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23 14:48:17

메이지 유신

일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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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발포약도.[1]
1. 개요2. 조선에 미친 영향3. 조선은 왜 개혁을 하지 못했나?4. 관련 문서
4.1. 시대적 사건4.2. 조직4.3. 사상4.4. 인물

1. 개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19세기일본에도 막부미국개항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굴복하고 조약을 체결하며 국호를 개방하자, 이에 반발한 막부 타도 세력과 왕정복고 세력(대표적으로 조슈 번)에 의해 막부가 실권하고(1867년대정봉환) 일본이 덴노 중심의 국가로 복고, 이후 서구화가 진행되며 근대국가화된 일련의 대사건을 말한다. 대개 개시 시기는 메이지(明治) 연호가 시작된 1868년으로 본다.

한국에선 한자음 그대로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도 부르며, 일본에선 그냥 유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메이지 유신이라는 말은 현대에 쓰이는 역사 용어[2]로, 당시에는 '고잇신(御一新, 어일신)' 등으로 불렸다.[3]

유신 3걸(사이고 타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로 대표되는 신흥 세력에 의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와쿠라 토모미는 그 중에서 최강의 흑막. 물론 그 배후에는 또 조슈 번요시다 쇼인이 있었고, 그의 제자들이 에도 막부를 타도하고 개국을 추진하게 되니 가장 큰 공로자는 요시다 쇼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4]

원래 메이지 유신을 시작한 세력들의 의도는 나라의 지도자(이자 실권자)를 막부에서 고메이 덴노로 바꾸고 쇄국은 이어가자는 순수한 존황양이의 사상이었지만, 사쓰마코마츠 타테와키삿초 동맹에서 삿토 맹약, 마지막으로 사카모토 료마의 '신정부강령팔책'에 따른 도쿠가와 막부 타도 직후 갑자기 전면 개국(全面開國)이라는 결론이 되어버렸다.

대강 보면 이해가 힘들지만 여러 상황들을 다 살펴보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걸 알 수 있는데, 우선 이 당시 정변을 주도했던 지역이 사쓰마조슈 두 번이었고 그 중에서 막부와의 공무합체(公武合体)를 추구하는 집단으로 잔류 중이던 사쓰마 번 소속의 무사가 '사소한 무례'를 이유로 영국인을 살해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 그 이후로는 반막부 세력(신정부군)과 영국 상인들 사이에 무구(武具), 조선(造船) 통상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개군(改軍) 현상을 돋보였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비교적 적은 사건으로 끝난 사쓰마와 달리 조슈는 도막(막부 토벌) 정신으로만 일관하면서 존황양이 의식을 일으키고 1864년에는 아예 시모노세키를 항해하는 4개 외국 양선(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에 발포하기까지 했으나, 곧 조슈 번도 열강의 보복으로 국력의 격차를 실감하고 도막 정책으로 항거하는 개국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전면 개항을 한 것도 이 때의 경험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일본도 막부 체제 하에서 어느 정도 서양화가 이뤄졌지만, 화혼양재라는 명목 하에 그다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에 이와쿠라 토모미, 이토 히로부미 등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여 직접 견학하고 서양의 문물, 제도 등 많은 걸 배웠는데, 이런 배움 속에서 내린 결론은 전면 개방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국내에서 반발이 없을 리 없고 사가 번 → 히고(구마모토) 번 → 아키쓰키 번 → 조슈 번 순으로의 사족 반란이 발생했다. 이후로도 신정부에서 정한론이 무산된 점과 산발탈도령(단발령+폐도령)에 항거한 사쓰마 번 사무라이들은 특권계급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뭉쳤고, 이들이 일으킨 반란이 바로 서남전쟁(현재까지 일본 내의 마지막 내전)이었지만 결국 진압되고 개항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2. 조선에 미친 영향

이때부터 국서(서계)의 발신자가 쇼군에서 덴노(천황)로 바뀌게 되었는데, 일본이 이렇게 개항을 결정하던 사이 청나라는 한창 마약 하나를 빌미로 서양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고 삥 뜯기던 시절(?)을 겪으며 차차 개항해나간 덕에 그냥 서양과 직접적으로 근대적 외교 관례에 맞춘 조약을 체결해서 아편전쟁만 빼면 개항 과정 실패 이후 그리 큰 피해는 없었다.

문제는 아직 통상 수교를 거부하고 있던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조선(한국).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새로 만든 도장을 사용한 점과 천황, 황조 등 청나라나 사용할 수 있는 황칙의 용어를 일본이 쓴 것(즉 기존 화이질서의 위계상 일본>조선)에 심히 불쾌해하며 국서(서계)의 접수 자체를 반환·거부해버렸다. 186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국서 거부 사건(서계 거부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후 일본은 다시 조약을 맺자고 제의했지만 흥선대원군은 또 거부했다.[5]

1872년 당시엔 점점 골이 깊어지다가 소요 사태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정식으로 국교가 단절되기까지 했으며 그전에 이미 조선 통신사가 50년간 교류가 없었다는 점에서 근세의 조일관계가 유명무실화되었다. 이에 더욱 격노한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일시적으로 힘을 얻었지만 척화파인 흥선대원군과 정한론 강경파(사이고 다카모리)가 양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실각하였다. 두 나라 모두 다시금 협상을 시도했지만, 수뇌부만 어느 정도 잘렸을 뿐이지 양국 모두 그 당시엔 척화파/정한론이 주 파벌이었기에 협상도 의미 없이 계속 결렬되고 그 와중 운요호 사건까지 터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선을 건너버렸다.[6] 그리고 이때 가지게 된 악감정의 영향으로 '일본은 상국, 조선은 하국'이란 인식이 일본 내에 퍼지면서 고종명성황후 민씨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왕'과 '민비'가 등장했다. 당시와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1910년 8월 29일)했을 동안엔 이게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1945년 8.15 광복이 온 이후 대한민국에서 의외의 부분에서 은근히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는데 영향을 줬다고 한다.

3. 조선은 왜 개혁을 하지 못했나?

내용이 길어져서 분리되었다. 메이지 유신/조선과 일본의 차이점 문서를 참조.

4. 관련 문서

4.1. 시대적 사건

4.2. 조직

4.3. 사상

4.4. 인물



[1] 대정봉환 당시의 그림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로부터 22년 뒤인 제국헌법 제정(1889년)을 묘사한 그림이다. 엄밀히 말해 메이지 유신 이전 에도막부(도쿠가와 막부) 말까지만 해도 저런 서양식 제복을 입은 일본 관료는 없었다고 보면 된다. 다만, 메이지 유신이 특정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 일련의 '과정'이므로 저 그림이 메이지 유신을 묘사한 그림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2] 단군이 통치했던 나라도 그냥 '조선'이지만 현대에는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부르는 것처럼 생각하면 쉽다. 아니면 서로마가 망하고 남은 동로마비잔티움이라고 부른다든가.[3]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에서 메이지 유신이 아닌, '어일신'이라 부르는 등 고증에 충실하는 모습을 보인다.[4] SBS 그것이 알고싶다 931회 "조슈 번의 후예들 - 왜 안중근을 죽이는가" 편(2014년 3월 15일 방송) 참고.[5] 이에 대해 중계지점인 쓰시마 섬의 책임자가 독단으로 국서(서계)를 먼저 읽고 양국이 불편한말한 단어 등은 살짝 고쳐서 보낸 일이 있었기에 그게 빌미라고 하지만 쓰시마 섬 책임자가 바보도 아니고 발신자를 바꿔적으며 일부 수정을 거쳤다는 사실은 양국에 확실히 밝혔다. 애초에 조사하면 다 나올 일이었으니 그 당시로선 양국의 중계지점일뿐인 쓰시마 섬(대마도)으로선 그런 독단을 똥배짱으로 밀어붙이는 건 무리였다. 즉 중계지점인 쓰시마 섬 측의 독단은 큰 의미가 없었고 문제는 양국의 외교에 대한 태도였는데 외교문서이니만큼 일본 측은 정부가 바뀐 만큼 따라서 바뀌는 관례가 있으면 먼저 조선 측에 알려줬어야 했지만 사전에 알리지도 않았고 조선 측도 그나마 서계를 받은 이후라도 일본 측에 제의를 하던지 해서 합의보면 될 것을 건방지다고 올바르지 않은 관례 운운하면서 일체의 타협도 보지 않아 서로 간의 골이 깊어진 게 문제였다.[6] 애초에 강경파가 실각당했을 뿐이지 지금 당장이 아니라 조금 뒤에 하자는 일단 정한론 자체는 긍정하는 사람들이 온건파인 시점이었기 때문에 조선 침략은 수단이나 기간만 안 정해져서 그렇지 일본 내에선 사실상 정해진 사항이었다. 일본 측 관점에선 그나마 운요호는 이런 일본 측 나름의 마지막 배려였던 셈이었지만 그게 그대로 터지면서 선도발을 당했던 셈.[7] 사쓰마 번 무사들이 서로 칼부림을 한 사건[8] 테라다야 사건으로 조정의 신임을 얻은 사쓰마 번이 주도한 막부 개혁[9] 번에서 쫓겨난 타카스기 신사쿠가 번의 정책을 막부 토벌로 되돌리기 위해 벌인 쿠데타[10] 삿쵸동맹 이후로 막부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포박하기 위해 급습했던 사건[11] 사카모토 료마가 기슈 번에게 살해되었다고 믿은 해원대의 대원들이 기슈 번의 미우라 규타로를 습격해, 그를 호위하던 신센구미와 칼부림을 한 사건.[12] 오쿠보 도시미치의 암살 사건[13]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조직한 번의 정치결사단체[14] 주일 영국 공사로서 에도막부를 지원하고 있던 프랑스와 경쟁해 조슈와 사쓰마 등 웅번 연합을 지원하였다.[15] 해리 파크 휘하의 영국 외교관, 항목참조[16] 당시 동아시아 무역을 주름잡던 Jardine & Matheson Co.란 영국 상사의 직원으로 일본에 와서 무기 밀수를 포함한 다양한 밀무역을 활성화 시켰다. 글로버는 회사의 자본과 네트워크를 동원해 사쓰마와 조슈에 최신 무기를 넘겨주는 한편, 당시 그 어떤 일본인도 에도막부의 승인 없이 국외에 나갈 수 없었음에도 사쓰마와 조슈의 청년 인재들을 영국에 몰래 보내주기도 하고(이토 히로부미가 그 중 한 명이었다.) 무역에 특혜도 주었다. 일본 제국이 성립된 이후 일본 정부는 그에게 제국 해군을 위한 첫 증기선 군함의 사업권을 주어 호의를 갚았다. 이후에도 계속 일본에 남아 오늘날에도 일본 최대의 기업집단이 되는 미쓰비시의 설립에 관여하는 등 산업화에 기여해 훈장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