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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fffff 보헤미아 왕국 룩셈부르크 왕조 제3대 국왕 바츨라프 4세 Václav IV}}} | ||||
| 로마왕 벤첼 Wenzel | ||||
| <nopad> | ||||
|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 <colbgcolor=#fff> 체코어 | <colbgcolor=#fff>바츨라프 4세 (Václav IV) | ||
| 독일어 | 벤첼 (Wenzel) | |||
| 출생 | 1361년 2월 26일 | |||
| 신성 로마 제국 독일 왕국 뉘른베르크 | ||||
| 사망 | 1419년 8월 16일 (향년 58세) | |||
| 보헤미아 왕국 프라하 쿤라티체 | ||||
| 재위기간 | 보헤미아 왕국의 왕 | |||
| 1378년 11월 29일 ~ 1419년 8월 16일 | ||||
| 독일왕 | ||||
| 1376년 6월 10일 ~ 1400년 8월 20일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cc20><colcolor=#000> 배우자 | 바이에른의 요하나 (1370년 결혼 / 1386년 사망) | ||
| 바이에른의 조피 (1389년 결혼) | ||||
| 아버지 | 카를 4세 | |||
| 어머니 | 슈바이트니츠의 아나 | |||
| 형제 | 엘리자베트 | }}}}}}}}} | ||
1. 개요
체코어: Václav IV (바츨라프 4세)독일어: Wenzel (벤첼)
라틴어: Venceslaus IV (벤체슬라우스 4세)
독일과 보헤미아의 왕, 룩셈부르크 공작. 대놓고 태만왕(Líný král, der Faule)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만큼 무능한 인물로 끊임없는 반란에 시달리다가 종국에는 이복 동생 지기스문트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파멸했다.
2. 생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국왕인 카를 4세와 세번째 부인 스비드니츠카의 아나의 아들로 제국 도시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으며 장크트제발트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프라하 대주교 파르두비체의 아르노스트와 얀 아코에게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 카를 4세는 1363년 그가 불과 2살 때에 보헤미아 왕위를 물려주었고[1] 1373년에 선제후령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을 하사했다. 1376년 황제선거에서 카를 4세가 아들의 독일왕 선출을 확고히 했을 때 7표 중에서 2표를 카를 4세와 바츨라프 4세가 갖고 있었다.계승을 안정시킨 카를 4세는 제국 도시들에 주었던 특전을 취소하고 다른 귀족들에게 특전을 주었다. 그러나 도시들은 약하지 않았으며 강한 군대를 길렀다. 더욱이 카를 4세는 큰 규모로 협조하고 시도할 수 있는 연맹이 가능하도록 도시들을 조직했다. 1376년 7월, 독일왕으로 선출된 불과 이틀 만에 14개의 슈바벤 도시들이 새롭게 선출된 왕에 대항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슈바벤 동맹을 결성하고 뷔르템베르크의 백작 에버하르트 2세를 공격했다. 도시 동맹은 1389년 제국 내의 자주적인 주들로 활동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새로운 구성원을 모집했다.
2.1. 왕위에 오르다
1378년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보헤미아 왕위를 확실히 승계했으며 몬차 대성당에서 롬바르디아 철관과 함께 이탈리아의 왕위를 이어받았다.1387년 바이에른 공작 프리드리히와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동맹을 맺은 슈바벤 동맹 간에 갈등이 일어 전쟁이 벌어졌고, 이후 약화된 상태에서 1388년에 벌어진 도핑겐 전투에서 에버하르트 2세에게 패배했다. 이 도시들은 점령되어 크게 약탈당했으며 1389년, 에거에서 자치권을 가진 도시들 간의 동맹을 금지하고 정치적 자치를 보장하자자 그들 대부분은 묵인했다. 이 평화령은 수 십년간 약간의 안정을 가져왔으나 도시들은 제국의 권위에 반대하게 되었다.
2.2. 계속되는 대립
긴 치세를 보냈지만 바츨라프 4세의 통치 능력은 형편없었다. 그래서 보헤미아의 로쥼베르크 가문이 이끄는 보헤미아 귀족들과 다시 대립했다. 이 두 번의 상황에서 그는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에 의해 감금당하면서 무능함을 인증했다. 바츨라프 4세의 가장 큰 문제점은 룩셈부르크 왕조 내부에서 드러났다. 카를 4세는 죽기 전 재산을 아들들과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복 동생인 지기스문트는 브란덴부르크를 상속받고 삼촌 벤첼 1세가 룩셈부르크 백작이 되었으며 모라바는 사촌들이 나누어 가지면서 바츨라프 4세의 권한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1386년 지기스문트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이 되어 동유럽 정세에 관여하기 시작했다.또 그는 프라하 대주교와 보헤미아 귀족들의 심각한 반대에 직면했다. 베네딕토회 아빠스 임명식을 둘러싼 대립에서 왕실 관료들에 의해 대주교의 총대리인 요한 네포무크가 고문당하고 살해당하자 1393년에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394년에는 그의 사촌인 모라바의 요프스트가 섭정을 자칭했다.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 된 지기스문트는 1396년 휴전을 주선했으며, 이로써 그는 바츨라프 4세의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서방교회 대분열에서 바츨라프 4세는 교황 우르바노 6세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보헤미아 국왕으로서 종교 개혁가 얀 후스를 보호하려고 했다. 당시 얀 후스의 추종자들은 그들을 이단으로 보고 진압하는 가톨릭에 저항하고 있었다. 이때문에 많은 독일인이 프라하 대학교를 떠났고 마이센 변경백 프리드리히 4세의 후원으로 라이프치히 대학교를 새로 세웠다. 이에 바츨라프 4세는 프랑스 왕 루이 6세와 만나 두 교황 베네딕토 13세와 보니파시오 9세에게 사임을 종용하고 새 교황을 뽑으려 하였으나, 이 대처는 보니파시오를 바츨라프 4세가 버리는것으로 여겨져 제후들의 반발을 샀고, 바츨라프 4세가 독일에 오지 않는것도 비판 받았다.
이러한 문제들로, 바츨라프 4세는 신성로마황제로써의 대관식을 추진하지 못했다. 그러자 1397년 뉘른베르크 제국의회와 1398년 프랑크푸르트 제국의회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고 이후 라인 지역의 네 선제후 즉, 라인 궁정백 루프레히트 3세와 마인츠•쾰른•트리어 대주교들은 그가 공공질서를 유지하지 못하고 교황의 분열조차 해결하지 못했다고 고발했다. 이들은 1400년 6월에 바츨라프 4세를 소환했으나, 그는 보헤미아 문제로 인해 거부했다. 그러자, 선제후들은 결국 8월 20일에 그를 무능, 태만, 게으름, 비천함으로 폐위한다고 선언하였고, 다음날 루프레히트를 왕으로 선출하였다.
바츨라프 4세는 루프레히트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독일 왕위를 위해 루프레히트에 맞서싸우진 않았다.
1402년 6월 29일, 그는 이복동생 지기스문트에게 붙잡혔고, 지기스문트는 바츨라프를 로마로 데려가 황제로 대관시키려 했으나, 곧 바츨라프를 유폐했다. 그는 처음엔 샤움베르크에, 이어 8월 16일부터는 오스트리아 공작 빌헬름의 감시하에 빈에 갇혔다. 11월 20일, 바츨라프는 모든 권한을 지기스문트와 오스트리아 공작들에게 양도하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다. 이후 1403년, 루프레히트는 지기스문트에게 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곧 지기스문트는 헝가리 왕국군을 끌고와 보헤미아를 침입해 약탈하고, 바츨라프의 지지자들을 탄압했다. 이어 그는 루프레히트와 모라비아의 유력 귀족인 욥스트를 상대하기 위해 왕실금고까지 털었으나, 휴전이 맺어지자 성과를 내지 못하고 7월 24일 브라티슬라바로 퇴각했다.
1403년 10월 1일, 교황 보니파시오 9세는 마침내 바츨라프의 폐위와 루프레히트의 즉위를 공식 승인했다. 바츨라프의 황제 대관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바츨라프는 11월 11일에 탈출에 성공했고, 리히텐슈타인의 요한 2세의 도움을 받아 미쿨로프를 거쳐 귀국했다. 이후 쿠트나호라에서 지지자를 만나 프라하에 입성했다.
이후 1409년 루프레히트는 교황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피사 공의회를 소집했고, 양측 교황 진영에서 이탈한 이들이 참여해 대립 교황 알렉산데르 5세를 세웠으나 두 교황 모두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후 1417년까지 3명의 교황이 공존하게 되었다.
1410년 루프레히트가 죽자 계승은 혼란스러웠다. 바츨라프의 사촌 욥스트(모라비아)와 동생 지기스문트(헝가리)가 모두 로마왕으로 선출된 것이다. 바츨라프 자신도 폐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여전히 왕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1411년 욥스트가 죽자, 바츨라프는 보헤미아만 보장된다면 왕관을 포기하겠다고 합의했고, 이로써 문제가 해결되었다.
교황 분열에 지친 주교들과 세속 군주들은 지기스문트가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를 소집했을 때 그를 지지했다. 공의회의 목표는 교회의 “머리와 구성원”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1417년, 공의회는 세 교황 모두를 폐위시키고 마르티노 5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했다. 분열이 종식되자 지기스문트는 제국 황제의 명예를 회복했고, 서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군주가 되었다.
바츨라프 4세는 이단 배제를 갈망하는 지기스문트와 새 교황 마르티노 5세의 압력을 받고 우왕좌왕하다가 1419년 2월 지기스문트에게 양보해 프라하 교회를 가톨릭으로 원복하고 후스파 교회를 세 곳만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7월 30일에 격분한 후스파가 일으킨 제1차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을 계기로, 보헤미아는 후스 전쟁이 일어났다. 그사이 바츨라프 4세는 사냥터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370년 니더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1세[2]의 딸 요하나(1362년경 ~ 1386년)와 결혼했고, 사별한 뒤 1389년 요하나의 사촌 바이에른뮌헨 공작 요한 2세(알브레히트 1세의 조카)의 딸 조피(1376년)와 재혼했다. 어느 결혼에서도 자식을 얻지 못해 사후 지기스문트가 상속인이 되었지만 보헤미아에는 후스 전쟁으로 오랫동안 들어가지 못해 그가 명실상부한 보헤미아 국왕이 된 것은 1436년에 후스 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나서였다.
바츨라프는 학식이 깊은 인물로 묘사되며, 1390년에서 1400년 사이에 제작된 화려한 장식 필사본인 <바츨라프 성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불안정했고, 때로는 무능하게 게으르다가도, 때로는 네포무크의 요한 사건처럼 잔혹한 조치를 취하는 등 극단을 오갔다.
[1] 대관식은 1363년에 열렸지만 실질적으로 보헤미아 왕권을 행사한 것은 1378년부터였다.[2]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의 다섯째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