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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만지로

존 만지로
ジョン[ruby(万, ruby=まん)][ruby(次, ruby=じ)][ruby(郎, ruby=ろう)] | John Manjirō
파일:Manjiro_Nakahama_circa_1880,_Millicent_Library_collection.jpg
<colbgcolor=#000> 본명 나카하마 만지로 ([ruby(中浜, ruby=なかはま)] [ruby(万次郎, ruby=まんじろう)])[1]
출생 1827년 1월 27일
도사국 하타군 나카노하마무라
(現 고치현 토사시미즈시 나카하마)
사망 1898년 11월 12일 (71세)
도쿄시 교바시구
(現 도쿄도 주오구)
묘소 조시가야영원[2] (도쿄도 도시마구)
직업 교육자, 통역사, 번역가, 관료, 선장
서명 파일:존 만지로 서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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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FFF> 애칭 존 만[3]
(John Mung, ジョン・マン)
부모 아버지: 에츠스케(悦介)
어머니: 시오(汐)
토키조(時蔵)
배우자 테츠(鉄)[4], 코토(琴)[5], 시게(重)[6]
자녀 5남[7]
역임 직위 도쿄대학[8] 교수
위계 정5위(正五位)[9] }}}}}}}}}
파일:ジョン万-01.jpg
그의 고향에 있는 존 만지로 동상[10]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와 표류2.2. 타국 생활2.3. 귀국과 취조2.4. 일본에서의 활동2.5. 말년
3. 연표4. 여담5. 창작물에서6. 관련 문서7.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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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When John Manjiro returned to Japan it was as if America sent its first Ambassador.
존 만지로가 일본으로 돌아갔을 때, 마치 미국이 첫 번째 대사를 보낸 것 같았다.[11]
캘빈 쿨리지 #

에도 막부 말기메이지 시대의 인물로, 19세기 일본 최초의 미국 경험자이기도 하다.

굉장히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인물로, 후술된 연표에도 있지만 가난한 어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14세에 고기잡이를 하러 나갔다가 표류한 뒤 미국 포경선에게 구조되어 10여년간 미국 생활을 하고 귀국했으며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지도층의 호감을 사 평민에서 하타모토로 신분이 상승하고 1853년 미국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러 왔을 때 막부에 일본 개항을 조언하고 일본이 근대화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

2. 생애

2.1. 초기 생애와 표류

파일:Torishima.jpg
존 만지로와 4형제의 표류를 그린 동상

도사 번 출신으로, 1827년 1월 27일 가난한 집안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농어업을 하던 평범한 평민 집안이었다. 가난한 집이라 서당인 테라코야(寺子屋)에도 다니지 못하고 글씨도 거의 못 썼다고 하지만 무슨 일이든 즐기고 마는 타고난 상상력을 지녔던 모양인데 이런 자질은 그의 큰 장점이 됐다. 아홉 살에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아주 작은 을 소작하여 이삭이 여물지 않아 푸를 무렵에 찧어와서 맷돌에 돌려 가루내어 자식들에게 먹였을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장남 토키조는 선천적으로 병약해서 어부가 될 가망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일찍 죽고 어머니마저 병이 들자 차남인 그가 대신 가장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불과 10세 때부터 여러 노역을 하면서 이마즈 가문의 허드렛일을 하게 됐다. 그의 주된 일은 장작 패기, 쌀 찧기, 아이를 돌보는 일이었는데 특히 쌀 찧는 일은 연말이 되면 하루에 몇 가마니씩을 혼자서 찧어야 하는 중노동이었다. 어린 그에게는 고된 일이었지만 이마즈가의 주인은 오히려 일을 잘하지 못한다며 질타했고 결국 지쳐 버린 그는 인근의 항구로 도망가서 마침 입항해 화물을 나르고 있었던 타카오카군(高岡郡) 우사우라(宇佐浦)의 어선 선장을 만나 사정을 털어놓고 이 어선의 어부 견습으로 취직하게 되면서 배를 타게 되었다.

이렇게 본래라면 평범한 어부나 일꾼 정도로 생을 마감해야 할 신분이었지만 어느 날 새벽에 우사우라에 전갱이고등어를 잡으러 왔다가 조난당해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면서 그의 삶은 크게 바뀌었다. 1841년 1월 5일, 그의 나이 14살 때 같이 일하던 다른 형제 4명[12]과 아시즈리미사키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러 나갔다가 폭풍우를 만나 5일간 표류[13]했는데 이때 이들이 탄 배는 4간(間) 한 자(약 7.5m), 노 2정을 세운 천마선(天馬船)으로 쌀 두 말 남짓한 식량과 약간의 장작과 물이 실려 있었을 뿐이었다. [14] 폭풍 때문에 노를 꺾어 항행이 곤란해진 배는 아시즈리곶 앞바다에서 표류해 하룻밤 사이에 무로토 앞바다까지 떠내려갔다. 게다가 강풍에 펄럭이며 기이 앞바다를 지나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그대로 주체할 수 없이 태평양으로 떠내려갔다. 출발할 때 싣고 온 쌀(약 38kg)을 먹고 생선을 먹어 허기를 달래고 빗물을 모아 식수로 만들어서 먹었다.

표류한 지 5일이 지난 낮 무렵 동남쪽 해상에서 섬을 발견해 모두 힘을 다해 섬에 접근했다. 저녁 무렵 섬에서 200m 거리(배 포함)에 닻을 내리고 정박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남쪽으로 750km 떨어진 '토리시마[15](鳥島)'라는 이름의 무인도에 표착했다. 다음날 아침 모두 피곤하지만 상륙해 먹을 것과 물을 구하러 섬 안을 산책했다. 섬 둘레는 약 8.5km, 산 정상에는 분화구가 있고 용암 자국이 곳곳에 드러나 있으며 시끄러운 울음소리를 내는 새인 알바트로스가 서식하고 있었다. 이들은 산책을 계속해 근처에서 동굴을 발견했는데 동굴은 다섯 사람이 생활하기에 충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제법 따뜻하여 우로(雨露)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큰 문제는 식수도 식량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불도 없고, 곡식도 없고, 약간의 유수(留水)와 해초, 바닷새를 잡아먹는 등 혹독한 무인도 생활을 했다. 이들은 여기서 물고기와 알바트로스[16]를 잡아먹고 빗물을 마시는 등의 방법으로 143일을 연명했다.

이들이 143일 동안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섬의 많았던 알바트로스 덕분인데 해초, 어패류와 함께 둘도 없는 영양원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어려움은 음료수의 확보였다. 60~70일 동안 비가 오지 않아 스스로의 소변을 손에 쥐고 먹고 살았다. 또 다른 일화에 따르면 벼랑을 올라가면 두 개의 오래된 무덤같은 것이 있었는데 돌무더기를 치우면 빗물이 고인 우물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옆에는 새도 있어서 12마리를 잡아 죽여 식량으로 삼았다. 그렇게 최대의 위기를 넘긴 만지로 일행은 그 무덤에 염불 한 변을 외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만지로의 표류와 구조 과정을 설명한 영상
일요일(1841년) 6월 27일(음력 5월 9일). 동남쪽의 미풍. 섬 그림자가 있다. 오후 한시에 두 보트로 거북이(수프용)가 있는지 보기 위해 내려온다. 다섯 명의 초라한 피곤한 인간을 발견. 데려오지만 그들이 배고프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 윌리엄 H. 윗필드(William H. Whitfield)의 항해 일지#

그러던 어느날 이들은 동남쪽에 검은 물체를 발견했는데 도사 주변에서는 본 적이 없는 커다란 범선이었다. 배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큰 선체의 돛이 여러 개 달려 있었다. 모두들 춤을 추고 기뻐하며 두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며 열심히 구조를 요청했지만 배는 5명을 모른 채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오후 1시 즈음에 아침에 본 배가 다시 섬에 다가왔다. 그와 동료들은 한참을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배가 앞바다에 딱 멈추고 큰 범선에서 조각배 두 척이 내려졌다. 두 척 모두 돛을 달고 대여섯 명의 큰 사내들이 노를 저으며 섬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만지로 일행을 눈치챈 조각배는 돛을 저며 바위틈을 누비듯 다가왔다. 별난 복장의 이인이었으면 얼굴이 새까만 이인도 있고 수염도 나고 덩치가 큰 이인들을 처음에는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뒷걸음질을 쳤지만 이인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고 한다. 만지로 일행은 바다로 뛰어들어 쪽배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는데 가까이 가자 상대의 작은 배로 끌어올려 주었다고 한다. 선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5명은 선장실로 안내되었는데 가구도구도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훌륭한 것이었다고 하며 그들이 보여준 지도를 보고 일본이 작은 나라인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만지로 일행은 근처를 지나가던 미국포경선 존 하울랜드(John Howland) 호에게 143일만에 구조되었다.
파일:g01_jyonman_img01.gif
존 홀랜드 호에 구조돼 무인도에서부터 호놀룰루, 괌을 거쳐 다시 무인도 부근으로 가는 항로(하늘색)
▲ 무인도 부근에서 산리쿠 앞바다를 거쳐 호놀룰루에 입항하지 못하고 타히티, 피지, 괌을 거쳐 페어헤븐에 이르는 항로. 만지로가 페어헤븐 도달 당시의 합중국 여러 주.(남색)

만지로 일행이 구조됐을 때 배의 의사가 "합장하거나 하는 나라 사람이냐"고 몸짓으로 물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만지로 일행은 반쯤 벗겨졌고 너덜너덜한 기모노를 입고 길고 건조하고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생기가 없는 얼굴이 반쯤 가려진 채 오랜 배고픔과 노출로 유령처럼 수척해 있었다고 한다. 윗필드 선장 앞으로 데려왔을 때 그들 중 일부는 서 있지 못하고 갑판 위에 힘없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만지로 일행을 구조한 존 하울랜드호의 선장 윌리엄 윗필드를 비롯한 선원들은 만지로 일행에게 호의적이었다. 다만 당초 선장은 갑자기 들이닥친 조난자 처리에 당혹스러워했는데 태평양 한복판 배 안에서 오랫동안 의사소통이 안 되는 5명의 식량과 물 확보를 걱정했고 사나운 뱃사람과 사소한 말썽도 걱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선장은 이들에게 일을 맡겼는데 갑판 청소, 돼지 돌보기 등의 일이었지만 다들 열심히 일했다. 특히 무엇이든 민첩하게 다루는 그에게는 선원들도 호의적이었다. 존 하울랜드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만지로들에게는 친절하고 몸짓과 손짓으로 말을 걸어오는 쾌활하고 친근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귀담아 듣고 배운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당시 그가 담당한 일은 갑판 청소와 선장의 뒷바라지가 주된 일이었지만 지원해서 고래잡이 일도 배워 갔다. 포경선인 존 하울랜드호는 만지로 일행 5명을 구출한 뒤에도 포경을 하면서 항해를 계속한다. 그러나 만지로와 동료들은 구조됐지만 감히 일본으로 가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일본은 쇄국 체제였고 그대로 귀국하면 만지로 일행은 사형을 포함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당시 에도 막부에 의해 내려진 '이국선 타불령'에 의해 외국 선박이 일본에 쉽게 접근할 수 없기도 했다.

2.2. 타국 생활

결국 귀국하지 못한 채 만지로 등을 태운 존 하울랜드호는 5개월 후 다음 기항지인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의 호놀룰루항에 기항하기까지 약 반 년 동안 그는 특유의 감과 영리함으로 미국의 앞선 포경기술, 언어, 습관 등을 익히려고 열심히 일했다. 지식욕이 왕성하고 흡수율도 높았던 그는 언어와 습관, 고래잡이 일 등을 조금씩 익혀가면서 미국인 선원들과 친숙해졌다. 윗필드 선장은 매사를 열심히 살아가는 그에게 호감을 가졌고 다른 선원들도 그를 동료로 맞아들이며 무척 귀여워했다.

이후 함께 구출된 동료들은 배의 기착지인 하와이[17]에 남았지만 그는 배에 있던 세계지도를 보고 모험을 희망했고 선장 윌리엄 윗필드도 그를 마음에 들어하여 포경 선원으로 거둔 후 포경선의 선명을 따 John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포경선 동료들로부터도 용기 있고 적극적인 일처리와 성실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모두와 친숙해졌고 '존 만(John Mung)'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됐다.[18] 이때부터 그는 알파벳을 배웠다. 일본에서는 서당에도 다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읽고 쓸 수 없었으며 돛대에 올라 고래 망을 보고 발견하면 'She Blows'라고 영어로 외쳤다. 그런 소년에게 선원들은 적극적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이후 그의 머리가 좋은 것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던 윗필드 선장은 "미국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을래?"라고 권유한다.

그는 이 질문에 바로 "꼭 데려가 주세요"라고 말했다. 이러한 역경 하에서의 솔직하고 적극적인 태도가 그의 이후의 인생을 개척하게 되었다. 윗필드 선장과의 운명적이고 기적적인 만남으로 인해 그의 삶은 앞으로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하와이를 출항한 존 하울랜드호는 곳곳에서 고래잡이를 계속하며 길버트 제도, 섬에서 식량과 물을 보급, 대만 근해를 거쳐 일본 근해로 들어갔다. 일본으로부터 200~400km에서 포경을 계속해 목표 포획을 달성한 존 하울랜드호는 포경을 마치고 호놀룰루로 향했지만 강한 바람과 거센 파도로 호놀룰루에 기항하지 못하고 남동쪽으로 진로를 돌려 남미 최남단의 혼곶(칠레의 곶), 즉 드레이크 해협을 경유해 미국으로 향했다. 존 하울랜드호는 미국 동해안에서 북상해 매사추세츠 주의 남단에 가까운 부저드만을 향해 항해했다.

바다 저편으로 띠처럼 길고 납작한 육지가 어렴풋이 보였고 윗필드 선장이 손가락을 가리키며 그에게 자신의 고향 페어헤븐(Fairhaven)을 소개했다. 배는 더욱 만내로 북상하고 있었다. 아크시넷 강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이 페어헤븐, 왼쪽이 뉴 베드포드(New Bedford)[19]였다. 이윽고 배는 세계 최대[20]의 포경기지인 뉴 베드포드 항으로 귀항했다. 이 항해에서 존 하울랜드호가 가져온 고래기름통이 엄청 많았고 호놀룰루에서도 다른 편으로 보내왔다. 선장이 그를 데리고 세관 선주 사무실 등을 돌며 항해 사실을 보고하자 이번 항해는 대성공이라는 찬사가 모두에게 쏟아졌다. 관계처에 갈 때마다 윗필드 선장은 그를 모두에게 소개했다.
파일:ktymtskz.jpg
소년기를 보낸 윗필드 선장의 집.

선장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들은 일본이라는 외딴 나라에서 미국 동해기슭까지 온 소년인 그에게 호기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도 이 무렵에는 일상적인 인사나 영어회화에는 상당한 기량을 기르고 말하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이때가 1843년 5월 7일의 일이다. 그는 윗필드 선장의 양자처럼 함께 살았고 그를 그의 가족이 있는 매사추세츠 페어헤븐에 데려가 옥스포드 스트리트 올드 스톤 스쿨에서 선생 제임스 아킨에게 의탁시켰다. 일본인 최초 미국 거주자이자 일본 최초 미국 유학 1호가 탄생한 순간이다.[21] 어린 그는 거기에서 영어수학, 측량, 항해술 등을 3년 동안 미국의 최신 교육으로 배웠고 그에 부응해 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등의 노력을 보였다. 이국의 생활에 필사적으로 익숙해지려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성과로 이후 그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영어 회화 교재 '영미대화첩경(英米対話捷径)'을 저술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마을에서 인종차별을 당하기도 했지만 학교 친구들은 대체로 그를 받아들였다. 다만 그들의 부모들 중 일부는 타지에서 온 동양인을 환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미국에서 나름 알찬 나날을 보냈고 공부하면서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배우며 민주주의를 터득했다.

그가 살았던 페어헤븐은 뉴 베드포드에 인접한 마을로 항해술 등의 전문학교가 있었다. 윗필드 선장은 그의 능력의욕을 높이 샀으며 그에게 페어헤븐의 항해전문학교(아카데미)에 다니며 본격적인 기술을 배우라고 권했다. 해가 바뀌어 1844년 그는 17살이 되었고 그해 2월 아카데미(전문학교)에 진학했다. 페어헤븐에서는 이 전문학교를 파트렛 아카데미라고 불렀는데 현재의 중고등학교라고 보면 된다. 학교의 이름은 루이스 바틀렛 스쿨이다. 초등학교와 달리 1시간을 수업하고 2, 3시간 자습해야 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영어, 문학, 역사, 수학, 측량술, 항해술 등 내용은 매우 고급이어서 그는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이때 같이 공부했던 야콥 트립이라고 하는 학우의 기록에는 "만지로는 반에서 항상 수석이며, 학습에 완전하게 몰두하고 있었다. 숫기가 없고 태도는 언제나 조용했으며, 공손했다"고 적혀 있다. 이 이야기는 1916년 1월 발행된 현지 신문지에 게재되었다. 그는 미국의 국가체제와 사회, , 풍토, 그리고 미국인들 개개인을 관찰하기도 했다. 당시의 학우들이 말했듯 '만지로는, 높은 의욕과 배우려고 하는 마음이 왕성하고, 뭐든지 척척 흡수해 버린 소년'이기도 했다.

당시 선장은 그를 소속된 개신교 교회 주일학교에 들어가게 하려고 했지만 동양인이었던 그는 당연히 거절당했으며 교회 사람들은 그에게 "니그로 좌석(negro pew)"에 앉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다음 일요일에 다른 교회에 데려갔지만 거기서도 거절당했다. 결국 그를 받아 준 교회는 유니테리언 교회였다.[22] 그는 윗필드 선장에게 친자식처럼 소중히 여겨져 은혜도 느끼고 있었지만[23] 가슴 한편에서는 향수병으로 인해 고향(특히 어머니에게)에 대한 생각이 계속 들었다고 한다. 그런 때에 선원 동료는 그에게 '너의 나라는 터무니없이 곤란한 인간을 돕지 않는다'라고 일본에 대한 분노를 들었다. 이때부터 그는 언제까지나 선장의 호의에 의지하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자립을 결심했다. 그는 어느 날 선장 부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동의를 얻었다. 1845년 2월부터 이웃 마을 뉴 베드포드의 오케야에 입주해 일하게 되었다. 그는 더부살이를 하며 고래 기름을 담는 통 만들기의 기본을 배웠다. 고된 일로 식사도 세 끼 모두 마른 빵으로 주어져 그는 영양실조 상태에 빠져 결국 쓰러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나무통 만들기의 솜씨를 연마해 가기도 했다. 나무통은 고래기름을 담기 위한 것으로, 포경선의 뱃사람이 되어 도움이 되는 수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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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포드 스트리트 올드 스톤 스쿨[24] & 루이스 바틀렛 스쿨

그는 미국의 고등교육을 받아 기초학력을 키워 갔다. 영어, 수학, 측량, 항해술, 조선기술 등 폭넓게 배운 것은 그의 능력과 인격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미국에서 받은 고등교육이 이후의 항해에도 활용되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지식의 폭이나 견문 등이 쇄국 시대의 일본에 활용되었다. 근대 일본의 국가 건설이나 발전의 주춧돌이 되어 공헌하기도 했다. 그는 옥스포드 올드 스톤 스쿨을 졸업한 뒤 선장의 의견에 따라 항해사 양성학교인 루이스 바틀렛 스쿨에 17세에 입학하고 최첨단 포경기술, 항해기술, 조선기술 등을 익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는데 이때는 19살이었다. 루이스 바틀렛 스쿨을 졸업한 뒤에도 윗필드 선장의 농장에서 일하다가 존 하울랜드 호에 승선해 있던 아이라 데이비스(Ira Davis)에게 항해 권유를 받았다. 당시 아이라 데이비스는 프랭클린호의 선장에 임명돼 있었다. 이때 윗필드 선장은 윌리엄 앤드 엘리자호로 2년 전에 외출하고 없었다. 큰 은혜를 입은 선장과 상의하지 않은 채 항해에 나서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 했다. 다행히 선장 부인이 만지로의 항해에 찬성하며 열심히 권했고 그는 아이라 데이비스의 권유를 수락하고 포경선 프랭클린 호에 승선하기로 결정했다.

1846년 19세의 나이로 포경선 프랭클린 호에 선원으로 취직하여 매사추세츠에서부터 항해를 시작하였다. 그는 1846년 5월부터 1849년 9월까지 3년 4개월 동안 프랭클린호에 승선해 고래를 쫓아 대서양, 인도양 그리고 태평양을 항해했다. 그는 맨 처음 잔심부름을 하다가 Harpooner(작살 다루는 사람)로서 일했는데 1847년 프랭클린 호가 하와이에 기착했을 때 그는 그와 함께 표류했던 동료 토라에몬을 다시 볼 수 있었는데 막부의 허락 없이 국외에 나갔다는 것이 발각됐을 때 처벌받을까봐 두려워 일본에 귀국하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하와이에 남은 것이었다. 시게스케와 고에몬 형제는 전년 윗필드 선장이 호놀룰루에 와 일본 근해로 가는 포경선 플로리다호의 선장을 소개해 줬다고 한다. 그래서 1846년 11월 두 사람은 플로리다호를 타고 호놀룰루를 떠났다. 1847년 11월 프랭클린호는 호놀룰루를 출항했는데 출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데이비스 선장의 언동이 갑자기 돌변했다. 원래 포경선에 어울리지 않게 온순한 성격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툭하면 욕도 하고 폭력도 휘두르기 일쑤였다. 알고 보니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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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경선 프랭클린 호의 모형

항해를 계속하다가 선장의 정신병 증세는 점점 악화돼 칼과 총까지 휘두르게 되었다. 만지로 등 프랭클린호 간부들은 협의 끝에 일시적으로 선장을 감금하기로 결정했다. 4월 하순 필리핀 앞바다에서 거센 폭풍우가 닥쳐와 한때 좌초 침몰의 우려를 낳았지만 선원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극복해 나갔다. 5월 하순에 필리핀 루손 섬 마닐라 항에 기항했는데 이때 미국 영사관에 데이비스 선장의 상황을 설명하고 본국으로 송환해 줄 것을 의뢰했다고 한다. 이후 프랭클린호는 선장이 없자 후임자를 뽑는 전원 투표가 진행됐는데 개표 결과로 새 선장에는 일등 항해사인 에이킨이 선정됐고 그가 일등 항해사이자 부선장으로 선임됐다. 그가 선택된 이유는 일에 대한 대처가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25]

이 항해로 그는 세계 여러 나라와 땅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으며 포경 활동도 순조롭게 진행돼 성과를 올리렸다. 프랭클린호는 마닐라에서 데이비스 선장을 하선시킨 뒤 대만과 류큐를 따라 북상하다가 다시 일본 근해에서 고래잡이를 하다 괌으로 돌아왔다. 약 1개월간 정박한 뒤 진로를 남쪽으로 잡고 뉴아일랜드 섬(파푸아뉴기니) 부근을 거쳐 스람 섬에 기항했다. 배는 인도양을 서진해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1849년 8월 수천 통의 고래기름을 선창 가득 싣고 모항 뉴 베드포드로 귀항했다. 1849년 그는 세계 일주를 마치고 메사추세츠에 돌아온 프랭클린 호에서 350달러의 보수를 받고 윗필드 선장을 오랜만에 만났다. 이후 그는 금을 캐서 귀국 자금을 구하기 위해 골드 러시에 참가하는 계획을 세웠다.

1849년 캘리포니아 주에 일어난 골드러시에 그는 귀국 자금을 벌기 위해 테리라는 청년을 꾀어 제2의 고향인 페어헤븐을 출발했다. 1850년 5월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만지로 일행을 기다리는 노동은 더 가혹했는데 곡괭이와 삽을 들고 쉬지 않고 일했다. 처음엔 고용돼 광부로 일했고 얼마 안 돼 독립적으로 파서 70여 일 일해 600달러를 벌었다. 이만큼 있으면 귀국 자금이 충분할 것이라며 채굴 도구 등을 테리에게 공짜로 주고 번 돈을 손에 쥐고 그는 얼른 산을 내려왔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이 시기 그는 일본인 최초로 철도, 증기선을 타 보고 최초로 근대식 포경업에 종사한 인물로 기록되었다.[26]

2.3. 귀국과 취조

파일:Map_of_John_Manjiro_voyages.jpg
존 만지로의 항해 지도[27]

그는 이듬해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배를 한 척 사서 귀국을 결심했는데 그야말로 팔자에도 없는 다이나믹한 생활을 하다가 일본으로 가는 계획을 세웠다. 윗필드 선장에게서 배운 '이웃 사랑'의 개념을 힘입어 그는 "선원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일본을 개국시키겠다[28]"는 결의를 안고 결국 귀국 작전을 결행했다. 도사로 고기잡이를 나가 표류하고 나서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1851년 음력 2월 2일 골드 러시에서 귀국 자금을 번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로 갔는데 지난번 항해에서 들른 지 3년 만에 표류 동료들과 재회했다. 역시 귀국을 희망하던 형들과[29] 만났고 현지에서 결혼하고 목수라는 직업을 가져 하와이에 남은 토라에몬을 제외한 시게스케, 히츠노죠, 그는 귀국을 준비했다. 이때 윗필드 선장의 친구 데이먼 목사신문 기사를 내고 만지로의 귀국길을 돕기 위한 자금을 모으고 미국 영사에게 부탁해 그에게 여권 대신 신분증을 발급해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여러 구호품도 모아주었다. 그가 구입한 상륙용 보트는 고래잡이 배였는데 '어드벤처호(アドベンチャー号)'라고 이름 붙였으며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하와이를 출발하기 전 윗필드 선장에게 그동안 키워 주고 미국 고등교육까지 받게 해 준 데 대한 은혜와 감사의 마음을 작별의 편지에 썼다.

그는 당시 쇄국정책을 시행하지 않았던 류큐 왕국을 목표로 향했는데 상하이행 배에서 류큐 부근에서 조각배로 갈아타고 무사히 류큐의 오도해안(현재의 오키나와현 이토만시)에 도착했다. 호놀룰루항을 출항한 지 1개월 반 후 상륙했으나 당시 류큐를 복속 중이던 사쓰마 번에서 취조를 받게 되었다. 사쓰마 번 공무원들은 그들을 7개월 동안 심문했다. 만지로 일행은 류큐에서 취조받는 동안 현지 말도 익히고 마을 사람들과도 교제했다. 당시 류큐에는 1844년과 1846년 두 차례에 걸쳐 프랑스 군함이 내항했으며 사쓰마 번은 외국의 움직임에 주목해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쓰마 번은 만지로 일행으로부터 해외 정보를 알고 싶어했다. 이때 사쓰마 번은 3명을 가고시마로 소환하기로 하고 1851년 7월 나하에서 사쓰마번의 배 다이세이마루로 출항해 12일 후 가고시마 만에 입항했다. 사쓰마에 도착하자마자 만지로 일행 3명에게 사쓰마 번은 저택을 제공하고 의상 외에 돈을 주고 주식을 제공하며 빈객과 똑같이 대접해 주었다.

사쓰마 번의 조사는 류큐로부터의 정보를 받았는지 만지로 한 명에게 연일 집중 조사를 벌였다. 특히 만지로 일행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였다. 평소 서양 문물과 기술 도입에 관심이 많았던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그를 불러 여러 질문을 했으며 그에게서 해외 사정과 지식을 얻고 싶어 직접 그를 취조하기까지 했다. 그는 번주와 그의 부하들 앞에서도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리아키라는 그를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처음으로 미국에서 배운 사람으로서, 또 선진적인 많은 경험을 한 지식인으로 취급했다. 그는 영어가 섞인 서투른 일본어로 미국이라는 나라의 성장 배경부터 현재 상태까지 설명했고 국민이 모두 법하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것, 국가체제나 대통령을 뽑는 일은 전 국민의 투표로 뽑히는 일이며 증기 기관차, 증기선문명의 실정, 고래잡이 이야기 등을 열정적으로 얘기했다.

나리아키라는 그가 서양 배에 항해사로 승선해 세계 바다를 항해한 것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그에게 "서양 배를 만들 수 있느냐"고 질문했고 그는 "뱃사람들을 모아주면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나리아키라는 당장 번 내의 실력 있는 선목수 3, 4명을 그에게 보내서 서양선 조선기술을 배우게 했다. 그는 자신이 탔던 포경선 존 하울랜드와 프랭클린 호의 구석구석을 기억하고 그림을 그려 배의 구조들을 해설했다. 나리아키라의 특명으로 포경선 모형이 만들어졌고 이 모형선을 바탕으로 소형 범선 제작도 시작되었다. 서양식 범선은 현지 선목수와 동료들도 도와 주야간 돌관공사로 조선을 서두른 지 불과 48일 만에 완공했다. 진수(進水)의 날 가고시마 만 안은 지역 주민들에게 괴이한 모양의 배에 흥미를 느끼고 한번 보고 싶다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 범선에는 옷토센(越通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이 배를 모델로 해 증기 기관을 설치한 배가 나오는데 일본에서 건조된 최초의 증기선인 쿠모유키마루(雲行丸)였다. 당연하겠지만 쿠모유키마루는 기술적인 완성도는 낮았다. 그러나 불완전하지만 거의 독학으로 최초로 증기선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쿠모유키마루 건조는 획기적인 사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그의 지식을 높이 산 나리아키라로부터 오히려 선생으로 임명되어 사쓰마 번의 사무라이들에게 서양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전수하고 번의 양학교(洋學校)에서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이때 알파벳 ABCD… 노래를 일본에 처음 전파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최초로 넥타이를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며 최초로 '신아메리카 항해술'을 일본에 전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다 다시 나가사키 봉행소로 옮겨져 긴 심문을 받게 되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나가사키 봉행 마키 요시노리(牧義制)[30] 앞으로 송장을 첨부하였는데 "세 명의 표류민에게 장래 등의 문제가 일절 없다. 만지로는 영리하고 패기가 있다. 장차 반드시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인재이기에 결코 소홀히 다루지 말자."고 편지를 보냈다. 나가사키 봉행소에서의 취조는 장기간동안 계속됐다. 봉행 마키 요시노리(牧義制)가 중심이 되어 만지로 일행에게 후미에도 시험해 보았으며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이후 외국에서 가져온 물건은 몰수되었다. 당시 그가 일본에 들여온 물건은 이러하다.
서적(보디치의 항해술서, 수학, 사전, 역사, 조지 워싱턴 전기, 농가력 등 13권의 영어 원서와 지도 7장)

일용품(약, 면도기, 성냥, 바느질 도구, 가위, 시계 등)

도구류(선구, 끌, 대패, 옥탄트(팔분의, 천체관측기), 나침반, 석판, 권총, 등)

의류(서양 의상, 구두, 모자)

귀중품(사금, , )

몰수품의 대부분은 훗날 에가와 타로자에몬(江川太郎左衛門) 등의 노력에 의해 반환됐다.

나가사키의 취조는 그를 이따금 짜증나게 했다. 기껏해야 취조 한 번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물었고 만지로는 깊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쇄국체제 하의 유일한 창구이자 국제정세에 가장 밝은 위치에 있어야 할 나가사키 봉행소의 고리타분한 관료제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서양의 신기술에 대해 설명하자 아무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고 미국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하면서 일본도 빨리 개방 정책을 펴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자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31] 나가사키 봉행과 사쓰마 번의 대응 차이를 몸소 느꼈다. 사실 사쓰마 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집안 어른들이 그가 서양문물을 너무 좋아한다고 걱정할 만큼 외국에 관심이 많고 매우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오랫동안 계속되던 조사를 나가사키 봉행소에서 하던 중에 만지로 일행의 고향의 번주인 도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로부터 '3명의 표류민을 인수하고 싶다'는 연락이 들어왔다.

이후 나가사키에서의 조사는 끝나고 도사 번에서 신병을 인수하러 온 17명의 관리들과 함께 6월 25일 나가사키를 도보로 고향 도사를 목표로 갔다. 일행은 배를 갈아타고 에히메현에 도착했으며 다시 국경을 넘어 도사 국에 들어가 7월 11일 고치에 도착했다. 고치 성 아래에 이르자 만지로 등 표류민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마중을 나왔다. 개혁파 인사였던 도사번 번주 야마우치 요도는 시마즈 나리아키라로부터 만지로라는 인물의 희귀한 체험과 박식함을 미리 들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귀국을 원했지만 막부 소속인 나가사키봉행소의 조사가 장기간에 이르러서야 겨우 소원이 이루어졌다. 고치에서도 역시 만지로 일행은 심문을 받았지만 며칠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도사 번 중신 요시다 도요(吉田東洋)가 선택한 고치 성 아래 제일의 지식인이자 화가 카와다 쇼료가 심문을 맡았다. 카와다 쇼료는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사람으로 특히 그의 회화는 번으로부터 인정받아 에도에 나가 솜씨를 연마하고 돌아와 요시다 도요의 문하에 들어갔다.

쇼료가 요시다 도요의 해외정책론에 경도돼 "쇄국은 이미 오래됐다. 대선을 건조하고, 대포를 제조하고, 이국과도 교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사상에 공명해 학문에 힘쓰던 중에 그가 귀국했다. 쇼료의 심문은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매우 온화해서 그가 기꺼이 해외 사정을 전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때 그에게서 들은 해외 사정을 간곡히 기록한 저서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효손키라쿠(漂巽紀略)'로 당시의 그의 증언록이며 요즘 말로 치면 미국 표류기인데 오늘날 도쿄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카와다 쇼료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일러스트가 들어간 '효손키라쿠'라는 서양 정보 책을 썼다. 쇼료는 일본을 떠나기 전 무학(無學)이었던 그에게 일본어의 읽고 쓰기를 가르쳤고 대신 그에게 영어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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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손키라쿠(漂巽紀略)에 그려진 포경선 존 하울랜드 호

쇼료는 그가 말하는 이국(異國)의 이야기에 경악했는데 증기선, 거대한 군함, 철도, 전신과학기술의 격차에 일본이란 나라의 장래를 불안하게 느꼈다고 하며 그에게 들은 지식에 지도·풍물 등의 삽화를 곁들여 '효손키라쿠' 4권을 지었다. 본서의 서문에는 작자의 생각을 덧붙이지 않았을뿐더러 문학적 각색도 하지 않는다고 기록돼 있으며 삽화도 그의 그림을 바탕으로 그려져 있다. 이 책은 이후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전편에는 풍향, 배의 진행 방향에 대해 상세하게 기재되었으며 세계 각지 사람의 습속(習俗), 도시의 모습에 대해서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의 스케치를 토대로 그렸다는 삽화는 마치 사람이나 동식물을 실제로 보고 그린 듯한 느낌을 준다. 다만 해마, 증기 기관차의 그림 등은 예가 없었던 탓인지 정확성이 부족하다. 이 책에는 그가 표류한 후 겪은 것들이 적혀 있는데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도사에서 동료와 고기잡이를 나가다 → 폭풍을 만나다 → 토리시마(이즈 제도)에 당도하여, 어떻게든 수개월간 살아 남는다. → 미국 포경선에 구출되다 → 하와이에 기항 → 미국으로 건너가다 → 미국에서 학문에 힘쓰다 → 미국 포경선의 선원이 되어 세계 각지를 여행하다 → 캘리포니아골드 러시로 목돈을 얻다 → 하와이 경유로 상하이행 배에 실리다 → 류큐에 도착 → 사쓰마·나가사키 취조를 거쳐 도사로 귀국."

쇼료는 '효손키라쿠'에 그가 미국에서 겪은 경험들을 듣고 그대로 적었는데 이 이야기들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충격을 줬다.
재능과 학식을 가진 많은 사람 중에서 내세울 만한 인물을 뽑아 대통령으로 앉힌다. 그리고 그 임기는 4년을 한도로 하되 그 사람의 이 높고 정치력도 탁월하면 임기를 거듭하여 그 직을 계속할 수 있다.[32]
미국의 대통령제에 대해#
세계 각국은 어디로든 항해를 하며 서로 교류하며 장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만에 하나 조난을 당하거나 우리와 같은 표류사태가 발생했을 때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각국의 요지나 항구에 영사관을 두고 있다.
영사관에 대해#
여기서 '시틴볼'(스팀보트.증기선)이라고 불리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배를 탔다. 시틴볼은 선체 길이가 40여 간(間)으로 돛은 하나도 없고 단지 선체 중앙에 거대한 보일러를 설치했다. 그 보일러에 끓인 증기를 이용해 선체 안팎에 설치된 쇠바퀴를 돌리며 움직인다. 엄청난 속도란 비길 것이 없을 정도이다.
증기선에 대해#
새크라멘토에 상륙하여, '레이로우'(레일로드.철도, 기차)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차. 레이로는 삼간사면의 철함에 석탄을 넣어 연소시켜 물을 달구고, 발한 증기를 철함에 충만시켜 그 증기를 철통 파이프로 이끌도록 만들어졌다. 그리고 앞의 시틴볼과 마찬가지로 철통을 지나오는 증기를 이용해 차체에 장착된 철륜을 돌려 움직이게 돼 있다.
증기 기관차에 대해#
단지, 이러한 번영, 번화 중에서, 한 가지 곤란한 일이 있었다. 불량배, 깡패 같은 패거리들이 패거리를 짜고 시비를 걸다가는 남의 금품을 빼앗거나 심지어는 총을 이용해 살인을 저지르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고, 어찌할 도리가 없는 패거리도 꽤 많아졌다.#

이후 '효손키라쿠'는 취조관 요시다 분지가 '표객담기(漂客談奇)'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이국에 관한 정보 유포가 금지되던 가운데에도 효손키라쿠는 많은 사본이 만들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봤다. '효손키라쿠'는 만지로가 증언한 미국의 정치경제, 사람들의 생활까지 컬러 그림으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효손키라쿠'의 애독자 중에는 사카모토 료마도 있었다고 하며 이후 그의 신국가체제에 대한 구상인 '선중팔책'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효손키라쿠'라는 책과 존 만지로라고 불리는 사람은 메이지 시대라는 여명을 여는 기폭제 역할을 한 셈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도쿠가와 후기와 메이지 초기의 일본인들에게 "아메리카"는 만지로의 묘사의 아메리카였습니다.
― 카와스미 테츠오(川澄哲夫, 게이오기주쿠대학 교수)#

이후 표류였기 때문에 불가피했다는 하소연이 먹혔고 사쓰마번과 나가사키 부교쇼(奉行所)에서 장기간에 걸쳐 심문을 받은 뒤 무죄 방면 판결이 내려졌다.[33] 부교쇼에서 막부에 보낸 보고서는 “만지로는 대단히 예리한 자다. 국가에 도움이 될 것이다.”였다. 귀국한 지 1년 반, 표류 이후로는 11년 10개월 만에 고향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와 가족들은 그가 14세 때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폭풍우를 만나 소식이 알려지지 않자 죽은 줄 알고 무덤까지 만들었는데 어머니는 아들이 바다에서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근처 다이카쿠지 경내에 자연석을 놓아두고 그것을 그의 빈 무덤으로 정해 놓고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아침 참배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정말 만지로입니까! 제 아들 만지로입니까!"라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고 한다. 귀향한 지 사흘 만에 도사 번 다이묘인 야마우치 요도가 그를 소환하고 그에게 지역 엘리트 자제들에게 외국 경험을 가르치도록 주선했는데 미천한 어부 신분으로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으므로 그를 다이묘의 가신, 곧 하급 사무라이 신분으로 승격시켰다.

그는 서구의 항해, 포경술 외에 영어도 가르쳤으며 도사 번의 번교(번이 세운 학교)에서 교수로 임명됐다. 그는 이곳에서 미국의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 독립정신, 세계 바다를 여행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가르쳤는데 이때 뒷날 도사 번의 참정이 되어 대정봉환에 기여한 고토 쇼지로, 사사키 타카유키, 정한론을 주장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미쓰비시 기업을 창업하는 이와사키 야타로[34], 군인 오토리 케이스케, 법학자 미츠쿠리 린쇼 등 일본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2.4. 일본에서의 활동

에도 막부는 쇄국정책을 계속 유지하려고 했으나 나가사키 데지마네덜란드인들로부터 영국과 프랑스가 청나라를 침략해 쑥대밭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후에는 미국이 일본을 타겟으로 무력 시위를 준비 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더 이상 쇄국은 무의미하며 서방 열강을 상대할 수 있는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인재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가 도사 번으로 돌아온 지 4개월만인 1853년, 쿠로후네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는 미국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에도 막부에 불려갔다. 미국에서 체류한 경험이 있으며 영어를 아는 유일한 일본인 만지로는 귀중한 존재였다. 유학자 오쓰키 이와케이는 "도사 표류인 만지로는 매우 천재끼가 있는 자. 이번 중견역 등에 기용되면 반드시 온편한 취급"을 할 수 있다고 막부에 추천했다.# 여기서 로주[35] 아베 마사히로와 접견하여 미국 포경선에서 일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미국의 개항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다. 그는 아베에게 미국이 오랫동안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했다고 알렸고 미국 포경선이 규슈 남부, 사쓰마 번의 작은 섬 중 하나, 류큐 열도 중 하나에 땔감, 담수, 식량을 운반할 수 있는 항구를 개설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이어 미국은 관대한 국가일 뿐만 아니라 매우 현대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를 침략할 의도가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그가 아베 마사히로에게 건넨 미국 정세 서술 보고서인 '존 만지로 수사기록'은 그가 일본 개방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느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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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의 존 만지로

미국이 요구한 사항 제1조는 난파해서 표류해 온 선원을 보호하고, 항구를 개방하라는 것이었다. 이후 실제 미국의 포경선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그는 항구는 개방하지만 통상은 안 해도 된다는 조언을 했는데 그는 윗필드 선장과 미국 포경선에게 진 빚의 만분의 1을 마침내 갚을 수 있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막부는 이 의견을 검토해서 받아들였다. 이 공적으로 막부로부터 직참 하타모토라는 벼슬을 얻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보면 신분을 뛰어넘는 엄청난 출세였다. 평민이라 성이 없었는데 고향 이름을 따와 나카하마라는 성씨를 칭했다. 이후 이즈의 니라야마다이칸쇼(韮山代官) 에가와 히데타츠(江川英龍)는 페리 제독이 다시 오는것에 대비해 만지로를 불러내 자신에게 배속시키도록 막부에 압력을 넣었다. 이 결과 그는 '다이칸 에가와 타로자에몬[36]의 착수'를 명령받았다. 일개 견습 어부였다가 소년으로부터 사분으로 발탁되어 고향에서 유래한 나카하마라고 하는 성을 따르게 된 청년을 에가와는 전속의 통역관 겸 외교 고문으로서 활동시킬 생각으로 지도했다. 이후 미일화친조약에서는 통역사로 발탁됐지만 애초에 전문 통역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었던 데다 외교 용어에 서툴렀고 당시엔 미국스파이 아니냔 편견[37]도 있었기 때문에 페리 제독과의 직접 통역은 하지 못했다.[38]

하지만 화친 조약 체결을 위한 회의가 열린 장소의 옆방에서 모든 문서를 점검하고 번역하는 역할을 했다. 이후 일본 최초의 영어 교본 <영미대화첩경>을 저술했는데 이것이 일본 영어 교육의 기초가 되었다. 항해나 조선에 관한 각종 서양 기술서적들을 번역하거나 영어 교육, 강연 등도 했다. 당시 그는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일본의 근대화에 공헌했는데 미국에서 얻은 지식을 사용하여 정부의 해군을 현대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당시 일본이 무엇보다 긴급하게 필요로 한 것은 대선(大船)을 갖춘 강력한 해군이었다. 1854년 5월, 막부가 주도하여 마스트 3본 형태에 용골(龍骨)을 갖춘 최초의 서양식 범선 호오마루(鳳凰丸)호를 건조했고 이어서 증기선 건조도 기획했눈데 이 과정에서 그가 조선(造船) 디자인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으며 막부 말기에 구입한 선박의 대부분이 4, 5년 만에 그 생명을 끝냈는데 원인은 후술할 간린마루의 태평양 횡단 당시 일본 선원이 그랬던 것처럼 악천후 시 조선기술의 미숙으로 많은 배가 좌초해 침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항해기술이나 조선기술은 점차 향상되어 러일전쟁 때에는 세계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어떻게 이러한 신속한 기술 향상을 실현할 수 있었냐면, 발전의 기초가 되는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시스템 만들기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미국의 항해 학교에서 공부할 때 배웠던 '현대 해양 항해술의 창시자'로 알려진 너새니얼 보디치(Nathaniel Bowditch)의 ‘미국 항해술 개설[39](The New American Practical Navigator)’을 교과서로 열심히 공부해서 많은 지식을 얻었기 때문에 귀국 후 이 책을 공들여 일본어로 번역했는데 이 책을 막부 말기와 메이지 시대의 일본 항해사들이 항해술 교육 교과서로 삼았다. 이후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에가와 타로자에몬의 니라야마주쿠와 막부의 해군훈련소에서 교수로 강의를 하게 되었으며 이즈의 헤다호에서 건조된 기미자와형 범선을 개조한 포경선과 네덜란드로부터 구입한 포경선으로 오가사와라 제도 해역을 향해 포경 활동을 실시했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가쓰 가이슈,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비롯하여 훗날 일본 해군, 해운, 수산 발전을 담당한 많은 인물들이 그에게서 실천적인 해양 기술을 배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러는 동안 막부에서는 네덜란드에서 증기선을 도입하고 해군 운용에 관한 지식을 전수받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1855년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가 호의로 증기선 숨빙[40]호를 선사하는 동시에 해군 교관단을 파견하여 해군 관련 지식을 교습해 주기도 했다. 1857년에는 일본이 주문한 증기선 군함 야판(Japan)호와 제2차 교관단이 함께 들어왔는대 이 배는 3본 마스트에 외륜이 달린 목제 기선이었으며 기관(機關, 모터)은 항구를 드나들 때만 사용하고 항해할 때에는 돛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곧 이름을 ‘역경(易經)’에서 따온 ‘간린마루(咸臨丸)’로 바꾸었다. 막부는 1년 반의 1차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교관이 되어 다음 기수 학생들을 가르치는 식으로 군함교수소(軍艦敎授所)를 운용했는데 그는 이 곳에 교수로 등용됐으며 일본 해군 창설에 기여했다. 이렇게 하여 일본 근대 해군이 첫걸음을 뗐다.#

그가 지휘한 도사 번사쓰마 번의 서양 선박 구입 단가는 막부나 다른 번에 비하면 상당히 낮았다. 도사 번은 군함이 아닌 상선을 주로 구입했는데 막부의 일반 선박 평균 단가보다 30%이상 쌌다. 왜 도사 번이 막부나 다른 번에 비해 저렴한 가격에 배를 구입할 수 있었는지를 분석해 보면 도사 번이 처음으로 구입한 '난카이마루(南海丸)'는 요코하마에서 그가 구입과 교섭을 실시했고 사카모토 료마가 '선중팔책'을 기초한 '유가오(夕顔)'등도 그가 고토 쇼지로와 함께 상하이에 가서 구입한 것이다. 사쓰마 번도 10척의 구미에서 조달한 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를 구입하는 데도 번교의 교수로 초빙된 그가 진력했다. 도사 번과 사쓰마 번은 그의 영어 실력과 선박에 관한 지식을 활용해 저렴한 가격에 배를 구입한 셈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도사 번이 구입한 서양 선박은 군함이 아니라 대부분 상업적인 목적의 선박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포경을 중심으로 한 어업력과 해운력을 향상시켜 일본을 발전시키고자 했던 그의 사상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유가오' 등의 도사 번의 주요 선박은 메이지 신정부 출범 후 미쓰비시의 설립자이자 만지로의 제자인 이와사키 야타로가 창설한 해운회사로 이적되어 일본 해운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1860년에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 일본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해서 미국으로 가는 선박 항해에서도 통역사로 동행했다. 당시 쇼군은 워싱턴에 대사를 파견하는 기회를 이용해 지난 수년간의 노력을 통해 근대 선박을 운용할 실력을 갖추었음을 확인하고 싶어했으며 선원들도 그동안 갈고 닦은 원양 항해술을 직접 실험해 보기를 원했기 때문에 사절단을 간린마루에 태워 태평양을 건너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런데 미국 측이 보기에 이것은 너무 위험한 실험이라 간린마루호(咸臨丸)는 시험 항해를 하고 사절 일행은 미국이 제공하는 선박 포해튼(Powhatan)호로 가기로 결정했다. 사실 경험이 부족한 선원들이 처음 태평양을 건너는 항해를 한다고 하니 죽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많은 사람이 탑승을 정중히 거절했다. 이렇게 빈 자리가 남아서 20대의 후쿠자와 유키치도 군함부교로 꼽사리로 동행했다. 일본 최초의 태평양 횡단인 이 항해는 오랫동안 일본인만으로 이뤄낸 위업으로 꼽혀 왔다.

그러나 100년 후인 1960년 미 해군의 존 브루크(John Brooke) 대위의 항해일지가 공개되면서 진실이 밝혀졌다. 간린마루에는 브루크 대위를 포함해 11명의 미 해군 선원들이 승선하고 있었다. 그의 일지에는 간린마루의 항해가 극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인 선원들은 겨울철 태평양의 거친 파도폭풍에 대응할 기술이 없었는데 출항 다음날부터 날씨가 험악해져 난항을 겪었기 때문이다. 일본 최초 태평양 항해인 이 항해는 통역으로 타고 있던 만지로가 미국인 선원들과 함께 '간린마루'를 조종했던 것이다. 전술한 내용과 태평양 횡단을 이끈 실적을 보면 그의 선박 및 항해기술 능력은 서양 열강국 전문가들도 인정하는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때의 선장은 가쓰 가이슈였는데 배멀미로 드러누웠고 기술도 부족해서 만지로가 배를 조종했다고 한다. 그는 태평양을 건너는 항해에도 직접 도움을 주면서 사실상의 함장 역할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전부터 항해 경험이 풍부했던 그가 배의 운항에 큰 도움을 주었다. 존 브루크 대위는 그의 활약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1860년 2월 5일 그와 함께 간린마루를 여행한 브루크 대령의 일기에는 "우리 존 만지로가 일본의 개국에 그 어떤 사람보다도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 기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함장은 설사를 일으키고, 제독은 배에 취해 있다. (중략) 일본 해군에 어떤 개혁이 필요한지에 대한 의견을 가진 사람은 선원 중 만지로가 유일하다. (중략) 나는 일본해군의 개혁에 힘쓰겠다. 그리고 만지로를 돕는다. (중략) 만지로는 누구든 거침없이 자유롭게 말하지만, 또 동시에 뭔가 불안해 보인다. 그는 매우 위험한 지위에 있으므로 매우 조심해서 균열을 피해야 한다. (중략) 만지로는 나와 함께 왔지만, 다른 일본인들은 너무 느리고, 또 관심이 없어서 덱에 나온 것은 한두 명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선실로 돌아왔다. 곧 만지로가 내려와 모두를 갑판으로 모았다고 보고했으므로 나도 갑판으로 올라가 배를 북동미동으로 향했다. (중략) 만지로는,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너새니얼) 보디치의 책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중략) 그는 모험정신이 풍부한 사나이다. 나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주요한 사건을 묻겠다. 그는 대단히 이야기를 좋아했고, 일본의 개국에 대해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공로가 많았다는 것은 나에게도 기쁜 일이다.
― 존 브루크(John Brooke)의 항해 일지[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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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린마루(咸臨丸)

이때 그는 후쿠자와와 함께 미국의 서점에서 웹스터 영어 사전을 구입하여 일본에 가져와 번역하였고 1866년에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도쿄대학의 전신이 되는 가이세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영어, 항해술, 측량술 등을 가르쳤다. 카이세이 학교에서 그는 영어를 지도해 후쿠자와 유키치나 오야마 이와오(大山巌) 등을 가르치는 등 교육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살렸다. 메이지 유신 이후 새 체제에서도 그는 여러 학교의 교수 요원 혹은 해상 사업의 운영 위원으로 활동했다. 1870년에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시찰단으로 유럽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유럽에서 군사학을 공부했고 미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돌아왔다. 워싱턴 D.C.에서 정식으로 영접을 받았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윗필드 선장을 만나기 위해 그의 고향인 매사추세츠주 페어헤븐을 육로를 여행했으며 은인인 윌리엄 윗필드 선장을 만났다. 윗필드 선장은 그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고 그도 감격한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하며 선장의 부인도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21년만의 재회였다. 윗필드 선장은 집에 있던 딸과 세 아들을 그에게 소개했는대 이 때 그는 선장에게 일본도를 선물했다고 한다.[42]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곧 알려지면서 다음날 아침 선장 집 앞은 발칵 뒤집혔는데 과거 동문이었던 반 친구를 비롯해 지인들도 몰려왔다고 한다. 윗필드 선장과 작별 인사를 하고 뉴욕으로 돌아온 다음 날 현지 신문은 그의 방문을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에도 막부 말기의 그의 행적은 미국의 다양한 문물을 소개하고 서양 지식을 흡수하고자 했던 막말의 지사들과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표류는 죽음을 의미했으며 살아 돌아올 확률은 1% 미만이었지만 그는 무인도에서 살아남았고 미국 본토에 상륙해 미국식 교육까지 받은 뒤 배를 타고 세계를 일주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가장 중요한 시기인 개화기에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잡아준 조타수 역할을 했다. 당시 많은 인물들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영향을 받았는데 당시 24살의 청년이었던 요시다 쇼인은 해외에 갔다 왔는데도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막부의 벼슬을 얻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앞으로 출세하려면 외국의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1854년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된 직후 조각배를 타고 쿠로후네로 찾아가 해외 밀항을 부탁했다가 페리 제독한테 거절당하고 옥살이를 했고(...)그 분노로 막부 타도를 외친건가 요시다 쇼인의 제자 '조슈 파이브' 이토 히로부미 등은 번의 공금을 횡령해서 영국으로 밀항하기도 했는데 이런 흐름은 이와쿠라 도모미이와쿠라 사절단으로도 이어졌다. 사카모토 료마[43], 이타가키 다이스케[44], 이와사키 야타로, 고토 쇼지로, 자유주의 사상가 나카에 조민(中江兆民)[45] 등에게도 영향을 줬다.

그는 엘리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서구 정치 제도에 대해 논하고, 외교 업무를 돕고, 조선과 해군 창설 등에 직접 간여했으며 봉건체제라는 우물 안 개구리의 일본인들에게 드넓은 세상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안내자 역할을 했다.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그의 지식이 메이지 체제의 중요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서 1889년 헌법에 반영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서구인은 야만인이라는 편견을 깨고 일본의 문호개방하는 데 일조했다.# 미일관계에 가교(架橋)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2.5.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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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살 때의 존 만지로 존 만지로의 무덤

그는 평민 출신으로 출세했음에도 자만하지 않고 빈민구제에 힘썼으며 정치인 친구들이 높은 자리를 제안했음에도 거부하고 교육자로서 헌신했다고 전해진다. 그 사이 나카하마에도 몇 차례 귀성해 어머니(1879년에 86세로 병사)를 문병했다.

이후 낫긴 했지만 뇌출혈로 쓰러지기도 해서 비교적 조용히 살다가 1898년 셋째 아들 케이사부로가 미국으로 갔을 때 아들에게 윗필드 선장의 집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케이사부로는 미국에 살던 친구를 통해 윗필드 선장의 주소를 찾는 데 성공했지만 선장은 이미 그의 장남 메르셀라스에게 집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존 하울랜드 호는 1883년 북극해에서 항해 중 실종되었고 그의 또다른 조력자 데이먼 목사는 188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케이사부로는 이 정보를 일본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냈지만 그도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도쿄 교바시구 장남 나카하마 토우이치로의 집에서 뇌출혈로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묘소는 조시가야영원(雑司ヶ谷霊園)에 있다.

이후 이러한 방식으로 윗필드 가문과 만지로 가문 간의 관계가 다시 형성되었는데 이 관계는 존 만지로와 다른 네 명의 도사 어부들이 난파된 지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의 사후 30주기인 1928년 위계 정5위가 수여됐다.

3. 연표

출처1, 출처 2
<rowcolor=#fff> 연도 사건
1827년
(0세)
1월 27일, 도사 나카하마의 가난한 어부의 차남으로 탄생한다.
1836년
(9세)
아버지 코시스케가 사망한다.
1837년
(10세)
벌이를 하러 나간다. 나카하마포(中浜浦)에서 노역, 이마즈타이헤이타쿠(今津太平宅)의 허드렛일을 한다.
1841년
(14세)
우사에서 동료와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조난을 당한다.
수일의 표류태평양의 외딴 섬 토리시마에 표착. 143일간의 무인도 생활 끝에 미국 포경선 존 하울랜드호에 의해 구조된다.
1842년
(15세)
동료와 하와이에서 헤어지고 배에 남아 미국으로 건너갈 것을 결심했다.
, 사모아, 타히티 등에 기항(寄港). 이 항해 중에 '존 만(John Mung)' 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1843년
(16세)
윗필드 선장의 고향 페어헤븐으로 간다. 학교에서 3년간 영어, 수학, 측량, 항해술, 조선기술 등을 배운다.
동료들과 헤어져 호놀룰루를 떠나고 1년 4개월이었다.
1846년
(19세)
포경선·프랭클린호에 스튜어드(잔신부름 담당)로 탑승해 전세계 바다를 항해한다.
1847년
(20세)
호놀룰루에 입항. 동료 토라에몬(寅右衛門)과 재회. 데이몬 목사와 만나다.[46]
1848년
(21세)
일등 항해사, 부선장이 되다.
1849년
(22세)
3년 4개월만에 뉴 베드퍼드(메사추세츠)에 입항하다.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샌프란시스코행 재목선에 올라타 서부 캘리포니아로 향한다.(골드 러시)
1850년
(23세)
출발부터 약 7개월 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금광에서 3개월 정도 일하다.
금광으로 얻은 자금으로 상륙용 보트를 구입해, 귀국 준비를 정돈하자 동료와 함께 호놀룰루를 출발.
1851년
(24세)
사쓰마 번령의 류큐에 상륙. 10년만의 일본땅을 밟는다.
나하→오나가→시마즈번 가고시마→나가사키 봉행소에 호송된다.
1852년
(25세)
고향 도사로 돌아온다. 요시다 도요(吉田東洋)로부터 70일간의 조사를 받다. 후에 화가 가와다 쇼료 집에서 기숙한다.
11년 10개월만에 어머니와 재회한다. 고치성 아래의 교수관[47]에 취임한다.
1853년
(26세)
막부에 초빙되어 에도로 간다. 직참 하타모토의 벼슬을 받는다.
이 때 나카하마의 성을 받고, 나카하마 만지로라고 자칭한다.
번교 '교수관'의 교수로 임명된다.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 등을 직접 지도한다.
1854년
(27세)
막부 통역사가 된다. 한편 조선, 항해, 측량, 포경 지도를 위해 온 나라를 동분서주한다.
막부검도지남 단노 겐노신(団野源之進)의 둘째딸 테츠와 결혼한다.
1855년
(28세)
미국 항해 학서 '신실전 항해서(新実戦航海書)'의 번역을 맡는다.
1857년
(30세)
군함 교수소(軍艦教授所)의 교수가 되다.
서양형 범선 건조(建造)를 이즈에서 직접 지도한다.
포경술 교수를 위해 하코다테로 출발한다.
1859년
(32세)
영어회화서 '영미대화첩경(英米対話捷径)'을 편집한다.
1860년
(33세)
미일수호통상조약 비준서 교환을 위한 해외사절단이 승선한 포하탄호의 수행함 간린마루에 통역, 기술지도원으로 탑승하며 일본 최초의 태평양 항해를 이끈다.
1861년
(34세)
외국 봉행 미즈노 다다노리(水野忠徳)와 동행하며 오가사와라 제도(치치시마, 하하지마) 조사와 도면 작성을 한다.
1862년
(35세)
아내 테츠가 병사하다.
막부의 범선 이치반마루의 선장에 임명된다.
1863년
(36세)
치치시마에서 고래잡이를 위해 출항한다. 향유고래 2마리를 포획한다.
호툰 사건. 강도 미수의 외국인 뱃사람 2명을 체포한다.[48]
1864년
(37세)
사쓰마 번 카이세이소(開成所)[49] 교수로 부임. 항해, 조선, 측량, 영어를 가르친다.
1865년
(38세)
나가사키로 출장을 가서 사쓰마 번의 배를 구입한다.
1866년
(39세)
도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 공의 의뢰로 고토 쇼지로 등과 번교[50] '개성관' 설립에 기여한다.
또한 고토 쇼지로 등과 상하이로 건너가 도사번선(유우가오호) 등을 구입한다.
1867년
(39세)
사쓰마의 초빙을 받아 가고시마로 출장을 갔다가 12월, 직장을 그만두고 에도로 돌아간다.
1868년
(40세)
도사번으로부터 에도 후카가와 스나초의 저택을 받다.[51]
1869년
(42세)
메이지 신정부에 의해 가이세이 학교(현 도쿄대학)의 이등 교수로 임명된다.
1870년
(43세)
가이세이학교 중박사(교수)가 되어, 최고 학부의 교단에 선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시찰단으로 유럽에 파견되다.
뉴욕에 체재했을 때에 페어 헤븐에 방문해, 윗필드 선장과 재회한다.
1871년
(44세)
런던으로부터의 귀국 후, 가벼운 뇌출혈로 쓰러진다.
곧 완쾌하지만 정치에 전면에 나서지 않고, 파란만장한 반생에 비해 대단히 조용한 말년을 보낸다.
1898년
(71세)
뇌출혈로 사망한다.
1928년 정5위에 추증된다.

4. 여담

  • '일본 최초의 국제인(国際人)'#, '퍼스트 재패니즈(ファースト・ジャパニーズ)'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할아버지 워렌 델라노 주니어(Warren Delano Jr.)가 그를 구조한 포경선 존 하울랜드호의 지분을 소유[52]하고 있었다고 한다. 워렌 델라노는 윗필드 가족이 있는 리버사이드 묘지를 위해 땅을 구입해 기부하기도 했다.# 1933년 만지로의 아들 나카하마 토이치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내가 페어헤븐의 워렌 델라노 씨의 손자라는 것을 모를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소년이었을 때, 나의 할아버지가 나에게 페어헤븐에 간 작은 일본 소년에 대해 말한 것을 잘 기억한다. 델라노 가족과 함께 가끔 교회에 간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하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나카하마 토이치로에게 보낸 편지 전문이다.#
    친애하는 나카하마 박사님께


    이시이 자작[53]이 여기 워싱턴에 있을 때 당신이 도쿄에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의 유명한 아버지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제가 페어헤븐의 워렌 델라노 씨의 손자란 걸 모르실지도 몰라요. 윗필드 선장의 배의 일부 소유주였습니다. 페어헤븐으로 당신 아버지를 데려온 사람이죠. 제가 기억하기에 당신 아버지는 할아버지 집 바로 맞은편에 있는 트리페 아저씨 댁에 살았는데, 제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페어헤븐에서 학교를 다니고 델라노 가족과 가끔 교회에 다니던 작은 일본 소년에 대해 다 말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페어헤븐에 가곤 했는데, 아직도 외가댁이 그 오래된 집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나카하마라는 이름은 우리 가족에게 항상 기억될 것이고, 당신이나 당신 가족 중 누구라도 미국에 온다면 꼭 우리를 보러 오길 바랍니다.
  • 귀국 후 그의 발언 중 에도 막부 말기의 인물들에게 충격을 준 말 중 하나는 "아메리카에서는 국왕을 투표([ruby(入, ruby=い)]れ[ruby(札, ruby=ふだ)])로 정하고, 4년이 지나면 교대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대통령 선거 제도)였다.#
  • 그의 자식들 중 나카하마 토이치로는 의학박사가 되어 오카야마·카나자와 각 의학교 교수겸 병원장을 역임했다. 나카하마 니시지로는 공학사 학위를 땄고 나카하마 케이사부로는 해군주계대감(海軍主計大監)(수석회계감독관)이 되었다.
  • 손녀는 나카하마 히토코(中濱絲子)가 있는데 메이지 시대의 활약한 여류 시인이다. 증손자는 나카하마 히로시(中浜博)가 있는데 가톨릭 계열 병원인 세이레이병원(聖霊病院) 원장으로 의학박사이며 저작으로는 '나의 존 만지로 자손이 밝히는 표류 150년째의 진실', '나카하마 만지로 미국을 처음으로 전한 일본인'이 있다. 2008년 사망했다.
  • 일본으로 10년만애 귀국하고 체포됐을 때 그의 초상화가 있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귀국했다고 한다. 현재 존 만지로 자료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림은 '효손키라쿠'의 카와다 소료가 그렸다.#
파일:uH4.jpg}}} ||
  • 1860년에 다시 미국으로 떠나 체류지인 미국 서해안에서 구입한 재봉틀을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이 재봉틀이 일본에 전래된 최초의 미싱이라고 한다.#
  • 과자장어구이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다니던 장어집의 이름은 야코(やっ古)인데 아직도 운영 중이며 또 다른 단골 손님인 가쓰 가이슈와 함께 가게 메뉴판에 얼굴이 붙어 있다.#
  • 상대를 신분에 관계없이 대했으며 특히 약자들에게 상냥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에피소드는 그가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만지로와 저희 가게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당시 꽤 부유했을 법한 만지로였지만, 식사 나머지를 항상 넣어 가지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모습에 이 가게의 점원이 '만지로는 구두쇠다.'라고 소문을 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가게 나카이가 외출했을 때 다리 밑에 있던 초라한 모습을 한 사람에게 만지로가 '지난번에는 네게 줄 수 없어서 미안했어.'라며 우리 가게의 뱀장어를 건네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지로는 일부러 식사를 남기고, 그 나머지를 싸서 불우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습니다." 나카이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점원들은 만지로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을 반성하고 후에 만지로의 자손이 이 가게에 내점했을 때 오해하고 있었던 것을 사과했다는 이야기가 만지로의 손자가 쓴 책에 실려 있다.#
  • 그의 고향 토사시미즈시에는 그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관(박물관)이 있다. 그는 고치현과 토사시미즈시가 배출해낸 대표적인 위인 중 한 명으로 대접받고 있다.[54] 고치현에 있는 사카모토 료마 기념관에는 존 만지로 전시실이 따로 있는데 료마와 동시대를 살았던 존 만지로를 소개하는 전시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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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에는 프리메이슨의 일원 아니었냐는 음모론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음모론일 뿐 진지하게 믿으면 곤란하다.#
  • 1860년에 페어헤븐을 떠난 후 윗필드 선장에게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여러분께 몇 마디 말씀드릴 기회가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저는 아직 살아있고 당신도 같은 축복이었기를 바랍니다. 저는 당신을 이 세상에서 한 번 더 만나고 싶습니다. 얼마나 기쁠까요. 아멜리아 윗필드 부부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보고 싶어요. 대위는 포경업에 부하들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을 일본으로 보내야 합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제가 그나 그들을 돌볼게요. 발송 전에 알려주시면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 오가사와라 제도와도 인연이 있는데 총 5번의 오가사와라 근해 항해 중 4번은 포경과 관련된 것이며 그 중 3번은 치치시마에 상륙도 했다. 현재 오가사와라에는 그의 발자취를 나타낼 만한 것은 없다. 단, 1861년에 막부가 오가사와라 개척 시 건립한 표류자명복비 및 오가사와라신치비는 현존한다.#
  • 그가 막부 군함 교습소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이곳의 책임자는 가쓰 가이슈였다. 가쓰는 그를 불러 미국 사정에 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는 많은 막부 관계자들로부터 바보 같은 질문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이때도 그냥 대충 받아넘기려고 했지만 가쓰가 열심히 묻자 "그럼 한 가지 들려드릴 게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 높은 신분을 가진 자는 점점 더 깊이 생각하고 거동이 고상해집니다. 여기 일본과 크게 다른 점이죠." 막부 수뇌의 무능함을 한탄하던 가쓰는 이 말을 듣고 그와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 그의 영어 실력을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회화 능력은 뛰어났지만 어린 시절 학문을 배운 적이 없어서 영어 문장을 일본어로 옮기는 것은 서툴러서 서양의 체계적인 학문 지식을 도입하려는 메이지 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능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했다고 한다. 참고로 만지로 본인은 미국에서 포경업을 배웠기에 일본에서도 고래를 잡으려고 귀국했는데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결국 영어와 미국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게 되었다.[55]
  • 일본 최초의 본격적 영어 회화 교본인 '영미대화첩경'을 만들었는데 213개의 일상영어회화에 대역(対訳)이 덧붙여져 있다. 그의 영어 공부법은 자신의 귀로 들린 영어를 그대로 발음하는 것이었다. '영미대화첩경'은 현재 '존 만지로의 영어회화(ジョン万次郎の英会話)'로 복각되어 현대어 번역이 완료되었으며 이 공부법이 재평가되어 그의 발음법을 참고로 한 영어를 가르치는 영어학원도 존재한다.
  • 실제로 현재의 영미인에게 그의 발음대로 말하면 다소 빠른 영어로 들리지만 올바른 발음에 좋게 들려 충분히 의미가 통한다고 하는 실험 결과도 있다.
  • 한국에서는 그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표류하다가 해외를 들렀다 온 조선문순득과 비교되기도 한다. 참고로 조선사절단이 미국에 간 건 1883년 보빙사가 최초였다.#
  • 만지로 이후에는 조지프 히코(Joseph Heco)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미국에 귀화한 첫 일본인이며 에도막 부 말기에 활약한 통역, 무역상이다. ‘신문의 아버지’라고도 불렸다.#
  • 2010년애 그가 어린 시절 살았던 생가가 복원됐는데 남은 사진을 바탕으로 설계한 초가 목조 단층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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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건국 200주년에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재단이 개최한 '해외로부터의 미국 방문자전'에서는 29명 중에 '미국 견문록'을 저술한 영국의 찰스 디킨스 등과 함께 선택되기도 했다.#
  • 2015년 4월, 메사추세츠 뉴베드포드의 도서관에서 그와 윌리엄 윗필드 선장으로 추정되는 노인이 촬영된 사진이 발견되었다.# 전술했듯 그가 1870년 윗필드 선장 집을 재방문했을 때 선장 등 지인들과 재회했고 이때 누군가와 사진을 찍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의 현존하는 사진은 많지 않으며 특히 선장과 함께 있는 사진은 확인되지 않았다. 만지로를 통한 미·일 교류 단체 간부 키타시로 쥰지는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지만, 얼굴의 특징으로부터 만지로라고 보고 있다. 중요한 사료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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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년 오키나와 오나가(翁長)에 존 만지로 기념비를 설립했는데 '일본 개국의 선구자 존 만지로가 오나가(翁長)에서 머물렀던 사실과 인간미 넘치는 선대의 행동에 감사하며 이 땅에 기념비를 건립한다'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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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행성 4841 만지로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고 입지전적스런 성공도 거둔 인물이라 대하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그의 고향에서는 그를 대하드라마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유치 운동을 하고 있는데 2020년대 초반 기준으로 서명자는 20만명 가까이 된다.# 고치현에서 서쪽으로 가면 '존 만지로를 NHK 대하드라마로!'라는 간판 등이 곳곳에 붙어 있다고 한다.# 토사시미즈시가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만큼 시의 대표 위인인 만지로를 대하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생각인 듯하다. 2015년 젊은 성인 남성 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NHK 대하드라마로 보고 싶은 유신 지사 순위'에서는 5위를 차지했는데 사실 유신지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위권에 들었다.# 근데 1위가..
  • 배우 키타무라 카즈키가 존 만지로가 주역인 대하 드라마에 꼭 출연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 2018년 2월 오키나와에서 24세의 그가 미국에서 귀국할 때 상륙한 곳인 이토만시의 오도하마 해안에 그의 기념비를 만들었다. 상륙한 땅에 그의 발자취를 전하기 위해 기념비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해안은 그의 이름을 따 '존만비치(ジョン万ビーチ)'라고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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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윗필드 선장이 사망한 지 20년 후 그의 장남은 아버지의 구원과 마을에서 받은 교육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4세기 일본도를 페어헤븐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윗필드의 무덤에 화환을 바친 후 미국 주재 일본 대사 이시이 기쿠지로는 1918년 7월 4일 기념식에서 검을 수여했다. 이후 대통령도 되는 당시 매사추세츠 부지사 캘빈 쿨리지는 환영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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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검은 한때 장소와 카스트, 임의의 계급의 상징이었습니다. 윗필드 선장이 인류의 부름에 충실했기 때문에 새로운 의미가 생겼습니다. 일본 소년은 의무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이 상징은 앞으로 두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우정의 증표일 뿐만 아니라 자유의 증표가 될 것이며, 두 나라 정부가 국민의 권리를 인정하는 증표가 될 것입니다.
  • 1987년 아키히토 당시 황태자가 페어헤븐과 윗필드 선장의 묘를 찾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일본인들이 윗필드에 대한 선물을 남기기 위해 묘지에 들른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 있는 그의 자손들은 미국 윗필드 선장의 후손들과 대대로 교류를 계속하고 있다. 그들의 후손들이 만든 Whitfield-Manjiro Friendship Society도 있다. 미국에서는 홀수 해인 10월 초에 윗필드 선장의 고향 페어헤븐에서 Whitfield-Manjiro Friendship Society가 후원하는 만지로 축제(Manjiro Festival)가 열린다.#
  • 그와 그를 구조해 미국에서 교육의 기회를 준 윗필드 선장, 또 그들 자손의 175년간 계속되는 우정을 원점으로 미국과 일본의 시민이 상호 이해와 친교를 깊게 해 우정을 기르는 국제 민간 교류 센터도 있다.[56]
  • 그가 쓴 알파벳은 그의 책 '난선인귀조[57]기사(難船人帰朝記事)'에 적혀 있다. 이 책에는 알파벳 외에도 간단한 영어 단어들의 발음도 소개되어 있다.[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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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만지로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또 다른 친필 알파벳이 존재한다. 'Z' 뒤에도 글자가 적혀 있는데 '&'이라고 하며 '앙'이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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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객에게 습격을 받은 적도 있다. 그래서 권총을 항상 챙겼다고 한다. 무사 오카다 이조가 그의 호위무사였다. 오카다 이조는 가쓰 가이슈의 호위무사였는데 가쓰가 오카다의 실력을 인정해 그의 호위무사 자리에 앉혔다. 그를 습격해 온 자객을 오카다가 순식간에 격퇴시키기도 했다.#

5.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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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키단 히토리가 연기한 존 만지로 토타스 마츠모토가 연기한 존 만지로
  • 2018년 방영한 대하드라마 세고동에서는 게키단 히토리가 존 만지로를 연기했다. 극중에서 게키단이 혼자 연기하는 '수수께끼의 표류자'의 정체가 '존 만지로'라고 밝혀지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방송 후에는 야후 재팬 실시간 검색 화제의 키워드로 존 만지로가 1위에 오르는 등 높은 주목을 끌었다.# 여기서 존 만지로가 사이고 다카모리와 만났다는 장면을 넣기도 했는데 사실 이건 픽션이다. 존 만지로와 사이고 다카모리가 만났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 2010년 방영된 대하드라마 료마전에서는 우루후루즈의 보컬 토타스 마츠모토가 존 만지로를 연기했다. 표류 생활과 선장으로 일했던 것 때문인지 존 만지로를 상당히 와일드하게 연기했다.[59] 이 드라마에서도 만지로가 사카모토 료마를 만난다는 장면을 넣었는데 실제로 료마와 만지로가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료마가 만지로에게서 영향을 받긴 했지만 둘이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없다.
  • 그의 인생을 그려낸 대표적인 뮤지컬로는 '존 만지로의 꿈(ジョン万次郎の夢)'이 있는데 일본 뮤지컬의 양대 산맥 극단 시키(劇団四季)에서 제작했다. 무려 1974년부터 공연 중이며 지금까지 공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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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년 존 만지로 표류 180주년을 맞아 뮤지컬 '존 마이 러브-존 만지로와 테츠의 7년-'이 공연됐는데 '에도 말기부터 메이지에 걸쳐 활약한 고치현 출신의 위인 존 만지로와 아내 테츠가 보낸 7년간을 그려진다.'는 내용. 한마디로 픽션이 가미된 뮤지컬이다.#
  • 애니메이션 어~이! 료마(お〜い!竜馬)와 게임 막부말Rock 초혼에서도 등장한다.
  • 만화 쾌락 히스토리에에서도 등장하는데 "전 세계에서 집결한 사람들과 함께 일확천금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에서도 탐광에 참여해 다수의 에로만화 발굴에 성공한다. 미국에서 본 훌륭한 여러 가지 에로만화와 남녀평등과 민주주의에 대해 일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을 꿈꾸고 있다."는 설정이다.
  • 일본에서 그를 다룬 소설 중 가장 유명한 소설은 일본 문학계의 거장 중 한 명인 이부세 마스지(井伏鱒二)가 쓴 소설인 '존 만지로 표류기(ジョン万次郎漂流記)'이며 쇼와 시대의 존 만지로의 인지도를 크게 올린 소설이기도 하다. 이 소설로 그는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 일본 역사소설의 거장 시바 료타로가 쓴 사카모토 료마의 전기 소설 '료마가 간다'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이렇게 묘사된다. "그러한 인물이 쇄국 시대에, 「표류」라고 하는 우연한 기회로 북미 대륙의 문명을 보고, 게다가 페리 내항 소동의 직전에 돌아왔다는 것은, 일본의 행운이라고 해야 했을 것이다."#
  • 영어권에도 그의 삶과 여정에 관한 책들이 출판됐다. 마지 프레우스의 'Heart of a Samurai[60]', 에밀리 크로포드의 'Born in the Year of Courage', 로다 블룸버그의 'Shipwrecked! The True Adventures of a Japanese Boy' 등이 있다.

6. 관련 문서

7. 외부 링크



[1] 사실 후술되어 있듯 평민 출신이라 원래는 성도 없었다가 '나카하마'란 성을 칭했다.[2] 雑司ヶ谷霊園. 나쓰메 소세키, 코이즈미 야쿠모, 이즈미 쿄카 등 유명인사들이 많이 안장되어 있는 공동묘지다.[3] 미국인들에게 불린 애칭이다.[4] 장남을 낳았으나 24세로 요절.[5] 차남, 3남을 낳고 이혼.[6] 4남, 5남을 낳았으나 4남은 요절.[7] 장남 나카하마 토이치로(中濱東一郎)는 의사이며 의대 교수로 활동했다.[8] 구 명칭 카이세이학교.[9] 사후인 1928년에 추서됐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 정5위는 메이지 유신에 공로가 있던 지사들 중 주로 가로직이 없는 중견·하급 무사인 사람이 많이 추증되었다.#[10] 토사시미즈시 아시즈리미사키(足摺岬)에 있다.[11] 정확한 원문은 "존 만지로의 일본 귀환은 일본 막부를 도와 우리나라의 실체를 파악한 그의 성공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가 초대 미국 대사를 파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은 페리 제독이 도착했을 때 예상되었던 것보다 더 환영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이다.#[12] 37세의 큰형 히츠노죠(筆之丞), 26세의 둘째형 토라에몬(寅右衛門), 25세의 셋째형 시게스케(重助), 16세의 넷째형 고에몬(五右衛門)[13] 자료에 따라 10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14] 당시 일본은 쇄국 정책을 폈기 때문에 막부가 어선이나 상선의 크기, 형태, 장비 등을 제한해 외양을 항해할 수 없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15] 만지로가 표착한 곳은 활화산토리시마라는 것은 윗필드 선장의 항해일지에서도 드러난다. 섬의 위도, 30도 31분 북쪽, 경도는 이틀 전의 일지에 '동경 140도 31분'이라고 되어 있으니 토리시마임에 틀림없다.[16] 알바트로스의 번식지였기 때문에 이곳은 '새섬'이라고 불렸다. 만지로와 동료들은 이 섬에서 알바트로스의 고기와 달걀을 먹으면서 140일 이상이나 생존 생활을 했다.[17] 하와이의 선교사들에게 맡겨졌다.[18] 만지로라는 이름을 줄여 만 혹은 존 만으로 불리게 됐다.[19] 당대 포경업을 다룬 소설 모비 딕에서는 주인공 이스마일과 키퀘그 일행이 출항하기 전에 찾는 예배당이 있는 도시로 등장한다.[20] 만지로가 방문한 이 시기는 확실히 최전성기로, 양항을 합해 260척의 포경선을 가진 미국 최대의 포경 기지였다.[21] 일본인 최초로 미국 땅을 밟은 사람은 아니다. 1614년 하세쿠라 츠네나가가 식민지였던 아메리카 대륙을 방문했지만 이때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없었다.[22] 현재는 노스웨스트 해양학 전문 양성소 학원으로 바뀌었다. 정면 입구 앞에 세워진 기념비는 만지로와 윗필드 선장의 우정을 상징하도록 학원장이 설계했다.[23] 만지로의 편지에서 The great God을 제외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선장을 회고했다.[24] 방 하나뿐인 교실에서 상급생, 하급생, 동석으로 공부했다.[25] 일등 항해사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이라면 3~4회 항해와 9년에서 12년의 경험으로부터 선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례적인 일이었다.[26] 존 만지로의 10년간의 여정은 인터넷 존 만지로 자료관 참고.[27] 1850년대에 만들어진 나카하마 만지로의 여행 지도. 어선 난파로 미국 포경선에 구조된 뒤 하와이와 태평양, 대서양과 아프리카, 인도양 등을 종횡무진한 그의 여행 경로가 표시돼 있다.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28] 당시 미국의 포경선은 종종 일본에 난파, 표류했지만 쇄국 정책을 강화하던 막부의 '이국선 타불령'은 외국 선박에 엄격하게 대응하여 이들 국가의 표류자는 감옥에 처박혀 식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미국에서도 반발의 목소리가 높았다.[29] 둘째형 시게스케는 하와이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30] 시마노카미(志摩守)라는 관직으로 알려져 있다.[31] 그도 그럴 만한 것이 나가사키에서 행해지는 외국과의 무역은 에도 막부가 직접 관리해서 관료들은 당연히 쇄국 정책을 유지하던 친막부 성향이었다.[32] 당시에는 아직 3선 제한이 없었다. 3선 제한은 한참 후대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사후에 수정헌법으로 제정되었다.[33]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이들이 일본어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34] 만지로에게 항해와 조선에 대해 배운 제자 중 한 명. 1875년 미쓰비시 증기선 회사를 설립하고 상하이 노선을 열었다. 정부와 유착 관계에 있던 미쓰비시 회사는 정부로부터 나가사키 조선소를 인수받아 조선회사로 발전시켰고 일본은 이후 주요 증기선 조선 국가로 발돋움했다. 대하드라마 료마전에서 주역으로 등장한다.[35] 老中, 쇼군 직속으로 국가 정사를 통솔하는 직책.[36] 에가와 히데타츠의 통칭이다.[37] 이 주장을 한 인물이 바로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아버지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38] 직접 통역은 미국인 래널드 맥도날드에게 영어를 배우고 네덜란드어 역관 집안의 자제인 모리야마 에이노스케가 했다.[39] 1802년에 처음 출판된 이 책은 항해술의 교과서라고 불리기도 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모든 미국 해군 함정에 탑재되어 있다.[40] Soembing, 자바의 화산 이름에서 유래했는데 후일 간코마루(觀光丸)로 개칭했다.[41] 브루크는 이 항해일지에서 만지로를 제외한 모든 일본인 선원들을 깠으며 일본인들은 순전히 굼벵이라고 말하기도 했다.[42] 다만, 이 검은 1977년에 도난당했고 지금은 몇몇 일본 회사들이 기증한 '대체' 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43] 상인들의 피를 이어받는 사카모토 료마는 가와다 쇼료를 통해 만지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합리적인 미국의 사고방식에 감동해 푹 빠졌다.[44] 만지로로부터 전해진 미국의 민주주의 지식은 이타가키에게 사상과 행동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45] 일본에서 장 자크 루소를 처음으로 소개한 인물. 동양의 루소라고 불렸다. 제자로는 고토쿠 슈스이가 있다.[46] 만지로는 윗필드 선장으로부터 하와이 예배소에 새뮤얼 데이몬 목사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을 들었다. 만지로는 호놀룰루에 올 때마다 데이먼 목사를 찾아가 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데이먼 목사는 만지로가 귀국 계획을 세웠을 때 자신이 발행하는 정보지를 호소해 필요 물자를 모아 주거나 일본에 관한 최신 정보를 가르쳐 주는 등 많은 협력을 했다. 두 사람의 교제는 이후에도 오래 지속되었다. 데이먼 목사는 일본의 직접 방문해서 존 만지로와 재회하기도 했다.[47] 학문을 가르치는 사람[48] 최초로 외국인을 체포한 일본인이기도 하다.[49] 막부의 서양 학문 교육 연구 기관이다.[50] 다이묘의 자제들을 교육하는 학교[51] 1880년까지 여기에서 가족들과 함께 거주한다.[52] 윗필드 선장과 함께 포경선의 공동 출자자였다.#[53] 이시이 기쿠지로(石井菊次郎) 미국 주재 대사.[54] 또 다른 막말 인물 중 고치현 출생 위인으로는 사카모토 료마와 야마우치 요도(山内容堂)가 있다.[55] 여러 곳에 서술되었듯 아편 전쟁을 비롯해 제국주의의 마수가 극동까지 뻗쳐오던 시대였다. 언제 이 공포가 일본으로 들이닥칠지 모르는 이 시기에 미국에서 살다가 온 만지로의 미국 생활과 서양식 항해술, 그리고 영어 실력은 일본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만지로도 결국 교편을 잡게 된 것이다.[56] 회장이 오자와 이치로다.[57] 난파선인의 귀국이라는 뜻이다.[58] 선원들의 구어체를 그대로 옮겼기 때문인지 현대 기준으로 보면 비속어에 해당하는 단어들도 소개되어 있다. 일례로 대변과 소변은 각각 "시엣(シヱツ)", "페에스(ペヱス)"라고 적혀 있는데 당연히 "shit"과 "piss"를 옮긴 것이다.[59] 존 만지로는 실제로는 굉장히 조용했던 인물이다.[60] 이 책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일본에서 청소년 독후감문 전국 콩쿠르의 과제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61] 이쪽은 조선판 존 만지로라고 볼 여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