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04:02:33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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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25대 공작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
Vladislav Jindřich
파일: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jpg
제호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
(Vladislav Jindřich)
출생 1160년
사망 1222년 8월 12일 (향년 61~62세)
재위 모라비아 변경백국의 변경백
1192년 ~ 1194년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1197년
모라비아 변경백국의 변경백(복위)
1197년 ~ 1222년
아내 하일비다
형제 베드르지흐, 스바토플루크, 보이테흐 3세, 아네즈카, 오타카르 1세, 리치사 체스카
아버지 블라디슬라프 2세
어머니 튀링겐의 유디트
1. 개요2. 행적

[clearfix]

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25대 공작.

2. 행적

1160년경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 2세와 튀링겐 변경백 루트비히 1세의 딸 유디트의 아들로 출생했다. 젊은 시절은 알려진 바 없으나 동복형 오타카르 1세와 행보를 함께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1191년 오타카르 1세가 보헤미아 공작 바츨라프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가담해 형의 승리에 일조한 뒤 119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 의해 모라비아 변경백에 선임되었다.

1193년 오타카르 1세가 하인리히 6세를 상대로 반기를 드려던 브라반트 공작 하인리히 1세와 손을 잡았던 일이 발각되어 궁지에 몰렸다. 프라하 주교였던 인드르지흐 브르제티슬라프는 하인리히 6세로부터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된 뒤 독일군을 이끌고 보헤미아로 진군했다. 오타카르 1세는 이에 항전하면서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블라디슬라프는 하인리히 6세와 대적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인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결국 오타카르 1세는 중과부적으로 친척인 보겐 백작 알브레히트 3세에게 망명했다.

1194년 여름, 인드르지흐 브르제티슬라프는 모라비아로 진군했다.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는 이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항복해 직위를 박탈당한 뒤 프르하로 이송되었다. 이후 프라하에서 감시를 받으며 지냈고, 1197년 오타카르 1세가 보헤미아 진입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건이 벌어진 후에는 감옥에 갇혔다. 그러다 1197년 6월 15일 인드르지흐 브르제티슬라프가 사망하자, 보헤미아 귀족들은 그를 석방하고 6월 23일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했다.

오타카르 1세가 이에 불복해 그 해 12월 보헤미아로 쳐들어오자, 그는 이에 맞서고자 진군했다. 하지만 동복형과 차마 피튀기는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그는 프라하 주교 다니엘과 귀족들의 중재에 따라 오타카르 1세와 협상한 끝에, 1197년 12월 6일 오타카르 1세가 보헤미아 공작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대신 모라비아 변경백에 복위한다는 합의를 맺었다.

그는 일반적으로는 1198년부터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이 된 오타카르 1세의 지시에 순종했지만, 독립적인 결정도 몇 가지 내렸다. 1204년 또는 1205년 올로모우츠 주교이며 잉글랜드 출신인 로버트와 함께 벨레흐라드에 시토회 수도원을 세웠다. 또한 아내 하일비다와 함께 북 스티리아 마리아젤에 성당을 설립했다. 브로츠와프 주교 소유의 즐라테 호리(Zlaté Hory, '황금산')에 있던 군용 금광을 자기 소유물로 삼았다가 교황청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1213년 모라비아에서 가장 오래된 자유 도시인 우니초프를 세웠다. 1216년 왕위 계승에 대한 장자 상속 원칙을 확립한 법령을 형과 함께 반포했다. 이는 군주 선출 과정에서 발생한 분쟁과 음모를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보헤미아가 또다시 혼란에 빠지는 걸 막기 위한 조치였다.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는 생전에 오스트리아 영주 가문의 일원인 것으로 추정되는 하일비다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1222년 8월 12일에 사망한 뒤, 모라비아는 오타카르 1세에게 넘어갔다. 그의 유해는 벨레흐라드의 시토회 수도원에 안장되었지만, 후스 전쟁 때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