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4-16 17:59:38

하인리히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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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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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nrich VII
가문 룩셈부르크 가문
생몰년도 1275년 ~ 1313년 8월 24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발랑시엔
사망지 이탈리아 부온콘벤토
재위
기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312년 6월 29일 – 1313년 8월 24일
독일 국왕 (로마왕) 1308년 11월 27일 – 1313년 8월 24일
이탈리아 왕국 국왕 1311년 1월 6일 – 1313년 8월 24일
룩셈부르크 백작 1288년 6월 5일 – 1313년 8월 24일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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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어: Heinrich VII. (하인리히 7세)
이탈리아어: Enrico VII (엔리코 7세)
라틴어: Henricus VII (헨리쿠스 7세)

이탈리아를 지배하려 시도한 마지막 독일 황제

신성 로마 제국황제. 아버지는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5세이며 어머니는 아벤느 가문의 베아트리체이다.

2. 생애

하인리히 7세는 프랑스 (당시엔 신성로마제국령) 발랑시엔에서 태어났다. 그는 비교적 지엽적이고 속이 좁은 군주였으며 신성 로마 제국에서 프랑스어로 이야기했다. 그가 룩셈부르크 백작으로서 행동할 때에 하인리히 7세는 프랑스의 신하가 되는 것에 찬성했으며 필리프 4세를 보호하려고 했다. 이것은 신성 로마 제국이 약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룩셈부르크 백작으로서는 봉건적인 분쟁에서 평화를 지켜 영지를 효과적으로 다스렸다.

하인리히 7세는 알브레히트 1세가 1308년 5월 암살당하자 제국 내부의 정치적인 책략에 말려 들어갔다.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는 즉시 자신의 형제인 샤를 드 발루아를 다음 로마왕으로 선출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지원했다. 필리프는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것을 믿었으며 선제후들에게 돈을 풍성하게 뿌렸다. 그러나 샤를 드 발루아를 지원하는 쾰른 대주교인 비르네베르크의 하인리히 2세는 프랑스의 힘의 팽창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팔츠 백작 루돌프가 샤를 드 발루아의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가 되었다.

비록 필리프 4세의 신하였지만 하인리히는 프랑스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선제후들 사이에서 중도파 후보자로 적합한 양상을 띄었다. 또한 그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거물도 아니었고 샤를과 루돌프 사이에 끼어 행복하지 못했다. 하인리히의 동생인 트리어 대주교 볼드윈은 대폭적인 양보를 해 쾰른의 하인리히를 포함한 선제후들의 과반수를 설득했다. 이래서 하인리히는 능숙하게 교섭을 한 결과로 1308년 11월 27일 프랑크푸르트에서 6표를 얻어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아헨에서 1309년 1월 대관식을 치뤘다.

그뒤 보헤미아(독일어로는 뵈멘)의 공주인 엘리슈카가 신성 로마 제국으로 망명하면서 룩셈부르크 가문의 세를 늘리는 계기가 되었다. 엘리슈카는 형부인 게른텔의 하인리히로부터 보헤미아 왕위를 되찾기 위해 제국의 힘을 빌리려했고 그대가로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인 룩셈부르크의 요한[1]에게 청혼해 1310년 8월 30일에 결혼했다. 어째든간엔 하인리히 7세는 며느리인 엘리슈카의 청에 따라 그해에 제국군을 보헤미아로 파견했고 12월 19일 프라하를 함락시키면서 자신의 아들인 요한을 보헤미아의 국왕 얀으로 즉위하게해 록셈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 왕위를 겸하게 되었다.

이후 하인리히 7세는 가문의 세를 불리는데 취미가 들었는지 1311년 1월 밀라노에서 롬바르디아의 왕위를 차지했고 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의 도시들이 그에게 굴복하였다. 그는 선포한 평화와 공명정대한 정의의 계획에 따라 싸우는 세력들을 화해시켰고 유배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돌려보낸 유배자들 대부분이 황제를 편드는 기벨린(황제파) 파벌이란 혐의를 받고 있기에 당시 교황을 편들고 있던 구엘프(교황파) 파벌이 장악한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토스카나와 로마냐 지방에선 의혹과 불만의 소리가 일어나 그해 2월 소요가 발생하였고 같은해 5월엔 브레시아의 발란으로까지 번지고 말고 하인리히 7세는 4개월이 지난 9월에야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다음해인 1312년 5월초 하인리히 7세는 신성 로마 황제위를 대관받기 위해 로마로 갔으나 나폴리 왕 로베르토를 위시한 구엘프 파가 즉각 로마 시 일부를 장악했다. 이를 막아야할 교황으로 당시 아비늉에 계속 있었기에 교황이 부재중이었던 로마를 구엘프 파벌이 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이에 하인리히 7세는 자신이 이끌고 온 군대와 도시 내에 아직 남아 있던 기벨린 파벌과 함께 시가전으로 점차 구엘프 파벌을 구축하면서 6월 29일에야 부재중인 교황을 대신해 로마의 추기경들에 의해 황제의 관을 썼고 그해 8월 하인리히 7세는 토스카나의 구엘프 파벌을 토벌하기 위해 다시 토스카나로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다.

하인리히 7세는 토스카나의 여러 도시들을 점령했지만 구엘프 지도격의 도시였던 피렌체는 함락시키는데 실패한다. 그뒤 자신에게 우호적이였던 피사에 장시간 체류하다가 같은해 8월 나폴리로 원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다시 한번 남진했다. 허나 시에나를 점령하려다가 실패하고 얼마안가 열병으로 향년 38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유해는 피사의 성당에 묻혔다.


[1] 훗날의 보헤미아 국왕 얀. 장님이 되었기 때문에 '맹인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재위 말년 백년전쟁에 프랑스편으로 참전했다가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한다. 참고로 요한의 아들이 바로 금인칙서로 유명한 카를 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