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8 10:40:58

바츨라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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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제4대 국왕
바츨라프 1세
Václav I
파일:Václav_I..jpg
제호 체코어 바츨라프 1세
(Václav I)
출생 1205년
보헤미아 왕국 크랄루프 드부르
사망 1253년 9월 23일(향년 47~48세)
보헤미아 왕국 프라하
재위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1230년 ~ 1253년
배우자 호엔슈타우펜의 쿠니군데 (1224년 결혼 / 1248년 사망)
자녀 블라디슬라프, 보제나 체스카, 아네슈카, 오타카르 2세
아버지 오타카르 1세
어머니 헝가리의 콘슈탄치어
형제 동복 형제 8명, 이복 형제 4명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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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4대 국왕.

2. 생애

1205년경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1세헝가리 왕국의 국왕 벨러 3세의 딸 콘슈탄치어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어린 시절 깊은 숲속을 헤매는 것을 좋아했고 사냥에 열정적이었다. 그러다가 사냥 중에 사고로 왼쪽 눈을 잃었다. 또한 교회 종소리가 날 때 심한 두통과 뇌전증과 유사한 발작을 일으켰기에, 그가 나타나는 곳마다 종소리가 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특정 음파 주파수에 대한 과민성이 증가하는 정신질환에 시달렸을 것이라 추정한다.

당시 오타카르 1세는 이전에 아내로 삼았다가 결혼 무효 처리하고 내보낸 마이센의 아들레타와의 사이에서 아들 브라티슬라프를 두고 있었다. 그는 브라티슬라프가 마이센 친척들의 지원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콘슈탄치어와의 사이에서 낳은 바츨라프 왕자의 계승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문제가 생기기 전에 후계 구도를 확실히 하기로 마음 먹었다. 1216년 6월 8일, 프라하에서 열린 왕실 의회에서, 오타카르 1세는 바츨라프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와 보헤미아 귀족 대표자들이 왕의 선택을 받아들였고, 프리드리히 2세 역시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1216년 7월 26일 바츨라프가 보헤미아를 세습받는 것을 받아들였다.

1224년, 바츨라프 1세는 아버지로부터 필젠과 부다의 왕자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1228년 2월 26일 차기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프르셰미슬 왕조의 역대 군주들은 자신들이 프르셰미슬의 후손임을 보헤미아인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대관식 중에 프르셰미슬의 그림이 그려진 라프테(Lapte: 슬라브 농민들이 주로 신은, 나무 인피나 자작나무 껍질로 짠 신발)를 신었고, 그의 베낭을 어깨에 매었다. 그러나 14세기에 집필된 달리밀의 연대기에 따르면, 바츨라프 1세는 자신이 농민 출신이라는 걸 부끄러워해 대관식에서 이 유물들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1230년 12월 15일 오타카르 1세가 사망한 뒤 보헤미아의 단독 군주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 오타카르 1세의 독일인 이주 수용 정책과 도시 건설 정책을 그대로 이어갔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프라하 시가지가 확장되었고, 스트르지브로, 로케트, 자테크, 체브 시가 보헤미아에서 건설되었으며, 모라비아에서는 이흘라바, 올로모우츠, 브르노, 프르제로프가 건설 및 확장되었다.

1231년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 호전공(Friedrich II. der Streitbare 1211~1246)에 불만을 품은 카우링 가문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구원을 요청하자, 그는 즉시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북쪽 지대를 철저하게 약탈한 뒤 귀환했다. 1233년 바츨라프 1세가 브르제크라브를 카란티아 공작 베르나르드 2세와 자신의 누이 유디타의 아들인 울리히 3세에게 넘기려 하자, 모라비아 변경백이자 바츨라프 1세의 형제인 프르셰미슬이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해 7월, 프리드리히 2세는 바츨라프 1세와 프르셰미슬간의 갈등이 벌어진 틈을 그해 7월에 모라비아로 진격해 비토프 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도중에 병이 나서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야 했고, 바츨라프 1세는 그 사이에 모라비아로 진격해 브르노를 정복하고 프르셰미슬을 복종시켰다.

123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에게 대적하는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의 직위를 박탈한다고 선포하고 바츨라프 1세에게 오스트리아를 공략하는 임무를 맡겼다. 바츨라프 1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로어 오스트리아 일대와 을 점령했다. 하지만 그는 보헤미아 왕국의 국경 인근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가 명백히 확장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대공과 화해하고 황제의 추가 공격 명령을 거부했다. 오스트리아 대공 프리드리히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의 조카 게르트루드를 바츨라프 1세의 장남 블라디슬라프와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하고, 지참금으로 다뉴브 강 북쪽의 오스트리아 영토를 보헤미아 왕국에 넘기기로 했다.

1237년, 바츨라프 1세는 모라비아 변경백 프르셰미슬과 또다시 갈등을 벌였다. 그는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모라비아로 진격했고, 프르셰미슬은 헝가리 뫙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와 바츨라프 1세와 프르셰미슬의 어머니인 콘슈탄치어가 중재하자, 양자는 화해하기로 했다. 이후 프르셰미슬의 통치는 올로모우츠와 오파바로 제한되었고, 바츨라프 1세의 장남 블라디슬라프가 모라비아 변경백에 선임되었다.

1241년, 몽골제국군폴란드 대공국을 침략했다. 그는 폴란드 대공 헨리크 2세로부터 구원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고, 몽골제국군이 보헤미아까지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군했다. 그러나 그는 레그니차 전투가 벌어진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군대를 배치해두고 상황을 지켜봤고, 헨리크 2세는 몽골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전사했다. 헨리크 2세가 참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보헤미아로 철수했다. 이후 몽골군 습격대가 글라드스코를 거쳐 보헤미아로 침입하려 했지만 바츨라프 1세가 산길에 배치해둔 군대의 거센 저항에 직면해 패퇴했다.

얼마 후 몽골군 분견대가 마이센을 공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마이센을 향해 진군했지만 도중에 모라비아가 몽골군에게 약탈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라비아로 이동했고, 1241년 말 몽골군 분견대가 얼어붙은 다뉴브 강을 건너 빈을 향해 진격하는 것을 저지했다. 그 후 몽골제국군은 유럽 원정을 중단하고 돌아갔고, 몽골군을 연이어 격퇴한 바츨라프 1세와 보헤미아 왕국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서 크게 상승했다.

1246년, 바츨라프 1세는 오스트리아 대공 프리드리히 2세가 조카 게르트루드를 자신의 장남 블라디슬라프와 결혼시키는 걸 좀처럼 진행시키지 않다가 게르트루드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제안한 것에 격분해 헝가리 국왕 벨러 4세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은 뒤 브르제크라브 공작 울리히 3세에게 오스트리아 침공을 지시했다. 그러나 그해 1월 26일, 울리히 3세는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국경 지대인 라 안 데르 타야에서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의 기습 공격을 받고 패배했다. 하지만 바츨라프 1세가 대대적인 공세를 가할 것을 우려한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는 블라디슬라프와 게르트루드의 결혼이 성사되게 했다.

1246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가 헝가리 왕국으로 쳐들어갔다가 레이타 강 전투에서 참패해 목숨을 잃었다. 이후 블라디슬라프가 오스트리아 공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 다수의 귀족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냈지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승인을 받기도 전인 1247년에 급사했다. 이리하여 프르셰미슬 가문이 오스트리아 공국을 손에 넣을 기회는 날아갔다.

블라디슬라프가 사망한 후, 모라비아 변경백 직위는 바츨라프 1세의 차남인 오타카르 2세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오타카르 2세는 아버지의 통치에 불만을 품을 귀족들을 비밀리에 포섭한 끝에 1248년 7월 31일 자신을 "젊은 왕"이라고 칭하며 반기를 들었다. 보헤미아 대귀족이자 대법관인 크티보르 등 보헤미아 대귀족들이 오타카르 2세를 지지했고, 프라하는 순식간에 오타카르 2세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바츨라프 1세는 자신을 추종하는 병사들을 끌어모은 뒤 프라하를 되찾으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보헤미아 북서쪽으로 후퇴한 뒤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마 왕 콘라트 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구원은 제때 오지 않았고, 오타카르 2세는 1248년 가을 아버지를 마이센으로 밀어내고 보헤미아 전역을 장악한 뒤 자신을 보헤미아 국왕으로 칭했다.

이후 콘라트 4세와 바이에른 공작 오토 2세의 지원을 받은 바츨라프 1세는 반격을 개시했다. 리즈므부르크체코의 보레스 2세가 이끄는 바츨라프군은 모스트 인근에서 오타카르군을 격파하고 프라하를 압박했다. 이에 오타카르 2세는 보레스 2세와 협상해 자신이 "젊은 왕"이라는 칭호만 사용하고 보헤미아 왕국을 아버지와 양분하겠다고 제안했다. 보레스 2세는 이에 응하려 했지만, 아들의 반역에 잔뜩 분노한 바츨라프 1세는 이를 거부했다. 1249년, 바츨라프 1세는 본군을 이끌고 리토메르지체로 진군한 뒤 프라하를 향해 행진했다. 그해 8월 5일, 바츨라프 1세는 일부 주민이 성문을 열어준 덕분에 프라하 시에 입성했다.

오타카르 2세는 프라하 성채로 피신했지만, 포위 공격에 시달린 끝에 젊은 왕이라는 칭호를 포기하고 성을 내주는 대신 모라비아 변경백으로 돌아가는 데 동의했다. 그해 9월, 바츨라프 1세는 오타카르 2세와 반란 당시 오타카르 2세를 지원했던 자들을 티르조프 성에 초대한 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모조리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오타카르 2세는 곧 사면을 받고 모라비아로 돌아갔지만, 반란의 주동자들은 감옥에 그대로 갇혀 있거나 처형되었다.

1251년, 바츨라프 1세는 바이에른을 직접 침공했다가 병에 걸리자 프라하로 돌아갔고, 전쟁 지휘권은 오타카르 2세에게 맡겨졌다. 그해 12월, 헝가리 왕국과 비이에른 공국의 침략에 시달리던 오스트리아 귀족들은 오타카르 2세를 공작으로 받들기로 결의했다. 이에 헝가리 국왕 벨러 4세는 갈리치아-볼히니아 국왕 다니엘 로마노비치, 바이에른 공작 오토 2세,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5세, 오폴레 공작 브와디스와프 1세와 함께 반 보헤미아 연합을 결성했다. 1253년 여름, 연합군은 오파바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뒤이어 모라비아를 침공해 올로모우츠 인근에서 모라비아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에 바츨라프 1세와 오타카르 2세 부자가 각각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에서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접근해오자, 연합군은 즉시 철수했다.

이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중재 하에 보헤미아 왕국-오스트리아 공국과 반 보헤미아 연합간의 평화 협상이 진행되던 1253년 9월 23일, 바츨라프 1세는 크랄루프 드부르의 별궁에서 급사했다. 사후 그의 심장과 내장은 포차플리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 보관되었고, 유해는 프라하의 성 아네슈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오타카르 2세가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으로 등극했다.

3. 가족

  • 호엔슈타우펜의 쿠니군데(1200 ~ 1248): 독일왕 필리프의 딸.
    • 블라디슬라프(1227 ~ 1247): 모라비아 변경백, 오스트리아 공작.
    • 보제나 체스카(1229/1230 ~ 1290):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3세의 부인.
    • 아네즈카(1231 ~ 1268): 마이센 변경백 하인리히 3세의 부인.
    • 오타카르 2세(1233 ~ 1278): 보헤미아 국왕, 오스트리아 공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