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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24대 공작 인드르지흐 브르제티슬라프 Jindřich Břetislav | ||
제호 |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 인드르지흐 브르제티슬라프 (Jindřich Břetislav) |
출생 | 미상 | |
사망 | 1197년 6월 15일 | |
재위 |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 |
1193년 ~ 1197년 | ||
형제 | 알즈비에타, 마르케타 | |
아버지 | 인드르지흐 프르셰미슬로베츠 | |
어머니 | 마가레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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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24대 공작이자 프라하 주교2. 행적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 2세 치세 때 보헤미아군 사령관으로서 반란군 진압을 수행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의 제2차 십자군 원정에 동행했던 인드르지흐 프르셰미슬로베츠와 마르게타의 외아들이다. 두 누이로 독사니 수도원의 수녀로 활동한 알즈비에타와 마르케타가 있었다. 그는 젊었을 때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후 사제로 서품된 뒤 1178년 비셰흐라드 교구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4년간 그곳에서 활동하던 그는 1182년 3월 25일 튀링겐 출신의 프라하 주교 발렌타인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주교로 선출되었고 5월 23일 잘츠부르크 대주교 보히테흐 3세에게 인가받았다.그는 세속 권력의 종속으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키고 성직자들에 대한 세금 징수를 제한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1186년, 사촌이자 크루딤, 차슬라프, 브라클라프 시를 관리하던 디에폴트 2세가 관리들을 파견해 교회의 영지 재산을 관리하는 감독들에게 자유롭게 간섭하게 하자, 그는 디에폴트 2세에게 성무 금지령을 내려서 그가 조치를 취소하고 사과하도록 했다. 이후 보헤미아 공작 베드르지흐가 디에폴트 2세와 똑같은 조치를 내리자, 그는 이에 불만을 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를 찾아가 베드르지흐를 단속해달라고 요청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레겐스부르크에서 제국 의회가 열릴 때까지 결정을 연기했다. 베드르지흐 본인은 의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인드르지흐가 공작을 상대로 불평할 권리가 없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1187년 3월 5일, 프리드리히 1세는 베드르지흐가 의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고 간주하고 인드르지흐 주교에게 황금 황소를 선물했으며, 보헤미아 공작과는 별개로 황제 직속의 공작으로 지명되었다. 이리하여 주교구의 재산은 보헤미아 공작의 권위에 속하지 않게 되면서, 주교구와 보헤미아 공국 사이에 분열이 발생했다.
1191년 9월 9일 보헤미아 공작 콘라드 2세가 사망한 뒤, 바츨라프 2세가 새 공작이 되었다. 인드르지흐는 보헤미아 공작은 바츨라프 2세가 아니라 블라디슬라프 2세의 아들인 오타카르 1세가 맡아야 한다고 여기고 1192년 1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를 찾아가서 오타카르 1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하인리히 6세는 은화 6,000 흐리브냐를 제공하겠다는 오타카르 1세의 약속에 따라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오타카르 1세를 보헤미아 공작, 오타카르 1세의 형제인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를 모라비아 변경백에 선임하기로 했다.
이후 바츨라프 2세를 몰아내고 보헤미아 공작이 된 오타카르 1세가 약속했던 돈을 지불하길 꺼리면서 황제와 공작간의 갈등이 불거지자, 그는 이 상황을 회피하고자 스페인의 명망높은 성당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으로 순례를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6세는 독일을 지나가고 있던 인드르지흐에게 보헤미아로 돌아가도록 강요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따랐다. 1192년 가을까지 약속했던 자금의 일부만 지불되자, 인드르지흐는 황제의 궁궐과 체브 성에 교대로 머물면서 오타카르 1세가 약속을 지키는 보증인으로서 붙들려 있어야 했다.
1193년, 오타카르 1세가 브라반트 공작 하인리히 1세가 주도하는 반(反) 하인리히 6세 연합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하인리히 6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보헤미아 공작을 교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해 6월, 하인리히 6세는 인드르지흐로부터 은화 6,000 흐리브냐를 받는 대가로 보헤미아 공작을 수여하기로 했다. 그해 8월, 인드르지흐는 독일군을 이끌고 보헤미아로 향했지만 주민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고, 오타카르 1세는 그를 물리치고자 보헤미아 귀족들이 이끄는 사병대를 집결시켜 진군했다. 그러나 즈디체 인근에서 양군이 대치했을 때, 오타카르 1세 휘하에 있던 귀족들이 대거 편을 바꾸는 바람에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오타카르 1세는 프라하로 도피했다.
오타카르 1세는 프라하에서 주민들의 열띤 호응을 받으며 1193년 성탄절까지 항전했지만, 결국 함락되기 직전까지 몰리자 친척인 보겐 백작 알브레히트 3세에게 망명했다. 인드르지흐는 프라하에 입성하여 입지를 다진 뒤 1194년 여름 모라비아에서 군사 작전을 벌여 모라비아 변경백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의 항복을 받아내고 프라하로 데려감으로써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이후 하인리히 6세의 명령에 따라 마이센 변경백 알브레히트를 향한 원정에 동행했다.
1195년 12월 6일 하인리히 6세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일으키겠다고 선포하자, 인드르지흐는 이에 호응했다. 그러나 나폴리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하인리히 6세의 십자군 원정은 지연되었다. 그 사이 병에 걸린 인드르지흐는 프라하를 떠나 조용한 마을인 체브로 옮겨 요양 생활을 했다. 1197년 3월 13일 교황 특사인 카푸아의 피에트로 추기경이 찾아와 십자군에 대한 지원을 얻고 보헤미아 신부들로부터 여인과 성관계를 하지 않고 순결 서약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6월 15일, 인드르지흐는 사망했고 누이들이 수녀로 활동했던 독사니에 있는 프레몽트레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