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17:02:43

농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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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발생3. 계층4. 생활5. 벗어나는 방법6. 중세 이후
6.1. 쇠퇴한 국가들6.2. 유지되거나 강화된 국가들
7. 유사 개념8. 기타9.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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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농노제(, Serfdom)는 봉건제 유럽 중세 사회에 존재했던 하층민의 종속 체제이다.

농노(serf)는 땅에 예속되어 농민으로 살아야 했으며 해당 영지의 지배자인 영주에게 종속되었다. 노예와 다르게 사유재산권을 인정받아 노예보다는 높으나 자유민보다는 신분적으로 낮은 것으로 간주되었다.[1]

마르크스의 시대구분법으로 인해 농노노예가 엄격히 구분되는 개념이라고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나, 사실 예속민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권리가 상이하였고 계속해서 변화하였기 때문에 현대의 학계에서는 농노와 노예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2] 사실 헤겔 철학의 영향을 짙게 받은 마르크스의 저서에서도 '이 서술은 논리적 상관관계를 기술한 것일 뿐, 실제 역사적 흐름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또는 '사회과학적 분석을 위한 추상화일 뿐이다.'라는 논지가 바탕으로 깔려있다. 마르크스가 언급한 농노제는 실재하는 어떠한 제도를 가리킨 것이 아닌 연구의 엄밀화를 위한 추상적인 개념 구분으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2. 발생

비록 현대에는 여러 신분들이 있지만,
태초에 모든 인간은 똑같은 자유를 가진 자유인이었다.
우리 모두가 한쌍의 남자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고,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지나친 자만심과 질투로 인해 원한과 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을 때,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위대한 군주라고 생각한다면 평화롭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 가운데서 왕을 선출해서 군주로 삼았다. 그리고 법을 만들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를 처벌할 권력을 주었다.
또한 왕이 공동체의 적들과 사악한 관료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자신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강하고, 현명한 자들을 선출해서 봉신으로서 왕을 도우며 평화를 지키는 영주들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귀족이라고 불리는 신분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자신들 가운데서 귀족을 선출한 사람들 중 남은 이들은 비귀족 자유민이 되었다.

농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런 예속인 신분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힘으로써, 몸값 대신이거나 감옥에서 풀려나는 대가로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재정적 이익을 얻거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팔아서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왕이 왕국의 방어를 위해 외국인들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무장을 한 채 같이 전장에 나갈 의무가 있는 자들을 전부 소집했을 때 안전한 후방에 남은 대가로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전장에서 도망친 죄로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 교회가 설립된 시기에 경건한 의도로 성인들에게 자신을 바침으로써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부당하게 예속을 강요하는 영주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농노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 농노가 되었든, 농노들에게 자유를 주고 예속인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영주들이 할 수 있는 선행 중에서도 훌륭한 것이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누구도 예속된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프랑스어][4]
보마누아르(Beaumanoir), 보베 지방 관습법(Coutumes de Beauvaisis, 1283), 45장 1453절 #(1900년도 출간본, 오른쪽 페이지)

최근 중세사 연구에서 밝혀지는 것들이 다 그렇다시피, 실제로는 중세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고대 로마 시대까지 기원을 소급할 수 있다. 농노제의 기원은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까지 올라간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에 토지세와 그 토지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인두세를 결합한 것이 기원이나, 디오클레티아누스 집권 이전인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3세기의 위기 동안 집권한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등 로마 황제들은 과거 공화정, 원수정 초와 다른 형태로 농노제 형태의 제도를 사용했다. 이들 황제들은 인구가 적은 지역에 로마 퇴역병과 그 가족들 혹은 귀순한 게르만족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해당 지역에서 농사에 종사하도록 하면서 그들을 정착시키는 제도를 시행했다. 물론 이런 방법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때 게르만족들이 북이탈리아와 갈리아에 반강제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 했던 적응 문제로 반란이 일어나 재배치되는 일, 프로부스 시대때 있던 병사들의 반발 등으로 불협화음을 겪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런 방법은 오현제 시대 후반부터 외침이 심해지고, 라인강과 도나우강, 발칸 반도 일대가 전란에 휩싸이는 현실에서 지역 재건과 인구수 유지 등에 큰 도움이 됐다. 따라서 디오클레티아누스 집권 이후에도 이 제도는 로마 황제 혹은 지역 행정관들의 명령으로 계속 집행됐다. 그러다가 4세기에는 원적법(JUS ORIGINARIUM)을 통해 농민이 원래 출생지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법이 시행된다. 이러한 토지 예속은 세습되는 신분으로 여겨졌으며, 이때 거주자를 가르키는 라틴어인 콜로누스(COLONUS)는 원래 자유민이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때는 이미 노예에 가까운 낮은 계급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서로마 붕괴기의 혼란 탓에 콜로누스 제도 자체가 농노제와 얼마나 연속성이 있는지는 불명확하다. 굳이 따지면 직접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거라고 보는 것이 대세인데, 콜로누스는 엄연히 자유민인지라 국가에 세금도 납부하였으며 국가가 지주와 농민 간 계약을 법적으로 보호하였다. 즉, 농노제보다는 소작제에 해당하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지주는 중요한 생산수단인 토지와 그에 수반하는 자본을 보유하므로 좀 더 경제적 우위가 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도 안정된 농업경제를 위하여 농민이 토지에 예속되도록 하였고 대를 이어서 재계약을 하다보니 사실상 세습이 되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농민이 계약의 보호를 받도록 힘써야 할 중앙화한 국가체계가 해체되어 분권화해버리면서 지주들이 곧 영주가 되어버렸으니 농민들이 종래의 자유민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도 중세 토지대장 문서 등을 보면 콜로누스라는 단어 자체는 살아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장원에 종속된 농민의 계급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어차피 노예제적인 관행은 전세계에 존재하기에 기존 콜로누그 제도에서 쓰던 용어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한편 게르만족의 습속에서는 종사 관계(Gefolgschaft, retinue)가 존재했는데, 자유민 상호간에 주군-종신 관계를 서약하는 것이다.

이 두 제도가 결합한 것은 봉건제의 시작인 8세기 이후부터인데, 봉건제의 시작과 같이 프랑크 제국의 황제들이 야만족의 침입을 막지 않고 방조하는 과정에서 각지의 제후들이 힘을 키운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원래 프랑크 왕국의 자유민들은 게르만족의 습속에 따라 전사이자 황제의 종신이었으나, 황제들이 야만족의 침입을 방조하자 각지의 자유민들이 멀리 있는 황제보다는 근처에 있는 유력자와 종사 관계를 맺어 자신을 의탁한 것에서 시작된다.

무력이 부족한 각지의 자유민들은 유력자들에게 자신의 토지를 바치고 종신이 된 다음, 유력자는 다시 그 토지를 종신에게 수여하는 형식의 계약을 맺어서, 유력자는 영주로 변하고 자유민은 농노로 변하게 되며, 영주가 그런 식으로 병탄한 대토지는 장원이 되었다.

유력자의 대토지에는 이미 상기한 콜로누스를 주축으로 노예(servus), 해방노예(litus) 등 다양한 신분이 존재했다. 중세 유럽을 노예제 이후 농노제로 표현하는 경향 때문에 노예 계층이 없었던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실제로는 9세기까지도 슬라브족이나 작센족 등 동방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잡은 이교도들이 적게나마 계속 노예로 공급되었으며, 각지의 유력자들은 그런 노예들을 거느린 대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간 유력자에게 토지를 위탁하온 이들은 원칙적으로 자유민이었고, 법적으로 이런 신분들은 세세히 규정되고 노예로 보느냐, 자유민으로 보느냐 차이가 있기도 했고 실제로 부역의 경중이나 예속 수준도 차이가 나기는 했으나, 현실에서는 그들이 계속 통혼으로 신분이 뒤섞이기도 했고, 토지에 예속되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존재로 여겨지면서 저 토지를 의탁해온 자유민이었던 이들도 점차 하나의 비슷한 계급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때문에 10세기가 되면 그냥 노예라는 뜻의 단어 세르부스에서 유래된 Serf로 퉁쳐지기 시작한다.

물론 저 자유민이었던 이들이 토지 의탁 하는 바람에 전부 농노 계급으로 떨어진 것은 아니다. 자기 토지와 재산, 특히 무기를 잘 갖춘 이들은 영주의 전투에 계속 동원되면서 기사 계급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중세와 관련된 것들이 으레 그렇듯이 농노제 역시 상당히 부정적인 시선만 받아왔던 제도이지만, '제도로서의 봉건제'에 대한 논의가 다 그렇듯이 매우 실체를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실제로는 관습적이고 모호하며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해온 유럽의 농촌 제도를, 후대에 대충 농노제라고 싸잡아 부르며 악습인 것처럼 규정한 것이다.

일례로 비교적 영토가 좁고 강력한 전제군주정과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조선노비제와는 달리 폴란드-리투아니아, 신성 로마 제국, 러시아 제국 같은 거대국가들의 농노제는 같은 시대에서도 단일 법적, 실질적 농노제가 존재하지 않았고 시대에 따른 변화나 지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한다.[5]

3. 계층

중세 서유럽의 봉건제란 사회 제도라기보다는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계약들이 얽히고 섥혀 생긴 어정쩡한 사회 구조이며, 농노제 또한 그 일부이다. '농노라는 것은 특정한 의무와 권리를 가진 계급이 아니라, 저 어정쩡한 사회 구조에서 전투보다는 농업에 더 치중한 계층을 퉁친 것에 가깝다.

실제로 농노와 기사는 8세기까지 중세 초기에는 예속민으로서 비슷한 신분으로 여겨졌다. 즉 자유 농민보다는 농노와 기사가 더 비슷한 종류였다는 것이다. 기사 역시 종속민으로서 결혼 결정권이나 주거지 이동권이 제한되었고 재판도 주군에게 종속되었다. 자유농민은 황제나 왕의 신하로서, 국가의 공법에 의해 재판을 받고 군역도 황제나 왕 아래에서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9~10세기경 중앙권력이 해체되면서 자유민은 중앙 군주에게 보호를 받을 수도 없고 의무를 수행할 수도 없게 된다. 오히려 지방의 유력자들이 군벌화되면서 그러한 지방 영주들의 '군인 예속민'의 지위가 더 높아지게 된다. 그렇게 '전투가 농업보다 고귀한 것' 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농노와 같이 예속민이던 기사는 자유농민보다 높은 계층으로 자리잡는다.

때문에 농노의 권리와 의무는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기보다는 개개별의 계약 사례마다 전부 다른 것으로 봐야한다. 심지어 장원과 행정 구역은 일치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한 마을에 살아도 누구는 A영주를 모시고, 누구는 B영주를 모시고, 누구는 C수도원에 속한 농노고, 누구는 A B영주를 동시에 모시는 농노고, 누구는 영주를 따로 안 모시는 자유민인 식으로 마구 섞여 있었다. 같은 마을 공동체에 사는 농민이어도 이렇게 예속계약 상태가 다른만큼 의무와 권리가 서로 달랐고 각 지역의 관습법마다도 달랐다. 또 세속 영주에 비해 교회 영주(수도원이나 교회의 수도원장과 주교)들이 더 가벼운 의무와 좋은 권리를 지니는 경향도 있었다. 단 하나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꼽자면, 농노는 영주에게 보호를 받으며, 영주의 사법 지배 아래 놓이고, 영주에게 생산물 혹은 노동력을 통한 봉사를 한다는 부분일 것이다.

게다가 종사 계약이 무조건 자발적으로 상호 합의하에 이뤄진 것도 아니고, 사병을 잔뜩 가진 유력자가 근처 마을에 무력 시위를 해서 강제로 자신의 농노적 종신으로 편입 시킨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종사 계약으로 편입된 농노는 자발적으로 계약한 경우에 비해서 더 악조건으로 대우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 근처 영주와 종사 계약을 자발적으로 맺으면서 '농노가 아니라 자유민이기 때문에 수확물을 공납할 의무만 있을 뿐 부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라고 계약을 맺은 이도 어느새 어영부영 부역에 끌려가는 경우도 매우 흔했다.
  • 자유민
    말 그대로 자유민. 하지만 중세시대의 자유민은 실질적으로는 명확한 정의를 할 수 없다. 상기하였듯 농노 계급의 유래의 상당수는 봉건 계약에 의해 종속민으로 편입된 것인데, 농노들도 자기네가 법적으로는 자유민이라고 주장하며 영주의 간섭을 차단하고 싶어했다. 일반적으로 자유민으로 보는 지표는 결혼세를 영주에게 납부하지 않는 것, 자유롭게 결혼하는 것, 봉건 계약이 맺어지지 않은 자유토지를 스스로 경작하는 것, 영주에 대한 부역이나 납세가 다른 농노에 비해 가벼운 정도, 영주의 법정이 아닌 왕의 판사 법정에서 심판 받는 것, 자유민이 배심원으로 참관하는 법정에 서는 여부 등을 통해 다른 주변 농노보다 잘 살았다 싶으면 대강 자유민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각 지역의 관습법에 의존하는 봉건사회의 특성상, 지역별로 자유민으로 간주되는 인구의 비율이 차이가 컸다. 플랑드르 지역의 경우 거의 대부분의 인구가 명목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자유민이었고, 영국노르만 정복 이래로 행정상의 목적으로 대부분의 토지를 봉건 질서에 따라 정리해서 '봉건 계약이 맺어지지 않은 자유토지'를 가진 인구는 10% 내외에 불과했다.
  • 미니스티리얼/미니스테리알(ministeriales)
    상기한 농노 계급 중 무장할 능력이 있던 계급이다. 주군에게 작은 토지를 수여받고, 주군에 대한 종속이 세습되는 계층이었다. 나라에 따라 다르지만, '기사 계급'으로서 귀족으로도 간주됐고 '종속 계급'으로서 평민으로도 간주되는 이중적인 신분의 계급이었다. 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신분이 애매모호했던 자유민과 빌런들에 비해서 더 확실하게 법적으로 주군에게 종속되는 신분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결혼 및 이주 등의 자유가 그냥 농민 나부랭이들보다 더 제한되어 주군의 허가를 받아야했다. 전시에는 무장하여 기사/병사로 동원되었지만 평소에는 주군의 장원관리자 등 관리로서 일했다. 이들 역시 자유민과 마찬가지로 일원적인 계층은 아니다. 백작의 미니스테리알이라면 부백작(자작)이 되었고, 백작 가문이 후사 없이 단절되거나 전사·처형 등 멸문당하여 없을 때 은근슬쩍 백작령을 낼름 먹고 완전한 귀족으로 승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혹은 주교의 가신으로서 장원이나 도시에서 관료로 일하다가 사실상 도시귀족이 되거나 코뮌 운동에 동조하여 자유를 얻기도 하였다. 시간이 흐르며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상승하였고, 세습적인 귀족 기사 계층으로 이어지게 된다.
  • 빌런/빌랭(villeins)
    마을 사람이라는 뜻이다. 중세에는 전형적인 농노, 하층민으로 간주되어 천시받았다. 자유민이나 미니스테리알에 비해서 많은 부역과 납세를 부담했으며, 무장할 권리도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서 병사로 징집되지도 않았다. 자유민 문단에서 설명했듯 자유민과 경계가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농촌에서도 하류층인 계급들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 계급에서 악당을 뜻하는 단어 빌런(villain)이 나왔다.
  • 첸수알레스/첸주알렌(censuales/zensualen)
    독일어권에서 두드러진 계층으로, 주로 교회 공동체에 예속된 예속민으로서 십일조, 헌금, 지대를 바치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노동지대를 내지 않고 화폐지대만을 내었으며 자유로운 경영과 이주가 허용되었으나, 인신 상 예속을 나타내는 인두세상속세, 결혼세가 부과되었다. 10세기 말부터 출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무렵 유럽의 상업과 교역이 활성화되자 귀족에 예속되어 있던 사람들 중 일부가 귀족에게 돈을 지불하여 '이전 주군의 위령 미사를 바치는 조건' 하에 교회로 주군을 바꾼 것이다. 이들은 교회에 속한 장원 공동체에서 농업에 종사하기도 하였고, 혹은 도시로 이주하여 상공업에 종사하였다.[6]
  • 코터(cottars)/보르다르(bordars)
    다르게는 코티저(cottagers)라고도 불린다. 빌런보다 하위 계급. 토지를 가족만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준으로 최소한으로 보유했거나, 그조차 없어서 오직 공유지에만 의존하는, 노예를 제외하면 최하위 계급이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하층민들이 쫓겨났다고 표현할 때 그 쫓겨난 하층민들이 주로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4. 생활

상기했듯 일원적이고 명확한 계급이 아니라, 같은 공동체에서도 다양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을 퉁친 계층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이런 삶을 살았다고 말하기는 애매하다. 농노와 바로 같은 마을에 10~40% 가량의 자유민도 섞여있어서 더더욱 무엇이 농노의 삶이라고 일원적으로 말할 수 없고, 공식적으로 농노제가 해체된 근세에도 농촌 공동체의 삶은 별 차이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농노들도 바보가 아니라서, 자기가 자유민이라고 주장하며 권리를 행사하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세르부스, 리투스 등 '예속 계급'으로 간주되는 계급들은 9세기에는 이미 자유민들과 같은 마을에 살며 통혼해서 이리저리 피가 섞인지라, 법이 발전하지 않은 초기 봉건사회에서는 저런 이들을 예속 계급으로 간주해야하는지 자유민으로 간주해야하는지 혼란스러워했다. 영주는 자기 휘하의 예속민에 대해서 재판권을 가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념이었으나, 게르만족의 전통에는 자유민이면 자유민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재판에 의해 심판 받는다는 관습도 존재했고, 동시에 자유민은 왕이 보낸 재판관에 의해 심판 받을 권리가 있다는 관념도 존재했다. 이렇게 3중적인 사법에 대한 관념 속에서, 농노와 영주들은 항상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해보이는 쪽으로 일을 진행시키려고 했다. 한 수도원의 기록을 보면 '우리 장원 소속 농노들은 평소에는 자유민이라고 주장하다가 자기들 위험할 때만 농노라고 주장하며 보호를 요청한다' 고 투덜거린 기록도 있다.(...)

특히 일반적으로는 세속 영주들이 교회 영주보다 더 압제적이었다. 세속 영주들은 자신의 권한을 더 크게 행사하고 싶어했고, 농노 계층은 그걸 벗어나고 싶어했다. 교회는 그 자신이 영주이기도 했지만 영주들이 농노들을 압제할 때는 대체로는 농노들에게 더 유리한 판단을 들어주기도 했고, 교회나 수도원에 속한 장원은 부역이나 공납에 있어서도 세속 영주의 장원에 비해서는 나았다.

이를테면 세속 영주들은 자신의 장원에 속한 예속민들은 결혼의 자유가 없다고 주장하며, 타 장원의 예속민과 자기 장원의 예속민과 결혼하는 것도 막고자 했다. 서로 다른 장원의 예속민끼리 결혼하면 그 자식은 어디 속하는가 따지느라 피곤하니 나름 이유있는 항변이었지만, 교회는 모든 자연인은 결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7], 농노들은 자기들이 자유민이라고 주장하며 교회법 아래에서 결혼을 해서 영주는 농노들의 결혼에 간섭하기 어려웠다.

영주들은 농노들의 이동의 자유도 제한하고 싶어했으나, 노동력은 부족한데 땅은 많은 중세 유럽의 상황상 아쉬운 것은 항상 영주였다. 왜냐면 영주는 막대한 토지를 지녔으나 그걸 전부 경작할 노동력이 부족한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농노제 역시 토지를 매개로 한 계약이었기 때문에, 장원의 농노경작지에 대한 경작권을 포기하기만 하면 농노는 자유민이 될 자격이 있었다.

영주가 자기 소유지의 예속민들에 대해서 부역에 동원시킬 권리가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된 것이었다. 농노들은 영주(의 가족)에게 큰 일(ex: 직영지 수확)이 생기게 될 경우, 농노들은 부역으로서 강제로 그 작업에 참가해야만 했다.

중세 유럽에는 막대한 미개발 삼림이 존재했으며, 그런 땅은 영주의 소유이거나, 공유지이거나, 교회 소유였다. 교회는 자기 소유의 삼림에서 농노들이 벌채, 사냥, 채집하는 것을 방기했다. 특히 성경에서 자기 소유의 땅에서 빈민들이 이삭을 줍는 것을 막지 말란 규정이 나오기 때문에, 교회가 그 규정을 실천하는 셈치고 빈민들이 교회 토지를 자유롭게 쓰는 것을 내버려 뒀다.

반면 영주들의 사유 삼림은 매우 빡센 규정이 적용되었다. 게르만족의 전통에서는 사냥은 곧 명예로운 전사의 행위였으며, 사냥 후 고기를 나눠주는 행위 역시 부족장의 권한이었기 때문에, 감히 농노 따위가 숲에 들어가서 사냥하는 것은 영주 입장에서는 죽일 일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들판에서 족제비나 들쥐, 그물 같은 간단한 도구를 사용한 토끼 사냥 등은 밭을 망치는 유해 조수를 박멸하고 농노들의 소소한 부수입을 통해 불만을 부분 해소하는 차원에서 눈감아주거나 대놓고 허가했다. 제대로 된 사냥이 허가된 이들은 소수의 전문 사냥꾼으로, 대신 이들은 영주의 사냥터지기가 되어 사냥터 내 사냥감 개체 수 관리와 경비, 영주의 사냥 시 수행원 역할, 전시에는 평시 연마한 궁술 및 사격술을 활용한 정예 보병으로의 소집과 같은 의무를 졌다. 사냥은 못 했지만, 농노들이 자기 재산인 돼지, , 등을 기르고 도축하는 건 세금만 제때 내면 아무 제약이 없었다.

교회가 세속 영주보다 더 관대한 것은 무려 프랑스 혁명 무렵까지도 유지된 경향이지만, 중세의 교회는 나름대로 좀 비상식적인 면이 있기도 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 간의 평화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수도원 휘하 장원들은 자기네 예속민이 평시에 무기를 들고 다니지 못하게 규정하거나, 너무 사치스러운 무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처벌하기도 했던 것이다. 현대의 국가야 행정력 강화와 치안 유지를 위해 일반 시민의 무기 소지를 금지하지만, 결투 재판이 법적으로 인정될 정도로 폭력이 만연한 시대에 수도원들의 저런 규정은 세속 영주들에게는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중세의 전성기 무렵 경제가 발전하고 기계공학이 발전하면서 영주들도 그런 것들을 도입해서 자신들의 수입을 높이려했다. 특히 빵의 보급과 물레방앗간의 등장이 영주에게 짭짤한 수익이 되어줬다. 농민들이 곡식을 제분하여 빵으로 만들어 먹기 위해선 영주들이 직영 혹은 세금을 받고 영업 허가를 내어 준 방앗간과 제빵소를 유상으로 이용해야만 하였다. 이를 이용하지 않고 집 등에서 몰래 제분, 제빵을 하면 중벌에 처해졌다. 농촌에서는 빵을 구울 때 공동화덕에서 몇달에 한번, 심하면 1년에 한번 대량으로 굽기도 했다.

장원은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적 성격이 강했고 도시와의 교류는 매우 적었기 때문에, 공업제품은 거의 영주의 직영 작업장에서 생산되는 물품에 의존했다.

'영주는 농노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말해지는 것 때문에 농노는 병역의 의무를 안 졌을 거 같지만 실제론 그렇게 FM대로 잘 지켜지진 않았다. 위에서도 말했듯 병역의 의무가 없는 것이 원칙인 '법적인 비자유민' 즉 노예, 해방 노예 등과 병역의 의무가 있는 '법적인 자유민'인 콜로누스가 뒤섞이고 서로 통혼하는 바람에 '법적인 자유민'과 '법적인 비자유민'이 구별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기 때문에, 결국 재산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서 무장해서 군사력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이렇게 제약이 많은 삶이나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니 살 수는 있게 해주었다. 후술하지만 12세기까지는 유럽의 행정능력은 영 형편없어서, 영주가 영지민들을 지나치게 착취하면 농노들은 그냥 도망쳤다. 영주 입장에서도 지나친 수탈로 농노들이 몰락하거나 반항하는 것은 제살 깎아먹기라서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게 해야 했다. 농민 반란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지고, 적어도 법적으로는 농노제가 철폐된 시대인 14세기 이후에나 잦아지기 시작한다.

5. 벗어나는 방법

사실 12세기까지는 영주에 대한 농노의 예속은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일단 인구 밀도가 너무 낮은 것이 궁극적인 원인인데, 봉건 영주들의 행정능력 자체가 미약해서 영지 내부 관리도 철저하지 못했고, 농노 가족이 야반도주라도 해서 텅텅 빈 땅에 정착해서 살면 못 잡는게 다반사였다.

게다가 농노의 예속은 기본적으로 토지소유에 기반한 것이다. 농노가 영주의 토지를 경작하는 동시에 자기소유토지가 따로 있는 상태라면 깔끔하게 영주 토지에 대한 경작과 영주의 보호 받기를 포기하고 자유민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자기 토지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여러 영주의 토지를 전전하며 경작해야하는 하층민도 많았는데, 이들은 도주가 아니면 예속 신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농노는 사유재산권이 존재하는지라 자기가 농사를 잘 짓고 거래를 잘해서 이윤을 충분히 남긴다면 축적한 자본으로써 자영농이 되거나 거창하게 대토지를 빌리고 다른 농업노동자를 부리는 차지농이 되기도 하였으며, 아예 농사에서 손을 털고 도시로 나아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도시의 관리가 되어 출세할 수도 있었다.[8]

11세기 들어서는 야만족으로 인한 혼란도 잦아들고, 비교적 평화로워져 인구가 늘자 토지 개간이 활발해진다. 그에 따라 영주의 농노경작지에 대한 소유권을 깔끔히 포기하고 새 토지를 개간하거나, 더 좋은 조건을 내거는 영주의 휘하로 옮겨가는 식으로 해방되기도 했다.

13세기 들어서는 서유럽의 대부분의 토지가 개간되어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영주의 행정적 역량도 그에 따라 강화됨에 따라 농노에 대한 예속이 강화되었고, 이런 강화된 영주 권력과 농노제를 재판(再版) 농노제, 재판 영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차부제나 부제, 사제 서품을 받고 성직자가 되면 영주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저절로 농노의 신분에서 해방된다.

부모가 농노라도 혼외관계에서 생긴 사생아임을 증명하면 농노 신분에서 해방된다. 법이론상으로 모든 인간의 자연 상태는 자유인이며, 상속권이 없는 사생아는 부모가 영주에게 빚진 의무 역시 상속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생아도 여러가지 신분적인 제약이 있고, 상속권에 매우 심한 제약을 받기 때문에 일장일단이 있지만, 실제로 농노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법정에서 스스로 사생아임을 주장한 사례들이 있었다.

북프랑스 보베지 지방의 관습법에서는 농노가 자신의 영주와 결혼한 경우 저절로 농노 신분에서 해방된 것으로 여겼다.

독일 같은 경우 발트해 동쪽의 식민지 개척(동방식민운동)으로 인해 일손이 많이 필요하자 농민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자유로운 신분을 약속하고 사람들을 끌어모으기도 했다. 유명한 하멜른피리부는 사나이 이야기도 젊은이들이 대규모로 동부 식민지로 떠난 것을 모티브로 한다는 설이 있다.

6. 중세 이후

6.1. 쇠퇴한 국가들

주로 서유럽 국가들이 이에 해당된다. 장원 조직의 쇠퇴와 부역 노동의 완화는 이미 12세기에 서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시작되었으며, 농노의 해방은 13세기 중반부터 진행되다가 14세기 동안 완료되었다.[9] 농노제가 쇠퇴한 원인으로 생산력 증대로 인한 무역과 상업의 발달, 관료제 발달, 흑사병 등을 꼽을 수 있다.

중세 전성기에 들어 무역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폐쇄적인 고전장원경제 하에서보다는 상대적으로 계층 이동의 가능성이 높아졌고, 화폐경제의 발달로 장원 내에서도 각종 부역을 세금으로 대체하게 되면서 농노와 자유소작인의 실질적인 경계가 모호해졌다. 1300년경 잉글랜드에서는 농노들에게 강제로 부과된 노역이 영주 직영지에서 행해진 노동의 8%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10]

12세기부터는 국왕의 사법권이 확대되고 법률이 체계화되었다. 결혼에 관해서는 교회법이 게르만법과 로마법의 상위에 있는 최고법으로 인정되었는데, 교회법은 영주가 동의하지 않아도 농노가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3세기 잉글랜드에서 자유민과 농노 사이의 결혼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자유민과 예속민의 이분법으로 사회적 신분을 나누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이런 경향이 지속된 결과, 13세기경의 소송 사례들을 보면 법적으로는 농노 신분임에도 스스로를 예속민이 아닌 자유민으로 여기며 자신에게 세금 이외에는 어떠한 의무도 없다고 주장하는 농민들이 많이 나타난다. 결국 14세기 경부터 잉글랜드에서 농노제는 거의 사문화되었으며, 프랑스에서는 1318년 필리프 5세의 칙령으로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자연법(jus naturale)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유인으로 태어나야 한다. 하지만 짐의 왕국에서 오랜 세월 유지된 어떤 관례와 관습들에 의해 (중략) 그리고 아마도 그들의 선조들의 악행에 의해, 인민들 중 많은 이들이 노예의 굴레나 그밖에 다양한 예속 상태에 빠져 있으며, 짐의 왕국의 이름이 자유인들(Franks)의 왕국이라는 점에서 이는 짐을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 ... 짐은 이 노예상태가 자유로 바뀌어야 하며, 평생 그랬건, 오랫동안 그래왔건, 아니면 최근에 그렇게 되었건 간에 혼인이나 거주에 의해 예속의 상태에 빠졌거나 빠질 수 있는 사람들이 알맞은 조건으로 자유를 얻어야 한다고 명령했다.
필리프 5세의 1318년 칙령

이렇게 해체된 농노제의 자리는 소작제로 대체되었다. 흑사병 대유행 직후 농촌 질서가 재편되던 14세기 중반, 북이탈리아와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1~5년 정도의 소작 계약이 유행했다.

하지만 불법이든 편법이든 가리지 않고 술수를 써서 영주가 농민을 부역에 동원하는 경우는 여전히 많이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자유소작계약인데 관습적인 임금에 훨씬 못 미치는 임금을 주고 사실상 농노처럼 부린다든가. 특히 샹파뉴와 부르고뉴 등 프랑스의 동부 지방에서는 이런 유사 농노제가 프랑스 혁명 전까지 존속되었다. 그리고 농노제 폐지령이 프랑스에서 내려지기는 했으나 상술한 유사 농노제의 존재, 지주에 대한 봉건적인 법적 권리와 장원제의 완전한 폐지가 프랑스 혁명 이후인 점을 들어 프랑스에서의 농노제 폐지는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봐야 한다는 시각이 많다.[11][12]

14세기 중반에는 흑사병으로 절대인구 자체가 감소하다보니 노동력의 가치가 상승해서 상대적으로 농민들이 유리해졌다. 이에 따라 조건이 불만족스러우면 도주하거나 이주해버렸으며, 영주는 이게 싫으면 부역과 세금을 경감하는 등 유인책을 펼쳐야 했다.

물론 아니꼬운 높으신 분들은 노동자 조례[13], 노동자법 등의 법령으로 규제하려 시도했지만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1381년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와트 타일러의 난은 비록 무력으로 진압되었지만, 노동조례를 폐지하고 모든 부역을 세금으로 대체하라는 반란군의 요구는 결국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수용되었다.

잉글랜드에서 농노들이 진 의무와 제약은 중세 후기와 근대 초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경감되었으나, 그러는 동안에도 농노제의 공식적인 폐지는 없었다. 13세기의 농노소작지는 농노의 의지대로 양도하거나 매매할 수 있는 재산에 가까웠고, 지역 관습법에 의해 이러한 권리를 보장받았지만, 이론상으로는 영주의 소유였으며 농노들이 가진 권리의 정도는 지역 마다(대표적으로 상업이 발전한 동부와 장원제도의 영향이 남아있는 서부) 차이가 있었다. 1300년경에 보통법의 기준에서 농노가 아닌 자유민으로 분류되는 농민 인구가 거의 절반 또는 과반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14세기의 농노들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증명하는 등본을 발부받았다. 15세기에 과거의 농노소작지의 후신인 등본보유권 토지(copyhold land)는 자유소작지보다 비싼 지대를 내야 하고 차지취득세를 징수할 권리 등이 영주에게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확실히 소작인의 재산이 되어 있었고, 등본보유권 소작인들도 국왕 법정에 자신의 영주를 고소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농노제는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1922년 재산법(Law of Property Act 1922)으로 등본보유권이 폐지되면서 농노제의 옛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6.2. 유지되거나 강화된 국가들

동유럽서유럽/남유럽과 달리 농노제가 오히려 강화되었다. 독일의 동방식민운동으로 개척된 북동부나, 그보다 동쪽은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의 수가 압도적이어서 사회적 변동도 적었고, 도시의 발달도 미약해서 농민들의 억압이 심해져만 갔다.[14] 러시아 제국같은 경우는 아예 농노들을 도박 판돈으로 사용하는 지주나 귀족이 있었을 정도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 일단 절대적인 자유민의 수 자체가 비교적 적었다.[15] 게다가 상당 기간 동안 정세상 자유민의 수가 늘어나기에 좋지 않았다. 오늘날 크림 반도에 있는 크림 칸국이 이런 자유민들을 노예로 마구 잡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농노로서의 삶도 결코 바람직하진 못했지만 그나마 최소한의 보호는 받을 수 있어서 불만이 덜했다.
  • 전통적으로 동유럽은 타 유럽지역에 곡물 수출을 해왔는데, 이것은 동유럽 쪽에는 상업자본이 발달하는 기회가 상실되고,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에게 경제적 주도권이 주어지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 위 두가지 이유로, 도시들이 발달하지 못했다. 또 귀족들은 도시들에 끊임없이 견제를 해서 발달을 방해했다. 한자동맹으로 대표되는 해안 도시들은 경쟁에서 패배하여 쇠퇴했다.[16]
  • 반면 서유럽은 동유럽에서 유입되는 곡물로 인해 곡물가가 하락했고, 서유럽의 토지 귀족들은 장원의 경제적 가치가 하락했지만 도시들은 귀족에 대한 식량 의존도가 줄어들었다. 이것은 서유럽의 도시가 발전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동유럽을 '서유럽 최초의 식민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13~15세기 이후 서유럽은 도시와 왕이 결탁해서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과 도시 경제와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하지만, 동유럽은 강력한 귀족 세력이 사회 주도권을 계속 가져 왕권의 발전도 미약하고 상공업과 자본주의 발전에서도 서유럽에 뒤쳐지게 된다.

프로이센의 경우 프리드리히 대왕이 1772년에 농노의 단독 매각을 금지시키는 등 농노제를 완화시키려는 움직임이 18세기 중후반에 있었지만 융커들의 대토지 경작[17]에는 농노가 필수적이다 보니 농노제가 강하게 존속되었다.[18][19]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대패한 후 내부적으로 개혁에 대한 요구가 강해져 결국 1807년에 농노제를 폐지하였다.[20][21] 이 개혁은 나사우 공국이나 작센 왕국 등의 국가들에서 농노제가 폐지되는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러시아에서는 19세기까지 농노제가 존속했으며[22] 장원 제조장이나 우랄을 중심으로 하는 제철소, 여러 공방과 공장에 농노들을 보내 기업이 농노를 부리는 변질된 형태의 공장 농노제도 생겨났다. 이후, 러시아의 경제가 성장하고 산업 혁명의 영향이 강해지면서부터는 향촌 지역의 농노들이 농한기에 도시 지역의 공장으로 가서 몇 달간 일하고 오는 일이 성행하게 되었다.[23]

일본에서는 폐번치현 이후 농노제가 폐지되었으나 다이묘나 번주가 아닌 지주, 귀족들은 건재했기에 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GHQ의 농지개혁 이전까지 시골의 농민들의 지위는 농노에 가까웠다.
1960년대 이후 실증적 연구에서 초기 근대 동유럽 및 중유럽 농촌 경제 발전에 대해 매우 차별화된 그림이 나타났으며, 이는 동유럽의 구조적, 경제적 후진성의 이미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 영지 영주권(demesne lordship)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여겨지는 시장 혐오적이고 전통적인 '농민' 경제와 사회의 이미지는 소작 경제 및 농촌 사회 구조 발전에 대한 실증 연구와 일치하지 않는다. 경제 발전 측면에서 종합적인 비교가 평가를 기다리고 있지만 초기 근대 동유럽 및 중부유럽에서는 경제적, 사회적 측면에서 전반적인 침체가 없었다는 결론이 타당해 보인다. 영지 영주권은 진보적인 제도적 조직은 아니었지만 농업 혁신, 사회 구조적 변화, 산업화 이전 발전 및 상업화를 수용하고 적응하고 통합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하고 유연했다. 초기 근대 서유럽 농촌 사회에 대한 맬서스-리카르도적 해석은 1980년대 초반부터 비판을 받아왔다. 동유럽에서도 유지되어서는 안된다.
Markus Cerman, Villagers and Lords in Eastern Europe (Red Globe Press), 133-134.
다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도식화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당장 '재판 농노제'라는 용어를 사용한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은 엘베강을 '사회경제적 경계선'으로 설정하고 '자유롭고 자본주의적인 서유럽'과 '후진적이고 봉건적인 동유럽'을 대비했다. 서유럽은 일찍이 자본주의가 발전했으나 반대로 동유럽은 재판 농노제가 형성되어 오히려 퇴보 혹은 정체했다는 것이다. 독일의 구츠헤르샤프트(Gutsherrschaft), 러시아 농노제(Крепостничество)는 각각 프로이센 절대주의, 군국주의와 러시아 전제정의 사회경제적 기반으로 인식되었다.[24] "러시아 농민들이 농민공동체를 중심으로 살았기에 집단주의적이었고 사유재산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으며, 시장진출을 꺼렸다"는 식의 인식들은 19세기에 인민주의자들을 중심으로[25] 정치적, 이념적으로 만들어진 '농민 신화'에 가깝다는 것이다.

7. 유사 개념

7.1. 소작/차지농

본인 소유의 토지가 아니라 빌린 것을 자유롭게 짓는다는 점에서 소작이나 차지농과 흔히 헷갈리곤 한다. 사실 화폐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농노제에서 소작제로 서서히 변환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제로 경계가 흐릿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고대 로마 말기의 콜로누스 제도는 원래 소작제의 일종이지만 중세 초에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농노제로 대체되었기에 그 정체성이나 농노제와의 연속성을 놓고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다만, 농노제는 자율 경영을 보장하는 대신에 노동력을 속박하기 위하여 게르만의 관습법인 종사제에 기반한 종속 관계가 섞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농노제에서 소작제로의 전환은 화폐 경제의 발달만이 아니라 자유민과 자유민의 계약에 기반하는 로마 보편법의 발전도 병행되어야 했다. 소작은 어느 때든 한쪽에서 계약 관계를 폐지한다고 선언하면 폐지가 가능하다. 반면, 농노제는 종속 관계가 세습되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영주 측이 농노에 대한 사법적 관할권을 지닌다고 간주되었다. 지주가 소작농에게 잡일을 시키는 것은 그냥 갑질이지만, 영주는 농노에게서 부역이나 세금을 물리는 것이 합법이었다.

물론 대지주-소작농 관계가 실제로 저렇게 상호 신의성실한 관계인 경우는 비서구와 서구를 막론하고 별로 없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 후기 소작농 생애나 일제 시대 지주들의 만행을 보면, 지주들이 소작민에 대한 만행을 부리는게 영주와 별 차이 없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농사란 게 한 번 시작하면 수확할 때까지 결과가 안 나오는 것이다보니 쫓겨나는 쪽만 극심한 손해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공산주의자들이 소작제를 봉건적인 제도라고 비난하며 토지개혁을 추구했을까.

이탈리아 지역, 특히 교황령에서는 고대 로마의 제도와 법적 규칙이 계속 유지되어서, 농노제가 아닌 고대 로마식 소작제도가 8세기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차지농은 맥락이나 사용자에 따라서는 소작농과 동의어로 취급되기도 하나, 구분하는 경우 자급자족 및 가계 경영 수준을 벗어나 본격적인 자본주의적 농업경영인으로서 토지를 임대하고 노동자를 고용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가를 가리킨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아예 법인 차원에서 농사를 짓는 기업농이 된다. 다만, 이러한 농업경영인으로서 차지농은 19세기 무렵 이윤 감소로 말미암아 다시 소농으로 회귀하거나 업종을 변경하면서 사라졌다.

7.2. 노예/노비

중세 당시 서유럽의 기준으로는, 농노는 노예와는 구분되는 계층으로 여겨졌고 노예와는 몇몇 권리에서 차이가 있기도 했다. 일반적으로는 외양상 두드러지는 법적 예속을 놓고서 구별하려는 경우가 많다.
  • 농노는 개인 주거지를 소유할 수 있다. 다만 주거지는 영주의 장원 내부로 제한한다.
  • 농노는 개인적인 재산을 소유할 수 있다.
  • 영주는 농노만을 단독으로 매각할 수 없다.
  • 농노는 토지에서 나오는 작물을 소유할 수 있다.
  • 농노는 수확물 등 각종 물품을 영주에게 일부를 바치므로 납세의무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노예는 모든 생산품을 밥 빼고 주인에게 뜯기므로 납세로 볼 만한 의무가 없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어디까지나 중세 서유럽의 기준으로, 근세 러시아와 16세기 이전의 일본은 농노를 매매하는 것이 가능하거나 반대로 조선에서는 노비가 결혼이 가능하며 토지를 보유할 수 있는 등 예속인들의 권리와 의무는 전세계 전지역에서 매우 상이했다. 심지어 농노의 결혼에 대한 권리는 상기했듯 당대에도 논쟁의 대상이어서 교회와 영주가 대립하기도 했다.

페르시아나 그 법제의 영향을 받은 나라(오스만 튀르크 등)의 경우 총독(사트라프)이나 신하도 이론상으로는 왕이나 황제의 노예였지만, 그들은 실제로는 매우 강력한 권력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비교사가 발전한 현대에는 농노제 자체도 넓은 의미에서 노예제적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반대 관점에서는 넓은 권리를 가진 조선의 노비제가 노예보다는 농노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한다. 학술적으로 농노와 노예를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요소는 사유재산권과 경영권의 유무이다. 예컨대 러시아의 농노는 거래의 대상이 된다고는 하나, 후대로 갈수록 법적인 인신 예속은 흔적이나 다름 없어져서 농노 신분으로도 부농이 되거나 자본가로 변모하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조선의 노비도 재산권을 지닌다는 점에서 노예보다는 농노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7.3. 노동자

농노와 노동자를 구분하는 부분은 무엇보다도 "생산수단"의 보유 여부이다. 농노는 일단은 생산수단인 토지를 빌려서라도 자기가 보유하여 이를 경영할 수 있지만, 노동자는 그저 자신의 노동력만을 제공할 뿐 생산수단 자체는 사업가의 소유라는 점이 큰 차이점이다. 따라서 농노의 수익은 지주에게 지대를 내고 남은 이윤인 것이고,[26] 노동자의 수익은 사업가에게 노동력을 주고서 받은 임금이다.

근대 노동자들은 중세 농노들보다 생활이 더 팍팍한 경우가 많았는데, 산업 혁명 시기 농노의 자리를 메꾼 노동자들은 이전까지 있던 각종 관습(법)과 중세시대 법이 공장주를 비롯한 사용자들이 거추장스럽게 여겨 대부분 폐지해버렸다. 공장제 수공업을 운영할 때는 노동자들이 생산품 일부를 가져가서 따로 팔 수 있는 관습이 있었으나 산업혁명으로 공장제 대규모 기계공업시대에 이르자 공장주들은 이를 절도로 간주하고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근대 초기 노동자들은 농노보다도 대우가 나빠졌다. 이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

8. 기타

오래된 루머인 '초야권'도 실제로는 '농노들은 결혼하려면 영주에게 결혼세를 내서 허락받고 해야 한다' 정도의 규칙이 부풀려진 헛소문이다. 예를 들면 "결혼세로 은화 10개를 내거나 첫날밤을 영주에게 바쳐야 한다." 같은 식이다. 마누라 뺏기기 싫으면 돈내라는 얘기인데, 누가 결혼세 아낀다고 첫날밤을 바칠까.. 즉 명목상의 규칙일 뿐이었다. 초야권 빌미로 신부들을 희롱하다가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킨 사례가 유일한 초야권 기록이다. 게다가 연구가 더 진행되면서, 이런 식의 명목상의 규칙조차 존재했는지도 의문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초야권 문서 참조.

중세의 농노들은 1년에 150시간 정도 일했는데, 현재와 비교했을 때 매우 적은 시간이다. 왜냐하면 가톨릭 성자의 축일은 모두 휴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루 치의 일을 이틀에 걸쳐서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토머스 칼라일과 같은 위대한 학자들은 근대의 자유시장주의를 거부하고 중세의 봉건제로의 회귀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참고로 유럽처럼 봉건제 국가였던 에도 시대 일본 역시 농노제 사회와 비슷한 부분이 많이 있었다. 에도 시대 일본의 농민은 자유로운 이주가 불가능했고, 쌀로 세금을 납부하고 고구마감자를 많이 먹었다. 링크 또한 조선 시대 노비의 경우도 노예보다는 농노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보는 편이다.[27] 이영훈 교수의 반박 조선의 노비제 숙의

9. 같이 보기



[1] 여담으로 조선시대 노비도 사유재산 소유가 가능했다.[2] 레닌의 경우 러시아 농노제를 예로 들며 노예제와 농노제, 노예와 농노는 명목상으로는 다른 개념이지만 실질적으로 착취적이라는 점에서 같다고 지적했다. 이는 초창기 소련 역사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졌다.[프랑스어] Comment que pluseur estat de gens soient maintenant,
voirs est qu’au commencement tuit furent franc et d’une meisme franchise,
car chascuns set que nous descendismes tuit d’un pere et d’une mere.

Mes quant li pueples commença a croistre et guerres et mautalent furent commencié par orgeuil et par envie, qui plus regnoit lors et fet encore que mestiers ne fust,
la communetés du pueple, cil qui avoient talent de vivre en pes, regarderent qu’il ne pourroient vivre en pes tant comme chascuns cuideroit ester aussi grans sires l’uns comme l’autres: si eslurent roi et le firent seigneur d’aus et li donnerent le pouoir d’aus justicier de leur mesfés, de fere commandemens et establissemens seur aus;
et pour ce qu’il peust le pueple garantir contre les anemis et les mauvès justiciers, il regarderent entre aus ceus qui estoit plus bel, plus fort et plus sage, et leur donnerent seignourie seur aus en tel maniere qu’il aidassent a aus tenir en pes et qu’il aideroit au roi,
et seroient si sougiet pour aus aidier a garantir.

Et de ceus sont venu cil que l'en apele gentius hommes, et des autres qui ainsi les eslurent sont venucil qui sont franc sans gentillece.

Et li serf si sont venu par moût de manieres d'aquiaicions.
Car li aucun sont venu par estre pris de guerre: si donnoient servitude seur aus et seur leur oirs pour raençon ou pour issir de prison;
et li autre sont venu parce qu'il se vendoient, ou par povrete, ou par convoitise d'avoir;
et li autre sont venu quant li rois avoit a fere et il aloit pour combatre contre estrange gent et il commandoit que tuit cil qui pourroieot armes porter li alassent aidier, et qui demourroit, il et si oir seroient de serve condicion;
et li autre sont venu de eus qui s'en fuioient des batailles;
et li aucun sont venu de ceus qui se donnerent as sains et as saintes par devocion puis que la fois crestienne commenca a venir;
et li autre sont venu parce qu'il n'ont eu pouoir d'aus defendre des seigneurs qui a tort et par force les ont atres a servitude.

Et par quelconques manieres qu'il soient venus nous pouons entendre que grant aumosne fet li sires qui les oste de servitude et les met en franchise,
car c'est grans maus guant nus crestiens est de serve condicion.
[4] 옛 문서이기 때문에 당시 철자법대로 적혀 있으므로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5] 두 국가의 체급이 뭐낙 커서 상대적으로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이지만 이는 전근대의 농민, 농노 연구의 패러다임의 변화이다. 혁명, 계급투쟁, 착취관계를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관에 기반을 둔 전통적 시각(특히 이쪽의 영향을 크게 받은 독일사와 러시아사)에서는 농노제를 하층민인 농민들이 착취당하는 봉건적이고 후진적인 제도 혹은 사회양상으로 여겼는데, 전근대의 러시아, 신성로마제국 같은 거대 국가에서 국가나 소수의 귀족이 절대다수의 농민을 완전히 통제하고 착취할 수 있었다면 그건 후진적인게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농노제 자체가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제도와 관행의 집합체로 규정하고 농노제 사회의 유연성과 내구성, 협력관계나 농노들의 역량을 더 강조하는 추세이다.[6] 원래 중세 도시는 주교가 도시영주인 경우가 일반적이었기에 도시로 이주한 첸수알레스도 여전히 교회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은 미니스테리알과도 비슷하다.[7] 이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결혼을 신성하게 여기기 때문이다.[8] 의외로 중세 도시의 구성원 다수는 이렇게 도시에 정착한 해방농노거나 최소한의 예속만 남은 농노였으며, 개중에는 도시영주인 주교(주교후)의 가신이 되어 관료귀족인 미니스테리알레스가 되기도 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고대 도시부터 터를 잡고 살아오던 자유민 시민들은 소수의 상류층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관해서는 자유도시, 코뮌 등 관련 문서를 참고할 것.[9] Karl Gunnar Person, <유럽 경제사>[10] Christopher Dyer, An Age of Transition?: Economy and Society in England in the Later Middle Ages, 90.[11] 출처: Jean Brissaud, 2001, A History of French Public Law, Beard books, p. 327[12] 농노의 범위를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하냐에 대한 기준에 학자마다 의견이 달라 프랑스 혁명 이전의 프랑스에서 농노가 어느 정도 있었는지에 대해선 이견이 많으나 L.C.A. Knowles(2013)은 자신의 저서 Economic Development in the Nineteenth Century: France, Germany, Russia and the United States에서 프랑스 혁명기 이전의 프랑스에서 150만명 정도가 농노 상태였다고 주장했다.[13] 흑사병이 한창 유행한 1349년 6월 제정된 영국 왕령. 품삯과 노동조건을 흑사병 유행 이전으로 동결하려 하였다.[14] 예를 들면 폴란드 농노의 경우 14세기에는 한 가구에서 일주일에 하루만 노동력을 제공하면 됐지만 의무가 계속 늘어나 18세기에는 한 가구에서 영주에게 일주일에 6일을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물론 가구 구성원들이 다 6일씩 노동력을 제공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었고 가구 구성원 A가 2일, B가 3일, C가 1일 이런 식으로 6일을 채우는 식이었다. 그래도 14세기에 비해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되는 노동력이 6배가 된 셈이니 농노들 입장에서는 가혹한 의무였다.[15] 논란이 있는 가설로 동방식민운동으로 유럽에 편입된 이래로 동유럽의 대부분의 민중인 슬라브족/발트족은 거의 다 농노로 편입되었고, 극히 일부 자유민과 귀족들은 거의 다 서유럽에서 유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다른 의견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같은 경우는 폴란드계와 리투아니아계, 루스계가 귀족의 대부분을 이루었고 독일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폴란드계 귀족에 동화되었다. 독일계는 오히려 상인과 기술자로서 활약했다.[16] 물론 동유럽이 처음부터 도시가 발달하지 않은건 아니다. 중세 초반만 해도 비잔틴 제국과 교역하면서 도시가 많았지만 십자군 전쟁으로 무역로가 바뀌고 몽골의 침공으로 초토화당하면서 동유럽의 도시들은 몰락하고 만다.[17] 1800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 중 2%를 차지하는 융커들이 전체 토지의 48%를 소유하고 있었다.[18] S. A. Eddie(2013)에 따르면 1800년 기준으로 농촌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subject peasant였다. 이들의 신분은 자녀들에게 세습되었으며 토지에 종속되어져 있었고 거주의 자유 등 많은 권리들이 제한되어져 있었다. 결혼도 토지 소유주의 허가를 필요로 했으며 도망치다가 잡혔을시 다시 토지 소유주에게로 반환되었다. 이런 신세에서 벗어나려면 많은 금전적 대가를 지불해야만 됐다.[19] 그리고 어차피 농노에서 해방이 되어도 자신의 소유한 농지가 없다 보니 다시 융커의 농노가 될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였다.[20] 출처: S. A. Eddie, 2013, "Freedom's Price: Serfdom, Subjection, and Reform in Prussia, 1648-1848", OUP Oxford[21] 물론 토지의 다수를 융커들이 소유하고 있는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다보니 해방된 농노들이 자영농이 되는 것은 힘들었고 융커들이 소유한 대농장의 소작농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였다.[22] 사실 러시아만 이런게 아니라 중유럽과 동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18~19세기에 농노제가 소멸했다. 소멸 시기를 보면 왈라키아 공국의 경우 1746년, 몰다비아 공국은 1749년, 보헤미아 왕국은 1781년(완전한 폐지는 1848년), 바덴 선제후국은 1783년, 바르샤바 공작령과 프로이센 왕국은 1807년, 바이에른 왕국은 1808년, 나사우 공국은 1812년, 에스토니아는 1816년, 하노버 왕국은 1831년, 작센 왕국은 1832년, 오스트리아 제국은 1848년, 불가리아는 1858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1791년에 농노제가 소멸, 러시아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다시 부활했다가 1864년에 완전히 소멸했다. 그리고 바타비아 공화국, 스페인 왕국처럼 18~19세기에 농노제가 소멸한 서유럽 국가들도 있다. 바타비아 공화국의 경우 1798년, 스페인 왕국은 1812년에 농노제가 소멸됐다.[23] 유사한 사례로 남북 전쟁 이전 미국에서는 노예를 농장이 아니라 공장에 보내는 일이 잦았다.[24] 중세 러시아는 좀 애매한게 여러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심지어 반공주의적 학자들에게도 아예 아시아적 생산양식(Asiatische Produktionsweise)을 가진 동방적 전제주의의 일종으로 여겨졌다. 이 관점에 따르면 러시아는 폴란드 같은 동유럽 국가라기보단 중국, 오스만, 서로마, 동로마 같은 아시아 국가에 더 가깝다 (여기서의 아시아는 지역 구분이 아니다). 원칙적으로 농노제가 귀족정인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국가를 지배하는 귀족이 토지소유를 바탕으로 농노를 예속시키는 것이라면, 전제정인 러시아에서는 국가에 통제당하는 귀족이 봉직의무를 수행하는 대가로 농노에 대한 일정 권리를 허용받는 것이다. 때문에 반공주의적 학자들로부터 지나친 국가통제가 사적 이익 추구를 가로막아 발전이 정체되었다는 주장을 받기도 했다. 즉 반공주의자들의 소련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과 일맥상통하며 실제로 전제정을 공산주의의 모체라고 보았다. 물론 전근대라서 정치제도나 원칙이 존재하더라도 실제 얼마나 이행되었는지는 별개의 문제고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적 사관은 지양되는 추세이지만 결국 원칙적, 명목상으로는 농노제의 개념이 정반대였고 대중적 인식에서 흔히 보이는 러시아의 폴란드식 농노제는 전제정의 붕괴와 서구화의 영향으로 탄생한 것에 가깝다. 때문에 이 '농노제'의 주체를 차르(국가)로 보느냐 아니면 귀족(유산계급)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설명이 달라지며 바로 그 제정 러시아의 정치 엘리트들도 이 두 가지 농노제를 구분했다.[25] 이들은 러시아가 농민공동체를 통해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 단계로 이행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심지어 그 칼 마르크스조차도 말년에는 러시아 농민공동체에 주목했다.[26] 보통 토지를 빌리면서 농지만 빌리는 게 아니라 여러 도구나 방앗간 등 시설물도 빌려서 쓰므로 자본도 빌렸다고 볼 수 있으므로, 지대에 이자가 포함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27] 실제로 위의 노예와의 차이점 항목을 보면 농노는 노예와 달리 법적으로 가족을 꾸릴 수 있었고 개인적인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으며 주거지를 소유할 수 있었고 토지에서 나오는 작물을 소유할 수 있고 납세라고 볼 만한 의무가 있었는데 이건 노비도 해당되는 얘기이다. 다만 농노와 달리 노비는 법적으로 단독으로 매각할 수 있기는 했는데 노비 매매는 관아의 승인을 받아야 되는 일이였고 사회적으로 노비 매매를 상스러운 짓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실제로 노비가 매매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노비를 법적으로 단독으로 매각할 수 있다는 점이 비교사학적으로 노비와 농노 두 계층을 구분 짓는 유의미한 기준이 된다고 확정하기는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