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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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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발포약도[1]

1. 개요2. 역사
2.1. 배경2.2. 메이지 천황의 즉위까지 (1854~1868)2.3. 제국 헌법 공표까지 (1868~1889)2.4. 메이지 유신과 그레이트 게임
3. 근현대 한자어의 탄생4. 조선에 끼친 영향5. 관련 문서
5.1. 시대적 사건5.2. 조직5.3. 사상5.4. 인물5.5. 창작물

1. 개요

[ruby(明, ruby=めい)][ruby(治, ruby=じ)][ruby(維, ruby=い)][ruby(新, ruby=しん)] | Meiji Restoration

메이지 유신1868년 일본이 정치·경제·문화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과정과 일련의 대사건을 말한다. 역사학에서 분류한 시기는 메이지(明治) 원년1868년으로 간주한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명칭은 현대 역사 용어[2]로, 당시에는 '고잇신(御一新, 어일신)' 등으로 불렸다.

2. 역사

2.1. 배경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일본의 전국 시대를 종결시키고 에도 막부를 세운 이후로, 근세 일본은 200년 넘게 에도 막부의 지배하에 있었다. 막부 체계는 도쿠가와 가문의 근거지인 에도[3]에 세워진 막부가 300명 정도의 지역 영주인 다이묘들 위에 군림하고, 또 각 다이묘가 많은 수의 하급 사무라이들을 거느리고 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는 봉건제였으며, 다이묘 밑으로는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제를 이루고 있었다. 에도 막부는 오랜 내란을 끝내고 확고한 지배체계를 구축하였고 조선 원정 실패의 여파도 안정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에도 막부 시대 동안 인구와 농업 생산량이 크게 늘었고 상공업이 번성하였으며 문화도 융성하였다.

하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사무라이라고도 불리는 일본의 하급 무사 계급[4] 내에서 에도 막부에 대한 여론은 악화 일로로 접어들었다. 지속적 평화와 방만한 국가 경영의 시기 동안 사족의 지위는 점차 흔들리고 있었으며, 막부는 18세기에 발생한 일련의 자연재해와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아무리 무술과 학문을 수양해도 엄격한 신분제 아래서 마음대로 뜻을 펼칠 수 없는 현실에 분개하는 사족들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막부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들을 통해 전래된 성리학이 융성하면서, 성리학 특유의 통합적이면서도 수직적인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정치 사상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나로 통합된 일본'이라는 생각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또한 성리학이 중국 사상을 지나치게 숭배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일본 고유의 정신에서 진리를 구하려는 국학이 발생하고 유행하였는데, 국학은 일본 토착 종교인 신토와 결합하여 천황을 숭배하는 사상을 만들어 내었다. 이때문에 점차적으로 천황을 막부보다 더 높게 쳐주는 풍조가 발생하였다.

점차 쇠약해져가던 막부의 지배에 결정타를 먹인 것은 외부로부터의 충격이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서양의 신식 증기선 전함들을 끌고와서 '평화적으로 교역에 응하는 것'과 '교역을 거부하는 대신에 전쟁을 감수하는 것' 중에 양자택일을 요구하였던 것이다.(쿠로후네 사건) 사실 일본인들은 서양의 열강들이 동아시아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페리 제독의 내항보다도 한참 전부터 듣고 있었으며, 특히 1840년의 아편전쟁에서 자타공인 동아시아 최강국인 청나라가 어떻게 대영제국에게 묵사발이 되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도 막부는 아예 처음부터 서양 국가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문을 완전히 닫아걸고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던 중이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중국이라는 더 큰 먹이에 골몰하느라 일본이 문을 닫아걸자 일본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미국의 경우는 달랐다. 미국의 서부 해안에서 출발한 증기선이 북태평양을 가로질러서 일본 근해까지 오면 증기 기관의 연료인 석탄을 보급받아야 했기 때문에, 미국이 아시아로 진출하려면 일본에 안정적인 보급항을 확보할 필요가 있어서 일본의 개항에 보다 진심이었다.

사실 일본은 국토의 폭이 좁고 길기 때문에 모든 주요 지역이 바다에서 멀지 않아서 바다로부터의 공격에 취약하고,[5] 특히 막부가 있는 에도와 천황의 황궁이 있는 교토는 만약 미국이 아편전쟁의 영국군처럼 군함의 함포 사격 지원을 받은 해병대로 공격해올 경우 제대로 방어하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6] 결국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의 주도 아래, 막부는 청나라처럼 얻어맏느니 평화적으로 통상조약을 맺기로 했다. 이때 막부가 미국과 맺은 미일수호통상조약조선을 비롯한 다른 동아시아 국가도 겪게 된 전형적인 불평등 조약으로, 관세권을 박탈당해 해외의 공산품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할 수 없고, 외국인에게 치외법권을 줌으로써 일본에서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을 처벌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아편을 금지할 수 있는 조항을 넣은 것이 막부의 수확이었다.

한편 막부도 개항에 대한 여론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때문에 비난을 피하고자 위로는 천황의 허가를 받고[7] 아래로는 다이묘들과 회합을 열어 여론을 수렴하는 형식을 취하고자 했다. 하지만 과거 힘으로 다이묘들을 찍어누를 수 있었던 막부라면 하지 않았을 이 꼼수는 결국 막부의 거대한 자충수가 돼 버렸다. 당시 고메이 천황이 '짐은 이인[8]이 싫다'며 결재를 자꾸 미뤘고, 다이묘들과의 회합은 서양 국가에 대한 결사항전을 외치는 성토장이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오히려 막부의 권위가 크게 실추됐고, 막부는 천황의 허가도 받지 못한 채로 모든 다이묘가 반대하는 조약에 서명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한편 일단 미국과 조약을 맺게되자 영국을 비롯한 다른 서양 국가들도 몰려왔고, 막부는 이들과도 불평등 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2.2. 메이지 천황의 즉위까지 (1854~1868)

막부가 천황의 칙허 없이 굴욕적인 외교 조약을 처리했다는 사실에 대해 강경파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예전부터 막부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웅번[9]들이 막부와 대립각을 드러냈고, 젊은 하급 무사들 사이에서 천황을 받들고 외세를 물리치자는 존황양이 사상이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처음에 이 젊은 무사들은 일본도를 들고 외국인이나 친외국 세력을 모두 베어버리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후 현실을 깨닫게 되자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우고 막부를 타도하자는 쪽으로 태도를 전환했다. 이들을 '토막파(討幕派)'라고 부르는데 특히 다이묘나 번의 상층부가 존황양이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조슈 번, 사쓰마 번, 도사 번, 히젠 번 등에서 토막파 무사들의 영향력이 거셌고, 조슈 번의 요시다 쇼인과 같은 사상가들은 많은 토막파 문하생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10] 반면에 막부는 강경책과 유화책 사이에서 우왕좌왕 하면서 대응의 일관성을 잃었고, 결과적으로 막부의 권위만 계속 실추됐다.

한편 외국 무역상들에 의해서 일본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으면서 민중 폭동이 줄을 잇기도 하였다. 일본의 값이 국제 시세보다 싸다는 것을 알아차린 외국 무역상들이 일본의 금화를 대량으로 유출하였는데, 이에 막부 정부는 금화에 불순물을 섞어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화폐 가치 저하는 당연히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발생시켰으며, 특히 도시에서 곡식 가격이 폭등하였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 비단을 짜는 생사[11] 가격이 싸다는 점을 이용해 외국 무역상들은 일본에서 생사를 쓸어담아 중국에 팔았는데, 이 때문에 당시 일본의 주요 산업이었던 비단 직조 산업이 붕괴돼 버렸다. 반면 저렴한 외국산 면직물이 밀려들어왔지만, 막부 정부는 불평등 조약 때문에 이를 막지 못했다. 서민 생활이 어려워지자 도시와 농촌에서 폭동이 잇달았고, 결국에는 막부의 군대가 출동하여 겨우 진압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1860년 막부의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가 토막파 낭인들에 의해 암살되자(사쿠라다 문 밖의 변), 막부는 다이묘들에게는 유화책을 펼치고 대신 과격한 무사들을 탄압하려고 했다. 막부는 각 다이묘가 스스로 개혁을 수행하고 서양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게 하였는데, 이 시기를 전후로 사쓰마 번과 죠슈 번 등이 개혁[12]에 성공해 막부 못지않는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또한 막부는 교토의 천황 조정과 에도 막부의 제휴, 소위 공무합체(公武合体)라고 불리는 합의를 제안했는데, 이 조치는 여러 웅번들에게 막부의 의사결정권을 교토에서 열리는 다이묘 회의로 대폭 옮기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13]

막부는 공무합체운동으로 여러 다이묘들의 호의를 살 수 있었지만, 다이묘와 무사들을 갈라놓고 토막파 무사들을 억누르겠다는 계획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1862년부터 1863년 사이에 전국에서 존황양이를 외치는 무사들이 교토로 몰려들었으며, 고메이 천황은 이들에게 화답하여 막부에 양이[14]를 실천하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압박에 몰린 막부는 1863년 5월까지 양이를 실행하겠다고 천명했지만, 현실적으로 양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은근슬쩍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조슈 번의 양이파 무사들이 무단으로 미국과 프랑스 등의 외국 선박에 포격을 가했다가 미군과 프랑스군의 보복 공격을 받아서 박살이 난 사건이 벌어졌다.(시모노세키 전쟁)

막부는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나섰고, 이 때문에 1864년 교토의 존황양이파 무사들이 조슈로 퇴거했다가 천황의 신변을 확보하여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반란을 일으켰다.(금문의 변) 반란은 막부측의 사쓰마-아이즈 연합군에 의해 조기에 진압됐고, 막부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조슈 정벌에 나섰다.(제 1차 조슈 정벌) 막부는 사쓰마를 비롯한 여러 친번의 군대를 소집하여 대군을 끌고 왔고, 이를 상대할 수 없다고 여긴 죠슈 번은 최고위 3명의 중신들이 할복하고 급진 토막파들을 다 쳐내면서 막부에 항복했다.
1865년부터 막부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진행시켰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군대에 서양 무기와 서구식 훈련을 도입했고, 서양의 과학 기술과 학문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막부 내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개혁의 속도는 미진했다. 또 막부뿐 아니라 몇몇 웅번에서는 광범위한 사회정치 개혁이 벌어졌는데, 특히 조슈 번에서는 출신 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정치 구조를 간소화시키는 개혁이 시행되었다.

1866년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등극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지난 100여년간 지속된 무능한 쇼군들과는 달리 상당히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는데, 그래서 역사가들 중에 요시노부에게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막부가 최소한 수십년은 더 지속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문제는 실제 역사에서 요시노부에게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슈 번의 토막파는 1864년의 패배로 힘을 잃었지만 완전히 뿌리뽑힌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토막파는 서양 무기와 서양식 편제를 이용해 비정규군을 육성했고, 특히 부대 편성의 임무를 맡은 타카스기 신사쿠는 무사가 아닌 농민의 입대를 허용하는 참신한 방법을 사용하였다.[15] 1865년에 벌어진 조슈 번의 내전에서 토막파의 무사+농민 혼성부대는 보수파를 격파하고 번의 지배권을 탈환했다. 토막파는 번의 풍부한 재정을 쏟아부어 영국으로부터 무기와 함선을 구입해 막부에 대항해 싸울 군비를 갖추었다. 하지만 조슈 번 혼자만의 힘으로는 막부와 친막부 다이묘들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한편 사쓰마 번은 조슈 번처럼 토막파 사족들의 세력이 크고 수십 년 전부터 진행된 개혁을 통해 막부에 대항할 만한 풍부한 재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막부의 편에 서 있었고 지난 1차 조슈 정벌에서는 막부 진영으로 조슈와 싸우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슈와 사쓰마가 막부에 맞서 동맹을 맺기에는 외부인의 설득이 필요했다. 도사 번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가 조슈와 사쓰마 사이에 가교를 놓아주었고, 1866년 비밀리에 삿초 동맹이 맺어졌다.

막부로써는 조슈에 토막파가 복권한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1866년 여름 조슈를 응징하기 위해 군사 행동에 나섰으며 여러 친번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였다.(제 2차 조슈 정벌) 하지만 조슈와 동맹을 맺은 사쓰마는 병력 파견을 거부했고, 사기가 낮았던 막부군은 참패를 당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막부 체제의 붕괴가 현실로 다가왔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도사 번주는 사카모토 료마 등의 조언에 따라 막부에 중재안을 제시하였는데, 막부 대신에 다이묘 회의가 담당하는 상원과 사족들과 서민들로 구성된 하원이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정부를 구성하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1867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 제안에 응해서 막부를 폐지하고 권력을 천황에게 봉환한다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승인하였다. 대정봉환으로 인해 도쿠가와 가문은 쇼군의 지위를 잃지만 여전히 거대한 직할지를 소유하고 상원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이렇게 평화롭게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나 싶었는데, 이러한 중재안은 조슈와 사쓰마의 반란 세력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1867년 11월 조슈와 사쓰마 동맹군은 교토로 진군하여 황거를 확보하였고, 1867년 사망한 고메이 천황에 뒤이어 막 등극한 메이지 천황에게 왕정복고와 도쿠가와 가문의 축출을 선언하게 하였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저항했지만 교토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패했다. 에도로 퇴각한 막부군은 1868년 4월 승산이 없는 싸움을 계속 하기보다는 새로운 질서에 편입하기로 결정하고 전투 없이 에도를 무혈개성하며 항복했다. 이렇게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정부가 수립되면서 일본의 근대화에 포문을 연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반란군을 불신한 친막부 다이묘들은 저항을 계속하였고, 토막파 군대는 북진하여 1869년까지 싸워 이를 진압하여야 했다.(보신 전쟁)

2.3. 제국 헌법 공표까지 (1868~1889)

좁게 보았을 때 메이지 유신이 끝나는 시기를 중앙집권을 이룬 1871년의 폐번치현(廢藩置縣)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이 문서에서는 길게 보아서 1889년 제국 헌법이 발표되어 근대 정부가 구성되는 시점까지 서술한다.

1868년 9월 아직 10대의 어린 나이인 메이지 천황이 즉위식을 올리고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으나 아직 일본의 앞날은 불투명했다.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지만, 실제로 천황이 직접 통치에 나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메이지 유신은 사실상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일부 사족들이 벌인 군사 쿠테타에 불과했고,[16] 다른 번들은 이들이 단순히 새로운 막부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또한 유신에 참여한 사족들은 본래 서양을 배척하자는 양이에서 출발했는데, 결국 막부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자기모순적이었다. 1868년 시점에서 유신의 주요 인사들[17] 앞에는 많은 선택지가 있었고 이들의 결정에 따라 일본의 미래가 크게 바뀔 수 있는 상황이었다.

왕정복고 쿠테타 이후 신정부에게 급한 과제는 중앙집권화, 세수의 확보, 서양 문물의 도입 등이 있었다. 먼저 신정부는 막번제라는 구시대의 정치 질서를 해체하려고 하였다. 다이묘들이 쉽게 권력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저항이 충분히 예상됐으나, 신정부는 면밀한 전술을 세워 3년만에 목적을 달성하였다. 먼저 이들은 1869년 조슈, 사쓰마, 도사, 히젠과 같은 웅번의 다이묘들을 설득해 토지와 백성에 대한 소유권을 자발적으로 천황에게 반환하도록 했다.(판적봉환 版籍奉還) 판적봉환은 어디까지나 요식적인 행위로 여전히 각 다이묘는 지번사(知藩事)로 번의 통치를 계속하였으나, 신정부는 다이묘들을 압박하여 개혁찬성파 사족들이 번정부의 행정직을 차지하도록 획책했다. 그리고 각 번의 유력인사들을 포섭하는 동시에 사쓰마와 조슈의 군대를 중심으로 구성한 황군을 이용해 일련의 공포 분위기를 형성했다. 마침내 1871년 기도 다카요시를 비롯한 메이지 개혁가들은 기습적으로 천황에게 모든 번을 폐지하고 현(縣)으로 대체한다는 선언을 하게 했다.(폐번치현) 대신 다이묘들에게는 과거 자신들이 다스리던 번에서 나오던 연간 징수액의 10%에 상당하는 봉록을 매년 지급받도록 했다.[18] 이러한 조치를 통해 단지 3년만에 일본 전국의 행정 단위는 280개의 번에서 72개의 부현으로 대폭 감소했고, 정부가 각각의 현에 현지사를 파견하였다.

메이지 신정부는 폐번치현을 통해 옛 번에 대한 징세권을 손에 쥐게 되었지만, 다이묘에 대한 상전록과 과거 다이묘들이 대량으로 고용하던 사족에 지급할 가록이라는 엄청난 지급 의무도 떠안게 되었다. 정부는 국가 세입을 확보하기 위해 1874년 오쿠보 도시미치가 발안한 지조개정(地租改正) 조례를 발표했다. 조례에 따라 1870년대 중반 토지 측량이 실시돼, 토지 1필마다 소유자가 정해져 권리증이 발행되었고, 모든 토지에 대해 시장가격을 조사하여 지가의 3%를 지조(地租)로 부과했다. 에도 막부 시절에는 세금을 마을 단위로 수확량에 따라 쌀과 같은 현물로 납부하게 했는데, 지조개정을 통해 농작물의 풍흉에 관계없이 정부가 안정적인 세입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토지의 개인 소유가 인정되고 농민이 어떤 작물을 재배할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서 생산성이 증가했다. 반면에 지조가 농민에게 큰 부담이 되었고, 정부가 농작물의 가격 변동에 따른 위험을 농민에게 전가하는 형태였으며,[19] 아직 토지 측량이 정확하지 않았기에 이후 농민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후 정부는 농민 폭동이 후술할 사족반란과 결합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세율을 2.5%로 낮추었다.

이를 통해 확보한 세수는 자본주의 산업경제의 사회간접자본을 세우는 데 투입되었다. 신정부는 항만을 준설하고 등대를 설치하여 연안수송을 위한 항로를 정비하였으며, 전신용 회선을 부설하고 영국을 본딴 우편제도도 발족했다. 또한 정부가 철도 부설에 나서서, 1872년 도쿄요코하마를 연결하는 일본 최초의 철도가 개통됐고, 1880년대 철도 투자 붐에 힘입어 1890년에는 일본의 총 철도 연장 길이가 약 2,250km에 달하게 되었다. 한편 1871년 을 공용 화폐로 정하고, 1880년대에는 유럽 방식을 본떠서 중앙은행일본은행을 유일한 발권 은행으로 지정하였다.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도입하는 데 있어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871~1873년 기간에 서양으로 파견한 이와쿠라 사절단이었다. 사실 이미 유신 이전인 1860년대 막부 뿐만 아니라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이토 히로부미 등을 유럽으로 유학을 보낸 적이 있기도 하였다. 이번에는 이와쿠라 토모미를 대표로 하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등을 비롯한 신정부 내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수십명 규모의 일행이 18개월 동안 미국과 유럽 12개국을 두루 여행했다.[20] 사절단의 목적은 과거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재협상과 일본 근대화를 위한 정부 고위 관료들의 해외 견학이었다. 그 중 전자에 대해서는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후자에 대해서는 충분히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받고 있다. 사절단은 학교, 공장, 의회 등을 비롯한 모든 기관, 제도, 관행을 시찰하였는데, 이 때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서양식 공공기관이나 시설을 도입했다.

서양을 공부하면서 서구의 힘이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판단한 메이지 정부는 의무교육국민개병도 추진했다. 먼저 정부는 1872년에 모든 어린이에게 4년 간의 초등교육을 의무화하는 새로운 교육제도를 공표했다. 여기에 더해 미국과 프랑스의 교육제도를 본따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로 이루어지는 교육 체계도 만들었다. 하지만 소학교 운영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재산세를 추가로 거뒀기 때문에, 의무교육에 반발하는 폭동이 발생해 2천 곳의 학교가 불에 타서 파괴되기까지 하였다. 의무교육에 대한 반발 때문에 1880년까지 아동의 취학률이 50%를 밑돌았지만, 교육이 천황의 신민이 다해야 할 의무라는 생각이 점차 받아들여지면서 취학률이 상승해 1905년에는 남아의 경우 98%, 여아의 경우에는 93%에 달하게 되었다.

메이지 신정부는 의무교육과 병행하여 군제의 개혁에도 나섰다. 국민개병은 주료 조슈 출신(기도 다카요시, 야마가타 아리토모, 오무라 마스지로 등)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유신을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조슈의 농민+무사 혼성부대가 탁월한 전투력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사쓰마 출신은 대체로 평민으로 군대를 구성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오히려 사족이 새로운 세상의 주역이 되기를 원했다. 신정부의 초기 군대는 이러한 사쓰마 출신의 반대 때문에 무사 중심으로 편성되었는데, 여기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이와쿠라 사절단이었다. 서양을 시찰한 이후 정부 내에서 국민개병의 의견이 우세해져서, 1873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주도한 징병령이 시작되었다. 이 징병령에 따라 20세가 된 모든 남성에게 3년간의 병역과 4년간 예비군 편입이 의무화되었다. 그러나 징병제도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아서, 징병 사무를 보는 사무소를 습격해 파괴하는 폭동이 수도 없이 발생하고 처벌받은 자가 10만명이나 될 정도였다. 일본인이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보여준 것처럼 광신적으로 군국주의에 매몰되는 모습은 수십년간 의무교육을 통해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주입한 뒤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메이지 정부가 빠른 속도로 개혁에 나서는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항상 같은 의견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정부 내부의 갈등이 표면으로 떠오른 대표적인 사건이 정한론을 두고 벌어진 이른바 메이지 6년의 정변이었다. 정한론은 '마치 1853년에 서양 열강들이 일본에 했던 것처럼 무력으로 조선을 개항시켜 무역 소득을 얻고, 필요하다면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자'는 주장이었는데, 이미 에도 막부 말기에 조슈 번의 요시다 쇼인이 조선 정벌을 주장한 바 있으며, 조선과의 통상을 원하던 일본의 무역상들도 정한론을 지지하고 있었다. 정부내 정한파의 대표적인 인물에는 사쓰마 출신 사이고 다카모리와 도사 출신의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있었다. 사이고를 위시한 이들 정한파는 정부의 다른 주요 인사들이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해외에 나가있는 동안 조선 침략을 밀어붙였다. 메이지 6년인 1873년 사이고가 급발진하면서 일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급히 귀국하여 정한파의 계획을 겨우 저지하였고,[21] 결국 정권 다툼에서 패한 사이고와 다른 정한파 사족들은 사표를 내고 귀향하였다. 정부 내의 균열은 여기에 그치지 않아서 다음해에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한파 사족들을 달래기 위해 타이완 섬에 대한 소규모 출정을 승인하자, 기도 다카요시가 정한론 때와 같은 이유로 타이완 출병에 반발하여 사직하기도 하였다.

메이지 초반에 벌어진 많은 개혁 중에서도 혁명적이면서도 차후 큰 대가를 치르게 된 사건은 무사 계급의 폐지일 것이다. 메이지 정부가 사족의 폐지를 점진적으로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3년만에 주도면밀하게 해치울 수 있었던 폐번치현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거의 10년이나 걸렸으며, 결과적으로도 많은 구사족의 노여움을 샀다. 정부는 먼저 1872년 하층 무사들을 대상으로 가록은 유지시킨 상태에서 신분을 평민으로 바꾸었다. 이어서 1874년 가록을 5년 혹은 14년 만기의 공채로 바꾸는 제도를 도입하였고 1876년 이 제도를 모든 사족에 대해 강제적으로 실시하였다.(질록처분 秩禄処分) 가록을 보장받은 옛 다이묘들과는 달리 사족의 수입은 질록처분에 의해 급감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정부는 민간인이 칼을 휴대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미 1871년 사족에게 서양식 머리를 할 자유와 칼을 휴대하지 않을 자유를 주는 산발탈도령(散髪脱刀令)을 발표한 바 있었는데, 1876년 폐도령(廃刀令)이 발호되어 아예 군인, 경찰, 대례복 착용자 이외에는 칼을 휴대하고 다니는 것이 금지되었다. 전근대 일본에서 칼은 무기로써의 기능보다는 특권신분의 표징이라는 의미가 강했기 때문에, 폐도령은 많은 사족들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1870년대 중반이 되자 메이지 신정부의 개혁에 분노한 사족들의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정부에 반발하는 사족은 크게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한 부류는 과거 유신에 함께했던 동료들 중에서 일부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에 분개한 진보적 사족들로, 정부에 권력의 문호를 넓히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다른 부류는 보수적인 사족들로 지나치게 빠른 근대화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과거의 질서로 회귀하기를 원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질록처분으로 인한 경제적 곤궁과 폐도령에 대한 반발은 사족들의 불만에 더욱 불을 지폈다. 이 때문에 1874년 히젠 번(사가라고도 함)에서 일어난 사가의 난을 시작으로 히고(구마모토), 아키쓰키, 조슈 순으로의 사족 반란이 발생했다. 정부는 빠른 정보 전달과 병력의 신속한 이동을 가능하게 해준 신문물 덕에 이 반란들을 조기에 진압할 수 있었다. 사족 반란이 절정에 달한것은 1877년에 발생한 세이난 전쟁으로, 정한론 논쟁에서 패하고 고향인 사쓰마로 귀향했던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뭉친 반정부 사족들이 사쓰마에서 출발하여 도쿄를 향해 진격했다. 반란군이 사쓰마의 이웃인 구마모토 현에 진입했을 때는 군세가 4만명까지 불어나 있었지만, 정부군이 격렬한 전투 끝에 어렵게 반란을 진압하였다. 세이난 전쟁은 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지만,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시킬 수 없다는 현실이 명확해지면서 더 이상의 사족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편 무장 반란이라는 극단적 방식과는 다르게 보다 온건한 방식으로 메이지 신정부에 도전장을 내민 정치적 동력도 있었는데, 민주주의의 도입을 요구한 자유민권운동이었다.[22] 초기 자유민권운동에서 중요한 인물은 정한론 논쟁에서 패하고 사직했던 이타가키 다이스케로, 그는 애국공당을 설립하고 1874년 의회의 설립을 요구하는 '민선의원 설립 건백서'를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타가키가 설립한 결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했지만, 187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민권운동가들이 등장하였고, 이들이 설립한 단체들이 점차 2개의 정당[23]으로 통합되면서 목소리가 커졌다. 정부는 1880년대 중반까지 민권파를 탄압하였지만, 결국 정부내 의견은 민권운동의 요구를 수용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자유민권운동이 이렇게 정부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반면에 정부의 고위 인사들에게 민중에게 너무 많은 권리를 주는 것은 위험하다고 확신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881년 메이지 정부는 천황에게 1890년까지 헌법을 발효시킨다는 칙유를 발표하게 하였으며, 188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유럽으로 파견하여 독일 제국의 제도를 연구하게 하였다. 1883년에 귀국한 이토는 이노우에 고와시와 함께 헌법 제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888년 헌법초안이 작성되어 헌법심의를 위해 만든 추밀원(枢密院)에서 정부 최고수뇌들의 심의에 붙여졌다.[24] 마침내 1889년 2월 천황이 국민들에게 선물로 하사하는 형식으로 대일본제국 헌법이 발표되었다. 제국 헌법은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헌법이 아니라 독일의 전례를 따라서 군주의 권한이 강한 헌법으로 천황이 주권자임을 명시하였다. 천황 밑으로 입법(제국 의회), 사법, 행정의 3권분립을 규정하였지만, 육해군의 통수권자를 정부가 아닌 천황으로 정함으로써 군부가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었다. 이는 수십년 뒤 군부가 천황의 이름으로 전권을 휘두르면서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가 되는 배경이 되었다.

2.4. 메이지 유신과 그레이트 게임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19세기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패권 경쟁인 그레이트 게임과 시기가 겹친다.[25] 이 때문에 영국이 동아시아의 동맹세력을 찾는 과정에서, 영국은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고 이후 성립된 일본 제국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다만 여기서 일본이 근대화라는 과업을 이룬 것이 순전히 영국의 도움 덕분이었다는 식으로 확대해석해서는 안된다.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로 진출하여 영국의 이익에 위협이 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유신보다 10년 이상 뒤의 일이고, 그 이전의 영국은 중국에서 재화를 뜯어내는데 골몰하느라 일본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정론에 가까운 관점은 일본 스스로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에 성공한 것을 본 이후에 영국이 일본을 대러시아 전선의 파트너로 삼았다는 것이고, 영미권 역사학자들 거의 모두가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26]

먼저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영국이 일본에 개입한 것은 오랜 앙숙인 프랑스를 엿먹이기 위한 의도가 적잖이 있었다. 유신 이전에 막부는 프랑스로부터 지원을 받았는데, 프랑스는 막부가 서양식 무기를 구입할 수 있도록 차관을 제공하고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는등 막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이 때 영국은 프랑스와 반대로 토막파를 지원하여[27] 메이지 유신의 성공에 기여하였다.

이후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고 일본이 빠르게 서구식 제도와 기술을 습득하자 영국은 일본을 높게 평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1899년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발발했을 때 8개국 연합군 중에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하자, 영국은 일본을 유럽의 중소국가들과 대등한 위치로 놓고 평가하였고, 1894년에는 서양 국가들 중에 가장 먼저 과거 개항 시기에 일본과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고쳐주기까지 했다.

당시 영국은 러시아와 소위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는 중이었다. 러시아는 예전부터 부동항을 찾아 꾸준히 남하해오고 있었고, 이러한 러시아의 시도는 1850년 동유럽에서 벌어진 크림 전쟁의 패배로 인해 좌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이후에도 중앙아시아동아시아에 걸쳐 끊임없이 기회를 엿보며 영국의 이익과 충돌하고 있었다. 영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 지구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대영제국에는 해가 저물지 않는다"라고 불리는 초강대국이었지만, 반면에 너무 넓은 지역에서 너무 많은 식민지를 경영했기 때문에 멀리 동아시아까지 충분한 전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 서구열강의 식민지가 없는 이유다.

참고로 이전 버전의 문서에서 "대영 제국 전체의 인구 중에 영국 본토의 인구는 15%에 불과했기 때문에, 본토의 영국인이 다 군대를 가도 저 식민지 지역을 지키기가 벅찰 정도였다"는 서술이 있었는데, 사실 영국이 식민지 쟁탈전에 동원한 군대의 거의 대부분은 현지인 용병이었기 때문에 맞지 않는 서술이다. 19세기 식민지 영국군의 일반 보병이나 기병은 거의 현지인으로 충당되었는데, 북부와 중부 아프리카에서 사용할 군대는 이집트에서 모집하고, 인도에서는 시크교도구르카족 용병을 사용하는 식이었다.[28] 이 때문에 식민지 영국군에서 영국 본토 출신은 장교포병과 같이 중화기를 다루는 부대의 병사 등 소수에 불과했다. 또한 식민지 행정을 담당하는 하급 관료도 아프리카에는 인도인을 데려다가 쓰고, 미얀마에는 방글라데시인을 데려다가 쓰는 등 식민지 출신을 주로 발탁했기 때문에, 식민지 경영을 위해 필요한 영국 본토인의 수는 방대한 식민지 규모에 비해서 한줌에 불과했다. 영국이 식민지를 경영했던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였고, 그렇게 식민지에서 들어온 돈으로 식민지 출신을 고용해서 제국을 운영했다.

한편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청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이탈시키면서 조선을 자신의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조선은 일본의 입김이 거세지자 이이제이의 전략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여 대항하였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러시아의 남하 시도는 노골적이었는데, 러시아는 1898년 청나라로부터 뤼순다롄 등을 조차받아 만주연해주로 진출하였고, 조선에서도 일본의 지위에 적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택한 것이 일본이다. 영국은 1902년에 일본과 동맹을 맺었고, 1904년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을 지원했으며, 이러한 영국의 지원에 힘입어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또한 일본은 당시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영국과의 동맹을 통해 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고, 더 이상 경쟁자가 사라진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영국과 일본의 동맹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이유는 일본이 조선에 이어 중국까지 식민지화 하려는 야욕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마자 영국측 진영의 일원으로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하고 참전해서 칭다오를 비롯한 산둥 반도의 독일 조차지와 철도 등을 접수하였으며, 1915년 1월에는 중국의 위안스카이 정권에 악명높은 21개조 요구를 들이댔던 것이다. 그래도 일본은 1920년대 중반까지 영국과 미국이 일본의 급발진을 제지할때마다 어느정도 타협하며 물러났었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 서구 열강 국가들이 중국의 자주권을 인정하며 중국에서 서서히 물러났던 것과는 반대로, 일본은 끊임없이 이 공백기를 이용해 만주와 중국 북부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결국 1930년대에 들어와서 영국과 일본의 관계는 파탄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3. 근현대 한자어의 탄생

현재 동아시아에서 사용하는 한자어(漢字語)들 중에는 메이지 유신 시기 일본에서 근대식 번역어로 선택되고 자주 사용하게 된 것들이 있다. 근대적 개념들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많이 쓰이던 한자어나 중국의 고전에 있던 한자어로 번역하여 차용한 것들이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같은 당대의 석학들은 1873년 메이로쿠샤(明六社)라는 학술 단체를 결성해서 한자 용어들을 번역어로 차용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사회(社會)'라는 단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외국어를 한자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고전에 있던 단어를 서구의 society에 맞춰서 번역한 한자어이다. 이후 'society'에 해당하는 동양 한자권의 단어로 널리 쓰이고 있다. 회사(會社)는 사회를 거꾸로 뒤집은 것이지만 영어의 Company를 번역했다.

'철학(哲學)'도 마찬가지다. 'philosophy'를 '철학'으로 번역한 것이다. 한국에서 자주 사용하는 ‘개인’(個人)도 마찬가지로 일본 학자들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거치면서 영어의 ‘individual’을 한자어(漢字語) '개인'(個人)으로 번역한 것이다.

'민주주의'(民主主義)도 그렇다. 'Democracy'를 민주주의로 번역한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자유'(自由)라는 단어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인 학자들이 서구권의 서적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선택한 한자 번역어(翻譯語)다. 원래 중국의 고전에도 있었던 단어이고, 영어의 liberty, freedom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던 '自由'를 근대적 의미로 새롭게 전용한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에서는 자유를 '제멋대로'라는 의미로 사용했는 데, 이로 인해 일본 사람들은 '자유(自由)'라는 단어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바뀌었다고 한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서구에서 유입된 외국어와 개념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자(漢字)를 사용해 만든 단어는 '개인'(個人) 뿐만 아니라 '민족(民族)', '자유'(自由), '권리'(權利), '사진'(寫眞), '헌법'(憲法), '내각제'(内閣制), '대통령'(大統領) 등이 있다. 현대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상당수 근대 한자 단어들이 메이지 유신 직후에 일본인 학자들이 주로 중국고전에서 발굴하고 선택하여 번역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군계급도 일본식 한자어로 번역된 것에서 유래한 계급들이 일부있다. 하사(下士), 소위(少尉), 소장(少將)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주요 근대 한자어들 중 상당수는 실제로는 이미 조선중국에서도 오래전부터 쓰이던 단어들에 단순히 서구식 개념만을 추가하는 방식 또는 이미 고전에 있던 단어들을 그대로 번역어로 선택해서 차용하는 방식으로 재탄생한 경우들이 상당수였다. 실제로 인민(人民), 문화(文化), 공화제(共和制), 국가(國家), 주의(主義), 사상(思想), 운동(運動), 노동(勞動), 국민(國民), 경제(經濟) 같은 단어들은 검색해 보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링크 즉, 아예 없던 단어들을 힘들게 창조하기 보다는 이미 한자 문화권에 존재하던 기존 단어들에 서구식 의미만을 번역과 차용 과정에서 새롭게 의미 부여를 해준 경우들이 대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하지만 '같은 무리끼리 모여 이루는 집단'을 뜻하는 '사회'(社會)라는 단어도 원래는 중국의 고전인 <근사록>에 이미 나오던 단어였지만 이후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에서 영어 Society의 번역어로서 중국 고전에 나오던 사회(社會)라는 단어를 선택함에 따라 지금의 의미로 주로 쓰이게 된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근대 일본식 한자어에 대해 "일본제 한자조어(和製漢語) (화제한어, 일본어 발음 : 와세이칸고[わせいかんご]) 는, 일본에서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한자어로서 고전 중국어·근대 북방 중국어의 어휘·어법·문법을 기반으로 참조하면서, 때에 따라 일본어의 어휘·어법·문법의 영향 (일본스러운 뉘앙스) 을 섞어서 조어(造語)되었으며, 일본제 한자조어(和製漢語)」 가 의미하는 범위는 학자에 따라 각기 다르고, 통일된 견해가 없으며, 「공화(共和)」 처럼, 고전 중국어에 용례가 있어도, 새롭게 일본인이 근대적 개념·의미를 넣어 사용하게 된 경우도 「일본제 한자조어(和製漢語)」 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예를 들어 순한자어였어도 일본에서 오랜 세월 어떤 일정한 의미 변화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의 확장만으로 일본제 한자조어(和製漢語)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도 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공화(共和)나 인민(人民), 주의(主義) 같은 이미 한자 문화권에서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단어들에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이 단순히 서구식 의미만을 새롭게 추가한 경우들에는 과연 그러한 단어들도 일본식 근대 한자어로 볼 수 있는지 일본내에서도 논란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서구의 여러 개념들에 해당하는 적절한 단어들이 없어서 고심하던 근대화 당시 일본의 일면을 보여준다. 일본 지식인들의 한학전통(漢學傳統)에 대한 존중과 낯선 외국어를 한자가 아닌 가나를 이용해서 원어 그대로 받아들이고 표기하기 보다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를 만들기 위한 노력에 따라, 조어력이 빈약한 일본 고유어에 견주어 왕성한 조어력을 갖춘 고전 중국어·근대 북방 중국어의 어휘·어법·문법을 기반으로 참조하면서, 때에 따라 일본어의 어휘·어법·문법의 영향을 섞는 방식을 통해 서구 용어의 번역어로서 원어들을 가나로 표기하기 보다는, 고전에 등장하거나 이미 오래전 부터 쓰였던 익숙한 중국식 한자와 한자어를 써서 번역, 차용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구 용어인 Democracy가나를 사용해 デモクラシー(데모크라시)로 번역하는 게 아닌 한자民主主義(민주주의)로 번역하는 식이었다.

만약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 지식인들이 한자어와 중국 고전에 대한 지식이 매우 부족했다면 society(사회)나 Company(회사), liberty(자유) 같은 '서구식 용어'들은 중국식 한자어들이 아닌 테레비(テレビ)의 경우처럼 일본의 가나로 주로 표기되고 직번역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민주주의 할 때의 민주(民主)라는 단어도 단어 그 자체는 중국의 고전인 '서경'에도 등장하는 오래된 단어였지만 의미는 지금 현재의 민주와는 다른 의미였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 데모크라시(Democracy)의 번역어로 선택된 경우로서 가나를 사용해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로 발음 그대로 직번역해서 사용하지 않고 한자인 민주주의(民主主義)로 번역을 하였다. 이는 당대 일본 지식인들이 고전 중국어·근대 북방 중국어의 어휘·어법·문법에 대해서 해박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번역과 차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외래어를 그대로 쓰지 않고 동양 고전에 있는 단어들로 번역한 것은 당대 학자들이 동양 또한 서양 못지 않다는 점을 어필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였다.

참고로 중국식 근대 한자어인데 일본식 근대 한자어로 착각하는 경우들도 일부 있다. 대표적으로 삐라의 번역어인 전단 또한 1920년대 쑨원의 중국 혁명세력이 군벌들을 상대로 뿌린 선전물을 가리키던 중국식 근대 한자어이다.

4. 조선에 끼친 영향

이때부터 국서(서계)의 발신자가 쇼군에서 천황으로 바뀌었는데, 일본이 이렇게 개항을 결정하던 사이 청나라는 한창 서양 열강들과 아편전쟁을 겪으며 차차 개항을 해 나간 덕에 그냥 서양과 직접적으로 근대적 외교 관례에 맞춘 조약을 체결해서, 아편전쟁만 제외하면 개항 과정 성공 이후 그리 큰 피해는 없었다.

문제는 아직 통상 수교를 거부하고 있던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조선(한국). 조선이 준 도서(圖署)가 아닌 새로 만든 도장을 사용한 점과 천황, 황조 등 청나라나 사용할 수 있는 황칙의 용어를 일본이 쓴 것(즉 기존 화이질서의 위계상 일본<조선)에 심히 불쾌해하며 국서(서계)의 접수 자체를 반환·거부해버렸다. 186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국서 거부 사건(서계 거부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후 일본은 다시 조약을 맺자고 제의했지만 흥선대원군은 또 거부했다.[29]

1872년 당시엔 점점 골이 깊어지다가 소요 사태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정식으로 국교가 단절되기까지 했으며 그전에 이미 조선 통신사가 50년간 교류가 없었다는 점에서 근세의 조일관계가 유명무실화되었다. 이에 더욱 격노한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일시적으로 힘을 얻었지만 척화파인 흥선대원군과 정한론 강경파(사이고 다카모리)가 양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실각하였다. 두 나라 모두 다시금 협상을 시도했지만, 수뇌부만 어느 정도 잘렸을 뿐이지 양국 모두 그 당시엔 척화파/정한론이 주 파벌이었기에 협상도 의미 없이 계속 결렬되고 그 와중 운요호 사건까지 터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선을 건너버렸다.[30]

또 그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청(清) 이외에 서양권 국가들과의 교류 및 개방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고 그 범위에는 일본도 포함되어 있다. 이미 그 전에 병인양요신미양요를 겪은 이후로 양란(洋亂)이 연이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을 필두로 쇄국정책이 시행되고 있었으며 또한 서양에 문호개방을 한 일본에게도 적개심과 불편함을 드러내었다.

4.1. 조선과 일본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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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련 문서

5.1. 시대적 사건

5.2. 조직

5.3. 사상

5.4. 인물

5.5. 창작물

메이지 유신을 다루는 창작물들.

[1] 1867년 대정봉환 당시의 그림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로부터 22년 뒤인 1889년 제국헌법 제정을 묘사한 그림이다. 엄밀히 말해 메이지 유신 이전 에도 막부 말까지만 해도 저런 서양식 제복을 입은 일본 관료는 없었다고 보면 된다. 다만 메이지 유신이 특정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 일련의 '과정'이므로 저 그림이 메이지 유신을 묘사한 그림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2] 단군이 통치했던 나라도 그냥 '조선'이지만 현대에는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부르는 것처럼 생각하면 쉽다.[3] 현재의 도쿄.[4] 이후 '사족'이라고도 표현함.[5] 해안선에서 가장 먼 내륙 지역도 바다에서 13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6] 사실 적극적으로 공격할 필요도 없이 그냥 도쿄만 입구에 군함 몇 척 띄워놓고 에도로 들어가는 물자만 막아버려도 에도 막부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포함외교 참조.[7] 원래부터 외국과의 조약은 천황의 결제가 있어야 하는 사항이지만, 실권을 막부에 빼앗긴 명목상의 군주였던 천황은 막부의 결정에 대한 거수기에 불과했다. 이 때와의 차이점은 '개항에 대한 천황의 결정을 막부가 받든다'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잘못을 천황에게 떠넘기려고 했다는 것이다.[8] 오랑캐, 서구인[9] 여러 번 중에서도 세력이 강한 번[10] 다만 사쓰마 번의 경우에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다이묘가 막부의 편에 서 있었다.[11] 누에 고치에서 나온 실[12] 이라고 쓰고 밀무역이라고 읽는다.[13] 물론 막부에게는 막부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좁은 의미였다.[14] 외세를 물리침.[15]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뒤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에도 막부를 세운 이래로 250년이 넘게 농민이 무기를 소유하거나 군사 훈련을 받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있었다.[16] 도사 번과 히젠 번이 뒤늦게 반란에 가담했지만, 신정부 내에서의 발언권은 사쓰마와 조슈에 비해 거의 없다시피 했다.[17] 예를 들어, 유신삼걸(維新三傑)이라고 불리는 조슈의 기도 다카요시,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오쿠보 도시미치[18] 10%가 적어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영지의 통치 비용으로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느라 적자에 시달리던 다이묘들도 많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군말없이 물러났다.[19] 세금이 토지의 가격에 연동되어 농작물의 가격과는 무관하게 되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농작물 가격이 상승하면 농민이 이득, 반대로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농민이 손해를 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물가가 조금씩 상승하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당시 일본은 금본위제를 고수하는 과정에서 디플레이션이 발생하였고, 결국 지조는 농민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20] 사절단 이외에도 수십명 규모의 유학생을 데려갔는데, 이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공부하고 귀국해 이후 일본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재 풀이 되었다.[21] 이들이 단순히 조선과의 평화적인 관계를 원해서 정한론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일본의 조선 출병이 열강들의 주목을 끌게 되어 실패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대신에 먼저 내부 개혁을 수행하여 국력을 신장시키고 나중에 조선에 진출하면 된다는 입장에 가까웠다.[22] 자유민권운동이 온건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무장 반란과 같이 극단적 수단을 획책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완전히 비폭력주의 운동이었다는 것은 아니다.[23] 자유당과 입헌개진당[24] 추밀원은 헌법이 공표된 이후에도 종속하여, 일본 정치를 배후에서 주무르는 초헌법적인 기관이 되었다. 추밀원의 구성원들을 겐로(元老)라고 부른다.[25] 영국은 19세기 당시부터 1945년까지 세계 패권국이었다.[26] 예를 들어 하버드 대학교의 일본 근현대사 교수인 앤드류 고든(Andrew Gordon)[27] 영국은 만약을 대비해서 막부에도 줄을 대기는 했다.[28] 원래 영국은 벵골 지역에서 모집한 힌두교도이슬람교도로 인도 용병을 구성하였지만, 1857년에 발생한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시크교도와 구르카족으로 바꾸었다[29] 이에 대해 중계지점인 쓰시마 섬의 책임자가 독단으로 국서(서계)를 먼저 읽고 양국이 불편한말한 단어 등은 살짝 고쳐서 보낸 일이 있었기에 그게 빌미라고 하지만 쓰시마 섬 책임자가 바보도 아니고 발신자를 바꿔적으며 일부 수정을 거쳤다는 사실은 양국에 확실히 밝혔다. 애초에 조사하면 다 나올 일이었으니 그 당시로선 양국의 중계지점일 뿐인 쓰시마섬(対馬)으로선 그런 독단을 똥배짱으로 밀어붙이기는 무리였다. 즉 중계지점인 쓰시마 섬 측의 독단은 큰 의미가 없었고 문제는 양국의 외교에 대한 태도였다. 외교문서이니만큼 일본 측은 정부가 바뀐 만큼 따라서 바뀌는 관례가 있으면 먼저 조선 측에 알려줬어야 했지만, 사전에 알리지도 않았고 조선 측도 그나마 서계를 받은 이후라도 일본 측에 제의하던지 해서 합의보면 될 것을 건방지다고 올바르지 않은 관례 운운하면서 일체의 타협도 보지 않아 서로 간의 골이 깊어진 게 문제였다.[30] 애초에 강경파가 실각당했을 뿐이지 지금 당장이 아니라 조금 뒤에 하자는 일단 정한론 자체는 긍정하는 사람들이 온건파인 시점이었기 때문에 조선 침략은 수단이나 기간만 안 정해져서 그렇지 일본 내에선 사실상 정해진 사항이었다.[31] 사쓰마 번 무사들이 서로 칼부림을 한 사건[32] 테라다야 사건으로 조정의 신임을 얻은 사쓰마 번이 주도한 막부 개혁[33] 번에서 쫓겨난 타카스기 신사쿠가 번의 정책을 막부 토벌로 되돌리기 위해 벌인 쿠데타[34] 삿쵸동맹 이후로 막부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포박하기 위해 급습했던 사건[35] 사카모토 료마가 기슈 번에게 살해되었다고 믿은 해원대의 대원들이 기슈 번의 미우라 규타로를 습격해, 그를 호위하던 신센구미와 칼부림을 한 사건.[36] 오쿠보 도시미치의 암살 사건[37]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조직한 번의 정치결사단체[38] 말 타는 기병이 아니라 기발한 군대라는 뜻이다.[39] 주일 영국 공사로서 에도막부를 지원하고 있던 프랑스와 경쟁해 조슈와 사쓰마 등 웅번 연합을 지원하였다.[40] 해리 파크 휘하의 영국 외교관. 해당 항목으로.[41] 스코틀랜드계 영국인이다. 당시 동아시아 무역을 주름잡던 Jardine & Matheson Co.란 영국 상사의 직원으로 일본에 와서 무기 밀수를 포함한 다양한 밀무역을 활성화 시켰다. 글로버는 회사의 자본과 네트워크를 동원해 사쓰마와 조슈에 최신 무기를 넘겨주는 한편, 당시 그 어떤 일본인도 에도막부의 승인 없이 국외에 나갈 수 없었음에도 사쓰마와 조슈의 청년 인재들을 영국에 몰래 보내주기도 하고(이토 히로부미가 그 중 한 명이었다.) 무역에 특혜도 주었다. 일본 제국이 성립된 이후 일본 정부는 그에게 제국 해군을 위한 첫 증기선 군함의 사업권을 주어 호의를 갚았다. 이후에도 계속 일본에 남아 오늘날에도 일본 최대의 기업집단이 되는 미쓰비시의 설립에 관여하는 등 산업화에 기여해 훈장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