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23:26:32

보헤미아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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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 왕국
České knížectví
국가 정보
870년 ~ 1198년
위치 중동부 유럽 보헤미아
수도 프라하
공용어 체코어, 라틴어
주요 공작 보르지보이 1세
바츨라프 1세
볼레슬라프 1세
브르제티슬라프 1세
브르제티슬라프 2세
블라디슬라프 2세
언어별 명칭
체코어 České knížectví
독일어 Herzogtum Böhmen(뵈멘)
라틴어 Ducatus Bohemiæ

1. 개요2. 역사3. 역대 보헤미아 공작
3.1. 전설상의 통치자3.2. 역사상의 통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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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왕국의 전신이 되는 체코인들의 국가

2. 역사

2.1. 건국 배경

550년경, 슬라브족이 슈마바(Šumava) 숲, 에르츠 산맥, 수데티 산맥, 보헤미아-모라비아 고원으로 둘러싸인 보헤미아에 정착했다. 그들은 초창기엔 아바르 칸국의 지배를 받다가 아바르 칸국이 동로마 제국과 오랜 세월 전쟁을 벌이면서 쇠락해지자, 623년 또는 624년에 사모의 지도 하에 독립하여 독자적인 국가를 세웠다. 사모는 630년경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의 국왕 다고베르 1세의 침공을 격퇴하고 튀링겐 등지를 약탈할 정도로 강력한 군주였지만, 658년 또는 659년에 사망한 뒤 그가 세웠던 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졌고 슬라브 부족들은 도로 뿔뿔이 흩어진 뒤 아바르 칸국에게 도로 지배되었다.

805년 카롤루스 대제의 침공으로 아바르 칸국이 복속된 후, 보헤미아는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보헤미아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대 모라비아 왕국이 등장했다. 모라비아인들은 822년 동프랑크 왕국루도비쿠스 1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봉신으로 자처하면서도, 보헤미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동프랑크 왕국과 모라비아 왕국 모두 보헤미아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고, 보헤미아는 여러 슬라브족이 각지를 나눠가지는 형국이었다. 그러던 중 중부 보헤미아에서 프르셰미슬의 후손을 자처하는 이들이 두각을 드러냈다.

2.2. 프르셰미슬 전설

12세기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학장이자 연대기 작가이며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코스마스(Cosmas, 1045년경 ~ 1125년)가 집필한 <보헤미아 연대기>에 따르면, 보헤미아 내 부족민들간의 분쟁이 갈수록 심화될 때 크록(Krok)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분쟁을 슬기롭게 중재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크룩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장녀 카지(Kazi)는 약초와 점술에 대한 지식이 뛰어났고, 차녀 테타(Teta)는 보헤미아 전통 신앙을 도입했다. 셋째 딸인 리부셰는 막내였지만 지혜는 가장 뛰어났고, 보헤미아에서 가장 강력한 성을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본따서 '리부신(Libušín)'이라고 이름 붙였다.

크룩이 사망한 후, 부족민들은 리부셰를 판관으로 선출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수많은 예언을 했는데 전부 들어맞았다. 한 번은 신탁의 정력이 리부신에 내려오자, 그녀는 위대한 도시가 나타날 것을 예언하고, 사람들에게 특정 장소에 성을 지으라고 지시한 뒤 그곳에 프라하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나라에서 구할 수 없는 금속 매장지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 지 조언해주기도 했고, 사람들이 앞으로 겪을 많은 전쟁과 고난을 예견했으며, 아들의 황금 요람을 블타바 강에 가라앉히고 요람이 나타났을 때 더 좋은 때가 올 거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리부셰는 사람들간의 분쟁을 공정하게 판결해 수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부족의 남자들이 여자가 판관이라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남자를 공작으로 세우라고 요구하자, 리부셰는 산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 산 너머에 작은 강 빌리나(Bilina)가 있고, 그 강둑에는 스타디체(Stadice)라는 마을이 있다. 그 안에는 길이가 12보이고 너비도 같은 경작지가 있다. 이 경작지는 수많은 들판 사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밭에도 속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공작은 이 경작지에서 가지각색의 황소 두 마리를 쟁기질하고 있다. 황소 중 하나는 흰색 줄무늬로 띠를 띠고 있는 것 같고, 머리도 흰색이다. 다른 하나는 머리부터 등까지 모두 흰색이며, 뒷다리도 흰색이다. 자, 원한다면 내 지팡이와 외투와 공작의 옷을 가져다가 백성과 나의 명령에 따라 가서 그를 당신들의 공작이자 내 남편으로 데려와라. 그 남자의 이름은 프르셰미슬이다. 그 사람은 너희의 머리와 목에 떨어질 많은 법을 고안할 것이다. 이 이름은 '계획적인' 또는 '과도한 생각'을 의미하게 때문이다. 그의 후손들이 이 나라를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

부족민들은 곧바로 사절단을 보냈다. 사절단은 프르셰미슬이 리부셰가 묘사한 모습 그대로 땅을 갈고 있는 것을 찾아냈다. 사절단이 그에게 공작으로 삼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프르셰미슬은 사절들에게 농민들이 먹는 음식을 대접한 뒤 자리에 앉아 지팡이를 땅에 꽃았다. 지팡이는 식사하는 동안 3개의 콩나물이 있는 나무로 변했는데, 한 새싹은 무성하게 자랐지만 나머지 2개는 말라버렸다. 사절들이 이 일이 벌어진 이유를 궁금해하자, 프르셰미슬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리부셰와 결혼하면 세 아들이 태어나겠지만 한 사람만 통치하게 될 것이다."

그 후 프르셰미슬은 호화로운 말과 신발을 신었고, 좋은 말을 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출신을 잊지 않고 나무 인피로 짠 신발과 베낭을 가져다가 미래를 위해 보존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리부셰와 결혼한 뒤 세 아들 네자미슬, 라도빌, 루도미르를 낳았고, 보헤미아인들을 현명하게 다스려 야만성을 억제하고 오랫동안 유효한 법을 제정했다. 프르셰미슬의 통치는 리부셰가 죽을 때까지 평온했지만, 리부셰 사후 부족 내 여인들이 남자에게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아 블라스타라는 여인의 주도하에 비셰가르드 맞은 편에 데빈 성을 지었다. 이후 남자와 여자간의 전쟁이 7년간 벌어진 끝에 블라스타가 전사했고 남자들이 성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프르셰미슬은 왕조의 창시자로서 보헤미아에서 큰 존경을 받았다. 보헤미아 통치자들은 그들의 기원을 드러내기 위해 대관식 중에 그의 그림이 그려진 라프테(Lapte: 슬라브 농민들이 주로 신은, 나무 인피나 자작나무 껍질로 짠 신발)를 신었고, 그의 베낭을 어깨에 매었다.[1] 이 유물들은 비셰흐라드에 있는 공작의 방에 보관되었고, 바츨라프 4세 시기까지 보헤미아 군주의 대관식에서 사용되었다. 이 유물들은 1420년에 후스파가 비셰흐라드를 함락시켰을 때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3. 보르지보이 1세에서 바츨라프 1세까지

전설을 배제했을 때 역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보헤미아 공작은 보르지보이 1세다. 보르지보이 1세가 집권하던 9세기 후반, 보헤미아 일대는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지의 통치자들은 보헤미아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고 있던 동프랑크 왕국대 모라비아 왕국 중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했다. 872년 5월, 마인츠 대주교 리우베르트(Liutbert)가 이끄는 프랑크군은 모라비아로 진격한 카를로만의 본대를 돕기 위해 모라비아 왕국을 돕는 보헤미아인들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했다. 튀링겐인과 작센인으로 구성된 리우베르트의 군대는 블타바 강가에서 보헤미아인들을 격파해 많은 적병을 사살하거나 부상 입혔고, 일부 보헤미아인은 강에 빠져 익사했지만 탈출한 사람들은 요새로 피신했다.

이때 보헤미아군 사령관 스바토슬라프(Svatoslav), 비티슬라프(Vitislav), 헤리만(Heriman), 스피티미르(Spytimír), 모이슬라프(Mojslav) 등 5명의 보헤미아 통치자들이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부 사료에는 '고리웨이(Goriwei)'이라는 이름이 여섯 번째로 명시되었는데, 현대 학자들은 보르지보이와 동일인물로 간주한다. 19세기의 체코 역사가 프란티셰크 팔라츠키(František Palacký, 1798 ~ 1876)는 그가 여섯 번째로 명시된 것은 블타바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부하들에게 리우베르트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체코의 법학자이자 역사가 바츨라프 바네체크(Václav Vaněček, 1905 ~ 1985)에 따르면, 보르지보이 1세는 이 전투에 아예 관여하지 않았으며, 보헤미아 남부의 다른 통치자들이 동프랑크 왕국과의 전쟁에서 큰 손실을 입은 틈을 타 보헤미아 남부를 장악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보르지보이 1세는 874년 또는 875년에 슬라비보르(Slavibor)의 딸 루드밀라(Ludmila)와 결혼했다. 코스마스와 <성 바플라프와 할머니 루드밀리의 전설>에 따르면, 슬라비보르는 프쇼바니족의 지도자였다고 한다. 반면 러시아에 보존되어 있는 고대 슬라브어로 쓰여진 <성 루드밀라 서문>에 따르면, 어퍼 루사티아에 거주하는 서브 슬라브 부족 중 하나인 밀차니족의 지도자였다고 한다. <성 바츨라프와 할머니 루드밀라의 전설>(이하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그는 루드밀라와의 사이에서 3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료에는 두 아들 스피티흐네프 1세브라티슬라프 1세만 알려졌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보르지보이 1세는 모라비아 국왕 스바토플루크 1세의 궁정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지만, 이교도들이 기독교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도였던 스바토플루크 1세가 탁자 위에서 식사하는 동안 자신은 땅바닥에 앉아서 식사했다. 당시 모라비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메토디오스는 이 광경을 보고 그에게 "당신같이 훌륭한 분이 어째서 땅바닥에 앉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이후 그는 메토디오스와 심도 높은 대화를 나눈 뒤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고, 아내 루드밀라와 함께 메토디오스로부터 세례받았다고 한다. 프란티셰크 팔라츠키는 그가 세례받은 시기가 메토디오스가 바이에른 주교구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직후인 874년이라고 추정했고, 고고학자 이반 보르코프스키는 스바토플루크 궁정에서 가톨릭 방식의 예배가 성행하기 시작한 880년 이전에 세례가 이뤄졌을 거라고 추정했다. 반면 체코 역사학자 바츨라프 로보트니(Václav Novotný, 1869 ~ 1932)는 스바토플루크가 보헤미아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된 시기인 882년 즈음일 거라 추정했다.

보르지보이 1세는 모라비아에서 돌아온 뒤 레비 흐라데츠에 교황 클레멘스 1세를 기리는 성당을 세웠다. 그러나 얼마 후, 불만 세력이 그의 친척인 스트로미르(Strojmír)를 공작에 추대하고자 반란을 일으켰고, 보르지보이는 모라비아로 도망쳤다. 일부 학자들은 스트로미르가 다른 통치자들과 함께 블타바에서 리우베르트와 맞서 싸웠던 스피티미르와 동일인물이라는 가설을 제기했지만 근거가 부족해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스트로미르는 독일인들과 함께 오래 살아서 슬라브어를 잊어버렸다. 이로 인해 보르지보이를 몰아내고 그를 추대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 문제로 불만을 품은 이들이 늘어났다. 보르지보이의 지지자들은 이런 갈등을 조장하면서 반격할 기회를 엿봤다.

이후 보르지보이와 스트로미르는 한 곳에 만나서 협상하기로 했다. 스트로미르의 추종자들은 무기를 옷 아래에 숨긴 뒤, 그들 중 한 명이 "변화하자!"라고 외치면 무기를 들어 보르지보이 편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내부의 배신자에 의해 보르지보이 추종자들에게 전해졌고, 보르지보이 추종자들 역시 무기를 숨겨두고 있다가 "변화하자!"라는 외침이 들리는 순간 무기를 곧바로 빼들어 스트로미르 지지자들을 선제 공격했다. 스트로미르 지지자들은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무너졌고, 스트로미르는 해외로 망명했다. 이후 보르지보이는 보헤미아로 돌아와 공작위를 되찾았다고 한다.

체코 고고학자이자 역사가 즈데네크 메르진스키(Zdeněk Měřínský, 1948 ~ 2016)는 이에 대해 다소 변형된 가설을 제기했다. 보르지보이 1세는 스트로미르의 반란으로 축출되어 모라비아로 도망친 뒤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스바토플루크 1세는 884년 가을까지 판노니아에서 카란티아 변경백 아르눌프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터라 그를 도와줄 여유가 없었고, 보르지보이 1세는 모라비아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3세의 중재로 아르눌프와의 전쟁이 마무리되자, 스바토플루크가 885년에 비로소 반란을 진압하고 그를 보헤미아 공작에 다시 앉혀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보르지보이 1세는 모라비아에 망명 가 있는 동안 기독교 신앙이 더욱 투철해졌고, 모라비아 국왕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성당을 하나 더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귀환한 그는 약속대로 프라하성모 마리아 성당을 건설했다.

888년에서 890년 사이에 보르지보이 1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들은 통치하기엔 나이가 아직 어렸다. 이에 모라비아 국왕 스바토플루크 1세가 890년 3월에 판노니아의 오문테스페르흐(Omuntesperch)에서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와 회담을 가진 끝에 보헤미아를 다스릴 권한을 인정받고 통치를 행사했다. 894년 스바토플루크 1세가 사망한 뒤, 보르지보이 1세의 장남인 스피티흐네프 1세가 비로소 보헤미아 공국의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895년 7월 보헤미아의 유력 귀족인 비티슬라프(Vitislav)[2]와 함께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가 개최한 총회가 열린 레겐스부르크에 방문해 아르눌프의 가신이 되는 대가로 동프랑크 왕국의 보호를 받기로 했다. 또한 보헤미아는 공식적으로 레겐스부르크 주교구에 포합되었다. 이로 인해 보르지보이 1세가 보헤미아로 데려왔던 슬라브 성직자들이 추방되었다.

대 모라비아 왕국의 새 국왕 모이미르 2세는 이에 반발해 보헤미아를 여러 번 공격했다. 이에 보헤미아인들은 896년에 아르눌프에게 사절단을 보내 도움을 욫어했고, 897년에 보헤미아 사절단이 재차 레겐스부르크로 찾아와서 모라비아인들이 자신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후 보헤미아인들은 아르눌프와 함게 모이미르 2세를 상대로 반기를 일으킨 스바토플루크 2세를 지원했다. 900년 여름, 스피티네프가 이끌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헤미아 전사들이 바이에른을 침공한 모라비아인들에 대항하는 바이에른인들을 도왔다. 이후 모이미르 2세는 901년에 바이에른인들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906년, 에르츠 산맥 북쪽에 위치한 글로마코베족은 작센 공작 오토 1세의 아들 하인리히의 공세에 직면하자 마자르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자르족은 이들을 돕기 위해 진군하던 중 보헤미아 영토를 지나갈 때 스피티네프 1세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스피티네프 1세는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마자르족과 싸우고 싶지 않았고, 작센을 약화시키고 싶었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마자르족은 보헤미아를 통과한 뒤 글로마코베족과 연합하여 작센군을 격파했다. 한편, 같은 해에 동생 브라티슬라프 1세가 하벨 강 중류 주변에 정착한 슬라브 부족인 스토도르 족의 공주 드라호미라와 결혼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작센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맺어진 정략결혼이라고 추정한다.

그는 보헤미아 중부에 위치한 프르셰미슬 왕조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프라하에서 26~34km 떨어진 언덕에 5개 요새를 건설하고 그 안에 교회를 세운 뒤 왕실 내 여러 구성원들을 배치했다. 이 요새들은 훗날 멜니크 시, 리부신 시, 테틴 시, 르슈테니 시, 볼레슬라프 시로 발견했다. 또한 프라하 성 요새화에도 힘을 기울여 해자 성 주변에 건설하고 프라하 주변에 여러 소형 요새를 세웠으며, 프라하 시 자체도 확장했다.

915년 스피티흐네프 1세가 사망한 후, 동생 브라티슬라프 1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즉위 직후 장남 바츨라프의 머리를 자르는 의식을 프라하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거행하면서, 베로나의 주교 노테리우스 2세를 초빙했다. 체코 역사가 두샨 트르제스티크(Dušan Třeštík, 1933 ~ 2007)는 노테리우스가 동프랑크 국왕 콘라트 1세에 맞서 싸우던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가 보헤미아인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파견된 외교 사절이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또다른 학자들은 브라티슬라프 1세가 노테리우스의 축복을 받고 보헤미아 통치자로 선포되기를 원했거나, 크로아티아 일대를 지배하던 트르피미르(Trpimir) 가문간의 결혼 동맹을 노테리우스의 중재하에 성사시키려 했을 수도 있다고 추정한다.

바츨라프 찰루페츠키(Václav Chaloupecký, 1882 ~ 1951)는 14세기에 쓰여진 비엔나 그림 연대기를 바탕으로 브라티슬라프 1세가 모라비아에서도 통치를 행사했으며, 작센과 손잡고 마자르족에 대항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두샨 트르제스티크는 브라티슬라프 1세는 보헤미아 중부 지역만을 효과적으로 통제했으며, 형의 정책을 그대로 받들어 마자르족과 싸우기보다는 동맹을 맺었다고 주장했다. 11세기 후반의 연대기 작가 브레멘의 아담 역시 보헤미아인들이 마자르족의 915년 작센 원정에 따라갔다고 밝혔다. 현대 학계는 두샨의 주장 대로 브라티슬라프 1세가 마자르족에게 협력했을 거라고 본다.

그는 902년경 프라하 성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조지 대성당을 건설했다. 이 대성당은 이후 프르셰미슬 가문의 묘지로 각광받았으며,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의 거점으로도 활용되었다. 또한 2층 짜리 왕궁과 파벨 신부의 목조 거주지도 건설되었으며, 형이 시작한 프라하 인근 언덕에서의 요새 건설 사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브라티슬라비아 언덕 요새'로 명명된 목조 요새를 건설했는데, 이곳은 훗날 브로츠와프 시로 발전했다.

921년 2월 13일, 브라티슬라프 1세는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3세기 연대기 작가인 케자의 시몬에 따르면, 마자르족이 판노니아를 정복했을 때 브라티슬라프 1세가 부상을 입었고 곧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샨 트르제스티크는 시몬이 후대의 보헤미아 공작이자 국왕 브라티슬라프 2세와 착각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후 장남 바츨라프 1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지만 나이가 어렸기에 어머니 드라호미라와 할머니 루드밀라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얼마 안가 공국의 권력과 바츨라프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두 여성과 추종자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다. 그러던 921년 9월 15일, 루드밀라가 테틴 언덕 요새에서 드라호미라의 시종인 투나(Tunna)와 고몬(Gommon)에 의해 베일로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드라호미라는 루드밀라를 살해한 뒤 바이에른 성직자들을 추방했다.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는 이를 빌미삼아 922년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기록상에는 그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925년 즈음에 성년이 된 바츨라프 1세는 루드밀라의 유해를 테틴 언덕에서 프라하로 이송하고, 드라호미라에게 추방된 사제들을 불러들였으며, 어머니 드라호미라를 추방하고 어머니를 추종한 인사들의 준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그는 뒤이어 코우르짐의 통치자 바츨라프 또는 라드슬라프와 맞붙어 승리했지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그곳을 계속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3] 이후 930년경에 성 비투스 성당을 세우고, 여전히 이교도가 많은 보헤미아에 기독교를 널리 전파하고자 성직자들의 선교 활동을 후원했다.

기독교인의 전설에 따르면, 바츨라프 1세는 거의 수도사처럼 살았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농사를 짓고, 포도주를 만들고 과자를 굽는 일을 했으며, 죄수들을 해방시키고 교수대를 허물었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또한 언젠가 동생 볼레슬라프 1세에게 공작위를 넘겨주고 로마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길 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은 훗날 성인이 된 그를 미화하고자 창작된 이야기로 간주한다.

그가 집권할 무렵, 보헤미아는 세 세력 사이에 끼여 있었다. 동쪽에는 유럽 전역에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던 마자르족이 있었고, 북쪽에는 엘베강 유역에 거주하는 슬라브 부족들[4]이 있었으며, 서쪽엔 독일 왕국에 속한 바이에른이 있었다. 보헤미아 공국은 스피티흐네프 1세 때부터 마자르족 및 엘베 강 유역의 슬라브족과 우호 관계를 맺었고, 마자르족이 바이에른 등지를 습격하는 것을 도왔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추방한 뒤, 어머니가 어머니가 추방했던 선교사들을 불러들이고 바이에른과 화해하려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929년, 독일왕 하인리히 1세가 엘베 강 유역의 슬라브족을 정벌했을 때, 어머니가 속한 스토도르족의 수도 브란덴부르크가 함락되었다. 그후 하인리히 1세는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공작과 함께 마자르족과 동맹을 맺고 있었던 글로마코베족을 공격해 수많은 이들을 살해했다. 뒤이어 하인리히 1세와 아르눌프가 프라하로 진격하자, 바츨라프 1세는 두 사람에게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그 해 초여름, 바츨라프 1세는 독일 왕국에 매년 공물을 바치고 독일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서약하는 대가로 그들이 보헤미아를 파괴하지 않고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코스마스는 보헤미아 공국이 소 120마리와 은 500 흐리브니아를 806년부터 비정기적으로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 피핀 카를로만에게 바쳤다고 기술했다. 현대 학자들은 카롤루스 대제 시기엔 보헤미아 공국이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코스마스가 잘못 기술했다며, 실제로는 바츨라프 1세 시대부터 독일 왕국에 공물을 바쳤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그 양이 코스마스의 기록과 같은 지는 불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동생 볼레슬라프 1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시기에 순교한 성 코스마스와 다미안의 축일인 9월 27일에 형 바츨라프를 볼레슬라프 시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다음날 아침, 바츨라프 1세가 아침 예배를 하러 교회에 갔다가 귀가하던 중 볼레슬라프와 마주치자 덕담을 건넸다.
"네가 어제 우리를 잘 섬겼으니, 신께서 너에게 상을 주실 것이다."

볼레슬라프가 외쳤다.
"오늘 나는 당신을 이렇게 섬기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검을 빼들어 형의 머리를 가격했다. 바츨라프는 경미한 부상만 입었지만, 형제를 해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볼레슬라프가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린 것을 빼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고, 볼레슬라프의 추종자들이 뒤이어 바츨라프를 살해했다. 10세기 중반에 고대 슬라브어로 작성된 <성 바츨라프의 생애>에서는 좀더 자세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에 따르면, 바츨라프와 볼레스와프 형제가 아침에 미사를 드리러 가던 중 길가에서 말다툼을 벌였다. 볼레슬라프가 검을 빼들어 바츨라프를 공격하려 했지만, 바츨라프가 이를 막고 볼레슬라프를 쓰러뜨렸다. 이때 볼레슬라프의 측근인 투자(Tuža)가 달려들어 바츨라프의 팔을 때렸다. 바츨라프는 교회에 숨기 위해 달려갔지만, 교회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고, 뒤따라 달려온 볼레슬라프의 부하들이 그를 검으로 난자해 살해했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귀족 므스티니(Mstiny)를 포함해 바츨라프와 함께 있던 인사들 역시 이날 피살당했으며, 볼레슬라프의 추종자들은 곧장 프라하로 달려간 뒤 바츨라프의 추종자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산 채로 블타바 강 깊은 곳에 수장시켰다고 한다. 이때가 벌어진 해는 문헌 기록에 전해지지 않았는데, 1960년대까지는 929년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여러 역사 기록들과의 대조를 통해 935년에 사건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살인 동기 역시 불분명하다. 일부 기록에서는 볼레슬라프가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형제를 살해했다고 기술되었고, 몇몇 학자들은 바츨라프 1세가 막대한 공물을 독일 왕에게 바치는 굴욕을 감수한 것에 대해 반감을 품은 보헤미아 귀족들이 볼레슬라프를 충동질했으리라 추정한다. 바츨라프 1세는 970년경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1세레겐스부르크에서 거행한 성찬식에서 성인으로 인정받았고, 오늘날 기독교적 미덕을 지닌 성자로서 체코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2.4. 볼레슬라프 1세부터 올드르지흐까지

볼레슬라프 1세가 형 바츨라프 1세를 살해하고 보헤미아 공작이 되었을 무렵, 독일 왕국의 국왕 하인리히 1세뇌졸중에 시달리고 있었다. 936년 7월 2일, 하인리히 1세가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 뒤 아들 오토 1세가 뒤를 이었다. 이에 지난날 하인리히 1세의 원정으로 복속되었던 엘베 강 유역 슬라브 부족인 루티키인과 오보르테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역시 이에 호응해 지난날 보헤미아와의 관계를 끊고 하인리히 1세에게 귀부했던 이웃 공국을 치기로 했다. 이 이웃 공국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대체로 믈라다 볼레슬라프 인근의 자브루샤니 언덕 요새 또는 흘로우메크 언덕 요새일 거라고 추정한다.

오토 1세는 엘베 강 유역의 슬라브족 반란 진압에 직접 착수하는 한편, 부하들에게 보헤미아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메르제부르크에서 아식(Asic)이 이끄는 군대가 출발했고, 튀링겐에서 또다른 군대가 출격했다. 메르제부르크에서 출발한 군대에 소속된 장병들은 범죄를 저지른 뒤 처벌 대신 군복무를 택한 자들이었다고 한다. 볼레슬라프 1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나눠 각 군대와 상대하기로 했다. 중세 작센 연대기 작가 코버리의 비투간트에 따르면, 튀링겐군은 보헤미아군이 자신들을 향해 접근해오자 전투를 회피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아식이 이끄는 메르제부르크군은 보헤미아군과의 첫 전투에서 가볍게 승리를 거뒀지만, 이후 약탈에 전념하다가 볼레스와프 1세가 군대를 재정비한 뒤 반격을 가하자 크게 패했고, 아식은 전사했다. 볼레스와프 1세는 독일군을 격파한 뒤 이웃 공작의 성채를 완전히 허물고 새 성채를 세운 뒤 측근을 그곳의 영주로 삼았다.

938년, 볼레슬라프 1세는 볼레스와프 마을에 묻혀 있던 형의 유해를 프라하로 옮겨서 성 비투스 성당에 안장했다. 10~11세기 베네딕토회 수도자이자 아말피 대주교였던 로렌티우스가 라틴어로 집필한 연대기 <성 바츨라프의 수난>에 따르면, 볼레슬라프 1세는 바츨라프 1세의 유해가 담긴 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온종일 회개했다고 한다. 반면 코스마스는 바츨라프의 무덤에서 기적이 연이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두려움을 느끼고 시신을 성 비투스 성당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가 형의 유해를 옮긴 것에 대해 형을 죽인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는 설과 바츨라프 1세를 추앙하는 이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으나,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볼레슬라프 1세는 오토 1세를 상대로 14년간 전쟁을 벌였다고 전해지지만, 국경 지대에서 사소한 전투가 벌어졌을 뿐 이렇다할 큰 충돌이 벌어지진 않은 듯하다. 그러다 모든 반란을 제압한 오토 1세가 950년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보헤미아로 쳐들어갔다. 그의 군대는 볼레슬라프 1세의 아들이 있던 성을 포위했지만, 병사들이 약탈하려 들자 이를 막느라 공성전을 미뤄야 했다. 볼레슬라프 1세는 아들을 구하려 했지만 적군의 숫자가 대단히 많은 걸 확인하고 오토 1세에게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이후의 협상 결과, 볼레슬라프 1세는 오토 1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며, 매년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또한 오토 1세는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에게 보헤미아 감독을 맡겼다.

그후 볼레슬라프 1세는 오토 1세와 동맹을 맺었고, 955년 오토 1세가 레히펠트 전투에서 마자르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둘 때 1,000명의 보헤미아 정예병을 파견해 오토를 도왔다. 960년대에 중부 유럽을 여행한 무슬림 유대인 이브라힘 이븐 야쿠브(Ibrahim Ibn yaqub)는 자신이 볼레슬라프 제국의 국경에서 프라하까지 이르는 데 3주가 걸렸다고 밝혔다. 슬로바키아 고고학자 미할 루토프스키(Michal Lutovský, 1961 ~)는 이를 근거로 볼레슬라프 1세가 키예프 루스와 접하는 부크강에서 스티르강 및 산 강까지의 영토를 통제했다고 추정했다. 또한 모라비아 남부 지역도 볼레스와프 1세의 손아귀에 넘어갔거나 간접 지배를 받았으며, 크라쿠프도 950년 이전에 볼레스와프 1세의 손아귀에 넘어갔을 거라고 추정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설의 근거가 빈약하다고 보지만, 볼레슬라프 1세 치세 때 보헤미아 공국이 영역을 상당히 확장했다는 건 분명하다고 본다.

한편, 볼레슬라프 1세는 보헤미아식 데나리온을 최초로 주조했다. 이 시대에 주조된 데나리온의 지름은 21mm로 순은으로 만들어졌으며, 무게는 약 1g이었다. 데나리온에는 새, 칼, 십자가 또는 그리스도의 초상 등 기독교의 고전적인 이미지가 그려져 있었다. 이 동전은 발트해 연안, 포메른, 심지어 스웨덴의 고틀란드까지 출토될 정도로, 중부와 동부 유럽에 널리 쓰였다. 이브라힘 이븐 야쿠브는 보헤미아식 데나리온을 '데나르'라고 지칭하면서, 실로 높은 가치를 지녔다고 밝혔다. 하지만 야쿠브는 무역은 대부분은 물물교환으로 이뤄졌고, 오직 가장 높은 사회 계층만이 데나리온으로 거래했다고 덧붙였다.

965년, 볼레슬라프 1세는 자신의 딸 두브라우카를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1세와 결혼시키고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967년, 그는 2개의 기병 부대로 구성된 보헤미아 군대를 미에슈코 1세에게 지원해, 미에슈코 1세가 슬라브족의 지도자 비흐만 2세를 패사시키고 오데른 강 어귀를 장악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966년에 딸 믈라다를 로마로 파견해 교황 요한 13세로부터 프라하 주교구를 바이에른 대주교구로부터 독립시키고 보헤미아에 최초의 수녀원을 설립하게 해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아냈다. 보헤미아 최초의 수녀원은 프라하의 성 조지 대성당에 세워진 베네딕토회 수녀원이었고, 첫 수녀원장은 믈라다였다.

볼레슬라프 1세는 7월 15일에 사망했다고 전해지지만 사망년도는 불확실하다. 코스마스는 그가 967년에 사망했다고 기술했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코버리의 비투간트가 967년에 미에슈코 1세에 대해 기술한 대목에서 "볼레슬라프 1세와 같은 세대"라고 밝힌 것을 볼 때 967년에 사망하지 않았고, 972년에 사망했다는 일부 연대기들의 기술이 좀더 그럴듯 하다고 본다. 이후에 집권한 장남 볼레슬라프 2세는 97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가 사망한 뒤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오토 1세의 어린 아들 오토 2세를 밀어내고 제위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밀 때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1세와 함께 하인리히 2세를 도왔다.

그러나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오토 2세와 하인리히 2세의 내전이 발발했다. 하인리히 2세는 보헤미아 전사들의 지원을 받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지만, 976년, 오토 2세를 지지하는 귀족들의 대대적인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보헤미아로 망명했다. 이후 오토 2세는 보헤미아를 상대로 2차례 공세를 벌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볼레슬라프 2세는 977년 오토 2세를 주군으로 인정할 테니 전쟁을 중단하자고 제안해 동의를 얻어냈고, 978년 크베들린부르크에서 오토 2세를 알현해 경의를 표했다.

977년, 미에슈코 1세의 아내이자 볼레슬라프 2세의 여동생이었던 두브라우카가 사망했다. 그후 폴란드와 보헤미아간의 우호 관계가 악화되었다. 980년 봄 또는 여름, 미에슈코 1세는 북방변경백 디트리히의 딸인 할덴슬레벤의 오다와 재혼했다. 이후 미에슈코 1세의 장남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마이센 변경백 릭다그의 딸[5]과 결혼했다. 하지만 볼레슬라프 2세가 985년에 락다그가 사망하면서 공백이 생긴 틈을 타 마이센 성을 공략하고 마이센 주교 볼콜트를 추방하자, 미에슈코 1세는 며느리가 쓸모 없다고 보고 결혼을 무효화한 뒤 헝가리 대공 게저 또는 트란실바니아 대공 줄러의 딸 유디트와 장남을 결혼시켰다. 이로 인해 보헤미아가 폴란드와 헝가리 연합에 둘러싸일 위험에 처하자, 984년 하인리히 2세와 동맹을 굳건히 했다.

이 무렵, 보헤미아 북동부의 리비체나트치들리노우와 쿠트나 호라를 거점으로 삼은 슬라브니크(Slavník) 가문의 위세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코스마스에 따르면, 슬라브니크는 서쪽으로는 보헤미아, 남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동쪽으로는 모라비아, 북쪽으로는 폴란드에 걸쳐 상당한 영토를 가진 강력한 영주였다고 한다. 현대의 일부 역사가들은 슬라브니크의 아내로 명시된 스트르제지슬라파(Střezislava)는 볼레슬라프 1세의 누이였을 거라고 추정하며, 슬라브니크는 볼레슬라프 1세로부터 보헤미아를 경유하는 상인들의 여행길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으리라 추정한다.

981년 슬라브니크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 소베슬라프는 보헤미아 공국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 폴란드와 작센과 외교 활동을 벌였다. 이를 경계한 볼레슬라프 2세가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 무력을 행사했고, 소베슬라프는 2차례 영토를 떠났다가 복귀하길 반복했다. 그러던 983년 프라하의 주교 데트마르가 사망한 뒤, 소베슬라프의 형제인 보이치에흐가 새 주교에 선임되었다. 이로 인해 슬라브니크 가문의 위세가 더욱 강해졌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에 슬라브니크 가문이 지배하던 지역에서 화폐를 독자적으로 주조했다고 한다.

986년, 독일 왕위를 찬탈하려는 하인리히 2세와 대적하던 오토 3세는 하인리히 2세를 지원하는 보헤미아를 응징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볼레슬라프 2세는 크게 패해 마이센으로 도피했고,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1세는 즉시 오토 3세를 알현한 뒤 막대한 선물을 넘겼다. 이후 오토 3세와 미에슈코 1세는 슬라브 원정에 가담해 각지를 황폐화하고 수많은 적병과 민간인을 살상했다. 두 사람이 공격한 지역의 위치는 기록이 미비해서 불확실한데, 일부 학자들은 폴라비아였을 거라 추정하고, 다른 학자들은 보헤미아였을 거라 본다. 990년, 미에슈코 1세는 보헤미아를 공격해 실레시아 일대를 정복하고 브로츠와프, 글로구프, 오폴레에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마워폴스카(Małopolska)를 정복하고 장남 볼레스와프의 영지로 삼았다.

992년, 오토 3세에게 복종한 볼레슬라프 2세는 오토 3세와 함께 폴라비안 슬라브족을 정벌하는 원정을 진행했다. 995년, 그는 보헤미아의 강력한 귀족 집안인 브르쇼브치(Vrshovichi)를 지원해 갈수록 강해지며 독립을 꾀하는 슬라브니크 가문을 공격하게 했다. 브르쇼브치 가문은 리비체나트치들리노우를 공략하고 슬라브니크 가문에 속한 스피티미르, 포브라슬라프, 포르제이, 카슬라프, 소베보르 등 5명을 처형했다. 슬라브니크 가문에 속했던 프라하 주교 보이치에흐는 이에 분노해 브르쇼브치 가문을 파문하면서, 그들이 3번 멸망할 거라는 예언을 남겼다. 이후 보이치에흐는 프라하를 떠나 로마로 망명했다.

996년, 교황 요한 15세는 보이치에흐가 프라하 주교로 복귀하게 하자는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즈의 주장을 받아들여 보헤미아 당국에 요청했지만, 볼레슬라프 2세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 후 보이치에흐는 폴란드로 이동한 뒤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의 지시에 따라 고대 프로이센으로 가서 선교 활동을 벌였지만, 그 해 4월 23일에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999년 볼레슬라프 2세가 사망한 뒤, 장남 볼레슬라프 3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형제들을 잠재적인 정적으로 여기고 숙청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1001년, 그는 야로미르가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를 적용해 거세했다. 이후 올드르지흐까지 살해하려 하자, 야로미르와 올드르지흐는 바이에른으로 도주했다. 1002년, 보헤미아 유력 귀족인 브르쇼프 가문이 폭정을 자행하는 공작을 몰아낸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볼레슬라프 3세는 반란군에게 패배한 뒤 노르가우 변경백인 슈바인푸르트의 하인리히에게 망명했다.

이후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블라디보이가 폴란드군의 지원에 힘입어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1002년 11월, 그는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의 조언에 따라 레겐스부르크로 가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보헤미아를 봉토로 받았다. 이로써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보헤미아를 봉토로 부여받은 최초의 보헤미아 통치자가 되었고,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이를 근거로 삼아 프르셰미슬 가문 출신 공작들의 계승에 반복적으로 개입했다.

1003년 1월, 블라디보이가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이에 볼레슬라프 3세는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에게 하인리히 2세에 대항하는 봉기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했고, 볼레스와프 1세는 이를 믿어주기로 하고 볼레슬라프 3세의 복위를 주선했다. 그 해 2월, 볼레슬라프 3세는 폴란드군의 지원에 힘입어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다. 그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을 사면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곧 이를 뒤집고 브르쇼프 가문 인사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인사들이 살해당하자, 이에 반발한 보헤미아 귀족들의 반란이 각지에서 발발했다.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는 그가 폭정을 일삼아 보헤미아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자 크라쿠프로 초대한 뒤 곧바로 체포한 후 실명형에 처한 뒤 알려지지 않은 곳에 가두었다.

그 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보헤미아를 침공해 프라하를 장악한 뒤 공작을 맡았다. 이에 반감을 품은 보헤미아 귀족들은 하인리히 2세에게 볼레슬라프 2세의 아들 야로미르를 공작으로 모시고 싶으니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004년 가을, 하인리히 2세가 파견한 독일군이 폴란드군을 보헤미아에서 몰아냈고, 야로미르는 보헤미아 공작에 등극한 뒤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으로서 하인리히 2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1005년 하인리히 2세가 폴란드를 공격했을 때 이에 호응해 부디신을 공략했다. 그러나 1007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반격해 부디신을 탈환했다.

1012년, 볼레슬라프 2세의 또다른 아들인 올드르지흐가 반란을 일으켜 야로미르를 축출하고 보헤미아 공작위를 찬탈했다. 그해 10월, 하인리히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보헤미아를 다스릴 권한을 인정받았다. 1014년 브르쇼프 가문을 비롯한 야로미르의 추종자들을 집단 처형해 입지를 강화했다. 1015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올드르지흐에게 장남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를 비롯한 사절단을 보내 동맹을 제안했다. 하지만 올드르지흐는 이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하인리히 2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후 하인리히 2세가 아버지를 위해 위험한 임무를 맡은 미에슈코 2세를 가상하게 여겨 풀어주라고 지시하자, 올드르지흐는 이에 따라 미에슈코 2세를 석방했다.

이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하인리히 2세와 전쟁을 벌이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모라비아를 점진적으로 공략했으며, 1017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의 보헤미아 침공을 격퇴했다. 또한 아들 브르제티슬라프 1세와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를 결혼시킴으로서 당시 오스트리아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바벤베르크 가문과 동맹을 맺고 그들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아냈다. 1024년 독일왕에 오른 콘라트 2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보헤미아 지배를 재차 인정받았다.

1031년, 올드르지흐는 폴란드 국왕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와 키예프 루스 대공 야로슬라프 1세의 협공으로 인해 정신없는 틈을 타 모라비아 전역을 별다른 저항 없이 공략하고 브르제티슬라프 1세에게 모라비아 행정을 맡겼다. 그해 가을, 미에슈코 2세가 신성 로마 제국과 키예프 루스의 공세를 피해 보헤미아로 망명하자, 그는 과거에 미에슈코 2세의 아버지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자신의 형인 볼레슬라프 3세를 크라쿠프로 유인한 뒤 체포 후 실명형에 처했던 것을 보복하고자 미에슈코 2세를 체포한 뒤 거세했다. 대 폴란드 연대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보헤미아인들은 그를 배신하여 붙잡은 뒤 그가 더 이상 자손을 낳을 수 없도록 그의 성기를 가족끈으로 묶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인 볼레스와프 왕이 그들의 왕자와 삼촌의 눈을 멀게 하여 그들에게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후 미에슈코는 포로 생활에서 풀려났지만 다시는 아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올드르지흐는 얼마 후 미에슈코 2세를 석방시켜 폴란드 대공에 복위하게 했는데, 그런 조치를 내린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한편, 그는 신성 로마 제국군이 폴란드를 장악하는 걸 돕기를 거부해 콘라트 2세의 의심을 샀다. 결국 1033년, 콘라트 2세는 올드르지흐를 소환한 뒤 반역 혐의로 고발해 체포한 후 바이에른으로 유배보냈다. 이후 그에게 축출된 뒤 21년간 위트레흐트에 조용히 지내던 야로미르가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다. 1034년 봄, 올드르지흐가 콘라트 2세에 의해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다. 콘라트 2세는 올드르지흐를 복위시키는 대신 보헤미아를 야로미르와 함께 나눠가지고, 모라비아 일대는 올드르지흐의 아들인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통치하게 했다. 그러나 올드르지흐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지배권을 형과 아들과 함께 나눠가질 생각이 없었다. 그는 부하들을 시켜 야로미르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한 뒤 감옥에 갇히게 했고,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아버지를 피해 해외로 도주했다.

2.5. 브르제티슬라프 1세부터 스바토플루크 2세까지

1034년 11월 9일, 올드르지흐가 급사했다. 야로미르는 올드르지흐 사후 석방되었지만 거세된 데다 눈까지 멀었기에 공작이 되기를 거부했고, 보헤미아 귀족들은 올드르지흐의 아들 브르제티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추대했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1038년 폴란드 대공국이 내란과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먼저 이교도를 타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폴란드로 진군하여 수많은 인명을 학살하고 철저하게 약탈했으며, 포즈난과 크루슈비차 주교구를 파괴했다. 이후 폴란드의 수도 그니에즈노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미에슈코 1세가 성당에 기증했던 금 십자가를 비롯한 수많은 귀중품과 보석을 약탈했다. <대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그니에즈노, 포즈난, 크루슈비차는 이후로 오랫동안 버려졌으며 야생 동물들이 은신처로 사용했다고 한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여기에 더해 레드니카 호수 위의 섬에 있던 성과 석조 교회를 파괴했고,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한 기츠에 살던 수많은 공예가들을 보헤미아로 이주시켜 헤드차니에 정착히켰다. 이 시기에 실레시아와 소 폴란드가 보헤미아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독일왕 하인리히 3세는 보헤미아 공국이 이대로 모라비아와 폴란드를 석권해버리면 장차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 들 거라 여기고, 보헤미아군에 쫓겨 독일로 망명한 폴란드 대공 카지미에시 1세를 돕기로 했다. 1039년, 카지미에시 1세는 하인리히 3세로부터 중무장한 독일 기사 500명과 재정 지원을 받고 조국으로 귀환했다. 여기에 키예프 루스 대공 야로슬라프 1세도 카지미에시 1세를 지원하기로 했고, 자신의 여동생인 키예프의 마리아 도브로니에가를 그와 결혼시켰다. 이후의 전쟁 과정은 전해지지 않으나, 1041년 레겐스부르크 협약이 체결되면서 보헤미아 측이 실레시아를 제외한 모든 폴란드 영토를 포기했다는 사실은 전해진다.

1040년, 하인리히 3세가 보헤미아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에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응전에 나섰고, 양군은 1040년 8월 22~23일에 브로테크에서 처음으로 격돌했다. 당시 하인리히 3세는 식량 부족에 시달렸기에 가능한 한 빨리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로 진격하려 했고, 진군로에 펼쳐진 울창한 숲을 제대로 정찰하지 않고 강행군했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브로테크 숲에 매복하고 있다가 통나무와 바위로 퇴로를 막은 뒤 기습 공격을 가해 수많은 적병을 사살했다. 숲에 들어가지 않은 후위대에 있던 하인리히 3세는 어떻게든 통나무와 바위를 치우고 아군을 구조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나머지 병사들만 수습해 바이에른으로 퇴각했다. 그 후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없다고 여긴 하인리히 3세는 거부하고 재차 침공했으나, 9월 22일 흘루메크 전투에서 또다시 패배했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재차 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하인리히 3세는 단호히 거부한 뒤 1041년 재차 대군을 일으켜 보헤미아로 진격했다. 이번에는 국경 방어선을 우회하고 프라하에서 브르제티슬라프 1세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으며, 프라하의 세비르 주교를 비롯한 많은 프라하 귀족들이 황제에게 귀순했다. 결국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10월 15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 참석해 참회자의 예복을 입은 채 맨 발로 걸어가다가 하인리히 3세의 발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하인리히 3세는 그를 사면하고 실레시아와 모라비아를 가지는 것을 허용하는 대신, 조공을 매년 바치고 경의를 표해야 하며, 다른 정복지는 포기하게 했다.

그 후 하인리히 3세의 충실한 봉신이 된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1042년 하인리히 3세의 오르세올로 페테르를 헝가리 국왕에 복위시키기 위한 원정에 참여해 도나우 강 북쪽 영토를 점거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3세는 점령지를 지키기에 충분한 병력을 끌고 오지 못했기에 곧 철수했고, 헝가리 국왕 어버 샤무엘은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했다. 1043년, 하인리히 3세와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다시 공세를 개시해 라바 강까지 이르며 헝가리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1044년, 하인리히 3세와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3번째로 헝가리로 진군했다. 1044년 7월 5일, 제국군과 보헤미아군은 멘포에서 헝가리 귀족들이 대거 배신한 덕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어버 샤무엘은 전사했다. 하인리히 3세는 오르세올로 페테르를 헝가리 왕위에 복위시키고 헝가리 왕국을 신성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삼았다.

1046년, 폴란드 대공 카지미에시 1세가 실레시아를 되찾으려고 쳐들어왔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즉지 군대를 이끌고 저지했다. 이후 양자는 마이센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050년, 카지미에시 1세가 실레시아를 재차 침공해 일시적으로 공략했다. 이에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하인리히 3세에게 "카지미에시가 자신의 정당한 영지를 침략하고 있다"고 제소했고, 하인리히 3세는 그 해 11월 고슬라르에서 카지미에시 1세를 소환해 보헤미아와 적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후 1054년 5월 22일 크베들린부르크 회의에서, 카지미에시 1세와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하인리히 3세의 중재하에 협상한 끝에 카지미에시 1세가 실레시아를 갖고, 보헤미아는 그 대가로 매년 은 500 그지브나(grzywna)와 금 30 그지브나를 폴란드로부터 제공받기로 했다.

1054년경,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죽을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다섯 아들과 귀족들을 불러다놓고 "나이가 가장 많은 자가 항상 공국의 권력과 권위를 갖고, 모든 형제와 후손들은 그의 통치 아래 복종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보헤미아는 장남 스피티흐네프 2세가 온전히 갖고, 모라비아는 세 아들 브르제티슬라프 2세(올로모우츠 지방), 콘라드 1세(브르노 지방), 오타 1세(즈노이모 지방)에게 분할되도록 했으며, 막내 아들 야로미르는 수도사가 되도록 했다.

1055년 1월 10일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사망한 뒤, 장남 스피티흐네프 2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곧바로 하인리히 3세에게 경의를 표했고, 그로부터 보헤미아를 영지로 보유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1056년, 그는 보헤미아 뿐만 아니라 모라비아 역시 온전히 독차지하기 위해 세 형제들을 프라하로 불러들이고 그들의 영지를 회수했다. 어머니 유디트가 이를 반대하자, 그는 어머니를 국외로 추방했다. 이에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보헤미아에 계속 있다간 화를 입을 것을 우려해 헝가리로 망명했다. 또한 사자바 수도원에서 슬라브 수도사를 추방하고 라틴 전례를 수행하는 독일 수도사로 대체했다. 이후 300명의 모라비아 귀족을 흐루딤으로 소집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그들이 불응하자 군대를 보내 체포해 프라하 성채에 가둬놓고 자신에게 철저히 복종하겠다고 서약할 때까지 고문을 가했다.

1057년경 브르제티슬라프 2세가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1세의 딸 아들레타 우헤르스카와 결혼하자, 스피티흐네프 2세는 그가 헝가리군의 지원을 받고 쳐들어올 것을 우려해 1058년 도로 불러들여 화해하고 올로모우츠 영지를 돌려줬다. 1060년경 교황 니콜라오 2세에게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연간 100파운드를 교황청으로 보내는 대가로 주교관을 착용할 권리만 허락받았다.

1061년 1월 28일 스피티흐네프 2세가 사망한 뒤, 동생 브르제티슬라프 2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고, 형제 콘라드 1세와 오타 1세는 모라비아의 영지를 돌려받았다. 이 무렵, 독일왕 하인리히 4세가 왕위 찬탈을 노리고 반란을 일으킨 슈바벤의 루돌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하인리히 4세를 돕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진군했다. 이때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가 이를 기회로 삼아 보헤미아의 영역이었던 실레시아 서부 지역인 오파비안 실레시아를 침공해 흐라데츠 나드 모라비치 시를 포위하려 했다. 그러나 현지 보헤미아군이 도중에 매복 공격을 감행하는 바람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가까스로 도주했다.

1062년 아들레타 우헤르스카가 사망헌 뒤,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와 화해하고 그의 누이인 시비엥토스와바 스와티와와 결혼했다. 1063년 다른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과 함께 셜러몬을 헝가리 왕위로 올리기 위한 원정을 단행해 성사시켰다. <대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1070년경 보헤미아인들이 폴란드로 쳐들어왔다가 볼레스와프 2세에게 패배했고, 볼레스와프 2세는 그들을 모라비아까지 추격했다고 한다.

1067년, 프라하 주교 세비르가 사망했다. 수도자로서 성직 생활을 하고 있던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막내 동생 야로미르는 자신을 프라하 주교로 선임해달라고 요청했다.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자신의 집사 렌크가 프라하 주교가 되기를 원했지만, 형제들과 여러 보헤미아 귀족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자 어쩔 수 없이 야로미르를 프라하 주교로 선임했다. 다만 야로미르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올로모우츠에 주교구를 설립해 프라하 주교구를 견제하게 했다. 이후 야로미르는 올로모우츠 주교구를 폐지하기 위해 형과 첨예한 갈등을 벌였다.

1070년, 야로미르와 올로모우츠 주교 얀과의 재산 분쟁이 벌어졌다. 두 사람 모두 교황 알렉산데르 2세에게 중재를 요청했지만, 야로미르는 교황청의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1071년 모라비아로 가서 얀 주교를 체포한 뒤 채찍질을 가했다. 또한 얀 주교가 이를 고발하기 위해 로마로 보낸 사절단을 도중에 붙잡아 신체 절단형에 처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2세가 보낸 교황 특사가 이 일을 문제삼았고,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즉시 법원을 소집하고 야로미르에게 출석 명령을 내렸다. 야로미르가 이에 불응하자, 교황 특사는 주교직 수행을 금지했고, 야로미르는 해외로 망명했다.

1071년 가을, 브르제티슬라프 2세와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는 마이센에 있는 황제 하인리히 4세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고 그곳으로 향했다. 연대기 작가인 헤르스펠트의 람페르트에 따르면, 황제는 두 사람에게 평화를 이루고 현재 국경에 만족하라고 명령해 관철시켰다고 한다. 1072년, 볼레스와프 2세는 마이센 협약을 파기하고 보헤미아를 공격했다. 이에 진노한 하인리히 4세는 1073년 5월 폴란드를 응징하기 위한 공세를 준비했다. 그러나 작센 귀족들이 황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하인리히 4세는 어쩔 수 없이 폴란드로의 원정 계획을 취소했다. 1075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공의회에서 프라하 주교구와 올로모우츠 주교구가 재산을 균등하게 나눠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간의 성직자 서임권 분쟁이 벌어졌을 때,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하인리히 4세 편에 섰고, 그레고리오 7세 편에 선 헝가리 왕국과 폴란드 왕국이 독일 본토를 노리는 것을 저지하는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했다.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편에 선 그에게 보답하고자 루사티아 변경백과 마이센 영주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1081년, 하인리히 4세는 마이센과 루사티아가 본래 주인에게 돌아가게 하고, 그 대신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 동부의 변경백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당시 오스트리아는 바벤베르크 가문이 통제하고 있었기에, 그저 허울 뿐인 칭호였다.

1079년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가 폴란드 귀족들의 정변으로 폐위되고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이 폴란드 대공에 선임되었다. 이후 1080년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딸 유디트 프르세미슬디카와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의 결혼이 성사되면서, 보헤미아 공국과 폴란드 대공국간의 오랜 갈등이 일시적으로 해소되었다.

1080년,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교황청에 슬라브 전례의 복원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며 거부했다.
Quia nobilitas tua postulavit, quo secundum Slavonicam linguam apud Vos divinum annueremus celebrari officium, scias nos huicpetitioni tuae nequaquam posse favare.
그대와 귀족들이 슬라브어에 따라 성무일도를 거행할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하느님을 섬기는 입장으로서 여러분의 요청을 어떤 식으로든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두시오.

1082년, 콘라드 1세, 오타 1세와 함께 그레고리오 7세 지지를 천명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침공해 그 해 5월 12일 오스트리아 대공 레오폴트 2세를 메일베르크 전투에서 격파했다. 1085년 4월, 하인리히 4세는 마인츠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자신을 충실하게 섬긴 브르제티슬라프 2세에게 크랄(král) 칭호를 내림으로써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임했다.[6] 단, 이 왕위는 상속될 수 없었으며, 의무 수수료를 면제하는 대신 독일왕이 로마로 가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대관식을 거행할 때 참여해야 했다. 1086년 6월 15일, 트리어 대주교 에길베르트의 주관하에 보헤미아 국왕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폴란드 국왕이라는 칭호도 주어졌지만,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칭호였을 뿐 실권은 없었다. 이때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도서인 비혜흐라드 코덱스가 제작되어 그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야로미르를 궁재로 삼은 하인리히 4세의 요청에 따라 올로모우츠 주교구를 프라하 주교구에 통합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1088년,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올로모우츠 주교구를 다시 세우기로 했다. 야로미르는 이를 항의하기 위해 로마로 갔으나 도중에 사망했다.

1087년 오타 1세 올로모우츠가 사망했다.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올로모우츠 공국을 오타 1세의 아들 오타 2세가 아닌 자신의 아들 볼레슬라프에게 넘겼다. 오타 1세의 아내 에우페미아는 이에 맞서 브르노 공작 콘라드 1세 등 자신을 지지하는 몇몇 귀족들과 함께 할거했고, 볼레슬라프는 그 와중에 사망했다. 그는 이를 응징하고자 1091년 모라비아를 침공해 브르노를 포위했지만, 도중에 그의 아들 브라티슬라프 2세가 보헤미아 본토에서 아버지를 축출하려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장로들의 권고에 따라 콘라드와 화해하고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 후 브라티슬라프 2세는 아버지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헝가리로 망명했다.

1092년 1월 14일,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낙마사고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후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된 동생 콘라드 1세는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사절을 보냈고, 프라하와 올로모우츠의 주교단을 재통합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1092년 9월 6일 재임 8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아들 브라티슬라프 2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된 뒤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대가로 보헤미아를 영지로 삼는 것을 승인받았다. 그는 브르쇼프 가문의 가주 무티나가 폴란드 대공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한 끝에 그의 직위를 박탈하고 전 재산을 압류한 뒤 국외로 추방했다.

1094년 평민들 사이에서 아직도 행해지고 있던 이교 의식을 금지하고, 이교도들이 신봉하는 '신성한 나무'를 뽑아내고 숲을 파괴했다. 1097년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의 유산인 슬라브 전례에 따른 예배를 여전히 지키고 있던 슬라브 수도사들을 사자브 수도원에서 추방하고 라틴 전례를 준수하는 베네딕토회가 사자브 수도원을 관리하게 했다.

1096년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십자군이 보헤미아를 통과하면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를 피해 헝가리와 폴란드로 도주했다. 1098년, 브라티슬라프 2세는 해외로 도주한 유대인들이 재산을 옮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게 했으며, 여전히 보헤미아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켰다.

1097년 브르노 공작이자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동생 콘라드 1세의 장자로서 브라티슬라프 2세의 사촌인 올드르지흐가 브라티슬라프 2세 사후에 자신이 나이가 가장 많으니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나이가 가장 많은 자가 항상 공국의 권력과 권위를 갖고, 모든 형제와 후손들은 그의 통치 아래 복종하라"고 정한 원칙에 따라 자신에게 보헤미아 공작위가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격분한 브라티슬라프 2세는 올드르지흐를 체포해 클라드스코 성의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1099년 부활절에 레겐스부르크 제국 의회에 참석한 브라티슬라프 2세는 자기 아들 브라티슬라프 대신 이복 남동생 보르지보이 2세를 상속인이자 후계자로 지명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로부터 보르지보이 2세가 보헤미아를 영지로 삼는 것을 승인받았다. 그가 이런 조치를 내린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사촌 올드르지흐의 영지를 몰수하고 보르지보이 2세에게 넘겼다. 이에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동생이며 올로모우츠 공작이었던 오타 1세의 아들들인 오타 2세, 스바토플루크 2세는 숙청될 것을 우려해 해외로 망명했다.

1100년 12월 22일, 브라티슬라프 2세는 즈베치노 마을 인근에서 사냥하고 돌아오던 중 로렉(Lorek)이라는 괴한이 쏜 화살에 맞아 암살당했다. 로렉은 도주를 시도했지만 체포를 피할 수 없게 되자 단검으로 자신의 몸을 찔러 자살했다. 그에게 큰 피해를 입었던 브르쇼프 가문이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과 보르지보이 2세가 사주했다는 설이 세간에 나돌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브라티슬라프 2세가 암살된 뒤, 이복 동생인 보르지보이 2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110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 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보헤미아를 영지로 상속받는 것을 인정받았고, 올드르지흐를 석방시키고 영지를 돌려주라는 황제의 지시 역시 따랐다. 올드르지흐는 브르노로 돌아온 뒤 보헤미아 공작위를 탈취하기로 마음먹고, 오스트리아 용병대를 고용하는 한편,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을 보헤미아 공작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5세는 교황청과 성직자 서임권 분쟁에 몰두하고 있던 터라 그를 도와줄 여유가 없었다. 올드르지흐는 쿠트나 호라 인근으로 진군해 보헤미아 귀족들이 자신에게 호응하기를 기대했지만, 아무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후 보르지보이 2세와의 첫번째 교전을 치른 올드르지흐는 용병들이 그를 위해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다며 뿔뿔이 흩어지자, 보르지보이 2세와 협상한 끝에 더이상 공작위를 욕심내지 않겠다고 약조하고 브르노를 계속 다스리는 걸 인정받았다.

1103년, 보르지보이 2세는 폴란드 대공국을 양분하고 있던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즈비그뉴 형제 중 즈비그뉴와 손잡고 볼레스와프 3세의 영역을 동시에 공격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이에 맞서 부하 젤리스와프에게 모라비아를 습격하게 했다. 젤리스와프는 모라비아의 많은 도시와 마을을 약탈했지만, 귀환하던 중 보르지보이 2세의 습격을 받고 패배했다. 이에 볼레스와프 3세 본인이 직접 모라비아로 재차 출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지 못하자 외교술을 구사하기로 했다. 보르지보이 2세는 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즈비그뉴와의 동맹을 끊었다.

1105년, 보르지보이 2세는 자신에게 폐위된 뒤 복위를 꾀한 아버지 하인리히 4세에 대적하는 하인리히 5세를 지원하기 위해 바이에른으로 진군했다. 사촌인 스바토플루크가 이를 이용해 프라하에서 정변을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폴란드 대공국으로 망명해 볼레스와프 3세의 보호를 받았다. 1107년, 볼레스와프 3세는 헝가리 국왕 칼만과 연합해 보헤미아로 쳐들어가 보르지보이 2세를 축출하고 스바토플루크를 보헤미아 공작 스바토플루크 2세로 앉혔다. 보르지보이 2세는 하인리히 5세에게 망명했다.

이후 하인리히 5세는 공작위에 오른 스바토플루크 2세를 소환했고, 스바토플루크 2세는 형제 오타 2세에게 통치 대행을 맡기고 황제를 알현하러 갔다가 체포되었다. 보르지보이 2세는 스바토플루크 2세가 체포된 틈을 타 그로이츠슈 백작 비프레히트 2세의 지원을 통해 복위를 꾀했지만, 스바토플루크 2세를 대신해 통치를 맡고 있던 오타 2세에게 격퇴되었다. 그 후 스바토플루크 2세는 하인리히 5세에게 많은 양의 금을 지불하고 항상 복종하겠다고 맹세해 석방된 뒤 보헤미아 공작으로 인정받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보르지보이 2세는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스바토플루크 2세는 폴란드의 지원 덕분에 보헤미아 공작이 되었지만 볼레스와프 3세의 간섭을 받기를 거부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볼레스와프 3세는 1108년 스바토플루크 2세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군의 헝가리 원정에 동행한 틈을 타 보르지보이 2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도중에 포모제인이 북쪽 국경을 넘어 여러 마을을 파괴하자 군대를 북쪽으로 돌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스바토플루크 2세는 혹여 보헤미아 내에서 볼레스와프 3세에 호응해 자신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것을 우려해 보헤미아의 강력한 귀족 집안인 브르쇼프 가문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여 처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1109년, 스바토플루크는 하인리히 5세와 손잡고 폴란드를 향한 원정을 단행하려 했다. 그러나 그 해 9월 21일 군대를 사열하던 중 어느 기병의 급습을 받고 뒤에서 창으로 찔려 암살당했다. 암살자 얀 브르쇼프는 도주했다가 1년 후 체포된 뒤 코가 잘리고 눈이 뽑히는 형을 받았다. 보르지보이 2세는 그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프라하로 진격했지만 오타 2세에게 패배하고 사로잡힌 뒤 프라하 요새에 감금되었다. 비프레히트 2세의 장남 비프레히트 3세가 그를 도우려 했지만 프라하 인근 전투에서 오타 2세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양자는 보헤미아 각지에서 내전을 이어가다가 1110년 하인리히 5세가 보르지보이와 비프레히트 3세를 봉국을 혼란에 빠뜨린 죄로 체포하고 보르지보이 2세의 남동생 블라디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선임하면서 분쟁이 종식되었다.

블라디슬라프 1세는 공작위에 선임된 후 잠재적인 정적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형제 소베슬라프 1세는 폴란드로 망명한 뒤 볼레스와프 3세와 손잡았다. 1110년, 볼레스와프 3세는 소베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앉히기 위해 프라하로 진격했지만, 보헤미아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그는 본국으로 귀환하다가 보헤미아군의 추격을 받았지만 1110년 10월 8일 트루티나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을 격멸했다. 하지만 전쟁 물자가 바닥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물러났다. 1111년, 양자간의 협상 끝에 합의가 도출되었다. 소베슬라프 1세는 블라디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인정하는 대신 흐라데츠 크랄로베 시의 통치권을 얻었다. 소베슬라프 1세는 1115년에 브르노 및 즈노이모의 통치권을 물려받았다.

1114년 1월, 블라디슬라프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와 잉글랜드 공주 마틸다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이때 그는 수석 시종을 맡았는데, 이는 훗날 체코 군주가 선제후로서 독일왕을 선출할 권리를 확보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1117년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3세의 압력에 못 이겨 보르지보이 2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시키고 자신은 자데츠만 소유했다. 하지만 보르지보이 2세는 이후 3년간 홍수와 폭풍 등 자연재해에 시달리는 바람에 민심을 잃었고, 그는 이를 틈타 1120년 정변을 일으켜 보르지보이 2세를 헝가리로 축출했다. 이후 소베슬라프 1세의 영지를 모조리 몰수해 해외로 망명하게 만들고, 브르노를 오타 2세에게, 즈노이모를 콘라드 2세에게 양도했다.

2.6. 소베슬라프 2세부터 오타카르 1세까지

1125년 임종을 눈앞에 둔 블라디슬라프 1세는 사촌 오타 2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어머니 시비엥토스와바와 프라하 주교 오토 밤베르스키가 강력히 반대하자, 그는 마음을 바꿔 형제 소베슬라프 1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 해 4월 12일 블라디슬라프 1세가 사망한 후 소베슬라프 1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오타 2세는 이에 불복했고, 독일왕 로타르 3세의 지지를 확보했다. 로타르 3세는 보헤미아 승계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며 소베슬라프 1세를 불렀지만, 소베슬라프 1세는 함정을 의심해 가지 않고 별다른 권한이 없는 사절단만 로타르 3세에게 보냈다.

로타르 3세는 불충한 봉신을 정벌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1126년 초 보헤미아를 전격 침공했다. 당시 1125년 말과 1126년 초 겨울 날씨는 매우 혹독했지만, 로타르 3세는 이를 감안하지 않았다. 여기에 보헤미아를 가볍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제국 전역에서 병력을 끌어모으지 않고 작센 공국 동부의 전사들만 동원했다. 소베슬라프 1세는 이 정보를 입수하고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성 오드리의 깃발과 성 바츨라프의 창을 병사들에게 보이며 다음과 같이 독려했다고 한다.
"나는 하느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거룩한 순교자인 바츨라프와 오드리의 공로로 우리 땅이 외국인들에게 넘겨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노라."

1126년 2월 18일, 소베슬라프 1세는 눈 덮인 산기슭으로 이동 중이던 적군을 흘루메크 언덕에서 기습 공격했다. 당시 로타르 3세의 독일 기병대는 내리는 눈을 뚫고 나아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말에서 내려야 했고, 무거워서 눈밭을 헤쳐나가기 어려운 갑옷 역시 벗어야 했다. 그러다가 보헤미아군의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을 받자 크게 패해 달아났고, 선두에서 길을 안내하던 오타 2세는 로타르 3세, 훗날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될 알브레히트 1세와 함께 근처 언덕으로 피신했다. 이후 보헤미아군이 언덕 밑에서 포위한 뒤 공세를 벌인 끝에, 오타 2세는 전사했고 로타르 3세와 알브레히트 1세는 생포되었다. 소베슬라프 1세는 즉시 로타르 3세와 알브레히트 1세를 풀어줬고, 로타르 3세는 그 대가로 소베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인정하고 독일 군주 선거에서 투표권을 가진 최고 시종 칭호를 내렸다.

신성 로마 제국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면서 입지를 공고히 한 소베슬라프 1세는 입지 강화에 나넜다. 먼저 오타 2세의 자식들인 콘라드 2세와 브라티슬라프로부터 즈노이모, 올로모우츠, 브르노 등 영지를 몰수하고, 인드르지흐 즈디크 주교를 통해 올로모우츠를 직접 통치했다. 또한 브라티슬라프 2세의 외아들인 브라티슬라프를 1126년에 체포해 도닌 성에 투옥했고, 1129년 데친 성으로 옮겼다. 1130년 여름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적발한 뒤 음모에 가담한 자들을 모조리 체포해 실명형을 가했고, 주동자들의 사지를 4등분으로 절단하는 형벌을 가했다.여기에 데친 성에 갇혀 있던 브라티슬라프가 이 음모와 연관시켜 실명형에 처했다.

한편, 그는 로타르 3세의 충성스러운 가신으로서 활약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과의 전쟁에 언제나 참여해 로타르 3세를 도왔고, 로타르 3세가 헝가리 내전에 개입했을 때도 힘을 보탰다. 1132년, 그는 로타르 3세의 지원 덕분에 헝가리 국왕으로서 입지를 굳힌 벨러 2세, 페레미실 공작 볼로디미르코와 함께 폴란드를 공격해 소폴란드로 진입하여 비실리카를 공략했다. 이후에도 폴란드와 수차례 소규모 접전을 치르다가 1137년 크워츠코에서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와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을 종식했다. 다만 이 협약에 대한 세부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

1138년 독일왕으로 선출된 콘라트 3세가 개최한 밤베르크 제국 의회에 참석한 소베슬라프 1세는 콘라트 3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수석 시종을 세습할 권리를 인정받고, 자신이 죽으면 장남 블라디슬라프가 보헤미아 공작위를 세습하는 것 역시 인정받았다. 그 해 6월, 그는 보헤미아 귀족들을 사드스카로 소환한 뒤 블라디슬라프의 계승을 확인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1140년 2월 14일 소베슬라프 1세가 사망한 뒤, 콘라트 3세는 약속을 뒤집고 전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의 아들이며 소베슬라프 1세의 조카인 블라디슬라프 2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세웠고, 보헤미아 귀족들 역시 받아들였다. 이는 보헤미아 공작에 통제하기 쉬운 젊은이를 세우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블라디슬라프 2세는 보헤미아 공작이 된 뒤 귀족들의 바람과는 달리 정무에 정력적으로 임했고 귀족들의 통제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이에 자신들이 오판했다는 걸 깨달은 귀족들은 반기를 들기로 하고, 1142년 당시 생존한 프르셰미슬 왕조 일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콘라드 즈노젬스키를 보헤미아 공작에 세우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브르노의 브라티슬라프와 오타 3세를 포함한 모라비아 지역의 공자들도 가세했다. 그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카슬라프 지역의 비소카 언덕에서 형제 디에폴트 1세와 인드르지흐, 올로모우츠 주교 인드르지흐 즈디크의 지원을 받아 반란군과 맞섰다.

1142년 4월 25일, 양군은 비소카 언덕에서 맞붙었다. 일부 귀족들이 전투 도중에 반란군 편으로 돌아서면서 전세가 기울자, 그는 적진 한 가운데로 돌진해 돌파에 성공하고 형제들과 함께 프라하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병력을 잃어서 반란군에 자력으로 대응할 수 없게 되자, 디에폴트 1세에게 프라하 성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인드르지흐 즈데크와 함께 콘라트 3세에게 찾아가서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콘라트 3세로부터 원군을 받아낸 그가 프라하로 돌아오자, 디에폴트 1세의 철저한 방비에 막혀 프라하를 공략하지 못하고 있던 반란군은 항복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이 승리를 이용해 모라비아를 프라하의 지배하에 두었고, 올로모우츠 주교 인드르지흐 즈데크의 협력을 통해 모라비아 교회의 영지와 물품들을 세속 군주들의 통제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했다.

1147년 콘라트 3세가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을 때 동행했고, 교황 특사 귀도가 그를 대신해 보헤미아를 통치했다. 하지만 그는 도중에 이탈해 아그림으로 가서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와 접견했고, 키예프와 크라쿠프를 거치며 이교도 슬라브족을 상대로 십자군 전쟁을 벌였다. 1152년 새 독일왕이 된 프리드리히 1세가 소베슬라프 1세의 자식들 중 한 사람을 보헤미아 공작에 앉히려 하면서, 처음에는 그와 프리드리히 1세와의 관계가 냉각되었다. 하지만 프라하 주교 다니엘의 중재 덕분에 양자는 화해했고, 1156년 6월 레겐스부르크 제국 의회에 참석한 블라디슬라프 2세는 공작들의 대변인 역할을 맡았다. 1157년 프리드리히 1세의 폴란드 원정에 참여해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북부 이탈리아 도시, 특히 밀라노를 공략하려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1158년 1월 11일,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에 보답하고자 레겐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 공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블라디슬라프 2세에게 보헤미아 왕관을 씌워주고 크랄(král) 칭호를 내림으로써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임했다.[7] 그 해 여름, 블라디슬라프 2세는 황제와 함께 밀라노 원정에 나썻고, 브레시아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밀라노는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1161년 장남 베드르지흐와 디에폴트를 이탈리아로 보내 황제를 돕게 했지만,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1162년 프리드리히 1세와 함께 3번째 밀라노 원정에 착수해 마침내 공략에 성공하고 금, 은 등 막대한 금은보화를 보상으로 지급받고 귀환했다.

1161년, 소베슬라프 2세는 용병대를 고용한 모라비아로 진군해 올로모우츠를 점령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진압에 착수했지만 여의치 않자 협상하고 싶다며 그를 프라하로 초대했다. 소베슬라프 2세는 이에 응해 프라하로 갔다가 체포된 뒤 프르짐다 성에 또다시 투옥되어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다.

한편, 헝가리 왕국에서는 1162년 국왕 게저 2세가 사망한 뒤 게저 2세의 아들인 이슈트반 3세와 게저 2세의 두 동생인 이슈트반 4세와 라슬로 사이의 내전이 발발했다.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가 자국으로 망명했던 이슈트반과 라슬로 왕자에게 군대와 물자를 지원해 이슈트반 3세에 대항하게 하자, 이슈트반 3세는 블라디슬라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동로마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했기에 거부했다. 이슈트반 3세는 마누일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간청했다. 이후의 협상 끝에, 그는 황제로부터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받는 대가로 동생 벨러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내기로 했고, 동생 벨러가 아버지 게저 2세로부터 부여받은 아파치 공국(달마티아, 크로아티아 등 헝가리 왕국의 일부 영역)을 동로마 제국이 장악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다.

마누일 1세는 이 정도면 헝가리를 약화시키고 제국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목표를 충분히 달성했다고 여기고 이슈트반 4세에게 등을 돌렸다. 이에 이슈트반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접근했고, 헝가리의 여러 성직자와 귀족들이 신성 로마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종주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이슈트반 3세는 낌새를 읽고 프리드리히 1세에게 사절을 보내 공물을 바칠 테니 개입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일단 헝가리의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고, 그의 신하들인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 2세,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에게 헝가리를 예의주시하라고 지시했다.

1164년, 이슈트반 3세는 동로마 제국이 가져갔던 벨러 3세의 영지인 중앙 달마티아를 탈환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이슈트반 4세가 용병대를 규합해 시르미움을 공략하고 주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이슈트반 3세는 이에 맞서 주변 세력에 구원을 요청했고, 그는 오스트리아, 할리치나 방면에서 파견된 군대와 함께 이슈트반 3세를 지원하러 출진했다. 연합군은 헝가리 각지에서 약탈을 벌였다. 그러나 마누일 1세가 곧 헝가리로 진군하여 바치까지 진군하자, 그는 이슈트반 3세에게 평화 협약을 맺을 것을 권고했다. 이슈트반 3세는 보헤미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시르미움을 포기하기로 하고, 그 대신 황제가 이슈트반 4세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그는 장남 베드르지흐의 딸이자 자신의 손녀인 헬레나를 마누일 1세의 친척인 페트라리프 가문 인사와 결혼시켰다고 전해진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보헤미아에서 30여년간 통치를 이어가면서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었고, 프레몽트레회, 시토회, 구호기사단 등 성직자 조직을 보헤미아에 수용했다. 그의 치세에 스트라호프 수도원, 플라시 수도원, 젤리브 수도원, 독사니 수도원을 포함한 여러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1160년경에는 프라하에 석조로 제작된 주디스 다리가 세워지기도 했다. 또한 이전에 개발되지 않았던 숲이 우거진 지역이 여러 소귀족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어 개간되면서 국가 경제가 발전했고, 그 과정에서 흐라비시츠, 로젠베르크, 스트라코니츠 등 새로운 영주 가문이 등장했다.

그러나 1167년 프라하 주교 다니엘이 사망한 후, 프리드리히 1세와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 2세간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1168년 블라디슬라프 2세의 아들인 보이테흐가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선임되자, 프리드리히 1세는 이러다가 보헤미아 공국의 영향력이 오스트리아까지 미칠까 염려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보히테흐 선임을 인정받기 위해 상당량의 금액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1169년 밤베르크 제국 의회에서 보이테흐를 인정하길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테흐는 잘츠부르크 주교구의 실질적인 주교로서 통치를 행사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장남 베드르지흐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물려주길 갈망했다. 애초에 그가 장남 이름을 베드르지흐라고 지은 것도 프리드리히 1세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8]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베드르지흐의 왕위 상속이 인정받을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그는 생전에 장남에게 왕위를 넘겨줌으로써 기정사실로 만들기로 하고 1172년 말에 아들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넘겨주고 스트라호프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로서 말년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곧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소베슬라프 1세의 아들들인 올드르지흐, 바츨라프 2세 등은 1173년 9월 베드르지흐를 몰아내기 위해 프리드리히 1세를 찾아가 황제의 승인 없이 계승이 이뤄졌으니 조치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보헤미아 왕위 계승이 이뤄졌다는 소식에 진노해 베드르지흐에게 소환령을 내렸고, 베드르지흐는 감히 황제에 대적할 엄두를 못내고 이에 응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는 블라디슬라프 2세의 조치를 무효로 처리하고 보헤미아 국왕 칭호를 회수한 뒤 올드르지흐를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했다. 하지만 보헤미아 귀족들은 올드르지흐를 공작으로 섬기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무산되었고, 그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던 소베슬라프 2세가 석방된 뒤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공작이 되자마자 자신을 그동안 학대했던 간수 콘라드 슈투름을 참수했다.

1176년, 소베슬라프 2세는 프리드리히 1세의 요구에 따라 황제의 이탈리아 원정에 보헤미아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황제의 군대는 레냐노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아달베르트를 대주교의 직위에서 면직시켰고, 이로 인해 아달베르트의 삼촌인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와 갈등을 벌였다. 즈노이모 공작 콘라드 2세도 아달베르트를 옹호했다. 이에 소베슬라프 2세는 무력으로 분쟁을 해결하기로 하고, 헝가리 국왕 벨러 3세와 연합한 뒤 군대를 일으켜 헝가리군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2차례 공격해 하인리히 2세의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하인리히 2세는 도망치던 중 사망했고, 오스트리아 전역이 보헤미아군에게 황폐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성당과 수도원이 약탈당하자,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1177년 소베슬라프 2세를 파문했다.

1178년, 프리드리히 1세는 헝가리와 협력해 자신의 봉신인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피해를 입힌 소베슬라프 2세에게 분노해 그를 폐위시키고 프르셰미슬 왕조의 또다른 구성원인 베드르지흐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세우겠다고 선포했다. 소베슬라프 2세가 쉽사리 물러나지 않자, 프리드리히 1세는 새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에게 보헤미아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여기에 즈노이모 공작 콘라드 2세까지 베드르지흐를 도왔다. 소베슬라프 2세는 로데니체 전투에서 이들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뒀지만, 뒤이은 프라하 성벽 인근의 노베메스토 전투에서 참패해 해외로 망명했다. 베드르지흐는 자신이 보헤미아 공작이 되는 데 큰 기여를 한 동생 오타카르 1세를 올로모우츠 공작에 선임해, 올로모우츠가 속한 모라비아 전역에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게 했다.

1179년, 소베슬라프 2세는 베드르지흐가 황제의 부름을 받고 슈바벤으로 간 틈을 타 군대를 끌어모아 프라하로 쳐들어갔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이 소식을 접한 베드르지흐는 독일에서 용병대를 모집하여 보헤미아로 돌아갔다. 도중에 소베슬라프 2세의 매복 공격을 받고 패배했지만 콘라드 2세의 구원군과 합세한 뒤 다시 공세를 개시해 프라하 인근에서 소베슬라프 2세를 격파했다. 소베슬라프 2세는 해외로 도망쳐 재기를 꾀했지만 1180년 1월 9일에 사망했다.

1182년, 콘라드 2세가 모라비아에서 반기를 일으켜 오타카르 1세를 올로모우츠에서 몰아내고 즈노이모, 브르노, 올로모우츠를 통합해 모라비아 전역을 통일시킨 뒤 프라하로 진격했다. 베드르지흐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달려간 뒤 도움을 호소했고, 황제는 베드르지흐가 보헤미아 공작을 계속 맡는 대신 콘라드 2세를 모라비아 변경백에 선임하고 보헤미아 공작으로부터 독립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1185년, 오타카르 1세가 이끄는 베드르지흐의 군대는 모라비아를 보헤미아의 지배하에 되돌리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이후 즈노이모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타카르 1세와 콘라드 2세 모두 큰 손실을 입었고, 오타카르 1세는 철수해야 했다. 1186년, 양자는 크닌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콘라드 2세는 변경백 칭호를 유지하면서도 보헤미아 공작의 패권을 인정했으며, 베드르지흐의 후계자가 되었다.

1187년, 베드르지흐와 그의 사촌이자 프라하 주교인 인드르지흐 브르제티슬라프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인드르지흐는 베드르지흐가 관료들을 프라하 주교구에 파견해 감독들의 재산 관리에 자유롭게 간섭한 것에 반감을 품고 프리드리히 1세를 찾아가 중재를 요청했다. 황제는 레겐스부르크에서 제국 의회가 열릴 때까지 결정을 연기했다. 베드르지흐 본인은 의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인드르지흐가 공작을 상대로 불평할 권리가 없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1187년 3월 5일, 프리드리히 1세는 베드르지흐가 의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고 간주하고 인드르지흐 주교에게 황금 황소를 선물했으며, 보헤미아 공작과는 별개로 황제 직속의 공작으로 지명되었다. 이리하여 주교구의 재산은 보헤미아 공작의 권위에 속하지 않게 되면서, 주교구와 보헤미아 공국 사이에 분열이 발생했다.

1189년 3월 25일, 베드르지흐는 프리드리히 1세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황제에 합류하려 하던 중 사망했다. 이후 콘라드 2세가 크닌 협정에 따라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고, 보헤미아와 모라비아가 재통합되었다. 콘라드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정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189년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하인리히의 지령을 받들어 프리드리히 1세와 많은 갈등을 벌였던 베틴 가문의 영지인 마이센 인근에 군대를 배치해 압박을 가한 끝에 마이센 변경백으로 프리드리히 1세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한 오토 2세가 세워지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콘라드 2세는 1189년 사드스카에서 최초의 보헤미아 법률인 <콘라드 법령(Statuta Konrádova)>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영주 가문은 농노를 세습할 수 있으며, 여성의 상속권도 인정되었다. 반면 과부는 상속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범죄에 적용되는 관습법을 성문화했으며, 국왕이 사법권과 행정권을 좀더 강하게 행사할 수 있게 했다. 그 대가로, 보헤미아 귀족들의 재산은 오랜 법적 절차을 거치고 관습에 어긋나지 않아야만 몰수될 수 있는 등 귀족들의 특권이 보장되었다.

1191년, 콘라드 2세는 프리드리히 1세 사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기 위해 로마로 진군한 하인리히 6세를 따라갔다. 그 해 4월 로마에서 열린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뒤, 하인리히 6세가 시칠리아 왕국을 신성 로마 제국에 재편입하기 위해 남하하여 남부 이탈리아의 거점 나폴리를 포위 공격할 때도 참여했다. 그러나 그해 9월 9일 진영에서 나돌던 페스트에 걸려 병사했다.

콘라드 2세는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소베슬라프 2세의 남동생인 바츨라프 2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프라하 주교 인드르지흐 브르제티슬라프가 그가 보헤미아 공작이 된 것에 공개적으로 반대했고, 1192년 1월 하인리히 6세를 찾아가 블라디슬라프 2세의 아들인 오타카르 1세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하인리히 6세는 6,000 그리브냐 은화를 제공하겠다는 오타카르 1세의 약속에 따라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오타카르 1세를 보헤미아 공작, 오타카르 1세의 형제인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를 모라비아 변경백에 선임하기로 했다. 이후 오타카르 1세가 독일에서 용병대를 고용한 뒤 쳐들어오자, 바츨라프 2세는 프라하에서 몇달 동안 항전했지만 보헤미아 귀족들이 전부 오타카르 1세에게 귀순하자 결국 1192년 초 항복하고 자신을 도왔던 스피티네프와 함께 망명했다. 그러나 둘 다 도중에 오타카르 1세의 처남인 마이센 변경백 알브레히트 1세에게 체포되었다. 스피티네프는 감옥을 성공적으로 탈출했지만, 그는 더 이상의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볼 때 그러지 못하고 옥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타카르 1세는 하인리히 6세의 지원 덕분에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될 수 있었지만, 약속했던 돈을 지불하길 꺼리면서 하인리히 6세와 갈등을 벌였다. 그러던 1193년, 오타카르 1세가 브라반트 공작 하인리히 1세가 주도하는 반(反) 하인리히 6세 연합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하인리히 6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보헤미아 공작을 교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해 6월, 하인리히 6세는 인드르지흐 브르제티슬라프로부터 은화 6,000 흐리브냐를 받는 대가로 보헤미아 공작을 수여하기로 했다. 그해 8월, 인드르지흐는 독일군을 이끌고 보헤미아로 향했지만 주민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고, 오타카르 1세는 그를 물리치고자 보헤미아 귀족들이 이끄는 사병대를 집결시켜 진군했다. 그러나 즈디체 인근에서 양군이 대치했을 때, 오타카르 1세 휘하에 있던 귀족들이 대거 편을 바꾸는 바람에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오타카르 1세는 프라하로 도피했다.

오타카르 1세는 프라하에서 주민들의 열띤 호응을 받으며 1193년 성탄절까지 항전했지만, 결국 함락되기 직전까지 몰리자 친척인 보겐 백작 알브레히트 3세에게 망명했다. 인드르지흐는 프라하에 입성하여 입지를 다진 뒤 1194년 여름 모라비아에서 군사 작전을 벌여 모라비아 변경백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의 항복을 받아내고 프라하로 데려감으로써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이후 하인리히 6세의 명령에 따라 마이센 변경백 알브레히트를 향한 원정에 동행했다.

1195년 12월 6일 하인리히 6세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일으키겠다고 선포하자, 인드르지흐는 이에 호응했다. 그러나 나폴리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하인리히 6세의 십자군 원정은 지연되었다. 그 사이 병에 걸린 인드르지흐는 프라하를 떠나 조용한 마을인 체브로 옮겨 요양 생활을 하다가 1197년 6월 15일에 사망했다. 이후 프라하 감옥에 갇혀 있던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가 석방된 뒤 귀족들의 추대에 힘입어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오타카르 1세는 이에 불복해 그 해 12월 보헤미아로 쳐들어갔고,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는 이에 맞서고자 진군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동복형제끼리 피튀기는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 프라하 주교 다니엘과 귀족들의 중재에 따라 협상했다. 그 결과 1197년 12월 6일, 오타카르 1세가 보헤미아 공작이 되고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는 모라비아 변경백에 복위한다는 합의를 맺었다.

1198년,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인 호엔슈타우펜 가문필리프벨프 가문과의 제위 계승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보헤미아를 끌어들이고자 오타카르 1세에게 보헤미아 국왕 작위를 내림과 동시에 왕위 계승권을 보장했다. 이에 필리프의 경쟁자였던 벨프 가문의 오토 4세는 오타카르 1세를 회유해 필리프를 배신하게 만들고 보헤미아 왕위를 승인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 또한 이참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 약화를 유도하고자 보헤미아 왕위를 인정해줬다. 그 후 오토 4세를 무너뜨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프리드리히 2세도 그 사이에 강력해진 보헤미아를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1212년 보헤미아 왕위 세습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리하여 보헤미아 왕국이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3. 역대 보헤미아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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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전설상의 통치자

3.2. 역사상의 통치자



[1] 14세기에 집필된 달리밀의 연대기에 따르면, 바츨라프 1세만이 자신이 농민 출신이라는 걸 부끄러워해 대관식에서 이 유물들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2]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스피티네프 1세의 남동생인 브라티슬라프 1세라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3]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바츨라프 1세는 전투 도중 사상자가 많이 생기자 코우르짐의 통치자에게 결투를 신청해 동의를 얻어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전진했을 때, 바츨라프의 이마에 십자가 형태를 띤 환상이 생겨났다. 코우르짐의 통치자는 그걸 보자마자 무기를 멀리 내던지고 바츨라프 1세의 발 앞에 몸을 던지며 "하느님께서 표창을 내려 도움을 베푸시는 사람을 이길 자가 없다"고 선언했다고 한다.[4] 드라호미라가 속한 스토도르족이 여기에 해당했다.[5]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6] 크랄(král)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카롤루스 대제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게 정설이다.[7] 크랄(král)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카롤루스 대제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게 정설이다.[8] 베드르지흐(Bedřich)는 독일의 남성 이름인 프리드리히의 보헤미아식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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