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18:50:04

블라디슬라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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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19대 공작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2대 국왕
블라디슬라프 2세
Vladislav II
파일:블라디슬라프 2세.jpg
제호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블라디슬라프 2세
(Vladislav II)
출생 1110년
사망 1174년 1월 19일
재위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1140년 ~ 1158년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1158년 ~ 1172년
자녀 베드르지흐, 스바토플루크, 보이테흐 3세, 아네즈카, 오타카르 1세,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 리치사 체스카
아내 바벤베르크의 게르트루드, 튀링겐의 유디트
형제 디에폴트 1세, 안드르지흐, 스바타바 체스카
아버지 블라디슬라프 1세
어머니 베르크의 리체자
1. 개요2. 행적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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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19대 공작,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2대 국왕.

2. 행적

1110년경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와 베르크 백작 하인리히의 딸인 리체자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디에폴트 1세, 인드르지흐, 스바타바 체스카가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알려진 바 없지만, 1136년에 벌어진 일화는 전해진다. 이에 따르면, 당시 로마에서 여행 중이던 그는 삼촌이자 보헤미아 공작을 맡고 있던 소베슬라프 1세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에게 제공한 보헤미아군의 지휘를 맡기겠다는 지시를 받았고, 군대에 합류하기 위한 여행 비용을 제공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돈을 가지고 친구들과 함께 헝가리로 도망쳤다고 한다.

1138년, 소베슬라프 1세는 독일왕으로 선출된 콘라트 3세가 개최한 밤베르크 제국 의회에 참석한 뒤 콘라트 3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수석 시종을 세습할 권리를 인정받고, 자신이 죽으면 장남 블라디슬라프가 보헤미아 공작위를 세습하는 것 역시 인정받았다. 그 해 6월, 그는 보헤미아 귀족들을 사드스카로 소환한 뒤 블라디슬라프의 계승을 확인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1140년 2월 14일 소베슬라프 1세가 사망한 뒤, 보헤미아 귀족들은 소베슬라프 1세의 권력 강화 정책으로 인해 많은 이가 숙청된 과거가 되풀이되는 걸 피하고 싶었고, 자신들의 특권을 관철하기 위해 젊고 경박한 인물을 공작위에 앉히기로 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딱 그 인물로 정평나 있었기에, 귀족들은 그를 옹립하기로 했다. 콘라트 3세 역시 보헤미아 공작위가 부자 상속 방식으로 세습되는 건 자신에게 좋을 게 없다고 여기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블라디슬라프 2세는 보헤미아 공작이 된 뒤 귀족들의 바람과는 달리 정무에 정력적으로 임했고 귀족들의 통제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이에 자신들이 오판했다는 걸 깨달은 귀족들은 반기를 들기로 하고, 1142년 당시 생존한 프르셰미슬 왕조 일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콘라드 즈노젬스키를 보헤미아 공작에 세우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브르노의 브라티슬라프와 오타 3세를 포함한 모라비아 지역의 공자들도 가세했다. 그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카슬라프 지역의 비소카 언덕에서 형제 디에폴트 1세와 인드르지흐, 올로모우츠 주교 인드르지흐 즈디크의 지원을 받아 반란군과 맞섰다.

1142년 4월 25일, 양군은 비소카 언덕에서 맞붙었다. 일부 귀족들이 전투 도중에 반란군 편으로 돌아서면서 전세가 기울자, 그는 적진 한 가운데로 돌진해 돌파에 성공하고 형제들과 함께 프라하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병력을 잃어서 반란군에 자력으로 대응할 수 없게 되자, 디에폴트 1세에게 프라하 성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인드르지흐 즈데크와 함께 콘라트 3세에게 찾아가서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콘라트 3세로부터 원군을 받아낸 그가 프라하로 돌아오자, 디에폴트 1세의 철저한 방비에 막혀 프라하를 공략하지 못하고 있던 반란군은 항복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이 승리를 이용해 모라비아를 프라하의 지배하에 두었고, 올로모우츠 주교 인드르지흐 즈데크의 협력을 통해 모라비아 교회의 영지와 물품들을 세속 군주들의 통제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했다.

1147년 콘라트 3세가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을 때 동행했고, 교황 특사 귀도가 그를 대신해 보헤미아를 통치했다. 하지만 그는 도중에 이탈해 아그림으로 가서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와 접견했고, 키예프와 크라쿠프를 거치며 이교도 슬라브족을 상대로 십자군 전쟁을 벌였다. 1152년 새 독일왕이 된 프리드리히 1세가 소베슬라프 1세의 자식들 중 한 사람을 보헤미아 공작에 앉히려 하면서, 처음에는 그와 프리드리히 1세와의 관계가 냉각되었다. 하지만 프라하 주교 다니엘의 중재 덕분에 양자는 화해했고, 1156년 6월 레겐스부르크 제국 의회에 참석한 블라디슬라프 2세는 공작들의 대변인 역할을 맡았다. 1157년 프리드리히 1세의 폴란드 원정에 참여해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북부 이탈리아 도시, 특히 밀라노를 공략하려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1158년 1월 11일,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에 보답하고자 레겐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 공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블라디슬라프 2세에게 보헤미아 왕관을 씌워주고 크랄(král) 칭호를 내림으로써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임했다.[1] 그 해 여름, 블라디슬라프 2세는 황제와 함께 밀라노 원정에 나썻고, 브레시아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밀라노는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1161년 장남 베드르지흐와 디에폴트를 이탈리아로 보내 황제를 돕게 했지만,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1162년 프리드리히 1세와 함께 3번째 밀라노 원정에 착수해 마침내 공략에 성공하고 금, 은 등 막대한 금은보화를 보상으로 지급받고 귀환했다.

1161년, 소베슬라프 2세는 용병대를 고용한 모라비아로 진군해 올로모우츠를 점령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진압에 착수했지만 여의치 않자 협상하고 싶다며 그를 프라하로 초대했다. 소베슬라프 2세는 이에 응해 프라하로 갔다가 체포된 뒤 프르짐다 성에 또다시 투옥되어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다.

한편, 헝가리 왕국에서는 1162년 국왕 게저 2세가 사망한 뒤 게저 2세의 아들인 이슈트반 3세와 게저 2세의 두 동생인 이슈트반 4세와 라슬로 사이의 내전이 발발했다.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가 자국으로 망명했던 이슈트반과 라슬로 왕자에게 군대와 물자를 지원해 이슈트반 3세에 대항하게 하자, 이슈트반 3세는 블라디슬라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동로마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했기에 거부했다. 이슈트반 3세는 마누일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간청했다. 이후의 협상 끝에, 그는 황제로부터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받는 대가로 동생 벨러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내기로 했고, 동생 벨러가 아버지 게저 2세로부터 부여받은 아파치 공국(달마티아, 크로아티아 등 헝가리 왕국의 일부 영역)을 동로마 제국이 장악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다.

마누일 1세는 이 정도면 헝가리를 약화시키고 제국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목표를 충분히 달성했다고 여기고 이슈트반 4세에게 등을 돌렸다. 이에 이슈트반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접근했고, 헝가리의 여러 성직자와 귀족들이 신성 로마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종주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이슈트반 3세는 낌새를 읽고 프리드리히 1세에게 사절을 보내 공물을 바칠 테니 개입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일단 헝가리의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고, 그의 신하들인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 2세,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에게 헝가리를 예의주시하라고 지시했다.

1164년, 이슈트반 3세는 동로마 제국이 가져갔던 벨러 3세의 영지인 중앙 달마티아를 탈환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이슈트반 4세가 용병대를 규합해 시르미움을 공략하고 주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이슈트반 3세는 이에 맞서 주변 세력에 구원을 요청했고, 그는 오스트리아, 할리치나 방면에서 파견된 군대와 함께 이슈트반 3세를 지원하러 출진했다. 연합군은 헝가리 각지에서 약탈을 벌였다. 그러나 마누일 1세가 곧 헝가리로 진군하여 바치까지 진군하자, 그는 이슈트반 3세에게 평화 협약을 맺을 것을 권고했다. 이슈트반 3세는 보헤미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시르미움을 포기하기로 하고, 그 대신 황제가 이슈트반 4세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그는 장남 베드르지흐의 딸이자 자신의 손녀인 헬레나를 마누일 1세의 친척인 페트라리프 가문 인사와 결혼시켰다고 전해진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보헤미아에서 30여년간 통치를 이어가면서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었고, 프레몽트레회, 시토회, 구호기사단 등 성직자 조직을 보헤미아에 수용했다. 그의 치세에 스트라호프 수도원, 플라시 수도원, 젤리브 수도원, 독사니 수도원을 포함한 여러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1160년경에는 프라하에 석조로 제작된 주디스 다리가 세워지기도 했다. 또한 이전에 개발되지 않았던 숲이 우거진 지역이 여러 소귀족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어 개간되면서 국가 경제가 발전했고, 그 과정에서 흐라비시츠, 로젠베르크, 스트라코니츠 등 새로운 영주 가문이 등장했다.

그러나 1167년 프라하 주교 다니엘이 사망한 후, 프리드리히 1세와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 2세간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1168년 블라디슬라프 2세의 아들인 보이테흐가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선임되자, 프리드리히 1세는 이러다가 보헤미아 공국의 영향력이 오스트리아까지 미칠까 염려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보히테흐 선임을 인정받기 위해 상당량의 금액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1169년 밤베르크 제국 의회에서 보이테흐를 인정하길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테흐는 잘츠부르크 주교구의 실질적인 주교로서 통치를 행사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장남 베드르지흐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물려주길 갈망했다. 애초에 그가 장남 이름을 베드르지흐라고 지은 것도 프리드리히 1세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2]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베드르지흐의 왕위 상속이 인정받을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그는 생전에 장남에게 왕위를 넘겨줌으로써 기정사실로 만들기로 하고 1172년 말에 아들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넘겨주고 스트라호프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로서 말년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곧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소베슬라프 1세의 아들들인 올드르지흐, 바츨라프 2세 등은 1173년 9월 베드르지흐를 몰아내기 위해 프리드리히 1세를 찾아가 황제의 승인 없이 계승이 이뤄졌으니 조치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보헤미아 왕위 계승이 이뤄졌다는 소식에 진노해 베드르지흐에게 소환령을 내렸고, 베드르지흐는 감히 황제에 대적할 엄두를 못내고 이에 응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는 블라디슬라프 2세의 조치를 무효로 처리하고 보헤미아 국왕 칭호를 회수한 뒤 올드르지흐를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했다. 하지만 보헤미아 귀족들은 올드르지흐를 공작으로 섬기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무산되었고, 그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던 소베슬라프 2세가 석방된 뒤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1173년 가을, 블라디슬라프 2세는 보헤미아를 떠나 두번째 부인의 영지인 튀링겐으로 이동했고, 1174년 1월 19일 메란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마이센 대성당에 묻혔다가 나중에 스트라호프 성모 승천 교회로 이장되었다.

3. 가족

  • 바벤베르크의 게르트루드(1118 ~ 1150):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3세의 딸.
    • 베드르지흐(1141 ~ 1189): 보헤미아 공작.
    • 아네즈카(? ~ 1228): 성 조지 대성당 수녀원장
    • 스바토플루크(? ~ 1169년 이후): 1164년 헝가리 국왕 게저 2세의 딸 엘레니와 결혼. 14세기 보헤미아 수도사 라데니의 프리빅 풀카바(Přibík Pulkava z Radenína)가 집필한 보헤미아 연대기에 따르면, 1165년 나라를 한동안 비운 아버지를 대신해 통치를 행사하던 보이슬라프가 계모 유디트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습격해 단검으로 찔러 치명상을 입혔고 유디트의 손에도 상처를 입혔다. 나중에 돌아온 블라디슬라프 2세는 이에 진노해 아들을 국외 추방했고, 스바토플루크는 1169년 이후 독일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 보이테흐(? ~ 1200): 잘츠부르크 대주교.
  • 튀링겐의 유디트(1135 ~ 1174): 튀링겐 변경백 루트비히 1세의 딸.
    • 오타카르 1세(1155 ~ 1230): 보헤미아 공작(1192 ~ 1193, 1197 ~ 1198), 보헤미아 국왕
    •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1160 ~ 1222): 보헤미아 공작, 모라비아 변경백
    • 리치사 체스카(1165 ~ 1182):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의 아들인 뫼들링의 하인리히 1세의 아내.


[1] 크랄(král)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카롤루스 대제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게 정설이다.[2] 베드르지흐(Bedřich)는 독일의 남성 이름인 프리드리히의 보헤미아식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