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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좌대신 시마즈 히사미츠 島津久光 | |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출생 | 1817년 12월 2일 |
사쓰마국 가고시마군 가고시마성 (현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 |
사망 | 1887년 12월 6일 (향년 70세) |
가고시마현 가고시마군 다마자토 저택 (현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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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마즈 히사미츠는 에도 막부 말기 사쓰마 번 출신의 정치인이다. 12대 번주 타다요시(島津忠義)가 즉위하자 그의 아버지이자 국부(國父)로써 상왕/대원군 역할을 맡았다. 사실상 사츠마 번의 다이묘 직을 수행했다.2. 생애
분카 14년 (1817년) 12월 02일, 가고시마 성에서 나리오키의 측실 오유라(お由羅)의 아들로 태어난다. 분세이 11년(1828년) 2월 19일, 성인식을 치르고 타다유키(島津忠教)라는 이름을 받았다.[1]카에이 2년 (1849년) 12월, 시마즈 본가의 가독상속권을 둘러싸고 사츠마 번내의 왕위계승전쟁이 벌어진다(오유라 소동). 당시 사츠마 번주 시마즈 가문의 당주 나리오키(島津斉興), 핵심 가로였던 즈쇼 히로사토(調所広郷), 그리고 이들을 따르는 중신들은 적장자 나리아키라(島津斉彬)의 난벽[2] 성향을 문제삼았고[3], 그 대신 나리오키의 측실의 아들인 타다유키를 후계자로 밀었다. 하지만 나리아키라도 막부의 로주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를 비롯해 (훗날 히토츠바시파의 원년 멤버로 이어지는) 막부 내의 친(親)나리아키라 성향의 다이묘 군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4] 가문의 패권을 둘러싼 일련의 소동에서 히사미츠는 히토츠바시파와의 외교전에서 패배해 당주의 자리를 이복형 나리아키라에게 빼앗기게 된다. 다만 나리아키라와 히사미츠 두 형제는 (가독계승분쟁 전후로도) 개인적으로 악감정이 깊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히사미츠도 중신들과 아버지에게 등떠밀려 참전한 것처럼 되어, 상속전쟁에 패배하고도 무탈하게 넘어갔다고 한다. (자세한 사항은 오유라 소동 문서 참조)[5]
안세이 5년(1858년) 7월 8일, 히토츠바시파(一橋派)[6]의 일원이던 나리아키라는, 난키파(南紀派)의 이이 나오스케가 멋대로 차기 쇼군[7]을 정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에 무력으로 항의하기 위해 교토로의 출병을 준비한다. 그러나 출병 직전 갑자기 쓰러지고 7월 16일 그대로 급사한다. 나리아키라의 유언대로 히사미츠의 아들 타다요시(島津忠義)가 12대 사츠마 번주에 오르고, 선대 가주이자 히사미츠/나리아키라 형제의 아버지였던 나리오키가 (공식) 후견인 역할을 맡는다.
다시 사츠마를 장악한 나리오키파벌의 정책노선은, 반대파였던 나리아키라 파벌에 대한 숙청 및 (나리아키라가 빌붙던) 히토츠바시파와의 선긋기였다. 안세이 대옥[8]이 한창 진행중이던 1858년 9월, 나리오키 3대가 정권을 잡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대옥사를 핑계삼아 가문내 반대파벌(나리아키라 파벌) 행동대장이었던 하급무사 사이고 키치노스케를 아마미 군도로 유배 보낸 것이었다. 섭정 나리오키는 이듬해(1859년 9월 12일) 사망하고 당주의 아버지였던 히사미츠가 사츠마 번의 다음 실세로 떠오르게 되는데, 이 시기 히사미츠의 정책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1860년, 안세이 대옥 때 가장 피를 많이 흘렸던 미토 번[9] 출신의 낭인들이 다이로 나오스케를 암살할 것을 계획하고 (히토츠바시파였던) 사츠마 번에도 도움을 요청해왔는데, 히사미츠는 '니들의 심정도 알겠고 막부에 니들 거사를 꼰지르지도 않겠지만, 어쨌든 못도와줌'이라고 거절하는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1861년 4월 19일, 히사미츠가 공식적으로 국부(国父)의 자리에 취임하면서 명실상부 사츠마 번의 최고실세가 된다. 이때 이름을 타다유키에서 히사미츠(島津久光)로 바꾸게 되는데, 역사상으로도 이 이름으로 쭉 남게 된다. 국부에 오른 히사미츠는 탈룰라를 시전해서 선대 가주 나리아키라의 공무합체 노선[10]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웅변의 정치참여에 적대적이고 막부의 중앙권력을 우선시하던 다이로 나오스케가 대숙청을 벌일 때는 납작 업드려 있었지만, 토자마 사츠마 번 자체를 아니꼽게 보던 다이로 나오스케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나오스케 잔존 파벌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사츠마번이 독자적으로 중앙정계로 진출할 기회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상경[11]을 준비하던 히사미츠는 같은 맥락에서 그 해 아마미 군도에서 썩어가던 사이고 키치노스케를 다시 가고시마로 불러 들이게 되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사이고는 이미 촌동네 하급무사를 넘어서서 전국구의 인지도를 쌓은 존황양이의 아이돌로 성장해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도막성향이 활활 불타는 소장파 하급무사였던 사이고는, 좌막성향의 진골귀족 히사미츠와 파벌적으로도 노선적으로도 극과극 반대상성이었고, 사이고를 이용하려던 히사미츠의 큰 그림이 어그러지자[12], 쓸모가 없어진 사이고를 다시 아마미 군도의 오키노에라부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13][14]
이듬해 분큐 2년 (1862년) 3월 16일, 국부 히사미츠는 (이복형 나리아키라의 못 이룬 꿈을 이어받아) 병력을 거느리고 가고시마에서 출발, 동년 4월 13일 입경했다. 히사미츠는 교토 중앙정계에 데뷔해, 고메이 천황을 포함한 교토의 전통 귀족들과 입을 맞춰 분큐의 개혁(1862)을 단행한다. 지금까지의 막부 체계 하에서는 천황의 조정이 쇼군의 막부에 국정전반을 일임했기 때문에, 조정으로부터 개혁 지시가 떨어지자 막부는 당황하면서도 히사미츠 파벌의 요구를 수용했다고 한다. 분큐의 개혁의 내용을 일부분만 언급하자면: i) 사츠마번의 오랜 친구이자 공무합체의 화신이었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를 근신에서 사면하고, 젊은 쇼군 이에모치의 후견인/섭정으로 삼았다; ii) 히토츠바시 파벌의 핵심 인사였던 에치젠노카미 슌가쿠를 사면하고, 신설할 정사총재직에 임명했다; iii) 격년제였던 산킨코타이 제도를 3년에 한번 하는 것으로 완화시키고, 체류기간을 100일로 한정했다. 에도성에 잡혀 있던 다이묘들의 처자식들도 영지로의 귀국을 허용했다.
지위나 관직명 하나 없이[15] 교토와 에도에서의 정계 데뷔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히사미츠는 1862년 8월 21일, 귀국도중 영국인 관광객을 죽이는 사고(나마무기 사건)를 치고, 이듬해 1863년 7월 2일 이에 대한 보복[16]으로 쳐들어온 영국과 전쟁을 벌인다(사츠에이 전쟁). 이 전쟁에서 사츠마 번은 관공서, 양학 연구소, 서구식 무기공장 등이 잿더미로 변하고, 해안 포대가 괴멸되었으며, 서양으로부터 구매한 3척의 증기선[17]이 침몰하는 피해를 입지만, 의외로 인명피해는 미미한 편이었다. 사츠에이 전쟁은 사츠마와 영국 둘 다 무승부라는 평가가 있는데, 대영제국의 해군을 상대로 생각보다 잘 싸웠기 때문이다. 다른 번들처럼 존황양이 사상이 유행하던 사츠마번은 이번 전쟁을 계기로 서양의 우수한 무기[18]에 감탄하며 숱한 번사들을 개화성향으로 전향시키게 된다. 그 영향으로 27세 젊은 나이인 고마쓰 다테와키를 가로(家老)[19]로 발탁하여 번정의 개혁을 시작한다.
사츠에이 전쟁이 잘 마무리되면서 히사미츠는 조정과 막부 양측으로 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고, 그의 인생에 있어서 황금기가 열린 시기도 이 즈음이었다. 히토츠바시 요시노부, 마츠다이라 슌가쿠 등과 더불어 산요회의(参与会議) 멤버로 등극했을 뿐더러, 니죠성 로쥬고요베야(老中御用部屋) 입실의 자격[20]도 얻게 되어, 시마즈 가문이 대대로 꿈꾸던 중앙정계 진출의 오랜 꿈이 이루어진 것처럼도 보였다. 권세가 절정에 달한 히사미츠와 사츠마 번은 요시노부의 정권 하에서 좌막파 여당 중진으로 쵸슈 번[21]을 때려잡으러 다니지만(예시: 8월 18일의 정변, 1863년), 정작 요시노부는 막부 내에서 시마즈 가문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히사미츠의 사츠마번과 요시노부 사이의 대립은 이미 1863년부터 감지되었는데, 동년 11월 26일 히가시혼간지에서 열린 참예회의에서 요코하마 개항/폐항 문제를 놓고 균열이 벌어졌다. 하지만 1864년 1차 쵸슈 정벌 때 까지만 해도 엄연한 좌막파로 일하던 사츠마번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요시노부의 친위세력이었던 이치카이소(一會桑) 신세력[22]에 밀려 막부에서의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여기에 쿠로다 나가히로[23]와 함께 진행하던 공무합체/공무중재 전략도 수포로 돌아가면서[24] 도쿠가와 막부를 향한 불만도 차근차근 누적되고 있었다. 게다가 동년 (1864년), 머리 깎고 출가했던 황족 야마시나노미야(山階宮)가 환속해 돌아오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고메이 천황이 싫어하던 야마시나노미야를 억지로 환속 시켜서 데려오자(無理強い)[25] 천황과 시마즈 가문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사츠마 번은 조정에서도 영향력을 잃고 고립되게 된다.
1867년, 효고(오늘날의 고베)개항 문제[26]를 둘러싼 회의에서 마침내 도쿠가와 막부와의 관계가 단절된다. 이곳에서 요시노부가 사후회의[27]의 의견을 묵살하고[28], 실패로 끝난 2차 쵸슈 정벌 이후에도 쵸슈에 대한 처분/사면 문제가 불명확하게 처리되는 등 요시노부 파벌쪽 주장 위주로 처리되자 사츠마 측의 불만이 폭발하고, 요시노부와의 정치적 타협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서게 되어 히사미츠와 그를 따르는 사츠마 번은 좌막의 기치를 버리고 도막의 길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유신 정부는 사이고와 오쿠보 도시미치, 조슈 번벌 등 하급 무사들이 장악했고 히사미츠는 중앙정부에서 영향력을 가질 수도, 그렇다고 가고시마에서 반독립 세력을 유지할 수도 없었다. 폐번치현 과정에서 히사미츠는 번의 행정권 및 군사력 등 실권을 통째로 빼앗겼다. 1874년 보상으로 좌대신 자리를 받았지만 개혁에 부정적이었던 히사미츠의 요구는 정부에서 계속 배제되었다. 결국 1875년 10월 좌대신직을 사임하고 1876년 4월에는 가고시마로 낙향하였다. 히사미츠는 계속 사이고와 오쿠보에게 속았다고 생각했으며, 폐도령이나 단발령 등 신정부 시책에 반발했다.
1877년 2월, 메이지 유신 이후로도 가고시마현의 높으신 분으로 살고 있던 히사미츠는, 사이고 타카모리가 거병해서 세이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립을 선언하고 사쿠라지마로 대피해서 전화(戰禍)를 면한다. 그로부터 10년 뒤, 1887년 12월 6일, 7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망 직전 종1위를 받았고, 장례는 가고시마에서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본가의 당주인 아들 타다요시와 독립적으로 공작 작위를 받았다. 히사미츠의 가문은 가고시마시 타마자토정의 이름을 딴 타마자토 시마즈 가문으로 불렸으며, 공작위는 7남 시마즈 타다나리가 계승하였다.
[1] 타다유키가 히사미츠로 이름을 바꾸는 건 훗날의 일이지만, 일단 일관성을 위해 계속 히사미츠로 기술.[2] 오란다(네덜란드=서양) 문물 덕후 기질[3] 나리오키의 할아버지였던 사츠마번 8대 당주 시게히데(島津重豪)가 난벽 성향으로 번의 재정을 탕진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10대 번주 나리오키와 중신 즈쇼 히로사토는 선대 가주가 만들어 놓은 펑크를 메꾸느라 고생을 했는데, 나리아키라가 증조부를 닮아 난벽 성향을 보이자 질색을 했다고 한다.[4] 에도에서 태어난 나리아키라는 오랜 인질 생활로 에도 생활이 길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막부 직속 가신 및 여러 다이묘들과 접촉이 많았다. 이 점을 고려해서인지 모든 대하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나리아키라는 가고시마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5] 기타 매체에서도 후계 상속 소동에도 불구하고 히사미츠는 나리아키라를 매우 잘 따르는 것으로 묘사된다.[6]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를 차기 쇼군으로 밀던 막부 내 붕당.[7] 고산케 난키(南紀)번주 이에모치[8] 히토츠바시파의 다이묘들과 번사들이 대거 몰락했다.[9] 요시노부가 미토번주 도쿠가와 가문 출신이었던만큼, 히토츠바시파의 본진이었다.[10] 막부 말기에 있어서 공무합체라는 단어는 주체와 객체, 시기에 따라 뜻을 달리하는 마법의 단어다. 여기에서 공무합체란, 시마즈 가문이 막부 중앙정계에 참정권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11] 이때 상경의 목적지인 서울은 에도성(오늘날의 도쿄)이 아니라 교토임을 주의[12] 히사미츠는 사이고의 유명세를 이용해 중앙정계에 화려하게 데뷔하고 싶어했는데, (반대파벌의 수장이었던 히사미츠를 아니꼽게 본건지) 번사 신분의 사이고가 국부 신분의 히사미츠를 그릇이 좁다는 둥 촌뜨기(지고로地五郎, 이나카모노田舎者의 가고시마 사투리)라는 둥 겐세이를 놓으며 히사미츠의 중앙진출을 반대했다.[13] 직접적인 유배 사유로는, 히사미츠가 사이고와 무라타 신파치에게 시모노세키에서 자신을 먼저 기다리고 있으라 명령을 내렸는데, 교토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감지한 사이고와 무라타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시모노세키를 벗어나 교토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이 불온한 움직임의 주인공은 바로 1862년 사쓰마번 지사 숙청 사건(데라다야 사건)의 당사자인 아리마 신시치 일당이었다.[14] 이때 섬으로 쫓겨난 사이고가 다시 가고시마로 돌아오는 건 한참 뒤의 일로, 시마즈 문중의 어르신들 중 나리아키라 파벌 좌장이었던 쿠로다 나가히로, 히사미츠의 직신이자 사이고의 친구였던 오오쿠보 토시미치 등이 긴 세월에 걸쳐 히사미츠를 어르고 달랜 후의 일이었다. 두번째 유배로 인해 타카모리는 1863년 사츠에이 전쟁 때에도 참전하지 못하고 섬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15] 무위무관(無位無官)의 시마즈 사부로(히사미츠의 아명)라 부르며 히사미츠의 무력시위를 언짢게 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16] 이건 핑계고, 사츠마 번과의 통상수교를 목적으로 내항했다. 대화로 해결이 안되니 양측에서 포를 쏘기 시작한 것.[17] 구체적으로는 텐유마루(天祐丸), 하쿠호마루(白鳳丸), 세이요마루(青鷹丸)를 잃어버렸다.[18] 예를들어 함포의 사거리가 사츠마측보다 4배 더 길었다.[19] 번주의 보좌역으로 번주 밑의 최고 지위[20] 다이로, 로쥬, 와카토시요리(若年寄) 등이 모여서 막부의 중앙 정국을 결정하는 집무회의 참가 자격을 의미한다.[21] 히사미츠의 상경 즈음을 전후의 교토는 혼맥상이었다. 당시 존황양이 사상에 불타던 젊은이들이 교토로 몰려와 공무합체파와 존황양이파로 갈라져 마피아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즈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가 교토의 치안을 유지시키기 위해 좌막파 자경단 신센구미의 스폰서를 자처하던 시기도 이때의 일이다.[22] 히토츠바시(一橋) 요시노부의 직계세력(一), 아이즈(會津)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세력(會), 쿠와나(桑名)번주 마츠다이라 사다아키의 세력(桑)에서 한 글자씩 따와 당명으로 불렀다.[23] 쿠로다 가문으로 양자입적한 시마즈 가문의 친인척이었고, 후쿠오카 번주 신분이었다.[24] 시마즈 가문이 미는 공무합체 전략이란, 웅번이었던 사츠마가 천황의 권위를 업고 막부 내 중앙정치에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걸 의미했다. 반면 이치카이소 정권이 생각하던 공무합체란, 막부의 중심인 자기네들과 천황의 조정이 친하게 지내면서, 웅번들을 겐세이 놓는 정치 체제를 의미했다. 실제로 이 시기 천황 가문에서 가장 의지하던 것은 쵸슈나 사츠마가 아닌, 강직하고 우직한 아이즈의 카타모리였다고 한다.[25] 이 환속을 억지로 들이민 주체로는 주로 히토츠바시 요시노부가 언급되는데, (천황이 히사미츠에게 제대로 삐진 걸로 봐선) 히사미츠가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거나, 요시노부에 찬동한 듯 하다.[26] 2차 쵸슈 정벌 이후 쵸슈의 사면을 포함한 전후처리 문제도 세트로 처리될 예정이었다.[27] 사츠마의 히사미츠, 토사의 요도, 우와지마의 무네나리, 에치젠의 슌가쿠 네명의 다이묘들이 뜻을 모은 합의사항[28] 혹은 묵살까지는 아니어도 요시노부 측의 의견이 강하게 반영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