inferi non praevalebunt adversum eam.
et tibi dabo claves regni caelorum.
quodqumque ligaveris super terram, erit ligatum et in caelis.
et quodqumque solveris super terram, erit solutun et in caelis.
마태오 복음서 16장 18 ~ 19절(공동번역 성서)[7]

1. 개요

바티칸에 있는 가톨릭성당. 가톨릭 교회의 성당 등급 분류상 최고등급인 대성전(Major Basilica)이며, 한국 천주교의 공식 명칭은 베드로 대성전이다.[8]

근대 이전까지 세계에서 제일 큰 기독교 건축물이다.[9] 건축물의 크기도 크기지만,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동원하여 설계했으며 수차례의 설계 변경을 거쳐 힘들게 완성된 건물이다. 부속된 예술품과 장식들도 바로크 양식을 대표할 만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1984년 바티칸의 일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전 세계 가톨릭 교회는 11월 18일을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바오로 대성전 봉헌 축일”(In Dedicatione basilicarum Ss. Petri et Pauli, apostolorum)로 기념하며, 로마 보편 전례력상 해당 축일은 선택적으로 기념할 수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 Virtual Tour
구글어스

2. 지위

여기가 가톨릭의 총본산이란 느낌이지만, 사실 로마 교구의 주교좌 성당(Cathedral)은 여기가 아니고, 로마 시내에 있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따라서 사실 가톨릭의 가장 으뜸가는 성당은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이는 라테라노 대성당이 '모든 성당의 어머니'라는 위치를 차지한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으며, 유일무이한 교황좌(성좌) 역시 라테라노 대성당에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의자는 베르니니가 만든 베드로의 성좌다. 자세한 내용은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문서의 첫부분 참고할 것.

다만 이제 교황궁은 더 이상 라테라노가 아닌 바티칸에 있으며, 따라서 교황의 주요한 업무나 미사, 전례는 모두 이곳에서 거행된다. 이에 따라 일반인들의 인식 역시 이곳이 라테라노 대성당을 포함한 로마 4대 대성전 중에서도 넘사벽의 인지를 갖추게 된 것이다.

3. 역사


3.1.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세계 최대의 단일 종교의 수도나 다름없는 위상답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성당 자체는 콘스탄티누스 1세 때인 약 4세기경에 세워진 바실리카식 성당에서 기원하며, 초대 교황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전설 정도로만 여겨지다가 1950년 12월 23일, 비오 12세성당 지하실의 기저 공간에서 성 베드로의 무덤을 확인했다고 공표했다.

여기서 출토된 유골을 감정한 결과 서기 1세기에 사망한 60대 중반 남자로 보인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발견 당시의 유골이 금실로 수놓인 자주색 천에 싸여 있었던 점[10], 유골이 발견된 곳 주위의 벽면에 베드로라는 글자가 새겨진 낙서가 많았던 점 등을 볼 때 교황청에서는 베드로의 유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거 맞다 1968년 6월 26일, 바오로 6세는 이 유골이 베드로의 유해가 거의 확실해 보인다고 발표한 후 그 다음 날 처음 발견된 자리에 다시 매장했다.

3.2. 과거의 대성당

3.2.1. 연혁

파일:external/www.pitt.edu/222.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98px-Alfarano_map.jpg
복원 상상도
파일:external/www.learn.columbia.edu/Old-St-Peters.jpg
평면도: 칼리굴라 경기장, 과거의 대성당, 지금의 대성당 옛 대성당의 평면도 (추정)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테베레 강 너머 바티카누스 언덕 위에 있던 성 베드로의 처형장인 칼리굴라 경기장 자리에 세워졌다. 90년아나클레토 교황이 베드로의 무덤 위에 작은 기념 성당을 지은 것이 그 시초다.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 치세인 326년 11월 18일 실베스테르 1세가 정초식을 거행한 후 완공까지 약 30년이 걸렸는데, 당시의 통상적인 교회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라틴 십자가 모양의 바실리카 양식이었다. 길이 118 m, 너비 64 m, 한 열당 기둥 22개가 총 4열로 늘어선 이중 측랑의 5랑식 바실리카 구조로 목조 트러스 지붕을 올렸는데,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과 비교했을 때 익랑이 굉장히 짧은 편이었다.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대성당 바깥의 장방형 정원에는 역대 교황의 무덤이 자리했다. 이곳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모후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예루살렘 성지순례 때 가져온 성 십자가, 성녀 베로니카의 수건, 롱기누스의 창과 같은 성유물이 봉헌되어 각국의 순례자들로 붐볐다.

이외에도 여기에서는 800년 카롤루스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이 열리는 등,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톨릭성지로 자리매김 했으나 로마를 침략한 서고트족, 반달족, 사라센족, 노르만족과 같은 이민족들에게 약탈당해 그때마다 만신창이가 되었다. 더욱이 천 년이 넘도록 너무 오랫동안 사용한 데다, 아비뇽 유수교황청이 대성당을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상황이 지속되자, 낡을 대로 낡은 건물은 틈틈이 계속된 보수 공사에도 결국 붕괴 직전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옛 대성당의 모습을 추체험할 수 있는 회화 자료로, 라파엘로 산치오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사도 궁전의 보르지아 아파트에 프레스코화로 그린 보르고의 화재(火災)의 방(Stanza dell’Incendio di Borgo) 현존하고 있다.

3.2.2. 신성 로마 황제의 대관식

프랑크 왕국의 군주 카롤루스800년 교황 레오 3세가 집전한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을 거행한 이래 1452년까지 600년 넘는 세월 동안 옛 대성당에서는 23명의 황제가 교황이 머리에 얹어주는 왕관을 통해 권위를 과시했다. 이들 23명의 대관식이 거행된 날짜, 이름, 대관식을 주재한 교황은 다음과 같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affaello_Sanzio_-_The_Coronation_of_Charlemagne_-_WGA18761.jpg
카롤루스 대제 대관식, 라파엘로 산치오, 1516~1517년, 프레스코, 670cm, 바티칸 사도 궁전
대관식 거행일 황제 대관식 주재자 대관식 거행일 황제 대관식 주재자
800년 12월 24일 카롤루스 대제 성 레오 3세 823년 4월 5일 로타리우스 1세 성 파스칼 1세
850년 12월 5일 루도비코 2세 성 레오 4세 875년 12월 25일 샤를 2세 요한 8세
881년 12월 25일 카를 3세 요한 8세 891년 2월 21일 귀도 3세 스테파노 5세
896년 2월 22일 아르눌프 포르모소 901년 2월 루이 3세 베네딕토 4세
915년 3월 24일 베렝가리오 1세 요한 10세 962년 2월 2일 오토 1세 요한 12세
967년 12월 25일 오토 2세 요한 13세 996년 5월 21일 오토 3세 그레고리오 5세
1014년 2월 14일 하인리히 2세 베네딕토 8세 1027년 3월 26일 콘라트 2세 요한 19세
1046년 12월 25일 하인리히 3세 클레멘스 2세 1111년 4월 13일 하인리히 5세 파스칼 2세
1155년 6월 18일 프리드리히 1세 하드리아노 4세 1191년 4월 15일 하인리히 6세 첼레스티노 3세
1209년 10월 4일 오토 4세 인노첸시오 3세 1220년 11월 22일 프리드리히 2세 호노리오 3세
1312년 6월 29일 하인리히 7세[11] 1355년 4월 5일 카를 4세 오스티아 주교 피에르 베르트랑[12]
1433년 5월 31일 지기스문트 에우제니오 4세 1452년 3월 19일 프리드리히 3세 니콜라오 5세

3.2.3. 옛 대성당에 있던 교황들의 무덤

옛 성 베드로 대성당 건물이 완성된 후 이곳에 처음 묻힌 교황461년에 선종한 성 레오 1세였다. 이후 1591년에 선종한 인노첸시오 9세에 이르기까지 1,000년 넘는 세월 동안 교황 100여 명이 성당 내부 곳곳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대성당 건축을 목적으로 율리오 2세가 임명한 수석 책임자 도나토 브라만테는 옛 대성당을 철거하면서 새 건물의 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교황들의 무덤 대부분이 파괴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옛 대성당에 있던 무덤 중에서 현존하는 것, 즉 무덤 또는 석관 자체를 옮겼거나 석관의 파편 또는 유골만이라도 남은 경우는 음영표시로 나타냈다(참고).
옛 대성당에 있던 교황 무덤 및 현존 여부
성 레오 1세 성 심플리치오 성 젤라시오 1세 아나스타시오 2세 성 심마쿠스 성 호르미스다스
성 요한 1세 성 펠릭스 4세 보니파시오 2세 요한 2세 성 아가피토 1세 펠라지오 1세
요한 3세 베네딕토 1세 펠라지오 2세 성 그레고리오 1세 사비니아노 보니파시오 3세
성 보니파시오 4세 아데오다토 1세 보니파시오 5세 호노리오 1세 세베리노 요한 4세
테오도로 1세 성 에우제니오 1세 성 비탈리아노 아데오다토 2세 도노 성 아가토
성 레오 2세 성 베네딕토 2세 요한 5세 코논 성 세르지오 1세 요한 6세
요한 7세 시신니오 콘스탄티노 성 그레고리오 2세 성 그레고리오 3세 성 자카리아
교황선출자
스테파노
스테파노 2세 성 바오로 1세 스테파노 3세 하드리아노 1세 성 레오 3세
스테파노 4세 에우제니오 2세 발렌티노 그레고리오 4세 세르지오 2세 성 레오 4세
베네딕토 3세 성 니콜라오 1세 하드리아노 2세 요한 8세 마리노 1세 스테파노 5세
포르모소 보니파시오 6세 스테파노 6세 로마노 테오도로 2세 요한 9세
베네딕토 4세 세르지오 3세 아나스타시오 3세 란도 레오 6세 스테파노 7세
요한 11세 레오 7세 스테파노 8세 마리노 2세 레오 8세 베네딕토 6세
요한 14세 요한 15세 그레고리오 5세 베네딕토 8세 요한 19세 그레고리오 6세
성 레오 9세 복자 우르바노 2세 복자 에우제니오 3세 하드리아노 4세 그레고리오 9세 첼레스티노 4세
니콜라오 3세 보니파시오 8세 우르바노 6세 보니파시오 9세 인노첸시오 7세 니콜라오 5세
바오로 2세 식스토 4세 인노첸시오 8세[13] 비오 3세 클레멘스 7세 바오로 3세
율리오 3세 마르첼로 2세 그레고리오 13세 그레고리오 14세 인노첸시오 9세

3.3. 건축가들의 개축 계획

니콜라오 5세(1447-1455 재위)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베르나르도 디 마테오 델 보라 감베렐리(Bernardo di Matteo del Borra Gamberelli)에게 보수 공사를 맡기면서 성당을 신축하는 수준의 설계도를 작성하도록 했으나 교황이 선종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16세기율리오 2세가 옛 건물을 완전히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새 성당을 짓기로 결정해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교황 21명이 재위한 120년 동안 쉴새없이 계속된 이 과정에서 최고의 예술가들을 기용하면서 숱한 역사를 남겼다. 예를 들면 천문학적인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몇몇 지역 교구에서 돈 받고 흔히 면벌부로 불리는 대사를 남발하면서 일부 신학자들의 어그로를 끌어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든가.

3.3.1. 도나토 브라만테

브라만테가 수석 책임자였던
1506~1513년까지의 교황
파일:external/classconnection.s3.amazonaws.com/stpeters.jpg
파일:external/uploads4.wikiart.org/portrait-of-pope-julius-ii.jpg
율리오 2세[14] 브라만테의 설계안에 따른 입면도
사진 설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aintPierre4.jpg
새로운 성당의 건설을 위한 설계 공모에 응모한 수많은 후보작들 가운데서 도나토 다뇰로 브라만테(Donato d' Aguolo Bramante)의 작품이 최종 선정되었다. 1506년 율리오 2세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의 성상이 놓일 북서쪽 벽기둥의 초석을 놓으면서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고대 로마의 건축을 연구한 브라만테는 포로 로마노에 있던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에 판테온을 얹고 싶다고 말했고, 자신이 언급한 대로 판테온을 참고해 건물을 설계했다. 성당의 평면을 그리스 십자가 형태로 삼고 거대한 기둥벽 4개가 하중을 지탱하는 중앙부의 커다란 주변에 작은 돔 4개와 종탑 4개를 배치해 대칭성을 강조했다. 사방이 같은 길이인 그리스 십자가 구조는 공간이 중앙에 집중되어 중앙 집중형 건축으로 불리우는데, 당대의 르네상스 건축가들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공사 부지의 지반이 약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건물을 올리기에 앞서 토대부터 단단히 다지는 작업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하에 매장된 역대 교황과 성인들의 무덤이 파괴되어 오늘날에는 옛 대성당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물론 무덤이 파괴되기 전에 유해는 미리 발굴해 옮겨 둔 상태였으나 이유야 어떻든 콘스탄티누스 이래 천 년간 존속하던 성당 건물과 무덤들이 파괴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브라만테는 '파괴자(Il Rovinante, 일 로비난테)'라는 별명을 얻었다. 단, 브라만테가 옛 대성당 건물을 한 번에 허물어뜨린 것은 아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미사를 보아야 했기 때문에 옛 건물은 순차적으로 철거되었다.
브라만테는 베드로의 무덤을 대성당 내부의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권했지만 율리오 2세는 베드로의 무덤이 원위치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고 잘라 말하며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 한편 교황은 신축될 대성당의 중앙부에 자신이 안장될 거대한 대리석 영묘를 세우려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설계를 맡겨, 영묘를 장식할 조각상 제작에 필요한 대리석을 고르러 미켈란젤로가 직접 카라라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교황이 영묘에서 관심을 돌려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를 그리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영묘 건설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던 와중 1513년 율리오 2세가 선종하고 레오 10세가 즉위하면서 브라만테는 수석 책임자 자리에서 교체되었고 1년 뒤인 1514년 브라만테도 세상을 떠났다.

3.3.2. 줄리아노 다 상갈로, 프라 조콘도, 라파엘로 산치오

라파엘로가 수석 책임자였던 1514~1520년까지의 교황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affael_040.jpg 파일:external/www.repro-tableaux.com/xir157492.jpg
레오 10세[15] [16][17]
사진 설명
파일:external/faculty.etsu.edu/raphael.1500s.planforstpeters.jpg
1513년 브라만테가 죽자 그를 대신해 줄리아노 다 상갈로(Giuliano da Sangallo)와 프라 조반니 조콘도(Friar Giovanni Giocondo), 라파엘로 산치오 다 우르비노(Raffaello Sanzio da Urbino)가 성당 건축에 참여했다. 그렇지만 채 2년이 지나지 않아 상갈로와 프라 조콘도가 잇따라 사망했고, 1514년 레오 10세라파엘로 산치오를 수석 책임자로 임명했다.
브라만테는 동향 출신인 라파엘로가 건축 분야에서 경험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후임자로 추천했는데, 정작 라파엘로는 선임자의 설계안을 전면적으로 수정해버렸다. 평면구조를 그리스 십자가에서 라틴 십자가로 바꿔 신랑의 길이를 늘리고 성당 모서리에 설치된 탑의 크기를 줄여 외벽의 경계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냈으며, 반원형의 후진을 복도로 둘러 각각의 공간을 명확하게 구획했다. 또한 신랑에는 5개의 공간을 나누고, 경당의 위치를 측랑 외부 양쪽으로 설정했다. 하지만 그가 단독 책임자로 설계에 참여한 지 5년 만인 1520년, 이번에는 라파엘로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3.3.3. 발다사레 페루치

페루치가 수석 책임자였던 1520~1527년까지의 교황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Sack_of_Rome_of_1527_by_Johannes_Lingelbach_17th_century.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affael_040.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adrian_VI.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pe_Clement_VII.jpg
레오 10세 하드리아노 6세 클레멘스 7세 1527년 로마 약탈[18]
사진 설명
파일:external/www.arch.virginia.edu/5049561a6d347-01_PeruzziStPeters_Analytical_Plan_Design_lr.jpg
라파엘로가 요절하자 발데사레 톰마소 페루치(Baldassare Tommaso Peruzzi)가 수석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라파엘로의 설계안이 담고 있던 주요 후진 세 곳의 내부 배열 변경은 그대로 유지했으나, 평면구조는 라파엘로의 라틴 십자가 형태에서 브라만테의 그리스 십자가 형태로 회귀해 신랑의 길이가 다시 축소된 것과 같은 변화가 있었다. 그가 책임자를 맡는 동안 1521년 레오 10세가 선종하고 하드리아노 6세(1522-1523 재위)의 짧은 재위기간을 거쳐 클레멘스 7세가 즉위했다. 1527년 신성 로마 제국황제 카를 5세사코 디 로마로 압박하가 클레멘스 7세는 카스텔 산탄젤로로 피신한 뒤 7달 동안 사실상 연금당했고 로마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아직 공사중인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계단에서는 카를 5세의 제국군이 교황청에 고용된 스위스 근위대의 항전을 제압했고, 하느님의 심판을 예언하며 잘못을 회개하라고 외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을 천장화에 그려 넣어 미켈란젤로교황청에 경종을 울리려 한 지 고작 1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스티나 경당도 제국군과 폭도들의 약탈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뒤숭숭한 시대적 상황과 열악한 재정 문제 때문에 성당 공사는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고, 결국 페루치는 자신의 설계안을 실현시키지 못한 채 1536년 세상을 떠났다.

3.3.4. 안토니오 다 상갈로

안토니오 다 상갈로가 수석 책임자였던 1520~1546년까지의 교황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845773e8dd1b345000ffe2325637831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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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스 7세[19] 바오로 3세[20] 안토니오 다 상갈로의 설계안에 따른 입면도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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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어수선한 와중에 1527년부터 중단된 공사는 1539년이 되어서야 다시 진행되었다. 이때 등장한 새 수석 책임자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Antonio da Sangallo il Giovane)는 전임자 브라만테, 라파엘로, 페루치의 설계안이 의도한 특징을 살려 정면의 폭을 넓게 하고 열주 현관을 넣었으며, 페루치가 늘렸던 신랑의 길이를 다시 줄여서 그리스 십자가 평면으로 설계했다. 한편 그는 판테온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 구조를 바탕으로 브라만테가 처음 구상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원안보다 더 크고 정교하게 재설계해 바깥에 가로로 된 보를 추가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가 제작한 목재 모형은 현재 성 베드로 대성당에 소장되어 있다.
안토니오 다 상갈로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전임자들의 설계안을 융합시키고자 했으나, 그로 인해 도리어 벽체와 기둥이 너무 많이 배치되었기 때문에 설계가 난잡해지고 내부도 어두워져 조명에 문제가 있다는 비난을 받아 그의 설계안은 전임자들의 것과는 달리 실제로 공사에 반영되지는 못했다. 비록 설계 작업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4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수석 책임자가 바뀌면서 금이 가기 시작한 브라만테의 네 기둥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보강했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대성당 공사에서 중요한 입지를 차지한다. 그동안 클레멘스 7세가 1534년 선종하고 바오로 3세가 선출됐다.

3.3.5.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가 수석 책임자였던 1547~1564년까지의 교황
파일:external/cdn.quotationof.com/pope-paul-iii-4.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86px-Girolamo_Sicciolante_-_Paus_Julius_III.jpg 파일:external/pitts.emory.edu/00019428.jpg 파일:external/giovannipreziosi.files.wordpress.com/image_thumb32.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ius_IV_2.jpg
바오로 3세 율리오 3세 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 비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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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미켈란젤로의 작업장을 방문한 바오로 3세[22]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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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6년 안토니오 다 상갈로가 사망하자 다음 수석 책임자로 내정된 사람은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였지만 3개월이 지나기 전에 사망해버렸고, 그 다음으로 내정된 자코포 산소비노(Jacopo Sansovino)가 직위를 거절하자 바오로 3세는 당시에 이미 70세를 넘긴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에게 억지로 자리를 떠맡겼다. 본디 조각가로 자부하던 미켈란젤로에게는 내키지 않는 작업이었으나 곧 마음을 바꿔 정력적으로 공사에 참여했으며, 그의 설계안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는 안토니오 다 상갈로의 설계대로 건축할 경우 언제 공사가 끝날지 모르는 데다가 비용은 비용대로 눈덩이처럼 불어날 게 뻔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외부에는 불필요한 열주가 늘어서 있고, 내부는 과도하게 장식적으로 분할되어 조명이 불충분한 탓에 어둡고 은밀한 장소가 너무 많아 범죄의 소굴로 전락할 것이라고 비판디스했다. 자신이라면 상갈로보다 더 적은 비용을 들여 더 멋진 건물을 더 빠르게 지을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미켈란젤로는 기존 인사에 대한 물갈이 작업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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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가 상갈로 휘하에서 공사에 참여했던 건축가 난니 디 바치오 비기오(Nanni di Baccio Bigio, 151~1568)를 비롯한 사람들을 내쫓고, 설계에 개입하려는 건축 위원회의 시도를 저지하는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자 상갈로 지지자를 포함한 기존의 공사 관계자들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미켈란젤로와 대립각을 세웠다. 일부에서는 미켈란젤로가 노망이 났다거나, 나이가 너무 많아 책임자가 된다 한들 얼마 못가서 죽을 거라고 악담을 퍼부었으나 정작 미켈란젤로는 말짱한 정신으로 17년 동안 공사를 담당했다.
결국 바오로 3세는 불협화음을 끝내기 위해 대성당 공사에 관한 전권을 미켈란젤로에게 부여하면서, 건축 당국은 오직 그의 설계에 따라서만 공사를 진행해야 하며 그 누구도 설계에 간섭할 수 없다고 천명했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보수를 받지 않고 공사에 임하겠다고 밝혀 교황의 신뢰에 응답함과 동시에 공사비로 사욕을 채우려 한다는 상갈로 지지자들의 비방을 차단했다.
공사에 참여했던 이전까지의 어떠한 건축가들도 받지 못한 특권을 얻은 미켈란젤로는 전임자들이 남긴 설계안들을 참고해 신랑의 길이를 줄여 성당의 평면구조를 다시금 브라만테의 그리스 십자가 형태로 회귀시켰다. 또한 상갈로의 설계안에 장식적인 벽체와 열주가 많다고 판단해 군더더기를 쳐내고 내부 공간을 나누는 구획을 최대한 단순화시켜, 그가 회귀시킨 브라만테의 설계안보다도 더욱 중앙 집중성이 극대화되어 가톨릭의 총본산이라는 상징성에 걸맞는 웅장함과 장중함을 강조했다. 한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당을 올려다 보았을 때 거대한 중앙 돔이 관람자의 시선에 곧바로 들어오게끔 했는데, 신랑의 길이를 줄인 것도 이 작업의 일환이었다. 다만 광장을 설계할 때는 성당 주변에 각종 부속 건물을 덧붙여 브라만테와 라파엘로의 설계안이 갖는 기하학적인 특징을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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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기존의 설계안을 모두 참고해 돔을 다시 설계했다. 두 겹의 벽돌 외피로 된 타원형 모양의 돔은 두 겹으로 늘어선 기둥들이 돔 하부의 원통형 드럼을 떠받치는 형태로, 성당 건물 서쪽 정면에는 열주랑으로 이루어진 현관을 설계에 덧붙였다. 이를 위해 그는 노구를 이끌고 조수 두 사람과 함께 피렌체로 건너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 구조를 살피고자 돔의 꼭대기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미켈란젤로였지만 건설 당시부터 경이로운 위업으로 평가받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만든 돔을 두고 자신이 설계할 돔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에 필적할 수는 있어도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아흔이 다 된 고령의 미켈란젤로는 자기가 죽은 후에 책임자 자리를 넘겨 받을 후임자가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설계를 임의로 수정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건물의 중요한 부분들을 동시에 공사했다. 돔을 받칠 원통형 벽체 부분 공사만 끝난 상태에서 1564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비오 4세(1559-1565 재위)는 미켈란젤로가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라도 절대 바꾸지 말라고 명하고, 미켈란젤로의 조수 자코모 바로치 다 비욜라(Giacomo Barozzi da Vignola)를 미켈란젤로의 친구이자 열렬한 찬미자였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와 함께 감리로 임명해 미켈란젤로의 설계안대로 공사를 진행했다.

3.3.6. 자코모 델라 포르타

델라 포르타가 수석 책임자였던 1585~1602년까지의 교황
파일:external/img2.wikia.nocookie.net/761px-El_Greco_050.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regory_XIII.jpg 파일:external/cdn.dipity.com/f9fd2ed895fd4b136520ebbf65e92138_1M.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rban_VII.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regorioPPXVI.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nnocent_IX_2.jpg
비오 5세[23] 그레고리오 13세[24] 식스토 5세 우르바노 7세 그레고리오 14세 인노첸시오 9세
사진 단면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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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4세의 후임자인 비오 5세는 1573년에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를 수석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는 성당의 세부적인 장식을 조금 변화시키거나 추가하여 성당의 디자인에는 큰 변화를 주지 않았지만, 조수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와 함께 성당과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돔을 실체화시킨 인물이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외부 돔이 가진 높이를 높게 수정하여 돔의 곡률을 브루넬레스키의 돔에 가깝게 고쳤고,[25] 그 돔과 비슷하게 벽돌도 헤링본 방식으로 맞물리게 쌓아 돔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거대한 철제 사슬 고리 3개로 돔을 죄어 돔이 하중으로 파열되는 것을 막았다. 성 비오 5세 선종 후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 재위)를 거쳐 식스토 5세가 즉위했는데 그의 치세 마지막 해인 1590년에서야 비로소 돔이 완공됐다.
이후 우르바노 7세, 그레고리오 14세, 인노첸시오 9세 등 단명한 교황들을 거쳐 클레멘스 8세(1592-1605 재위) 때 돔의 완성과 더불어 대성당 내의 첫 십자가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성대한 축하행사를 거행했다.

3.3.7. 카를로 마데르노

마데르노가 수석 책임자였던 1602~1674년까지의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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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스 8세 레오 11세 바오로 5세[26]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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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138 m, 외부 직경 42 m, 내부 직경 41.5 m에 달하는 중앙부의 거대한 돔이 완공된 이후에도 막바지 공사는 진행되었고, 그동안 클레멘스 8세와 레오 11세를 지나 바오로 5세(1605-1621 재위)가 즉위했다. 바오로 5세는 돔의 공사에 참여했던 도메니코 폰타나의 조카인 카를로 마데르노(Carlo Maderno)를 수석 책임자로 임명했다. 바오로 5세가 선출된 지 5개월이 지난 1605년 9월 17일, 미사 도중 옛 대성당의 일부가 붕괴되자 그때까지 남아 있던 옛 대성당 건물은 모두 철거되었다.
마데르노가 수석 책임자로 임명될 당시 성당 건물은 신랑과 정면의 공사만을 남겨놓은 상황에서, 신랑 길이를 늘리지 않은 그리스 십자가 평면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신랑 길이를 늘린 라틴 십자가 평면으로 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마데르노의 설계를 채택한 바오로 5세와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미래의 교황 우르바노 8세)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바오로 5세가 마데르노의 설계의 당위성을 주장하면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이를 반박하며 미켈란젤로의 설계에서도 교황이 원하는 바를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다고 지적하는 형식이었는데, 열띤 논쟁 끝에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다른 교황이라면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지키기 위해 마데르노의 설계를 파기했을 것"이라고 말하자, 이에 대해 바오로 5세는 "짐은 앞으로 어떤 교황도 마데르노의 설계를 파기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맞받아치며 자신의 의도대로 공사를 밀어 붙였다.
새로운 성당 건물이 옛 대성당이 있던 자리를 모두 포함해야 한다는 교황의 요구에 따른 마데르노는 종탑 2개와 교황 전용 발코니가 설치된 화려한 정면을 포함하여 기존의 신랑을 확장시켜 더욱 웅장하고 권위있게 보이는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이 공사는 1607년에 시작해 1614년에 끝났는데, 신랑의 확장으로 인해 성당의 평면구조가 그리스 십자가에서 라틴 십자가로 바뀌게 되어 정면부가 돔을 가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성당에서 어지간히 멀리 떨어지지 않고는 광장에서 미켈란젤로의 돔을 올려다보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는 비판을 시공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받게 되었다. [27] 그렇지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사람이 다름 아닌 교황이었기 때문에 마데르노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애초에 마데르노에게 미켈란젤로에 부여되었던 것과 같은 자유로운 설계상의 재량권이 없었던 점도 한몫 했다. 마데르노는 로마 시내에 있는 일 제수 성당의 정면을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했던 경험을 되살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정면을 설계했지만, 워낙 대성당 정면의 너비가 길어 비례가 다르고, 크기 차이 있어 작은 성당인 일 제수 성당의 정면이 가졌던 특유의 미적 효과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다소 떨어진다는 평을 받는다.[28]
한편 교황 율리오 2세 때 옛 대성당 지하에서 발굴했던 역대 교황성인들의 유해 및 보물과 예술품이 바오로 5세의 명령하에 새로운 대성당의 지하 묘소로 속속 이장되기 시작했다.

3.3.8.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

베르니니가 수석 책임자였던 1629~1674년까지의 교황
파일:external/www.nndb.com/gregory-xv-1-sized.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rban_VIII.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etrato_del_Papa_Inocencio_X._Roma%2C_by_Diego_Vel%C3%A1zquez.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91px-Giovanni_Battista_Gaulli_-_Portrait_of_Pope_Alexander_VII_%28Fabio_Chigi%29_-_Walters_37598.jpg 파일:external/cultured.com/7974_o_carlo_maratta.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lement_X.jpg
그레고리오 15세[29] 우르바노 8세[30] 인노첸시오 10세[31] 알렉산데르 7세[32] 클레멘스 9세[33] 클레멘스 10세[34]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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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전체적인 모습이 거의 완성되어가는 동안 바오로 5세가 선종하고 그레고리오 15세(1621-1623 재위)를 거쳐 우르바노 8세(1623-1644 재위)가 즉위했다. 1626년 11월 18일에 대성당의 축성식이 거행되니, 성 실베스테르 1세가 옛 대성당의 정초식을 거행한 326년 11월 18일로부터 정확히 1300년 뒤였다. 우르바노 8세는 1626년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를 마데르노의 후임 수석 책임자로 선정했다. 베르니니는 교황의 전폭적인 지원에 따라 이후 반 세기 가까이 성당의 세부적인 장식을 설계했다.
우선 돔 아래에 있는 중앙 제단과 제단 위를 덮은 발다키노를 1625년부터 1633년까지 8년여에 걸쳐 제작했다. 마데르노의 설계를 토대로 베르니니가 완성시킨 발다키노는 당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기에 발다키노답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우르바노 8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또한 베르니니는 중앙 제대 주변의 네 벽감을 장식하기 위해 1629년부터 1640년에 걸쳐 성인들의 대형 성상을 만들었다. 한편 마데르노가 기초만 만들어 놓고 아직 완공하지 못한 정면의 종탑을 건설하기 위해 1636년 설계안을 제출했는데, 베르니니는 마데르노가 애초에 의도한 낮은 종탑이 아니라 높이 30 m에 달하는 웅장한 종탑을 설계했다. 베르니니의 설계에 따른 성 베드로 대성당 정면부 상상도, 상상도 교황과 건축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베르니니는 1638년 종탑을 건축하기 시작해 1641년 상당 부분을 완성했으나 도중에 종탑 기초에 금이 발생해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르니니를 후원한 우르바노 8세가 1644년 선종하고, 베르니니에게 냉담했던 인노첸시오 10세(1644-1655 재위)가 즉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노첸시오 10세는 건축가들을 불러들여 종탑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하도록 했다. 여기에 참여한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는 베르니니를 신랄하게 혹평했고, 보로미니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결국 베르니니의 종탑은 1646년 모두 철거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에서 승승장구한 베르니니의 유일한 흑역사로, 이전부터 라이벌 의식이 강했던 베르니니와 보로미니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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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인노첸시오 10세를 이은 알렉산데르 7세(1655-1667 재위)는 베르니니가 그동안 쌓은 성과를 높게 평가하여 그에게 다시 중책을 맡겼다.
이에 따라 그는 성 베드로 광장을 1656년에 착공해 1667년에 완공했다. 광장 입구에서부터 성당 입구까지의 길이가 300 m, 폭 246 m에 달하는 성 베드로 광장 둘레에는 높이 16 m인 대리석 기둥 284개가 각각 네 열로 늘어선 대회랑이 있고, 그 위에는 3.2 4m 높이인 역대 교황과 성인들의 성상 140개가 장식되어 있다. 카를로 마데르노가 미켈란젤로의 설계안에 추가시킨 신랑에 이 가려지게 되어 관람자가 성당 정면에서 멀찌감치 떨어지지 않고서는 돔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 가운데, 베르니니는 광장의 평면을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으로 설계해 성당 건물 본체의 수직성을 돋보이게 하는 시각적 효과를 연출했다. 광장 가운데에는 1586년에 식스토 5세가 칼리굴라 경기장 한가운데 있던 것을 옮겨온 오벨리스크가 있다. 그 양쪽에는 분수대가 하나씩 있는데, 오른쪽은 카를로 마데르노의 작품이고 왼쪽은 카를로 폰타나의 작품이다.
이외에도 1666년 베드로의 의자를 제작하고 1676년 성체 경당의 장식을 맡아 시공했는데 이것이 그가 참여한 마지막 설계였다. 베르니니는 오랜 기간 수석 책임자를 맡으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1680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4. 보수 공사

성 베드로 대성당은 워낙 건물의 규모가 큰 탓에 작게는 모자이크화에 사용된 돌조각을 갈아끼우는 것부터 크게는 건축 부재를 보수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성당 곳곳에서 크고 작은 보수 공사가 끊이지 않고 진행된다.

이 성당이 완공된 이후 에서 다수의 균열이 발견되었다. 원래 16세기에 델라 포르타가 이 거대한 돔을 건설하면서 설치한 16500~18000 파운드에 달하는 큰 철제 사슬 고리 3개가 돔의 팽창을 막기 위해 돔을 죄고 있었지만, 그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들어서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돔이 팽창하면서 발생한 균열이 발견된다. 이에 5개의 철제 고리가 추가되었지만 이것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16세기의 것 하나가 파손된 것이 발견되어 1개가 추가로 건설되었다.

이외에도 완공 이전에 종탑 기초에 균열이 생겼었다는 설명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전면부 왼쪽 상단에 균열이 다수 있다. 이 성당의 지지 기반이 열악한데다가 전면부의 좌 우 지면의 강도가 달라 일부분이 침강하면서 균열이 발생하는 것. 원래 로마 시대의 구 성당을 지을때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언덕을 보존하기 위해 언덕의 일부분을 깎아내고 낮은 곳을 채워 평탄한 부지를 마련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강에 가까워 성당 주변은 원래 늪지대였다는 등의 이유로 지반이 무르다는 것. 새로운 성당을 만들때도 지면 속에 말뚝 등을 박아넣었지만 당시 기술로는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종탑을 짓기 위해 자재를 올릴 때 균열이 커졌고 종탑을 제거하자 균열이 더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지금은 그냥 현상유지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보수공사가 있었기에 지금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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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이전 공사 이후

이외에도 건물 외부의 동상을 고정하기 위해 박은 철제 자재들이 부식되면서 동상의 설치가 불안정해지고 동상도 부식시키는 문제 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성당의 정면부는 카를로 마데르노가 1607~1614년 완공한 이래 3세기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산성비와 같은 환경오염 등으로 인해 석재에 금이 가거나 빛이 바래고 부식된 상태였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 관리소(Reverenda Fabrica Sancti Petri)미국에서 1882년 설립된 세계 최대 규모의 가톨릭 신심 우애 단체인 콜럼버스 기사단(Knights of Columbus)의 지원을 받아 1985~1986년 성당 정면부에 대한 보수 공사를 진행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콜럼버스 기사단의 지원에 감사를 표하는 의미로, 대성당 정면부 위에 올려진 구세주 그리스도상이 왼팔로 안고 있던 청동 십자가를 새 것으로 교체하면서 기존의 청동 십자가를 기사단에 선물했다.

4. 주요 건축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성 베드로 대성당/주요 건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역대 수석사제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1930~1939년) 이후 역대 성 베드로 대성당 수석사제
파일:external/image1.findagrave.com/26976488_121138552260.jpg 파일:external/image2.findagrave.com/27542667_1418830077.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aolo_Marella.jpg 파일:external/www.araldicavaticana.com/SABATTANI%20AURELIO%20(+2003)1.jpg 파일:external/www.veja.it/il-Cardinale-Virgilio-No%C3%A8.jpg 파일:external/wf4.xcdn.pl/380690_marchisano01_34.jpg 파일:external/www.centenariopiox.it/don.jpg
F. 테데스키니
(1939~1959)
D. 타르디니
(1959~1961)
P. 마렐라
(1961~1983)
A. 사바타니
(1983~1991)
V. 노에
(1991~2002)
F. 마르치사노
(2002~2006)
A. 코마스트리
(2006~현재)

성 베드로 대성당,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등 로마 4대 대성전에는 수석사제(archipresbyter)가 있어서 각 대성전의 본당사제로 재직한다. 기록이 남아 있는 1053년부터의 성 베드로 대성당 역대 수석사제는 아래와 같으며, 이들 중 세 명이 훗날 교황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교황으로 선출된 수석사제는 굵게 표시했다.

수석사제 = 본당사제 즉 주임신부가 아니다

이들이 주임신부 또는 본당신부라고 해서 현재 대한민국의 각 성당별로 있는 단순한 주임신부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4대 대성전은 교황직속 성당들로서 원래의 교회법에 따르면 교황은 매주일마다 이들 성당에서 1번의 미사를 집전해야할 의무가 있는 성당이다

이는 전세계 교구의 중심인 주교좌성당에서 교구장들이 미사예물을 받지않고 교구신자들을 위해 교중미사를 집전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를 잘 실천하고 있는 경우가 서울대교구 명동대성당으로서 주일 미사 중 1번은 교구장인 염수정 추기경이 반드시 미사를 집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아래에 서술된 주임신부들은 가톨릭 교회 내에서 "수석사제"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수석 사제 아래에 별도의 주임신부가 있으며 담당업무가 나뉘어져 있는 교구소속 보좌사제나 특별임무나 대성전 내의 특별구역 관리를 맡는 수도회사제들이 주임신부와 수석사제를 보좌한다

따라서 수석사제는 교황의 이름으로 각자의 임무를 담당하는 사제들과 대성전 주임신부로 구성된 사제단의 수석의 위치와 대표라는 성격과 지위를 지닌다

이들 수석사제는 교황의 대리자로서 대성전을 관리하고, 교황의 이름으로 미사를 대리집전하는 역할을 함으로, 가톨릭 교회건물 지위등급 10종류에 따른 서열기준에 맞춰서 추기경이나 주교가 임명되거나 주교가 아니라면 주교와 비슷한 예우를 받는다

이를 조선시대로 비교하면 선왕들의 기일에 조선 조정에서 별도의 관리나 왕릉을 지키는 능지기 참봉에게 왕이 명령을 내려서 왕의 이름으로 다례나 기제례를 집행했던 예를 비춰서 이해하면 쉽다.
수석사제 출생 선종 재임시작 재임종료 재임기간
조반니(Giovanni) ? ? 1053 ?
데우스데디트(Deusdedit) ? ? 1092 ?
아초(Azzo) ? ? 1103 1104 1년
루스티코 데 루스티치(Rustico de' Rustici) ? ? 1128경 1131? 3년?
그리포네(Griffone) ? ? 1138 1139 1년
피에트로(Pietro) ? ? 1140경? 1144 4년?
베르나르드(Bernard) ? ? 1145? 1176? 31년?
조반니 다 수트리(Giovanni da Sutri) ? 1180 1176/78 1180 2년/4년
우골리노 디 세니(Ugolino di Segni) ? ? 1191/1200경 1206 6년/15년
귀도 피에르레오니(Guido Pierleoni) ? ? 1206/7 1228 21년/22년
스테파노 콘티(Stefano Conti) ? ? 1229 1254 25년
리카르도 안니발디(Riccardo Annibaldi) 1200/1210 1276.10.4 1254 1276 22년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Giovanni Gaetano Orsini)[36] 1225경 1280.8.22 1276 1277 1년
마테오 오르시니 로소(Matteo Orsini Rosso) ? ? 1277/1288 1305 17년/28년
나폴레오네 오르시니 프란지파니(Napoleone Orsini Frangipani) 1263 1342.3.24 1306 1342 36년
안니발도 디 체카노(Annibaldo di Ceccano) ? ? 1342 1350 12년
기욤 드 라 주지(Guillaume de La Jugie) 1317 1374.4.28 1362 1365 3년
리날도 오르시니(Rinaldo Orsini) ? ? 1366 1374 8년
위그 드 생마르샬(Hugues de Saint-Martial) ? ? 1374 1378 4년
필리프 달랑송(Philippe d'Alençon) ? ? 1378 1397 19년
크리스토포로 마로니(Cristoforo Maroni) ? ? 1397 1404 7년
안젤로 아차이올리(Angelo Acciaioli) 1349.4.15 1408.5.31 1404 1408 4년
안토니오 칼비(Antonio Calvi) ? ? 1408 1411 3년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프리아스(Pedro Fernandez de Frias) ? ? 1412 1420 8년
안토니오 코레르(Antonio Correr) 1369.7.15 1445.1.19 1420 1434 14년
조르다노 오르시니(Giordano Orsini) 1360/1370 1438.5.29 1434 1438 4년
줄리아노 체사리니(Giuliano Cesarini) 1398 1444.11.10 1439 1444 5년
피에트로 바르보(Pietro Barbo) 1417.1.23 1471.7.26 1445 1464 19년
리처드 올리비에(Richard Olivier) ? ? 1464 1470 6년
조반니 바티스타 제노(Giovanni Battista Zeno) 1439/1440 1501.5.7 1470 1501 31년
후안 로페즈(Juan López) 1455경 1501.8.5 1501.5.11 1501.8.5 86일
이폴리토 데스테(Ippolito d'Este) 1479.3.20 1520.9.3 1501 1520 19년
마르코 코르나로(Marco Cornaro) ? ? 1520 1년 미만
프란치오토 오르시니(Franciotto Orsini) 1473 1534.1.10 1520 1530 10년
프란체스코 코르나로(Francesco Cornaro) 1478 1543.9.26 1530 1543 13년
알레산드로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37] 1520.10.5 1589.3.2 1543 1589 46년
조반니 에반젤리스타 팔로타(Giovanni Evangelista Palotta) ? ? 1589 1620 31년
스치피오네 카파렐리-보르게세(Scipione Caffarelli-Borghese) 1577.9.1 1633.10.2 1620 1633 13년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Francesco Barberini) 1597.9.23 1679.12.10 1633 1667 34년
카를로 바르베리니(Carlo Barberini) 1630.6.1 1704.10.2 1667 1704 37년
프란체스코 네를리(Francesco Nerli) ? ? 1704 1708 4년
안니발레 알바니(Annibale Albani) 1682.8.15 1751.9.21 1712 1751 39년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Henry Benedict Stuart)[38] 1725.3.2 1807.7.13 1751 1807 56년
로무알도 브라스키-오네스티(Romualdo Braschi-Onesti) 1753.7.19 1817.4.30 1807 1817.4.30 10년
알레산드로 마테이(Alessandro Mattei) 1744.2.20 1820.4.20 1817 1820.4.20 3년
피에트로 프란체스코 갈레피(Pietro Francesco Galleffi) 1770.10.27 1837.6.181820.5.5 1837.6.18 17년 51일
자코모 주스티니아니(Giacomo Giustiniani) 1769.12.20 1843.2.24 1837.7.1 1843.2.24 5년 239일
마리오 마테이(Mario Mattei) 1792.9.6 1870.10.7 1843.3.11 1870.10.7 27년 217일
니콜라 클라렐리 파라치아니(Niccola Clarelli Parracciani) 1799.4.12 1872.7.7 1870.10.8 1872.7.7 1년 273일
에도아르도 보로메오(Edoardo Borromeo) 1822.8.3 1881.11.30 1872.7.10. 1881.11.30 9년 145일
에드워드 헨리 호워드(Edward Henry Howard) 1829.2.13 1892.9.16 1881.12.12 1892.9.16 10년 281일
프란체스코 리치 파라치아니(Francesco Ricci Paracciani) 1830.6.8 1894.3.9 1892.10.6 1894.3.9 1년 154일
마리아노 람폴라 델 틴다로(Mariano Rampolla del Tindaro) 1843.8.17 1913.12.16 1894.3.21 1913.12.16 19년 274일
라파엘 메리 델 발(Rafael Merry del Val) 1865.10.10 1930.2.26 1914.1.12 1930.2.26 16년 49일
에우제니오 파첼리(Eugenio Pacelli) 1876.3.2 1958.10.9 1930.3.25 1939.3.2 8년 344일
페데리코 테데스키니(Federico Tedeschini) 1873.10.12 1959.11.2 1939.3.14 1959.11.2 20년 238일
도메니코 타르디니(Domenico Tardini) 1888.2.29 1961.7.30 1959.11.14 1961.7.30 1년 259일
파올로 마렐라(Paolo Marella) 1895.1.25 1984.10.15 1961.8.14 1983.2.8 21년 183일
아우렐리오 사바타니(Aurelio Sabattani) 1912.10.18 2003.4.19 1983.2.8 1991.7.1 8년 145일
비르질리오 노에(Virgilio Noè) 1922.3.30. 2011.7.24 1991.7.1 2002.4.24 10년 300일
프란체스코 마르치사노(Francesco Marchisano) 1929.6.24 2014.7.27 2002.4.24 2006.10.10 4년 170일
안젤로 코마스트리(Angelo Comastri) 1943.9.17 현재 2006.10.10 현재 현재

6. 관람 시 주의사항

로마 시의 모든 성당들과 같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입장이 무료다.[39] 따라서 바티칸 미술관으로 입장해서 대성당으로 들어가는게 아닌 한 무조건 줄을 서서 들어가야 한다. 종종 가이드를 자처하며 줄을 생략하는 티켓이 있다고 말하는 인간들이 있지만 사기이니 무시하자. 또 주의해야 할 점으로, 교황이 직접 주관하는 미사 티켓이라며 정체불명의 티켓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 사기니 절대 구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40] 소매치기도 많다고 하며, 특히 피에타 상 앞에서 털리기 쉽다는 이야기가 있다.

성당이니까 당연히 미사도 드릴 수 있는데, 미사 시간에 맞춰서 맨 안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너무 늦게 가면 안 들여보내주기도. 물론 주제대에서 사제가 봉헌하는[41] 미사에 참례하려면 미사 시간에 맞추어 성당에 들어가야 하지만, 성당의 허가만 있다면 사제가 주제대를 제외한 성당 내 부속제대에서 자유로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다. 보통 해외에서 성당 단위로 성지순례 온 신자들이 미사에 참례할 때 쓰는 방법. 그래서 일부 배낭여행자들은 "나 성 베드로 성당에서 한국어 미사에 참례했음"이라는 말이 종종 들리기도 한다.

입장 시 엄격한 복장 제한이 있어서[42] 기본적으로 이곳에 들어가려면 단정한 복장이 요구된다. 사실 꼭 성 베드로 대성당을 포함한 유럽의 다른 오래된 성당이 아니라도, 성당에 들어갈 때 단정한 복장을 갖추는 것은 기본적인 예절이지만 유독 이 성당은 더 엄격하다. 어깨가 노출되는 민소매탱크톱, 무릎이 노출되는 미니스커트, 반바지 등을 입고 들어갈 수 없으며[43], 슬리퍼 종류의 신발도 입장불가. 이 때문에 성당 앞에 복장 제한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으며, 입구에서 입장객들의 복장을 육안으로 일일이 검사한다. 이곳에 다녀온 여행객들의 경험담을 보면 이 복장 규제 때문에 성당 주변에 얇은 스카프 등을 파는 상인들이 많이 있다.

7. 관련 건축

7.1. 크기 경쟁

볼로냐에선 14세기에 옛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더 큰 성 페트로니우스 대성당을 지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야심이 맘에 들지 않던 교황청은 이 성당의 건설을 중지시켰고, 이 성당은 오늘날까지 신랑만 남아있다. 전설에 따르면 교황 비오 4세가 이 성당의 근처 대학 건물을 후원해 확장시켜 성당의 완공을 막았다고도 한다.

1958년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건설한 전몰자의 계곡에는 화강암 산의 암반을 굴착해 조영한 '전몰자의 계곡 성 십자가 대성당'이 있는데 전체 길이가 가톨릭 교회에서 이보다 더 크게 지을 수 없다고 정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길이보다 40m나 더 길자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1m 짧은 지점에 격벽과 중문을 만들어 '이곳부터 성당'이라고 주장하는 꼼수를 썼다.

1989년 아프리카코트디부아르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모델로 지어진 평화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등장함에 따라 가장 큰 성당의 타이틀은 넘겨주게 되었다. 교황청에서는 이제 이런 타이틀에는 집작하지 않는지 특별히 제한을 두거나 하지 않고 1990년에 이 성당을 축성하였다.

7.2. 외관을 본뜬 경우

크고 아름다운 규모와 세계구급 유명세에 걸맞게 성 베드로 대성당의 외관을 베낀 본뜬 성당이 여럿 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1801년부터 1811년까지 10년에 걸쳐 세워진 러시아 정교회상트페테르부르크카잔 대성당(Каза́нский кафедра́льный собо́р), 1875년부터 1894년까지 19년간 건설된 캐나다 퀘벡마리 렌 뒤 몽드 대성당(Cathedrale Marie-Reine-du-Monde)[44], 1865년부터 1892년까지 27년 동안 지어진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 주 오우덴보쉬의 성녀 아가타와 바르바라 대성당(Basiliek van de H.H. Agatha en Barbara)[45], 1985년부터 1989년까지 4년 동안 지어진 코트디부아르 야무수크로평화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다.

이외에도 대한민국 울산광역시 선암호수공원에 있는 초미니 종교시설 중 '성 베드로 기도방'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축소해 2011년에 세워졌다. 최고높이 3.4 m, 너비 1.4 m, 길이 3.5 m, 면적 4.8 ㎡의 아담한 규모로 겉보기에는 미니어처와 다를 게 없으나 내부에는 십자고상과 성모상, 성경이 있고 성인 1~2명이 기도할 수 있다. 성 베드로 기도방은 바로 옆에 자리한 불교 사찰 '안민사' 및 개신교 예배당 '호수교회'와 함께 한국기록원으로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종교시설로 인증받았다. 사진

7.3. 이름만 같은 경우

이 경우는 한 지역에 성당이 2개 이상 존재하는 경우에 생길 수 있다. 아래 예시.
  • 대한민국
    • 수원교구 - 안산대리구 시화 성 베드로 성당

8. 기념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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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착공 기념주화, 크리스토포로 포파,
1506년, 지름 56.5 mm, 청동,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
성 베드로 대성당 500주년 기념주화, 파리 조폐국,
2006년, 지름 37 mm,
율리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신축하기 시작한 해인 1506년에 이를 알리는 기념 화폐를 발행하도록 했고, 이에 따라 금세공사·조각가 크리스토포로 포파(Cristoforo Foppa, 1445~1527경)가 기념 화폐를 제작했다. 교황의 옆얼굴이 있는 면에는 IVLIVS·LIGVR·PAPA·SECVNDVS·MCCCCCVI(Iulius ligurini papa secundus millesimo quingentesimo sexto, 리구리아[46]의 율리오 2세 교황, 1506년)라는 라틴어 명문이, 브라만테의 설계안에 따른 성당 정면이 있는 면에는 TEMPLI·PETRI·INSTAVRACIO(Templi petri instauracio, 베드로 성전 재건)과 VATICANVS·M(Vaticanus mons, 바티칸 언덕)이라는 라틴어 명문이 새겨졌다.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2006년, 성 베드로 대성당 정초 5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의 파리 조폐국에서 1.5유로 기념 화폐를 발행했다. 성당 평면도가 묘사된 면에는 1 1/2 EURO 2006 RF LIBERTÉ - ÉGALITÉ - FRATERNITÉ(1.5유로, 2006년, 프랑스 공화국[47], 자유 - 평등 - 박애)라는 프랑스어 명문이, 성당 정면과 베네딕토 16세가 묘사된 면에는 500 ANS de la BASILIQUE SAINT-PIERRE(성 베드로 대성당 500주년)라는 프랑스어 명문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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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 뒷면
1985년부터 1986년까지 2년에 걸쳐 성 베드로 대성당 정면부, 그 위에 올려진 예수12사도의 성상, 대성당 정면부 앞에 놓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성상에 대한 보수 공사가 있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보수 공사' 항목 참조. 작업이 끝난 후 이를 기념하는 기념 화폐가 발행되었다. 앞면에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옆얼굴과 ·JOANNES·PAVLVS·II·P.M.AN·MCMLXXXVI·PONT·SVI·VIII·(요한 바오로 2세 교황, 1986년, 교황 재위 8년째)라는 라틴어 명문이, 뒷면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 정면부와 ·RESTORATION·OF·THE·FACADE·OF·SAINT·PETER'S·BASILICA·1985·1986·(성 베드로 대성당 정면부 복원, 1985~1986년) 및 POPE·JOHN·PAUL·II·WISHING·TO·HONOR / THE·PRINCE·OF·THE·APOSTLES·RESORED·TO / ITS·FORMER·GLORY·THE·FACADE·OF·THE / PATRIARCHAL·VATICAN·BASILICA / THROUGH·THE·MUNIFICENT·GENEROSITY / OF·THE·ORDER·OF·THE·KNIGHTS·OF·COLUMBUS / AND·UNDER·THE·DIRECTION·OF / ARCHBISHOP·LINO·ZANINI·DELIGATE / OF·THE·R.F.S.P.(사도 베드로를 찬미하기를 바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콜럼버스 기사단의 아낌없는 관대함과 성 베드로 대성당 관리소 대표 리노 자니니 대주교의 지도 아래 바티칸 대성당 정면부의 예전 영광을 회복하였다.)라는 영어 명문이 새겨졌다.

9. 기타

바티칸의 최고 수입원이자 동시에 최대 지출 요인. 관광 수입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 들이지만 그 이상의 돈이 미술품 및 건물 보수에 지출된다. 사진에서 성당에 도배를 하다시피 그려진 그림들부터 살펴봐도 하나같이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화가들이 그린 걸작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모자이크 작품의 경우 벽에 박힌 돌이나 유리가 떨어지면 동일한 자재로 같은 자리에 다시 붙이는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 이는 베네딕토 16세 이후 바티칸 재정의 악화 요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로마에 있는 4대 대성당과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을 포함한 5개의 성당들은 고대 기독교 세계의 5대 총대주교 관구(Pentarchy)들과 각각 연계되어 로마가 5개의 총대주교 관구들 가운데서도 그 정점에 있음을 나타냈는데, 성 베드로 대성당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연계되었다.

스페인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젊은 시절인 1770년로마를 여행했을 때,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꼭대기까지 장비 없이 맨몸으로 올라갔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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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프란치스코가 거행한 요한 23세요한 바오로 2세시성식, 2014년 4월 27일
어떤 사람을 복자성인의 반열에 올리는 시복식, 시성식이 거행되는 곳이다. 새 건물이 완성된 후 거행된 첫 번째 시복식은 교황 알렉산데르 7세가 1662년 1월 8일 집전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시복식이었다. 시복식은 반드시 이곳이 아니더라도 다른 장소에서 거행할 수 있지만, 시성식은 교황이 직접 주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만 거행하는 것이 수세기 동안 이어진 원칙이었다. 아비뇽 유수 때를 제외하고 이 원칙이 깨진 첫 번째 사례가 바로 1984년에 방한한 요한 바오로 2세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한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시성식이다. 당시 한국 가톨릭에서는 교황 방한에 맞춰 시성식을 한국에서 열 수 없겠느냐고 교황청 시성성과 협의했지만, 시성성은 한국 103위 순교복자 시성에 매우 협조적이었음에도 '성 베드로 대성당 이외의 장소에서 시성식이 열릴 경우 다른 지역 교회와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그 상징성이 퇴색할 수 있다'며 시성성 명의로 허가했을 때 혹여 전례로 남아 나중에 말썽이 되지는 않을까 우려해 반대했다.

그런데 시성성의 입장과 상관없이 교황이 친히 내린 결정으로 사안이 해결되면서 '한국에서 거행된 시성식은 어디까지나 1984년 교황 방한 때의 부대 행사이지 주된 행사가 아니고, 시성성의 동의 없이 교황의 의지로 관철한 극히 예외적인 사례이므로 이는 시성식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대한 변경이 아니며, 다른 교회가 한국 교회를 전례로 들어 자국에서 시성식을 거행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구조가 정립되었다. 실제로 당시 시성성 장관[48], 차관[49]과 차관보[50]는 한국에서 열린 시성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몇몇 시성청원인이 바티칸 이외의 지역에서도 시성식이 가능한지 문의했을 때 시성성에서는 "예외는 한 번뿐이며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2013년 2월 11일, 베네딕토 16세2월 28일에 퇴위한다고 밝혀 전 세계 여론이 바티칸으로 집중된 가운데, 퇴위 발표 직후 성 베드로 대성당 돔 채광 정탑에 벼락이 치는 장면이 촬영되어 화제를 모았다.(기사, 사진).

2012년에 마르셀로 디 피니치오라는 이탈리아의 자영업자가 유럽연합과 이탈리아 정부의 정책 때문에 자기 비치 리조트 사업이 망하게 됐다며 성 베드로 대성당 돔 지붕에 올라가 플래카드를 펼치고 24시간 동안 시위했다.#. 시위하는 사람이야 한두 명이 아니니 이런 행위가 특별할 것도 없겠지만, 이 사람은 2013년]에도 돔 지붕에서 농성했고, 2014년에는 정치인들과 면담하기 전까지 절대 내려오지 않겠다면서 성당 정면부의 파사드 박공 지붕에서 농성했다. 돔 지붕이 아니라 파사드를 선택한 이유는 보다 사람들 눈에 잘 띄기 때문이라고.

2015년 9월, 교황 프란치스코의 미국 방문을 맞이해 펜실베이니아 주 모스코의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당 밥 사이먼 신부가 6개월 동안 레고 블럭 50만 개를 이용해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베드로 광장 모형을 만들었다. 해당 작품은 필라델피아 프랭클린 연구소 과학박물관에서 2016년 2월까지 전시되었다.

2015년 12월 8일, 프란치스코가 자비희년을 선포한 당일 저녁 성 베드로 대성당 정면에 '빛이 있으라: 우리를 비춰줄 것이다(Fiat Lux: Illuminating Our Common Home)'라는 제목의 영상 작품이 영사되었다. 이 작품은 인도주의·환경보호 단체가 교황이 동년 6월 18일 발표한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것으로, 해당 단체들은 자비의 희년 개막일에 맞춰 교황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교황청에서는 막바지에 이른 파리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 맞춰 성당 건물을 스크린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영상 제작에 참여한 단체의 홈페이지, 기사, 사진들, 바티칸 유튜브 채널 영상

로마 시내 아벤티노 언덕에는 구호기사단의 수도원 건물(Villa del Priorato di Malta)이 있는데, 이 수도원 문에 뚫힌 작은 열쇠 구멍을 들여다보면 정원의 관목 사이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부분이 절묘한 구도로 나타난다. 사진, 사진

2006년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이기도 한 이날 정초(定礎) 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기사, 기사, 프랑스에서 발행한 1.5유로 기념주화

2018년 10월 17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특별미사가 바티칸을 방문중인 문재인 대통령과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참석한 가운데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청 국무원장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 주재로 집전되었다.기사 영상 특히 미사 직후 문재인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 정착을 주제로 10분간 연설한 것에 대해서 교황청은 '매우 특별하고 이례적인 것'이라고 밝혔다.

10. 대중 매체

이 건물 자체가 바티칸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니, 이를 무대로 한 작품에선 반드시 등장한다. 또한 콜로세움 등과 함께 로마 시내의 주요 랜드마크 중 하나이기도 해서 로마 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편.

찰턴 헤스턴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로 등장한 영화 <고통과 환희(The Agony and the Ecstasy)>(1965년)에서는 새로 지어지기 전의 옛 성당 건물이 부분적으로 등장한다. 내용은 교황 율리오 2세가 미켈란젤로를 억지로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를 그리게 하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옛 성 베드로 대성전이 옆에 있는지라 장면에 따라서 조금씩 철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대성전 건축물의 고증 자체는 그다지 좋지 않다.

영화 2012에서는 성당이 지진 때문에 통째로 무너져서[51] 돔이 굴러가며 성 베드로 광장의 사람들을 깔아뭉개버린다. 영상. 물론 현실의 돔은 저렇게 굴러갈 정도로 단단하진 않다.

무흐테솀 유즈이을에서는 1500년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나온다. 여기서는 쉴레이만 1세오스만 제국을 방해하는 악의 소굴인 것마냥 나온다.[52]

비잔티움의 첩자로 국내에 유명한 미국 작가 해리 터틀도브의 단편 'Under St. Peter's'에서는 예수십자가에서 죽은 게 아니라 뱀파이어가 되어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에 갇힌 것으로 나온다.

신경숙소설 <엄마를 부탁해>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에 가게 되면 장미나무로 만든 묵주를 사달라'고 한 엄마의 부탁을 기억한 주인공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가 피에타를 보며 엄마를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것이 마지막 장면으로 나온다.

스트라이크 위치스 애니메이션 2기 5화에서는 프란체스카 루키니마리아와 함께 로마 시내 이곳저곳를 구경하다가 들른 장소로 나오는데,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꼭대기로 데리고 와서는 여기에서 바라보는 경치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네우로이가 로마 상공에 출현하자 루키니는 돔 지붕을 미끄럼 타듯 쭉 내려가(!)[53] 점프해 스트라이커 유닛을 착용한다.

도쿄 ESP 5화 초반부에서 아즈마 호쿠사이가 자신의 esp 능력으로 보여준 환각 중 하나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내부가 나온다.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스타라이트 스테이지에서 칸자키 란코의 SSR 카드 배경으로 나온다.

10.1. 천사와 악마

랭던이 공중에서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본 것은 처음이다. 오후 햇살에 건물의 대리석 외관이 불꽃처럼 빛났다. 140명의 성인과 순교자들, 그리고 천사의 조상(彫像)으로 치장된 장엄한 건축물은 넓이가 축구 경기장 두 개, 길이는 무려 경기장 여섯 개를 이어놓은 것과 같다. 동굴 같은 대성당 내부는 6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다. 이 숫자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국가인 바티칸 시국 인구의 100배 이상에 달한다.
- 천사와 악마 1권
댄 브라운의 소설 및 이를 바탕으로 한 동명의 영화 천사와 악마에서는 일루미나티가 성당 내부에 있는 베드로의 지하무덤에 반물질을 숨겼다. 궁무처장이 폭발 직전의 반물질을 가지고 헬리콥터를 탄 채 수직 상승하다가[54] 바티칸 공중에서 반물질이 폭발하는데, 이때 발생한 충격파로 인해 성당 전체가 흔들리면서 돔 내부에 장식된 모자이크 성화들이 벽에서 떨어져나갔다. 영상

10.2. 베니스의 개성상인

597개의 대리석 기둥에 의해 떠받쳐지는 이 대규모 성전은 44군데의 제단과 4백여 개의 성상이 구비되며 1천 3백 개에 달하는 모자이크 그림으로 내부장식이 되게끔 설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원형인 광장으로부터 길쭉한 모양으로 뻗어 있어, 위에서 보면 마치 열쇠와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천국의 열쇠'라고도 불리고 있었다.
델 로치 상사가 이번에 응찰한 교황청 입찰은 성 베드로 대사원 개축공사에 추가되는, 1천 3백 개에 이르는 모자이크 유리와 교황청에서 쓸 용기, 그리고 거울용 유리였다.
- 베니스의 개성상인 1권 중

오세영의 장편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도 주인공 안토니오 꼬레아가 상사의 명을 받고 이곳의 건축에 쓸 유리를 납품하는 임무를 맡는다. 베네치아의 유리 공예 기술을 빼돌린 피렌체가 입찰 중간에 끼어들어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입찰을 따내고 안토니오가 승진하는 계기가 된다. 작중 시점인 1606년에 성당 앞에 광장이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만든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성 베드로 광장은 아니지만, 그 이전에도 성당 앞은 '성 베드로 큰 길(Platea Sancti Petri)'이라는 이름의 사각형 모양 공터가 비어 있어서 광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 성 베드로 광장이 조성되기 이전의 모습을 담은 그림. 훗날 광장이 생길 자리에 'PLATEA S·PETRI'라고 적혀 있다.

10.3.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이 땅에는 베드로 씨가 잠들어 있으니 교회는 그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고 유산 관리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는 게 로마 정교의 의견이지 말입니다. 본래는 베드로 씨가 잠들어 있는 곳 바로 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성당을 봉헌 및 건설한 게 시초인 모양이지만 르네상스유쾌한 인플레가 일어나서 크게 개축되었어. 그게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지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ㅡ 명실공히 세계 최대의 교회이자 죽은 이 위에 지은 성역이지."
-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9권 중, 츠치미카도 모토하루

카마치 카즈마라이트 노벨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에서는 로마 정교의 본거지로 등장한다. 14권에서는 후방의 아쿠아가 대성당의 천장을 받치는 기둥 중 하나를 부러뜨려 로마 근교의 이교도들을 실험에 이용한 좌방의 테라를 후려쳐 두 동강 냈는데,[55] 로마 교황은 "역사적, 학술적인 가치를 생각하면 이곳에서의 전투는 삼가야 했어. 훌륭한 건물에 상처를 내고 말았군."이라고 핀잔을 줬다. 16권에서는 우방의 피암마를 막기 위한 로마 교황의 술식이 깨지면서 건물의 3분의 1이 박살나고 말았다.#

10.4.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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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어쌔신 크리드 2에서는 마지막 미션의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에치오 아우디토레로드리고 보르지아를 암살하기 위해 향한다. 그러나 여기는 알고보니 먼저 온 자들의 창고가 있는 곳이었고, 선지자였던 에치오만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만난 미네르바는 에치오를 통해서 미래의 데스몬드 마일즈에게 앞으로 닥칠 위험을 경고한다.

후속작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에는 게임 내에서 보르지아 가문을 필두로 한 교황청 세력의 하수인인 '로물루스의 추종자들'의 소굴로 등장한다. 게임을 하면서 바티칸 영역을 가볼 기회는 꽤 있지만 성 베드로 대성당을 갈 수 있는 건 이 소굴을 통해서일 뿐. 하지만 공사가 막 실시될 즈음인 1500년대 초반이라는 시기상, 공사 중이기에 웅장한 모습은 잘 볼 수가 없다. 들어가면 보르지아 가문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추기경을 잡기 위해 한창 공사 중인 성당 내부를 뛰어다니게 된다. 시작은 추기경들이 미사를 집전하는 성당 내부인데, 여기도 나무로 막아놓은 벽들이나 공사 현장을 가리기 위한 천들 등 공사의 흔적이 곳곳에 존재한다. 물론 추격과 파쿠르 위주의 진행이기에 그것을 위한 지지대나 발판이 즐비해 있을 뿐, 맨 처음 장소를 제외하고는 성당 본면의 느낌은 거의 없는 상태. 곳곳에 인부들이 위치해 있어, 주변으로 뛰어가면 놀라서 연장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마지막에 추기경을 쓰러뜨리고는 꼭대기에서 아래쪽 호수로 다이빙.

특기할만한 점은 구 성당의 일부분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신 성당이 지어지고 있는 모습을 재현했다는 점이다. 나름대로 고증에 신경쓴 것. 다만 역사적으로는 아직 돔이 지어지지 않았던 시기다. 돔이 없으면 게이머들이 잘 못 알아볼테니까 의도적으로 고증 왜곡을 한 것 같다.

10.5. 트리니티 블러드

『너는 베드로. 나는 이 반석(베드로)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
그리스도의 첫 번째 제자이자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의 묘 위에 서 있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그 자체가 거대한 묘비이다.
-트리니티 블러드 4 - 사일런트 노이즈, p.141

요시다 스나오라이트 노벨 트리니티 블러드에서는 2124년 핵전쟁으로 파괴된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대성당과 율리오 2세의 대성당에 이어 3번째로 건설되었다. 이곳 지하 성당은 지상의 대성당에 필적하는 넓이와 30m나 되는 높은 천장을 갖추고 있으며[56], 각 교황의 묘별로 수십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각각 석관과 묘비가 안치되어 있다. 이곳에 안장된 것으로 언급된 교황들 중 실존 인물은 요한 바오로 2세인데, 소설에서는 '대재앙(아마게돈) 이전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던 사회과학적 무신론(커뮤니즘)과 싸운 요한 바오로 2세'라고 서술되었다.

성 베드로 광장은 여전히 있지만 광장을 둘러싼 회랑과 성당은 훨씬 더 커진 건물로 탈바꿈했다. 애니메이션에서의 모습 그리고 3번째 대성당의 축성식과 더불어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 있던 로마 주교의 주교좌, 즉 교황좌가 이곳으로 옮겨졌다. 영어권 번역이 San Pietro Basilica가 아니라 San Pietro Cathedral인 것도 이 때문.

10.6. 바티칸 기적 조사관

동화에 나오는 새하얀 성보다 몇 십 배는 스케일이 크고 위엄 있는 건물이 바로 바티칸의 중심,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대략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건축물이라고 하니 이쯤 되면 하나의 요새라 할 수 있으리라.
- 바티칸 기적 조사관 1권 중

후지키 린의 소설 바티칸 기적 조사관 1권의 프롤로그가 대희년을 맞아 2000년 12월 24일 교황이 거행한 성 베드로 대성당 성문 개문 행사를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설의 두 주인공 히라가 요셉 코우로베르토 니콜라스교황궁 내에 있는 '성도의 자리'로 출근할 때마다 성당 내부를 지나가며, '성 베드로의 의자'가 있는 제대 앞에서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또한 히라가가 사는 집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주인공 두 사람이 바티칸에서 일하다보니, 기적 조사 때문에 현지로 파견되는 곳에 있는 성당을 성 베드로 대성당과 비교해 "바티칸에는 못 미치지만, 규모가 작은 것 치고는 괜찮게 지었어."[57]라고 말하기도 한다. 바티칸에 맞먹는 성당이 전 세계에 얼마나 있다고


[1] 사진으로 보다시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정면에 서면 신랑의 길이 때문에 가까이선 돔이 보이지 않는다. 정면에서 돔을 보려면 정말 뒤로 멀리 가야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카를로 마데르노 항목에 후술.[2] 이걸 만들기 위해서 우르바노 8세가 판테온 현관의 청동판을 모조리 벗겨내도록 명령하자, 당시 로마 시민들은 "Quod non fecerunt barbari fecerunt Barberini(바르바로이(야만인)도 하지 않은 짓을 바르베리니(우르바노 8세의 가문)가 한다)"며 비꼬았다. 그렇지만 판테온에서 뜯어온 청동교황청 성채인 카스텔 산탄젤로에 배치할 대포 주조에 사용되었으며, 발다키노에 소요된 청동베네치아에서 들여왔다는 주장도 있다.[3]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4]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5]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6]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7] 대성당 쿠폴라에도 밑줄 친 이 글귀가 있다.[8] 보통 대성당 하면 큰 성당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대성당은 보통 주교좌 성당(Cathedral)에 대응하여 번역된 단어기 때문에 주교좌 성당이 아닌 이 성당을 대성당으로 부르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틀렸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성당은 가톨릭에서 특별하게 대성전으로 분류하고 있으므로...[9] 1989년 아프리카코트디부아르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모델로 지어진 평화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등장함에 따라 가장 큰 성당의 타이틀은 넘겨주게 되었다. 물론 종교적 권위와 예술성, 역사에서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넘사벽.[10] 자주색(보라색)은 로마 제국 시대에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귀한 색깔이었다.[11] 당시 교황 클레멘스 5세로마를 비운 상황이라 추기경들이 교황을 대신해 대관식을 거행했다.[12] 인노첸시오 6세를 대신해 대관식 거행.[13] 옛 대성당에 있던 교황들의 무덤 중 유일하게 무덤 전체가 온전한 모습으로 새 대성당에 옮겨졌다.[14] 율리오 2세, 라파엘로 산치오, 1511~1512년, 목판에 유채, 108 × 80.7cm,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15]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 라파엘로 산치오, 1518~1519년, 154 × 119 cm, 목판에 유채,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16]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게 바티칸과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주문하는 율리오 2세, 에밀 장 오라스 베르네, 1827년,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17] 헌데 설계도는 라파엘로가 자신을 추천한 브라만테의 설계안을 다 갈아엎고 만든 라파엘로만의 성 베드로 대성당 설계도이다.[18] 1527년 로마 약탈, 요하네스 린겔바흐, 17세기, 캔버스에 유채[19] 클레멘스 7세,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1526년경, 캔버스에 유채, 145 × 110cm, 이탈리아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20] 바오로 3세, 티치아노 베첼리오, 1543년경, 캔버스에 유채, 113.7 × 88.8cm, 이탈리아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21] 비오 4세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모형을 보여주는 미켈란젤로, 도메니코 크레스티, 1618~1619년, 캔버스에 유채, 236 x 141 cm, 이탈리아 피렌체 카사 부오나로티[22] 미켈란젤로의 작업장을 방문한 바오로 3세, 페테르 리티쉬, 1834년, 캔버스에 유채, 190 x 138 cm[23] 비오 5세, 엘 그레코, 1605년경,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24] 그레고리오 13세, 라비니아 폰타나, 캔버스에 유채, 116.5 × 97.5cm, 개인 소장[25] 미켈란젤로가 계획한 돔의 곡률은 반원에 가깝고, 델라 포르타의 것은 현수선에 가깝다. 이를 통해 돔의 수평으로 팽창하는 힘을 아래로 좀 더 집중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돔이수평으로 팽창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켈란젤로가 계획한 16개의 외부 돔 뼈대(rib)와 드럼의 기둥들이 받는 힘은 줄어들어 델라 포르타가 건설한 돔에서는 구조라기보다는 장식에 가깝게 바뀌었다. 미켈란젤로의 돔 모형과 달리 드럼의 기둥 상단과 돔의 뼈대를 연결하는 장식이 델라 포르타의 결과물에서는 빠진 것을 볼 수 있다.[26] 바오로 5세,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1505~1506년경, 캔버스에 유채, 203 × 119cm, 이탈리아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27] 대표적인 예시로 르 코르뷔지에가 훗날 그의 저서에서 이를 심하게 깠다.[28] 마데르노의 일 제수 교회는 예수회 계열 성당들의 정면 디자인의 모범이 될 정도로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특징 중 하나는 기둥의 튀어나온 정도를 다르게 하여 입구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일 제수 교회의 바깥 기둥은 얕고, 점점 가운데 기둥에 가까워질 수록 튀어나오며, 입구 주변의 원 기둥은 벽에서 독립되어 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입구를 강조하고 있다. 근데 성 베드로 대성당도 같은 원리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효과가 다소 밋밋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성당 정면의 좌우 너비가 워낙 넓다보니 각 기둥의 거리가 먼데, 더 많아진 기둥들 간의 입체감 차이는 상대적으로 적어져 입체감이 달라지는게 생각보다 잘 눈에 안띈다. 또한 정면의 크기에 비해 입구들이 작은 편인데 중앙으로 가면서 그 크기도 커졌다 작아졌다가 반복되며, 2층의 발코니 때문에 중앙의 입구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다. 그런 작은 입구를 강조해야 하니 밋밋해보이는 것.[29] 그레고리오 15세, 조반니 프란체스코 바르비에리, 1622~1623년경, 캔버스에 유채, 133.4 × 97.8 cm, 미국 로스앤젤레스 장 폴 게티 미술관[30] 우르바노 8세,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1624~1627년경, 캔버스에 유채, 199 × 128 cm, 이탈리아 로마 카피톨리니 미술관[31] 인노첸시오 10세, 디에고 벨라스케스, 1650년경, 캔버스에 유채, 141 × 119 cm, 이탈리아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32] 알렉산데르 7세,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1667년경, 캔버스에 유채, 90.1 x 76.7 cm, 이탈리아 로마[33] 클레멘스 9세, 카를로 마라타, 1669년, 캔버스에 유채, 158 x 119 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34] 클레멘스 10세,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51.3 × 43 cm, 캔버스에 유채, 73.5 × 59.5 cm, 바티칸, 주바티칸 영국대사관[35] 베르니니와 보로미니는 모두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가 및 조각가로 꼽힐 정도로 출중한 재능을 지녔지만, 로마시 곳곳에 그들이 경쟁한 흔적이 남아있다.[36] 니콜라오 3세[37] 바오로 3세의 손자.[38] 영국 국왕 제임스 2세의 손자이자 마지막 자코바이트 상속자.[39] 성 베드로 대성당뿐만 아니라 로마 시내의 모든 성당은 바티칸이 직접 관리하며, 일단 들어간 이후에 내부의 특정 사적에 대한 입장료를 받는 경우는 있지만 성당 자체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료는 없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요구하는 경우 무조건 사기이니 속지 않도록 하자.[40] JTBC의 한 여행 프로그램에 따르면, 애초에 교황이 직접 주관하는 미사는 인터넷을 통해 사전 예약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무료로 참례할 수 있다고 한다. 해당 방송 제작진도 멋모르고 구입했다가 이걸 본 바티칸 관계자들이 대번에 이건 사기라고 했고, 막판에는 현지 경찰까지 출동하기에 이르렀다.[41] 운 좋으면 교황이 직접 봉헌한다.[42] 이런 복장 규제는 유럽의 다른 유서깊은 성당들에서도 실시하고 있다.[43] 민소매나 탱크톱 상의의 경우 카디건 등 노출을 가릴 수 있는 별도의 겉옷을 준비해서 입으면 입장이 가능하다고 한다.[44]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절반 크기로 축소해 지은 건물이다.[45] 파사드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을, 신랑와 돔 및 내부 장식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본떴다.[46] 율리오 2세가 속한 델라 로베레 가문이 리구리아 주 사보이에서 유래했다.[47] R.F. : République Française[48] 피에트로 팔라치니 추기경(Pietro Palazzini), 1912.5.19~2000.10.11[49] 트라이안 크리산 대주교(Traian Crișan), 1918.5.21~1990.11.6[50] 파비얀 페라야 주교(Fabijan Veraja), 1923.1.20~2014.10.28[51] 이 장면에서 지진으로 성당 벽화들이 갈라질 때 <아담의 창조> 그림에서 하느님과 아담의 맞닿은 손가락에 균열이 일어나며 갈라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인간을 상징하는 연출인 듯하다.[52] 이건 이슬람의 시점에서 기독교를 이단으로 배척하는 데다, 당시 이슬람권과 가톨릭권인 유럽과 견원지간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슬람 입장에서는 알라와 오스만의 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53] 실제로는 돔 지붕의 윤곽이 미끄럼틀을 탈 수 있을 정도로 요철 없는 완벽한 곡면이 아닌 데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돔 지붕의 표면이 석재이기 때문에 찰과상, 화상 등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54] 소설에서는 랭던과 궁무처장이 헬리콥터에 함께 탑승했다.[55] 코믹스판도 동일하게 묘사.## 애니판에서는 기둥을 부러뜨려 테라를 깔려죽였다.##[56] 실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지하 성당은 이 정도로 높지 않다.[57] 바티칸 기적 조사관 1권 검은 학교, p.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