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사쓰마 번 薩摩藩 | ||
중심지 | ||
現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 ||
다이묘 | 시마즈 가문 | |
고쿠다카 | 77만 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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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도 시대 규슈 남부의 사쓰마 국, 오스미 국, 휴가 일부분(모로카타군[1]), 아마미 제도를 다스리던 중세 일본의 번(藩).판적봉환 이후 가고시마 번이 되었고 폐번치현에 의해 가고시마현이 됐다. 그러나 지금도 사쓰마라고 통칭한다. 약 600년간 시마즈 가문의 통치를 받았다.
2. 역사
가마쿠라 막부 때 코레무네 씨(惟宗氏)를 시조로 하는 시마즈 일족이 사쓰마(薩摩), 오스미(大隅), 휴가(日向) 3국의 슈고(守護)로 임명돼 교토에서 옮겨왔다. 무로마치 막부 때는 물론 전국시대에도 군대 세력을 유지하면서 일본 유수의 센코쿠 다이묘(戦国大名)로 성장해 한 때 규슈 통일을 노릴 정도로 군대가 강성했다.[2] 이때 일본 최강의 강병이라는 평을 듣게 된다. 그들은 1580년대 중반 규슈 통일의 꿈을 이루는 듯 했으나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복으로 물거품이 된다. 다만 히데요시는 시마즈 일족을 남겨 사쓰마, 오스미 두 개 국의 영지는 인정해 줬다.이후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여 사천성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 4만명을 대파하고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을 전사시킨 왜군들이 모두 이쪽 지역 출신이다.
히데요시의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에서 시마즈 가문은 서군에 동참해 다시 패하지만, 승리한 도쿠가와 가문은 시마즈 타다츠네에게 도자마 다이묘로서 가문을 계승하게하고[3] 영지를 그대로 인정했다. 이 시점이 본격적으로 사츠마, 즉 오늘날의 가고시마현의 성립이라고 본다.
1609년 시마즈 가문은 군대를 이끌고 류큐 왕국을 정복하고 식민지배를 시작하여 원래 산출량에다가 류큐 12만 석을 더했다. 한편 오키나와에 이웃한 아마미 군도를 류큐에서 분리해 사쓰마가 직할지배했다. 오늘날 21세기에도 아마미 제도는 가고시마현 소속으로, 오키나와현 소속이 아니다. 사쓰마 번은 류큐를 대중 무역 창구로 이용하는 한편 아마미 군도 산 설탕을 일본 전국으로 유통시켜 번의 재정을 강화했다.
사쓰마는 토양 자체가 시라스(화산재) 대지[4]로 물이 잘빠지고 토질이 벼농사에 적합치 않다. 에도 막부가 파악한 초기 사쓰마 번의 총 수확 규모는 90만 석인데, 그 중 곡물 소출은 절반 정도이고 나머지는 다른 작물이나 어획량, 대외 무역 등을 환산한 것이라고 한다. 대대로 농업은 소규모의 논 및 밭농사가 대부분이던 그들은 고구마, 담배 등 상품 작물을 들여와 재배에 성공한다. 오늘날에도 고구마의 일본 이름엔 사쓰마가 들어간다. 통신사 조엄이 일본에서 들여온 고구마도 사쓰마 산이었다.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 속에서도 밀무역으로 번의 재정을 강화해갔으며 그런 기반이 메이지 유신의 토대가 되었다.
밀무역과 반도쿠가와 등 이런저런 이유로, 에도 막부로부터 역사적으로 찍혔던 지역이었다. 당시 근세 일본 영주들 모두 겪던 참근교대는 물론 각종 공사에 과중하게 동원되기 일쑤여서, 그 피로감과 불만은 고조되었다. 이런 상황은 8대 당주 시마즈 시게히데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약간 해소되었고 막부 정치에 제 목소리를 내게 되고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다.
1827년, 가로(家老) 즈쇼 히로사토(調所広郷, 1776 ~ 1849)를 중심으로 번정 개혁을 단행해 채무 정리, 설탕 특허 제도강화, 류큐 무역의 확대[5] 등로 재정이 크게 나아졌다. 오유라 소동을 극복하고 1851년 제11대 번주가 된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서양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서양식 공장 시설을 설립하고 증기선 군함을 구입하는 등 군비를 확충했다. 양녀(篤姬, 아츠히메)를 쇼군에게 시집보내 외척이 되는 한편, 공무합체 운동(친막부 운동)을 벌여 중앙의 신임을 얻었고, 타지방 도자마 다이묘들도 중앙 정치에 진출하게 했다. 막부의 중신들은 시마즈 가문을 우대했다. 이 때를 그린 NHK 대하드라마가 아츠히메.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병사한 후, 이복동생인 시마즈 히사미츠가 실권을 잡아 공무합체파로 번을 통솔한다. 공무합체파란 막부 자체의 존립에는 찬성하지만 막부가 공가 등 천황의 조정을 존중하고 지방 다이묘에게도 권력을 나눠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시마즈는 막부의 외척 집안이었다. 그러나 당시 막부가 권위를 잃으면서 전국적인 선풍을 끌었던 존황양이파들이 사쓰마 번내에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존왕양이란 오랑캐 서양인들을 축출하고 국정의 실권을 막부에게서 박탈해 천황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군사활동이었다. 아무리 영주가 공무합체를 주창한들, 번내 하급 사무라이들이나 우국지사들의 존왕 바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실제로 아들 나리아키라한테 에도로 쫓겨난 시마즈 나리오키가 돌아와 존왕양이 지사들을 학살했지만 고작 1년도 되지 않아서 병사하면서 다시 존양지사들로 사쓰마의 상층부가 구성되었다.
1862년 나마무기 사건이 벌어진다. 요코하마 항구 근처 나마무기 영지를 지나가던 시마즈 히사미쓰와 700명의 병력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다. 때마침 말에 탄 영국상인 윌리엄 마샬이 실수로 시마즈 군 앞에 난입하면서 벌어진다. 당황한 수행원들이 영국인을 칼로 베자 영국과 외교 문제가 일어나 이듬해 8월 영국과 전쟁이 벌어진다(사쓰에이 전쟁). 영국은 7척의 전함을 앞세워 자그마치 1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요구해왔다. 사쓰마는 막부로부터 차관을 빌려 배상금을 냈고, 이후 서구화와 부국강병을 더욱 가속하고 과격한 양이를 지양하게 되었다. 사쓰마는 8월 18일의 정변, 금문의 변까지만 해도 막부를 돕고 조정에서 조슈 세력을 몰아내는 데 협조했으나, 곧 막부의 외척이었음에도 공무합체파가 힘을 잃고 번내 여론이 존왕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그들은 집안의 체면도 있어 쇼군 후견직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에게 요코하마 개항 철회를 요구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받아 막부와 사이에 금이 갔다. 요시노부가 술자리에서 히사미쓰를 모욕하고 이에 히사미쓰가 분노하여 히사미쓰 등 유력 다이묘가 막부 정치에 참여했던 참예회의가 와해되기도 했다.
이후 가로(家老) 코마츠 타테와키 밑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도막파 하급 무사들이 실권을 쥐고 에도 막부의 제2차 조슈 정벌 명령에 따르면 번의 재정이 거덜날 것이 뻔하니 방관하자는 쪽으로 돌아서, 이때까지 견원지간이었던 조슈 번과 삿초 동맹을 맺는다. 덕분에 조슈 번은 막부군을 물리치고, 대정봉환을 거쳐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메이지 6년 정변에서 패하고 낙향하자 많은 사쓰마 출신 무사들이 그를 따랐고, 1877년 사이고를 추대하여 세이난 전쟁을 일으켰다. 가고시마현 현지에서는 압도적으로 사이고를 지지했으나 이미 조정에 출사한 사쓰마 무사들은 반란에 동참하지 않거나 아예 진압군에 가담한 경우도 많았다. 사쓰마군은 정부군과의 전쟁에서 패했고 사이고 이하 간부들은 전원 전사 내지 할복하여 사쓰마 번벌의 세력은 조슈에 비해 축소되었다.
가고시마현의 현지사를 지냈던 이토 유이치로의 조상들은 옛 시마즈 가문의 사무라이라고 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근대식 해군을 육성할 때 사쓰마 지역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고[6], 위의 조슈 번(육군)과의 라이벌 의식과 맞물려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생겨난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사쓰마 번(해군)은 조슈 번(육군)과 황태자비 자리를 놓고도 다툼을 벌였는데, 화족 이치죠 도키코(一條朝子)를 지지하는 조슈 번에 맞서, 방계 황족이자 사쓰마 번 제12대 영주 시마즈 다다요시(島津忠義)의 외손녀 나가코 여왕을 지지했다. 일명 '궁중모중대사건'이라고도 불린 치열한 싸움 끝에, 결국 나가코 여왕이 히로히토 황태자의 비(妃)가 되었다.
3. 여담
- 상무 정신이 유명한 지역으로 사무라이가 지배한 전근대 일본의 기준으로도 상무적이고 전투적인 기질이 강했다. 독자적으로 류큐 왕국을 정벌하거나 수많은 왜구를 배출하는 등 대외로 군사력을 투사해왔고, 히데요시의 큐슈 정벌에서 패배 했지만 이 당시 사쓰마의 군대는 일본 최강이라 불릴 정도로 강했다고 전해진다. 신유한의 해유록[7]을 보면 저자인 신유한이 수백년째 엄격한 문치 사회를 형성한 조선에 비해 폭력적으로 보이는 일본의 사회상이나 법 제도에 대해 소개하면서 통역 겸 가이드였던 일본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에게 "일본인들은 삶을 가볍게 여긴다던데 사실인가?" 라고 물어보았고, 이에 아메노모리의 "사람이 살고 싶어하고 죽기 싫어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다만 사쓰마인들은 성격이 독특해서 예외인데, 일본인이 삶을 가볍게 여긴다는 건 사실 사쓰마 사람들 때문에 생긴 말이다." 라고 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 그리고 신유한으로부터 백여년 전인 17세기 전반기에 일본을 방문했던 통신사들도 비슷한 기록을 남겼다. # # [8]
- 예로부터 일본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밀무역이 주 주익원이다보니 반골 기질도 강해 실제로 중앙정부에 대항한 적이 많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직전까지 잇따른 농민난을 수습하다보니 히데요시의 징집 기한을 어겼다. 그 벌로 모리 카츠노부 밑으로 배속되어 험한 강원도 산길을 통해 조선을 침공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19세기 중반에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중앙정부 타도를 성공시켰으며, 이후 세워진 신정부에 대항하여 서남전쟁을 일으켰다. 현재는 보수색이 강하고 자민당이 강세를 보인다. 그러나 2016년 제24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이후 야권 계열이 강해지고 있다.
- 고대에는 야마토인들과 다른 구마소, 하야토 등의 이민족들이 살던 땅으로 야마토와는 별개의 읍락국가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8세기 무렵에 이들 읍락국가는 야마토 조정에 복속되면서 동화되었지만 아직도 사쓰마 사투리는 여타 규슈 사투리와 큰 차이를 보인다. 심지어 이웃 구마모토현이나 미야자키현과도 큰 차이를 보일 정도로 발음과 억양이 매우 독특하다. 사쓰마의 주민들은 스스로를 사쓰마하야토(薩摩隼人)라 부르며 지방색을 보인다. 15세기부터 일본인들이 스페인, 포르투갈 등 라틴 유럽을 지칭하던 남만(南蠻)이란 단어는 원래 규슈 원주민들을 부르는 멸칭이었다.
- 사극에서 사쓰마 관련 인물들이 나오면 100% 사쓰마 사투리를 구사하는데, 사쓰마 사투리는 난이도가 너무 높고 억양도 특이해서 알아듣기 힘들다.NHK 대하드라마 등을 보면 함경도 사투리와도 억양이 유사하다. 2차대전 당시 미군도 이 사투리를 해석하지 못해 가고시마 출신 일본계 미국인을 불러와 사투리 해석을 맡겼을 정도였다.
- 왜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포로로 끌려간 심당길과 박평의등 도공들의 후손이 이 지역에 정착했다. 일본 제국 외무대신이자 A급 전범인 도고 시게노리(조선명: 박무덕)가 조선 도공의 박평의의 후손이였다. 그 외에도 임란 이전부터 활개친 왜구 역시 사쓰마가 주요 근거지였다.
- 상무적이고 이질적인 지방색을 반영한 듯한 특유의 검술 유파인 지겐류가 있다. 부드럽고 세밀한 검풍의 본토 유파들과 달리 박력넘치고 야생적인 검풍을 자랑한다.
4. 출신 인물
※ 에도 막부 성립 이전, 메이지 유신 이후 출생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가고시마현 문서에 기재.- 사이고 다카모리
- 오쿠보 도시미치 - 초대 내무경. 이 직위의 직계 후신은 내무대신이지만, 당시에는 총리에 비견되는 역할을 했었다. 물론 내각제 도입 이전 총리와 같은 격을 가진 직위는 태정대신이었지만 명예직의 성격이 더 짙었다.
- 코마츠 타테와키
- 사이고 주도(츠구미치) - 사이고 다카모리의 친동생으로 서남전쟁에서는 형을 따라 참전하는 대신 정부의 편에 남았다. 참의, 육군경, 해군대신 등을 거쳐 일본 해군 최초의 원수가 되었다.
- 오야마 이와오 - 러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 원수. 사이고 다카모리의 의형제
- 도고 헤이하치로
- 야마모토 곤노효에 - 제16, 22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총리 영전 이전에는 일본 제국 해군대신을 지냈었으며, 지금으로 따지면 국방부가 육군부와 해군부로 나뉘어 있고 그 중 해군부장관을 지낸 격에 해당한다.
- 구로다 기요타카 - 제2대 내각총리대신.
- 주만 가나에 - 야구라는 단어를 창시한 교육자로 1970년 일본야구전당 헌액. 일본인들 사이에선 '쥬마 카노에'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 마쓰카타 마사요시 - 1882년에 일본은행을 설립한 재정가, 제4, 6대 일본 총리.
- 텐쇼인 - 아츠히메로 잘 알려진 인물.
- 고다이 도모아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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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모로카타 군은 미야자키현 소속이다.[2] 히데요시의 규슈 정복에선 압도적인 힘에 밀려 항복하지만, 본군이 오기 전까지 연합군을 대파하면서 받았던 평가.[3] 이 과정이 제대로 골때리는데 원래 다이묘였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세키가하라 전쟁에 참전하자마자 은근슬쩍 다이묘를 시마즈 타다츠네로 갈아치워버리고는 세키가하라 전쟁이 끝나자마자 대놓고 도쿠가와 가문에게 "시마즈 요시히로 저 인간이 정신이 미쳐서 저희 가문차원에서 온갖 진귀한 약을 구해다가 치료중입니다"라고 둘러댔고 이를 반신반의하면서도 믿어준 도쿠가와 가문 측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서군에 가담한 것이 자기네 가문을 적대하려는 게 아니라 정신이 나가서 그랬다고 간주해서 시마즈 가문의 영지를 삭감하지 않고 살려 뒀다.[4] 규슈 남쪽 반도 지역에 널리 분포하는 화산재와 속돌의 층[5] 덤으로 밀무역, 위조화폐 제조[6] 명나라, 류큐와 해상 무역을 했던 지역이라 해상업이 발달했다.[7] 조선통신사로 파견된 신유한이 전성기 에도 막부의 정치적 상황, 문화, 발전상을 기록한 서적이다.[8] 다만 역대 통신사들은 일본 측과 마찰이 생길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가이드북 차원에서라도 이전 사행록들을 읽거나 아예 챙겨가기도 했고 자신이 사행록을 쓰면서도 이전 사행록들을 대거 참고해서 비슷한 기록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이 이야기는 이전 사행록들에 있으니 나는 생략한다"고 기록하는 경우도 있고, 이전까지와 다른 이야기나 없었던 이야기를 쓰는 경우 학자들의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9] 도고(東郷), 사이고(西郷), 南郷(난고), 혼고(北郷). 혼고씨는 시마즈씨의 분가이며, 사이고 씨에는 미카와 사이고, 아이즈 사이고, 히젠 사이고, 사쓰마 사이고, 이나바 사이고, 부젠 사이고 등 여러 분가가 존재한다. 대표 인물로는 사이고 다카모리, 도고 헤이하치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