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6 09:38:29

스바토플루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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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모라비아 공국 3, 5대 공작
보헤미아 공작
대 모라비아 초대 국왕
스바토플루크 1세
Svatopluk I
파일:스바토플루크 1세.jpg
제호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스바토플루크 1세
(Svatopluk I)
라틴어 즈벤티발트
(Zwentibald)
출생 미상
사망 894년
재위 모라비아 공국의 공작
870년 ~ 871년
모라비아 공국의 공작
871년 ~ 885년 이전(복위)
대 모라비아 왕국 국왕
885년 이전 ~ 894년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890년 ~ 894년
자녀 모이미르 2세, 스바토플루크 2세, 프레슬라프
아버지 스베티미르 또는 보기슬라프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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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라비아 공국 3, 5대 공작, 대 모라비아 왕국 초대 국왕, 보헤미아 공국 공작.

2. 행적

동프랑크 왕국의 연대기인 <아날레스 풀덴세(Annales Fuldenses)에 따르면, 스뱌토플루크 1세는 라스티슬라프의 조카였다고 한다. 12세기 후반에 작성된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스베티미르였다고 한다. 17세기에 모이미르 가문의 가계도를 집필한 보헤미아 출신의 가톨릭 성직자이자 역사가 얀 토마시 페시나 이 체코로두(Jan Tomáš Pešina z čechorodu, 1629 ~ 1680)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보기슬라프라고 한다.

그는 860년대 초에 모라비아에서 삼촌이자 모라비아 공작 라스티슬라프의 중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메토디오스의 생애>에 따르면, 라스티슬라프와 그가 공동으로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3세에게 슬라브어에 익숙한 선교사들을 모라비아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미하일 3세는 스라브어에 능통과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를 파견해 정교회를 널리 전파하게 했다. 865년경 삼촌에 의해 모라비아의 동부 지역인 나트라 공국의 공작에 선임되었다. 868년과 869년에 동프랑크 왕국의 군주 루트비히 2세가 파견한 프랑크군의 침략에 직면했지만 삼촌과 함께 막아냈다.

870년, 스바토플루크 1세는 동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동맹을 맺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라스티슬라프는 분노해 사냥을 함께 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를 불러들인 뒤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 음모를 사전에 파악한 스바토플루크 1세는 라스티슬라프를 급습해 체포한 뒤 870년 11월에 동프랑크 왕국에 넘겼다. 라스티슬라프는 프랑크푸르트로 끌려간 뒤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루트비히 2세는 평결을 실명형으로 완화했다. 그 후 라스티슬라프는 로마에서 모라비아로 가던 도중에 바이에른 주교에 의해 체포된 메토디오스와 함께 바이에른 수도원에 감금되어 870년 이후에 사망했다.

이후 스바토플루크 1세는 모라비아 공작이 되었지만, 871년 카를로만이 파견한 오스트리아 변경백 빌헬름 2세와 어퍼 판노니아 변경백 엥겔샤크 1세에게 체포되어 바이에른으로 끌려갔다. 이에 모라비아 주민들은 스바토플루크 1세가 살해되었다고 여기고 사제로 지내던 슬라보미르를 새 군주로 세우고 반기를 들었다. 슬라보미르의 반란군은 압도적인 군세를 앞세워 빌헬름 2세와 엥겔샤크 1세를 타도하려 했지만 전투력에서 밀려 패배하고 모라비아의 수도로 후퇴했다.

하지만 카를로만은 자신이 가진 병력으로는 반란군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다고 여기고, 모라비아인들이 스바토플루크 1세가 살해되었다고 오해했다는 것을 감안해 스바토플루크 1세를 석방시킨 뒤 모이미르의 묘지에서 약탈했던 보물을 돌려주고 슬라보미르를 토벌하게 했다. 스뱌토플루크 1세는 동프랑크 왕국을 위해 슬라보미르를 토벌하겠다고 약속하고 모라비아의 수도 외곽으로 진군했지만, 비밀리에 슬라보미르와 협상해 자신이 모라비아의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받는 대신 프랑크군을 협공하기로 했다. 프랑크군은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은 채 방심해 있다가 모라비아인들의 갑작스러운 기습과 스뱌토플루크 1세의 호응으로 인해 궤멸되었고, 빌헬름 2세와 엥겔샤크 1세는 전사했다.

871년, 루트비히 2세가 바이에른과 프랑크 군대를 동원해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이때 프랑크인들은 보헤미아 요새로 향하는 좁은 통로에 매복해 있다가 모라비아인들을 습격했다. 이때 모라비아인들은 보헤미아 공작의 딸과 함께 모라비아로 귀환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아마도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모라비아의 고위 귀족과 결혼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라비아인들은 말 644마리를 버려서 추격대의 앞을 막은 뒤 안전한 요새로 피신했다. 현대 학자들은 스바토플루크 1세가 보헤미아인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혼사를 진행했을 거라 추정한다.

루트비히 2세는 이 소식을 전해듣자 스바토플루크 1세를 위험한 인물로 여기고 모라비아 원정을 게획했다. 872년, 3개 군대가 모라비아를 향해 진격했다. 튀링겐과 작센군으로 구성된 한 부대는 레겐스부르크에서 출진했다가 그해 5월에 모라비아인들과 맞붙은 첫번째 교전에서 패퇴했다. 뷔르츠부르크의 아르노 주교와 풀다의 시기하르트 수도원장 휘하의 프랑크인으로 구성된 2번째 군대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반면, 카를로만의 지휘 아래 바이에른인과 카란타니아인으로 구성된 세번째 군대는 모라비아 영토를 황폐화시키고 스바토플루크의 군대를 격파해 요새로 피신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카를로만이 매우 견고한 요새에 고전하는 동안, 스바토플루크는 대규모 병력을 모은 뒤 다뉴브 강 유역의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남겨져 있던 바이에른군을 급습해 궤멸시켰다.

873년, 스바토플루크 1세는 루트비히 2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루트비히 2세는 모라비아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했고, 스바토플루크 1세는 루트비히 2세에게 매년 경의를 표하고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또한 바이에른에 수감되어 있던 메토디오스는 교황 요한 8세가 바이에른 주교들을 호되게 꾸짖은 서신을 보낸 덕분에 석방된 뒤 모라비아로 돌아가 선교 활동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동프랑크 왕국과 화해한 뒤, 스바토플루크 1세는 영토 확장을 단행했다. 874년 비스툴라 강 상류 지역을 공략했고, 북부 모라비아의 오파바 주변 일대를 평정했다. 880년 실레시아에 진출했고, 881년 티서강 중류 일대를 공략했으며, 890년경에 보헤미아와 루사티아를 공략했다.

881년 동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카를 3세는 다뉴브 강에 걸친 동프랑크 국경지대에 주둔한 동프랑크군을 지휘하는 역할을 판노니아 백작 아리보에게 맡겼다. 이에 지난날 모라비아를 점령한 바이에른군의 사령관이었던 빌헬름 2세와 엥겔샤크 1세의 아들들은 불만을 품고 바이에른의 고위 귀족들과 공모해 아리보를 축출하려 했다. 이에 아리보는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자기 아들을 인질로 넘겨줬다. 스바토플루크 1세는 빌헬름 2세와 엥겔샤크 1세가 지난날 모라비아를 점령한 뒤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렸던 걸 기억하고, 아리보를 돕기로 했다. 그의 군대는 바이에른으로 진군해 엥켈샤크 1세의 둘째 아들을 생포한 뒤 목을 베었다.

빌헬름 2세와 엥겔샤크 1세의 남은 아들들은 카란티아 변경백 아르눌프에게 망명했다. 스뱌토플루크 1세는 아르눌프에게 사절을 보내 그들을 즉시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카란티아를 침공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전쟁은 라바 강 동쪽의 판노니아를 황폐화시켰고, 불가리아인과 헝가리인도 양측에 고용되어 전쟁에 뛰어들었다. 884년, 카를 3세가 직접 나서서 양자를 중재했다. 스뱌토플루크 1세는 카를 3세가 모라비아를 절대로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여기에 아르눌프와 스뱌토플루크 1세도 양자간의 영역을 존중하기로 합의했다.

885년 메토디오스가 사망한 뒤, 교황 스테파노 5세는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서신을 보내 신앙고백에 필리오케를 추가하고 토요일 단식 등 동로마 제국의 관습을 포기하라고 촉구했다. 이 서신에서, 교황은 그를 "rex Slavorum(슬라브의 왕)"이라고 칭했다. 이로 볼 때 스바토슬라프는 885년 이전에 모라비아 국왕을 칭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교황의 뜻에 순종하기로 하고, 로마에서 모라비아 주교구로 파견된 위칭과 함께 메토디오스의 제자들에게 교황에게 복종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이 이를 거부하자, 스바토플루크는 위칭에게 이들을 마음대로 처리하게 했다. 이 제자들 일부는 감옥에 갇혔다가 모라비아에서 추방되었고, 나움 등은 노예로 팔려갔다. 모라비아에서 추방된 제자들은 불가리아 제1제국으로 망명해, 그곳에서 선교 활동을 이어갔다.

887년, 지난날 그와 전쟁을 치렀던 아르눌프가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890년 겨울, 두 사람은 오문테스페르흐(Omuntesperch)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때 그는 아르눌프에게 교황 스테파노 5세가이탈리아를 침공해 교황청을 보호해달라고 촉구하는 서신을 전달했다. 아르눌프는 스바토플루크에게 보헤미아를 다스릴 권한을 부여했다고 전해진다. 풀다 연대기에 따르면, 891년 어느 시점에 아르눌프는 평화를 갱신하기 위해 아리보가 이끄는 사절단을 모라비아에 파견했다. 스바토플루크는 "왕을 찾아뵙고 우정을 나누겠다"고 답하고 사절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서약을 어겼고, 아르눌프는 모라비아를 침공하기로 마음먹었다.

891년, 아르눌프는 사바 강 유역의 공작 브라슬라프와 합류한 뒤 프랑크인, 바이에른인, 알레만니인, 마자르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일으켜 모라비아를 침공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전쟁은 894년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풀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894년에 전쟁에 뛰어들었다가 '가장 불운한 죽음'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정확한 사망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13세기 헝가리의 연대기 작가 케자의 시몬은 스바토플루크 1세가 쾨르니에(Környe) 인근에서 전투 도중 사망했다고 밝혔다.

콘스탄티노스 7세가 기술한 <제국 관리에 대하여>에 따르면, 스바토플루크 1세는 죽기 전에 큰 아들 모이미르 2세를 왕으로 세우고, 나머지 두 아들 스바토플루크 2세와 프레슬라프는 2개 지역을 분할받고 큰 형의 지시를 받게 했다. 그는 지팡이 3개를 가져오게 한 뒤, 이를 묶은 후 첫째 아들에게 주어 부러뜨리게 했다. 그가 그러지 못하자 둘째에게 다시 부러뜨려보게 했고, 그 역시 그러지 못하자 셋째 아들에게도 시도해보게 했다. 세 아들 모두 부러뜨리지 못하자, 지팡이 3개를 세 명에게 각각 하나씩 주게 한 뒤 부러뜨려보라고 했고, 세 아들 모두 지팡이를 쉽게 부러뜨렸다. 그후 그는 세 아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만일 너희가 화합과 사랑 가운데 쪼개지지 않으면 너희 대적에게 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 가운데 분쟁과 경쟁이 있어 너희가 스스로 세 정부로 나뉜다면, 너희는 서로 멸망하게 될 것이고, 너희들의 이웃인 원수들 때문에 완전히 망하게 될 것이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후대 학자들은 모이마르 2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두 형제와 심각한 내전을 벌이다가 마자르족의 침략에 의해 나라 전체가 무너진 일로 인해 이러한 이야기가 생겨났을 것이라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