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23:39:26

인두세

1. 개요2. 반발 3. 사례
3.1. 로마 제국의 인두세3.2. 이슬람교지즈야3.3. 오키나와의 인두세3.4. 식민제국의 인두세3.5. 오늘날
4. 기타

1. 개요

인두세(, poll tax)는 세금을 징세하는 방법 중 하나로 사람의 머릿수에 맞추어 내는 세금을 말한다.

복잡한 조사 없이 인간의 존재 자체만으로 징세할 수 있으므로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가장 원시적인 조세수입의 원천이기도 했다.

2. 반발

납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되어 형평성에 크게 어긋나는 불합리한 세금이기도 하다. 당장 재벌 회장과 월 200만원을 버는 일반 서민이 똑같이 매달 100만원을 낸다고 생각해 보자. 재벌 회장에게 100만원은 껌값 보다도 못한 돈이겠지만, 월 200만원을 버는 서민에게 100만원은 월급의 절반이다. 현대적인 세제는 소득세가 적용되어 기본적으로 부자에게 더 높은 비율의 세금을 징수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낮은 비율의 세금을 징수하는 누진세제를 원칙으로 하는데, 인두세는 이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불합리한 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근대 이전의 조세, 혹은 소작료는 작황에 따라 조정되는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통이었다. 즉 흉년에는 조세가 감면, 혹은 면제되거나 심각한 경우에는 구휼 등의 지원이 나오는 형태로 어떻게든 최저한의 생계를 맞춰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안되면 사람들이 죽창을 깎게 된다.)[1] 그러한 변동 세율이 일반적이던 시절, 정액으로 징수하는 인두세는 특히나 악평이 자자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심각한 불황, 혹은 흉작시에는 이 인두세가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는 요인이 되었기에 더더욱 그렇다.

이러다 보니 역사적으로 볼 때도 인두세는 많은 조세저항을 불러온 세제이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1377년 백년전쟁의 전비 조달을 위해 의회가 14세 이상 모든 남녀에게 인두세를, 1379년 재산비례세를, 이것도 신통찮자 1380년 1377년의 3배를 부과하는 바람에 조세저항과 납세 회피가 만연해져 납부 조사위원들을 파견하였다가 와트 타일러의 난이라는 크리티컬을 맞기도 했고, 무굴 제국에서는 악바르 대제가 악으로 깡으로 키워 놓은 제국을 아우랑제브 황제가 전비 조달을 위해 비 이슬람교도들에게 부과하던 인두세를 부활시킴으로써 반란의 연쇄작용을 일으켜 제국을 쇠퇴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학적으로 봤을 때, 인두세는 사중손실이 전혀 발생하지 않아 단기적인 효율성 측면에서는 가장 완벽한 조세로 평가된다. 사중손실의 발생은 대체효과, 즉 세금을 부과했을 때 납세자의 행동 선택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인데 사람에게 부과되는 인두세의 특성 상 세금 내기 싫다고 자살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실제로 사람을 죽여서 인두세를 회피한 적도 있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게 되면서 효율성이 깨지게 된다.[2]

인두세가 매우 불합리하긴 해도 고대나 중세에는 그나마 최선의 징세 방식이었다. 누진세제 중 대표적인 요소인 소득세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소득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데 당시의 행정력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 당장 한국만 하더라도 금융실명제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소득 판별에 많은 허점이 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서술한 대로 근대 이전에는 작황에 따라 세율이 변동되는 경우가 흔했는데 이건 조세 수입이 들쭉날쭉하고 예측이 안된다는 뜻이다. 국가 입장에서 보면 매년 예측 가능한 세수를 얻을 수 있는 인두세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소득세라는 개념 자체가 인두세의 불합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나온 투쟁의 결과물이며, 이전에도 인두세에서 소득세로의 전환을 꾀하기 위해 유럽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많은 노력을 해왔다. 소득 자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니 집의 크기, 창문 숫자, 고용인 숫자, 커튼 길이 등에 따라 세금을 간접적으로나마 다르게 매긴 게 대표적인 예이다. 결론을 내자면 기술의 발전 이전까지 현대의 누진세를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 인두세가 오랜 기간 유지되어온 것이다.

3. 사례

3.1. 로마 제국의 인두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세제 개혁으로 인두세가 도입되었다. 아직 식자율이 낮고 관료제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주민들의 소득을 일일이 다 조사해서 국가에서 필요한 만큼의 세금을 부과하려면, 징수 과정에서 드는 비용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다는 판단 하에서 이루어진 세제 개혁이다. 이 세제 개혁에는 토지를 일일이 측량하게보다는 소가 끄는 쟁기의 숫자를 파악한 후 이를 바탕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정책도 포함되었다. 인두세 정책은 로마 제국의 인구 증가를 가로막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세금 징수가 간편하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후에 동로마 제국으로 계승되어 천년 넘게 지속되었다.

3.2. 이슬람교지즈야

이슬람교에서는 비무슬림에게 인두세를 거두었다. 아랍어로 지즈야(جزْية) 라고 한다.

이슬람교가 태동하던 시점부터 있던 제도이다. 이슬람 초기에는 당연하게도 무슬림은 소수였고, 대다수의 신민이 비무슬림이었는데, 비무슬림이라고 해서 모조리 죽이거나 추방하는 것은 당연히 저항을 불러일으킬 일이었으니 이들을 포용해야 했다. 그러므로 별도의 세금을 물려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줬다. 이후 인두세를 내던 주민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무슬림이 된다면 인두세를 면세했다. 다만 대개 무슬림으로 개종할 경우에는 병역의 의무가 부과되었기 때문에 꼭 안 내고 버티거나 하지는 않았다.[3]

지즈야는 근대 들어와서 폐지되었으며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과거의 유물로 여겨지고 있으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지즈야의 부활을 운운하며 비이슬람인들에게 이를 빙자한 보호비를 갈취한다. 자세한 사항은 지즈야 항목 참고.

3.3. 오키나와의 인두세

류큐를 정복한 사쓰마 번류큐 왕국에 엄청난 양의 공물을 강요하였는데, 이 때문에 류큐 조정은 오키나와 본도를 제외한 부속 도서의 주민들에게 인두세를 가혹하게 매겼다. 이 인두세는 마을 단위로 납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각 마을들은 인구 조절에 매우 고심했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경우 '섬 나누기'라 불리는 무인도 개척과 강제 이주 정도로 끝났지만 [4] 주변에 주민들을 분산시킬 무인도도 없으면 낙태로 인구를 조절한다거나, 심한 경우 살아 있는 사람을 여러 구실을 붙여 죽이기도 했다고 하며[5] 오키나와 본도를 제외한 류큐 제도 어디를 가든 이런 참혹한 역사에 대한 전승이 없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다.

이 때문에 일본의 류큐 처분[6] 당시 지방 섬 주민들은 일본이 직할 통치하면 인두세와 공물은 없어지지 않겠느냐며 환영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에서는 오키나와 구 왕족과 귀족들을 달래기 위해 인두세를 계속 유지했으며, 이후 24년간이나 더 지속되다가 1903년에야 폐지하였다.

이런 과거가 있기 때문에 류큐 독립 운동은 상당히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는데, 오키나와 본섬이 아닌 다른 섬들에 사는 주민들이 일본은 싫어하지만 오키나와 본도에 대해서는 또 다른 악감정을 가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3.4. 식민제국의 인두세

식민 지배에도 인두세는 매우 유용하게 이용되었는데, 이 때문에 마하트마 간디의 불복종 운동의 요구사항에는 인두세 폐지가 들어가기도 했다.

3.5. 오늘날

현대에 와서도 인두세에 대한 반감은 변함이 없는데,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가 인두세를 도입했다가 엄청난 반발을 불러와 결국 대처 퇴진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인두세는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조세제도로 인식되어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폐지되었다. 특히 미국의 경우에는 아예 헌법에서 금지하고 있다. 일부 남아 있더라도 전체 조세 총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에는 인두세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일본의 주민세는 소득 기반의 '소득할'과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부과되는 '균등할'로 계산된다. 여기서 균등할에 해당되는 항목이 인두세로 볼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소득 근로자의 경우 소득할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고, 반대로 소득이 없거나 낮은 경우에는 주민세 자체가 면제가 되기에 인두세에 대한 거부감은 거의 없는 편이다.

대한민국 또한 일본과 유사하게 균등분 주민세가 있다. 정확히는 인구가 아니라 가구 수 기준이다. 1가구 당 1년에 한 건이 부과되며, 대학교 기숙사 등 임시적인 사정으로 분가된 경우는 예외적으로 비과세한다. 이 세제는 1961년 세제개혁 때 일시적으로 폐지되었다가 1973년에 다시 도입되었는데, 이는 세대주와 법인에 매겨지는 것으로서 인두세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다. 소득에 따라 매기는터라 심한 조세저항은 없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비판적인 의견이 많으며, 박근혜 정부복지예산 벌충을 위해 담배값 인상과 함께 자동차세 인상, 주민세 인상을 들고 나온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 바 있다. 지방자치제 이후 지자체의 세수로 포함되어, 한 푼이 아쉬운 지자체 재정에서 주민세를 폐지하기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 다만 세대주 분리라는게 굳이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안해도 되는 경우가 많고 세대주 분리로 이득을 보는 경우도 많아서[7] 이에 항의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추가로, 한국에서 국방세가 도입된다면 인두세적인 성격이 될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기회비용이라는 면에서 소득세에 가산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도 있으나, 대부분 세금을 내게될 20~30대 여성이 소득을 올리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역 의무라는 국민으로서 의무에 대해 차등적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에서도 군포는 인두세 개념이었다. 기회비용의 측면에서 볼 때 소득으로 차등하여 부과하는 논리도 설득력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럴 경우 조세를 회피할 방법이 너무나 많아진다.

전산화가 잘 되어있지 않고 세금 걷기가 어려운 세네갈 등등의 아프리카 국가에서 인두세를 많이 활용한다.

현대에도 비슷하게 이슬람권에서는 아내가 늘어나면 그만큼 세금을 더 걷는다. 아내를 한 명 더 들였다는 것은 아내 1명(+그 사이에서 추가적으로 태어날 자식들) 만큼의 사람들을 먹여살릴 재력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슬람에서는 아내를 한 명 더 들일 시 그 아내에게도 기존의 아내와 같은 대우를, 기존의 아내에게도 새로 들일 아내와 같은 대우를 해줄 것을 명시하기에 아내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지출이 어머어마하게 커짐을 의미한다. 그러다 보니 부자가 아니면 아내를 늘릴 생각도 못한다. 부자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최대 숫자인 4명을 꽉 채우는 경우는 드물다.

4. 기타

  • 단체관광객이 특정제품을 일정수량 만큼 구매하지 않을 경우, 여행사가 관광통역안내사에게 손실액을 징수하는 폐습이 있는데, 이를 속칭 인두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 인두세와 정액세를 혼동할 수 있는데, 인두세는 정액세의 한 형태이다.

[1] 실제로 프랑스의 징세청부업자들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민중을 가혹하게 쥐어짰고,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사이좋게 단두대로 갔다. 그 악명이 어느 정도였냐면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경우 로베스피에르 시대에 처형되었지만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에도 그의 유죄 판결은 뒤집어지지 않았다.[2] 전근대 일본에선 이를 회피하기 위해 태어나자마자 아이를 죽이기도 했는데 이 역시 가족 계획이라는 관념이 없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출산 회피와 본질이 같다고 할 수 있다.[3] 국가적 차원에서도 개종을 마냥 달가워하지만은 않았는데 비무슬림의 지즈야가 꽤 많은 세입원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즈야로 거두는 세입원이 줄어드는걸 막기 위해 어떤 때에는 개종을 제한하거나 금지하기도 했다.[4] 이 경우도 아열대기후다 보니 무인도로 이주한 주민들이 미개척지에 창궐하는 모기 때문에 말라리아로 고생하고 심지어 몰살당하는 경우도 잦았다. 혹은 무인도들의 크기가 작아서 해일 한 방에 휩쓸려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야에야마1771년 수위가 85m(!)까지 올라가는 해일로 전지역이 초토화 되기도 했고 이 피해는 근대가 도래할 때까지 복구하지 못했다.[5] 갑자기 소집을 걸어 선착순(!)으로 늦은 사람을 죽이든가, 아예 일정 연령 이상을 죽이든가, 임산부에게 폭이 3~4m에 달하는 절벽 틈새를 뛰어서 건너게 하는 식이었다.[6] 1879년 류큐를 일본에 편입한 사건.[7] 특히 복지청약 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