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17 13:47:22

아키히토

파일:나무위키+유도.png   헤이세이 시대에 대한 내용은 헤이세이 시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유도.png   같은 이름을 가진 75대 덴노에 대한 내용은 스토쿠 덴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border:0px solid; margin:-11px; margin-top:-6px; margin-bottom:-5px"
초대

진무
제2대

스이제이
제3대

안네이
제4대

이토쿠
제5대

고쇼
제6대

고안
제7대

고레
제8대

고겐
제9대

카이카
제10대

스진
제11대

스이닌
제12대

케이코
제13대

세이무
제14대

주아이
진구
제15대

오진
제16대

닌토쿠
제17대

리추
제18대

한제이
제19대

인교
제20대

안코
제21대

유랴쿠
제22대

세이네이
제23대

켄조
제24대

닌켄
제25대

부레츠
제26대

케이타이
제27대

안칸
제28대

센카
제29대

긴메이
제30대

비다츠
제31대

요메이
제32대

스슌
제33대

스이코
제34대

조메이
제35대

고교쿠
제36대

코토쿠
제37대

사이메이
제38대

덴지
제39대

고분
제40대

덴무
제41대

지토
제42대

몬무
제43대

겐메이
제44대

겐쇼
제45대

쇼무
제46대

코켄
제47대

준닌
제48대

쇼토쿠
제49대

코닌
제50대

간무
제51대

헤이제이
제52대

사가
제53대

준나
제54대

닌묘
제55대

몬토쿠
제56대

세이와
제57대

요제이
제58대

고코
제59대

우다
제60대

다이고
제61대

스자쿠
제62대

무라카미
제63대

레이제이
제64대

엔유
제65대

카잔
제66대

이치조
제67대

산조
제68대

고이치죠
제69대

고스자쿠
제70대

고레이제이
제71대

고산죠
제72대

시라카와
제73대

호리카와
제74대

도바
제75대

스토쿠
제76대

코노에
제77대

고시라카와
제78대

니죠
제79대

로쿠죠
제80대

다카쿠라
제81대

안토쿠
제82대

고토바
제83대

츠치미카도
제84대

준토쿠
제85대

주쿄
제86대

고호리카와
제87대

시죠
제88대

고사가
제89대

고후카쿠사
제90대

가메야마
제91대

고우다
제92대

후시미
제93대

고후시미
제94대

고니죠
제95대

하나조노
제96대

고다이고
제97대

고무라카미
제98대

조케이
제99대

고카메야마
제100대

고코마츠
제101대

쇼코
제102대

고하나조노
제103대

고츠치미카도
제104대

고카시와바라
제105대

고나라
제106대

오오기마치
제107대

고요제이
제108대

고미즈노오
제109대

메이쇼
제110대

고코묘
제111대

고사이
제112대

레이겐
제113대

히가시야마
제114대

나카미카도
제115대

사쿠라마치
제116대

모모조노
제117대

고사쿠라마치
제118대

고모모조노
제119대

고카쿠
제120대

닌코
제121대

고메이
제122대

메이지
제123대

다이쇼
제124대

쇼와
제125대

아키히토
제126대

나루히토
-2 [[틀:역대 일본 북조 덴노|{{{#FFF 북조 덴노}}}]] · [[틀:일본 추존 덴노|{{{#FFF 추존 덴노}}}]]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Imperial_Seal_of_Japan.svg.png 일본국 제125대 천황 | 現 일본국 상황
[ruby(明, ruby=あき)][ruby(仁, ruby=ひと)]
아키히토
파일:아키히토사진.jpg
현 칭호 상황 아키히토 (上皇明仁)
출생 1933년 12월 23일 ([age(1933-12-23)]세)
일본 제국 도쿄시 칸다구 고쿄 산전
재위 천황 1989년 1월 7일 ~ 2019년 4월 30일
-2 (30년 113일)
상황 2019년 5월 1일 ~ 현재
즉위식 1990년 11월 12일 (도쿄 고쿄)
연호 [ruby(平, ruby=へい)][ruby(成, ruby=せい)](헤이세이)
친필 서명 파일:572px-Heisei_shomei.svg.png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11px;margin-top:-5px;margin-bottom:-5px"
[ruby(明, ruby=あき)][ruby(仁, ruby=ひと)](아키히토) | 명인
[[칭호#s-3|어칭호]] [ruby(継宮, ruby=つぐのみや)](쓰구노미야)
부모 부황 쇼와 덴노, 모후 고준 황후
형제 2남 5녀 중 다섯째 / 장남
배우자 미치코 상황후
자녀 2남 1녀
나루히토, 후미히토, 구로다 사야코
학력 가쿠슈인 대학 정치학과 중퇴
신체 165cm, A형
십이지 닭띠 (계유년) }}}}}}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및 후사4. 한국 관련 발언5. 평화주의자6. 기타

1. 개요

일본의 제125대 천황이자 현 상황(上皇). 연호는 헤이세이(平成). 1989년부터 2019년까지 31년간 즉위하고 노령과 건강 상의 이유 등으로 2019년 4월 30일 맏아들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나 고카쿠 덴노 이후 200년 만에 일본의 상황이 되었다.

1933년생으로 쇼와 덴노고준 황후의 2남 5녀 중 다섯째이자 첫 장남이다. 1989년 1월 7일 쇼와 덴노의 사망으로 일본 제125대 덴노에 즉위하였으며, 이듬해 11월 12일 도쿄 고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1]

아명의 일종인 '어칭호(御称号)'는 쓰구노미야(継宮). 사후에는 헤이세이 덴노(平成天皇)로 불리게 된다. 현재 퇴위하였으나 생존 중이므로 일본에서는 상황(上皇)으로 불린다. 외국에서는 휘를 그대로 따서 Akihito로 호칭된다. 현재 아들과 함께 둘만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Emperor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평화주의자로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도 유명하다. 그 이유는 어릴때부터 유년시절 때까지 전쟁의 참상을 몸소 겪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발언으로 꼽히는 대부분의 말이 평화를 지향하는 말들이다. 덕분에 식민지들을 비롯한 과거 일본 제국의 피해자들에게도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일본 국내외에서 모두 지지를 받는 인물.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려 하고 있는 오늘, 일본이 지나온 역사를 반복해 배워서 평화를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2011년 12월 23일 자신의 생일 기념 감상문을 통해서)
2016년 8월 8일 오후 3시, 공식적으로 생전 퇴위 발표를 하였다. 2017년 6월 9일 일본 국회에서 '천황의 퇴위 등에 관한 황실전범 특례법(天皇の退位等に関する皇室典範特例法)'이 만장일치로 정식 통과되어 2019년 4월 30일 정식으로 퇴위하였다.# 물러남으로써 황위는 장남 나루히토에게 승계되었고, 자신은 상황(上皇, 조코)[2]이 되었다.

2. 생애

아키히토/생애 문서 참조. 내용이 길어져서 개별문서로 분리했다.

3. 가족관계 및 후사

파일:DE61AD21-B7A6-4784-BF8E-74C9CB7213CA.jpg
결혼 이듬 해인 1960년 황태자 시절, 도쿄 황궁 동궁어소의 아기방에서 당시 황태자비였던 미치코 상황후의 품에 안긴 첫아이이자 장남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덴노를 바라보고 있는 아키히토.

파일:06407AA1-0789-4627-AEEE-E5F0099C5625.jpg
1971년, 좌측부터 차남 후미히토 친왕, 장녀 사야코 공주, 아내 미치코 황후, 장남 나루히토 덴노.

아키히토 덴노는 아내 미치코 황후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으며, 손녀 3명에 손자 1명을 두고 있다.

1990년, 작은아들 후미히토 친왕이 대학 후배 가와시마 키코와 먼저 결혼하여 마코 공주(1991)와 카코 공주(1994)를 낳았다. 큰아들 나루히토 황태자는 1986년부터 외교관 오와다 마사코를 마음에 두었으나, 그녀는 황실에 시집오는 것을 좀처럼 내켜하지 않았다. 7년이나(!) 매달린 끝에 1993년 결혼하였으나, 2001년에야 어렵게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낳았다. 방계에도 남자아이가 1명도 없어서 일본 황실로서는 후사가 끊길 지경이 되었으며, 때문에 여성 덴노를 허용하자는 이야기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황태자의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가 장래 여성 덴노로 즉위하게 된다.

그러던 중, 차남 후미히토 친왕이 셋째 임신을 발표했고, 2006년에 히사히토 친왕을 낳았다. 황실전범이 새로 개정되지 않는다면 남자인 히사히토 친왕이 장래 덴노가 된다. 왜냐하면 메이지 덴노가 죽기 전에 제정한 황실전범에 "황위는 남계인 남자가 계승한다."라고 명문화되어 있기때문에 아들을 낳지 못한 나루히토 천황과 마사코 황후 부부는 현재 자식으로는 딸 아이코 내친왕 뿐이니, 황위는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 또는 조카 히사히토 친왕이 황위를 잇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히사히토 친왕은 어려서부터 황태손처럼 대우받으며 주목을 받았으며, 반면 사촌누나 아이코 공주는 상대적으로 홀대받았다. 하지만 나루히토 천황이 아키히토 상황의 뒤를 이어 즉위한다면 또 법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므로, 두고 볼 일이다.

고명딸 노리노미야 사야코는 2005년 36세에 쿠로다 요시키라는 남성과 결혼하여 평민이 되었고, 자녀는 없다.

자세한 가족 관계는 아키히토/가족관계 문서 참고.

4. 한국 관련 발언

아키히토는 식민지배나 전범 피해자에 대한 사과 같은 평화주의적 언행 외에도 한국 관련한 친화적 발언을 꽤나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아베 신조와 다르게 일본이 저질렀던 만행들을 반성하고 뉘우치고 있으며 아베 신조에게 후손들을 위해서 바른 역사를 가르치라고 일침을 날리기도 했고 미래를 위해서라도 과거의 전쟁을 반성해야 한다고 할 정도면 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아베 신조가 그냥 기도하고 있으라고 하는 등 아베하고 사이는 그렇게 좋진 않다. 일본의 간무 덴노의 어머니가 백제의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했는데 일본의 우익 세력들이나 혐한세력들은 당연히 이 발언을 듣고 아키히토를 까기도 하고 싫어할 정도이다.

우선 1990년, 일본을 공식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과의[3] 대화 때 ''저의 가계를 살펴보면 모계에 한국계 인물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국빈방문시 만찬에서 한때 우리나라가 한반도의 여러분께 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습니다.라고 발언했다.#

2001년 12월 23일, 68세의 생일을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선 직접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덴노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발언했다.[4]# 다만 아사히신문 등이 이 대목을 보도한 것과 달리, 주로 일본의 보수 성향 언론들은 이날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하면서도 아키히토의 이 발언은 쏙 빼놓기도 했다. 2013년 나라 현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도 속일본기를 인용하며 같은 발언을 했다.#

참고로 언급한 간무 덴노나라에서 교토로 수도를 옮기고 헤이안 시대(794~1185년)[5]를 연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좀 더 들여다보자면 간무가 편찬한 ‘속일본기’(789년)는 이렇게 전한다.
‘황태후의 성은 화씨(和氏)이고 이름은 신립(新笠)이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다. 황후는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을 드러냈다. 고닌(光仁) 천황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혼인하여 맞아들였다. …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주몽)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6]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

간무 덴노의 아버지는 고닌으로 할아버지 대에 황위 쟁탈전에서 패배하여 황위 계승이 어려웠던 인물이다. 그때 만난 여인의 이름은 화신립(和新笠) 또는 고야신립(高野新笠)으로 백제 무령왕의 10대손으로 멸망한 백제 왕실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61세에 덴노가 된 고닌은 화신립을 정실로 삼고 이들 사이에 난 아들 간무를 황태자로 삼는다. 789년 화신립이 세상을 떠나자 간무 덴노는 어머니를 태황태후로 추증하고 히라노 신사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냈다. 간무는 즉위 동안 백제 왕족의 후손들을 찾아가 제사 지내고 이들에게 5위 이상의 관위를 내리거나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에 임용하였다.

이는 정략결혼을 한 아버지와 간무 자신이 무령왕 혈통임을 내세워 왕권을 강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고닌이 즉위할 때 정실은 이후 황후였고 그 아들인 오사베가 황태자로 책봉되지만 이들은 불과 몇 달 후에 폐위되고 사망한다. 화신립 소생이던 간무에게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고닌의 자식은 5남 7녀였는데 후지와라 가문은 간무를 내세운다. 반대측이 적통성을 문제삼자 내 어머니는 백제의 직계왕족이란 말로 이를 잠재우고 간무는 황태자에 어머니는 황후에 책봉된다.

간무가 속일본기를 편찬하여 화신립을 서술할 때 동명성왕의 출생까지 거론한 것은 무령왕은 온조왕의 후손이며 온조는 천제의 아들이자 하백의 외손자인 주몽의 아들이니 곧 간무 자신이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왕권신수설을 나타낸다.

이때 일본의 일부 우익들은 충격을 받았는지, 이후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인들이 차지한 한반도" 운운하며 "지금의 한반도는 백제와 무관한 나라"라는 망언을 펼치기도 했다.

2005년 사이판 방문 당시엔 '태평양조선인평화탑'에 참배했다. 궁내청 관계자들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고 했다.#

2017년 9월 20일엔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 부부가 사이타마현 히다카 시에 있는 고마 신사(高麗神社)를 방문했다.[7] 역대 덴노 가운데 고마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아키히토 덴노가 처음이라고. 참고로 고마신사는 1300여년 전 고구려가 멸망하자 일본으로 건너온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이자 도래인인 약광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신사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아키히토 천황이 퇴위하기 전에 일본 내에서 고구려를 상징하는 의미가 있는 고마신사를 방문함으로써, 한국에게 반성과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를 내비쳤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신사 관계자 말론, 신사를 둘러보던 아키히토가 "고구려는 몇 년에 멸망했습니까?"668년이요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2019년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황태자였던 1988년 9월 당시 일본 외무성의 무라타 료헤이(村田良平) 사무차관이 이원종 주일대사와의 비공식 협의에서 '아키히토 황태자(현 상황)의 조속한 한국 방문이 실현되길 기대한다'는 일본 입장을 전달했고, 이 대사가 이를 본부에 보고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아베 신조 현 총리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8] 인 외무상이 1986년 3월 아키히토 황태자 부부의 방한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으나 그해 8월 미치코 황태자비의 건강 문제 등으로 방한 계획이 보류됐었다.#

5. 평화주의자

역사관, 정치관은 밑에 쓰여있는 발언들에서 알 수 있듯이 반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과거 침략을 부인하거나 미화하는 짓은 하지 않으며, 평화헌법의 가치도 인정하고 있기 때문.

대표적인 발언은 아래와 같다.
"우리 국민은 다시는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깊은 반성평화국가가 되겠다는 굳은 결의를 했다." (1992년 10월, 중국 수교 20주년차로 베이징 방문 때)
“제국헌법 시대의 천황의 지위와 비교하면, 현행 헌법 아래의 천황의 지위가 오랜 역사에서 볼 때 전통적인 천황의 지위에 맞다고 본다.”(2009년 4월, 결혼 50주년 기념 기자회견에서) #
(일본에 장래에 대한 걱정이 있느냐는 질문에) "내가 오히려 걱정인 것은 차츰 과거 역사가 잊혀지는 것이다.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말도 못하는 고생과 희생 위에 지금의 일본이 세워진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후 태어난 사람들에게 제대로 (역사를) 전달해 나가는 것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 (2009년 11월, 즉위 20주년을 하루 앞두고.)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려 하고 있는 오늘, 일본이 지나온 역사를 반복해 배워서 평화를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2011년 12월 23일 생일 기념 감상문을 통해서)
"전후 연합군최고사령부,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던 일본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소중한 것으로 삼아 일본국 헌법을 만들고 다양한 개혁을 실시해 오늘의 일본을 일궜다." (2013년 12월 23일 팔순을 맞아 발표한 인사말 중에서)
"만주사변으로 시작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우고, 앞으로 일본의 존재 방식을 생각하는 것이 지금 무척 중요하다." (2015년 1월 1일 궁내청을 통한 신년사에서)
"전쟁 후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진 평화로운 세월을 회상하고 이를 되돌아보며,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간곡히 기원하며…" (2018년 8월 15일 임기 마지막 전국 전몰자 추모식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 당시,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란 말도 아키히토가 한 말이다.[9] 아키히토는 즉위 이후 단 한 번도 야스쿠니 신사참배한 일이 없다. 극우 세력 일각에서는 꾸준히 참배를 권유하고 있지만, 아키히토는 이에 대해 일체 함구 중. 일본어 위키피디아에서는 "황태자 시절 참배한 적이 5회 있다"고 썼지만 아키히토 덴노가 정식으로 황태자 자리에 오른 건 1952년이고, 야스쿠니 신사에서 공개적으로 A급 전범을 합사한 건 1978년 이후로, 1975년 이후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않은 전임 히로히토와 마찬가지로 아키히토가 A급 전범 숭배에 동조한다는 근거는 일체 없다.

결국 위 발언들도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지위를 의식해 표현을 다소 완곡하게 했을 뿐이지, 실제 아키히토 덴노의 성향은 반(反) 극우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어린 시절 생생히 겪은 전쟁의 아픈 기억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아키히토는 11살이라는 초등학생 나이에 몇 달 동안 연합군 작전으로 퍼부어진 전국 대공습, 어뢰작전으로 인한 사람들의 대규모 아사, 원자폭탄이라는 절대적인 파괴라는 '전쟁의 비참함'과 방공호에 몇 달 간 틀어박히며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했던 '압도적인 공포'까지,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두려운 것인지를 어린 나이에 생생히 실감해야만 했다. 처음 도쿄 대공습이 일어난 직후 천황과 황족들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천황에게 "현인신이라면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냐"며 원망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린 나이에 그러한 참상과 원망이 충격이 되었을 것은 당연지사.

또 11살 때 방공호로 피난할 당시 군대의 장성에게서 카미카제에 대한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건 그저 병력을 소모하기만 하는 게 아닌가?"라고 물어서 입을 다물게 하는 등, 사람 목숨을 벌레 취급하던 일본군의 잔혹함과 어리석음도 직접 보아온 것이다. 이러니 극우들의 주장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는 전쟁세대로서 누구보다 잘 아는 셈이다.

2011년 3월 15일 토호쿠 대지진과 관련한 영상 메시지를 발표했는데, "메시지가 방송되는 도중 긴급 뉴스가 발생하면 메시지 방송을 중단하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 TV 도쿄는 천황폐하의 담화든 뭐든 개의치 않고 정규방송을 돌렸는데 그 소식을 듣고도 "문제없다"며 넘어갔다고 한다.

파일:attachment/72765_39760_2824.jpg
제일 왼쪽에 아베 신조 총리가 보인다.

2013년 4월 28일, 아베 신조 총리가 주도하여 '주권 회복의 날' 을 정부 행사로 격상하였다. 이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미군정 체제를 벗어난 것을 기념함과 동시에, 미군정 때 만들어진 현행 헌법도 개정해야 한다는 분위기 조성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 행사인만큼 내각이 참석을 요청하면 덴노로서도 따를 수밖에 없는데,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자리에 참석한 아키히토는 행사 내내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행사 폐막 직후 퇴장하는 도중 참석자들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万歳 천황 폐하 만세)!'라고 외치자 사뭇 당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이런 짓을 하면 할수록 일본 황실까지 덩달아 이미지가 안 좋아지는건 둘째치고서라도, 과거 히로히토조차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이 합사되자 매우 불쾌해하며 이후로는 근처에도 안 갔다는 사실[10][11]을 감안하면 내심 평화헌법(일본국헌법)을 유지하려는 아키히토 입장에서 이 날 모습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덴노 헤이카 반자이'도 얼핏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를 내세워 본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간신배[12]의 속셈이 뻔한데 아키히토 입장에서 유쾌할 리가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일본 내의 매우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와 결부되는데, 현재 언론은 아베 신조의 개헌 중에서 자위대 관련된 부분만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개정헌법에 덴노를 다시 국가 원수로 명문화하려고 하고 있다. 이는 2차대전 당시 덴노를 일본의 상징으로 삼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이를 휘두르던 군국주의자들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다만 이쪽 안은 불행 중 다행으로 자민당과 연정공명당의 결사 반대로 빠지긴 했다.

위와 같은 일련의 일들로 인하여, 아베 신조 총리와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덴노는 신임 총리가 취임하면, 공무 외에도 개인적으로 고쿄에 초청해서 만찬을 베푸는 전통이 있는데, 아베는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고 알려졌다. 이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어쩔 수 없어도, 사적으로는 아베와 교류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로 보인다.

일본 내 극좌파들도 "덴노 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심심하면 주장하지만, 아키히토 개인의 인격에 대해선 거의 비판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히로히토조차 전범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이 말이다.

2013년 야마모토 타로가 초선의원이던 시절 원자력 발전소 관련 문제 등으로 황거에서 열린 행사에서 편지를 건넨 적이 있는데, 야마모토의 안전을 위해서 읽지 않고 바로 시종장에게 넘겼다. 만약 읽었으면 야마모토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일본의 상징이지만, 정치적인 권력은 극도로 제한된 일본 덴노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건. 덴노가 왜 편지를 즉석에서 보거나 자신이 갖지 않고 시종장에게 편지를 넘긴 게 현명한 판단인지는 야마모토 타로 문서로.

거기에 더해 패전 70년을 맞이해 쇼와 덴노의 항복 선언 녹음(옥음방송) 원판 사진과 고음질 디지털 녹음본을 2015년 8월 1일에 전격 공개했다.#(일본어) mp3

덴노 일가의 굴욕이라고도 볼 수 있는 항복 녹음을 디지털로 세심하게 복원해 공개한 것은, 아베 정권의 우경화를 반대하는 아키히토 덴노의 의중이 반영되었다는 해석이다. 즉, "전쟁의 참상을 잊지 말고 반성하자"는 것. 참고로 이 원본을 이용한 디지털 녹음본이 공개되기 이전의 항복 선언 녹음본은 음질이 매우 열악했다. 자세한 것은 옥음방송 문서를 참고할 것.

6. 기타

아버지 쇼와 덴노처럼 어류학자로서 일본 어류학회 회원이기도 하고, 사이언스네이처 논문을 포함하여 논문 28편을 발표했다.[13] 한편 덴노가 되기 전에 했던 연구중에 당시에는 논란이 되었던 망둑어 분류법을 제안하였는데 현대에는 널리 사용되고 있다고 린네 탄생 300주년에 런던 린네 학회의 키노트에서 밝히기도 했다. #

2008년에는 차남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과 사이좋게 1, 2저자를 먹으며 논문을 냈다. 저자 목록을 살펴보면, Akihito, Fumihito A et al. 이라고 되어 있는데, 일본의 황실은 성(姓)이 없기 때문에, 저자 목록에 그의 '이름'만 올라가 있는 특이한 경우이다. 후미히토 친왕은 궁호(宮號)인 '아키시노노미야'를 '성'으로 등재. 참고로 저자 주소는 Imperial Residence. 첫째 누나 히가시쿠니 시게코생물학에 관심이 많았고, 딸 구로다 사야코도 조류 연구소에서 비상근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물총새에 대해 연구한 바 있다. 일종의 집안 내력인 듯.

오랫동안 망둑어 연구를 한 것을 기려, 그의 이름이 들어간 망둑어 종이 2개, 속이 1개 있다. Platygobiopsis akihitoExyrias akihito 두 종과 바누아투와 월리스 푸투나 근방에 서식하는 Akihito속이 바로 그것. 실험이 예상했던 것처럼 안 되어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경험을 털어놓은 적도 있다. # 2019년 퇴위를 앞두고 덴노로서 마지막으로 망둑어 관련 논문을 발표하였는 데 그 자리에서 다른 논문도 검토 중이라고 하므로 퇴위 후에는 편하게 연구에 전념할 것으로 보인다. 황태자 시절 미국에서 블루길을 생포해 처음으로 일본에 들여왔다. 현재 일본에서 생태계 교란을 일으키는 블루길의 선조이기 때문에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한다.

외국 방문이 3차례 (미국, 중국,[14] 영국, 네덜란드) 뿐이었던 히로히토와 달리 미국, 중국, 영국 등 다른 나라들의 해외순방이나 지방순례, 지진 등과 같은 자연재해 발생시 피난소 현장 방문도 상당히 흔해서 인기가 높은 편[15]이며 이러한 모습으로 인하여 일본 내에서 덴노제에 대한 자발적인 호의도가 상당한 편이다. 참고로 2003년에 이르러 일본의 전체 도도부현을 모두 방문했다.

영어 실력이 어느정도 있는듯 하여 해외순방시 따로 번역가 없이도 해외의 수상들과 무리없이 대화한다. 그 외에 짧지만 영어로 대화하는 장면이 포착 되기도 하였다.

파일:attachment/e0053988_4a20445819755_1.gif

2002 한일 월드컵 결승전 폐막식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악수를 청했다 무시당한 적이 있었다고 오해한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은 아키히토 덴노가 더 들어가라고 손짓한 걸 김대중 대통령이 못 본 거다. 애초에 두 사람이 저기서 처음 만난 것도 아니고 밖에서 만난 후에 같이 들어온데다, 일반적으로 악수는 오른손으로 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절 교육을 받았을 아키히토 덴노가 악수를 왼손으로 청할 리가. "김대중 대통령님, 더 들어가시죠. 아니, 더 들어가셔야… 그냥 제가 들어가죠." 왼손으로 악수합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24년생으로, 아키히토 덴노보다 9살 더 많다.


1998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방일했을 때는 직접 영어를 쓰며 클린턴을 환대하기도 했다.


근데 훗날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2000년 오키나와 방문시 오키나와 평화의 비 앞에서 뒷짐을 지고 참배를 하는 결례를 범하기도 했다.

2015년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 순방을 검토하기도 했었다고 NHK에서 밝혔다.

파일:external/jto.s3.amazonaws.com/nn20131030a9a-870x590.jpg
파일:external/assets.inhabitat.com/yamamoto-hand-emperor-akihito-letter-annual-garden-party-japan-fukushima-nucleur-disaster.jpg
관용차로는 2세대 토요타 센추리 로얄 리무진 외에 위 사진과 같이 세단형 센추리로 목격되는 일도 많다.[16] 덴노의 차량 탑승시 덴노의 위치는 운전석 바로 뒷자리이다. 즉 인도와 가까운 쪽 자리에는 앉지 않는다. 이 자리는 황후의 자리가 된다. 이유는 테러에 의한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다.


별도로 개인적으로는 1991년식 혼다 인테그라 4도어 세단 모델을 지금도 이용하고 있다. 부부가 테니스 치러 갈 때 직접 운전한다고. 1991년부터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17] 참고로 황태자 시절에는 노란색 비틀을 몰았다. 사실상 덴노 중에선 처음으로 운전면허 취득 및 자가용을 소유했다 볼 수 있다. 물론 자신이 직접 운전하는 기준.

1992년 4월 6일 MBC 드라마 <분노의 왕국> 천황 암살미수 에피소드에서 아키히토 덴노 즉위식 장면이 삽입된 바 있었다. 당연히 방영 이후 야나기 겐이치 주한 일본대사가 한국 정부에 항의했다.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 시즌 10 23화에서 심슨 가족이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스모 경기장에서 등장했는데[18] 그를 스모 선수로 착각한 호머 심슨에게 집어던져져 마와시(샅바) 담는 통에 쳐박혔다. 당연히 호머 심슨은 일본인 관객들에게 쓰레기 세례를 받았고, 일본 경찰에게 교육을 받다가 마지가 보석금을 내서 석방된다. 정치인 뿐만 아니라 군주들조차도 호머와 엮이면 무사할 수가 없다.[19] 일설에 따르면 이 에피소드는 일본에서는 천황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방영금지 처분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디 심의기관에서 방영금지처분을 받은 게 아니라 그냥 논란을 피하기 위해 방송국에서 이 에피소드를 건너 뛰었다. 한국에서 왜색이나 우익적 표현을 이유로 에피소드를 건너뛰는 상황과 같다고 보면 된다. 천황을 던지는 장면이 있어 방영하지 않았다고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게 아니라, 그냥 건너 뛰었기 때문에 천황 관련 장면 때문에 방영하지 않았다고 짐작할 뿐이다. 정발 DVD에도 이 에피소드는 빠져 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 말고도 방영하지 않은 에피소드가 몇 개 더 있다.

소설 원작인 <높은 성의 사나이> 드라마판에서도 등장한다. 직접적인 이름 언급은 없고 그저 황태자, 전하(皇太子殿下)라고만 언급이 된다. 배우는 츠지 다이스케.[20] 일본에게 병합된 태평양 연안 미주 지방을 방문하게 된다. 황실은 이미 군부의 꼭두각시가 되고 독일과 벌어지는 격차를 걱정하며 평화를 주장하는 이미지로 나온다.[21] 위험을 무릅쓰고 태평양 연안의 자국민들에게 연설을 하다가 저격을 당하고 중태에 빠진다. 이후 수술은 무사히 마쳤지만, 중태에 빠졌다는 언급만 나온다.

퇴위 발표 이후에 덴노의 생일과 신년에 궁중에서 이뤄지는 일반인의 축하 행사에 참가하는 관광상품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JR 히가시니혼이 관리하는 황실 전용 특별열차[22]가 있고 이를 위한 덴노 전용 시설이 도쿄역, 하라주쿠역에 있는데 정작 본인은 이를 사용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한다. 이런 걸 사용하려면 각종 준비를 해야 하는데[23] 이 과정에서 다이어가 망가져 국민들이 불편을 겪을 것을 안 좋아해서라고.[24][25]

그 외에 일본의 역대 덴노여성 덴노와 요절한 덴노를 제외하면 처음으로 수염을 기르지 않은, 다시 말해 면도한 덴노이기도 하다.

2018년 1월, 1989년 이전에 태어나 현재 만 29세 이상인 사람이 아키히토 덴노가 퇴임하는 2019년 4월까지 결혼하지 못하는 일본 청년들이 자신들을 덴노의 연호 ‘헤이세이(平成)’를 본떠 ‘헤이세이 점프(jump)’라며 자조하듯이 부르고 있다고 한다. 이에 덩달아 SNS에서 ‘헤이세이점프!’를 함께 거론하며 화젯거리로 삼고 있다고.#

황위 즉위 당시 상속세 4억 2,800만 엔을 냈고, 주민세는 황거 주소가 치요다구라서 치요다구에 납부한다고 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헤이세이 문서의 r450 판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1] 쇼와 덴노까지는 교토고쇼에서 진행했다. 즉, 도쿄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사상 첫 천황인 셈이다.[2] 사무라이 무사들이 막부로 정권을 잡기 전에는 일본천황의 권력이 막강한 편이어서 황위 다툼이 심해, 일찍 양위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상황이 되고, 불교에 귀의해 출가한 상태라면 법황(法皇)이라고 한다.[3] 여담으로 역대 한국 대통령 중 아키히토와 회담한 인물은 2018년 기준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이렇게 5명이다.[4] 그래서인지, 일본에서는 아키히토의 발언 때문에 혐한 넷 우익들을 비꼬는 표현을 쓸 때 "한국 형님(…)"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5] 교토 시대[6] 백제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주몽이라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7] 주변에는 세이부 철도코마역이 있으며, 역전에 장승이 있다.[8] 여담으로 아베 가문도 한국계이다. 아베 신조 총리의 친가와 외가 모두 한국계##[9] 그런데 이른바 "통일운동가"라는 정경모는 이것을 백제아신왕에게 광개토대왕이 쓴 표현이란 이유로 "내 땅인데 지금 못 되찾아서 아쉽다"라는 뉘앙스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그런데 설령 이게 사실이라도 직역 자체는 "유감이다"로 해석되는 것으로 보아 아키히토가 영토 수복의 의미를 쓴 건 아닌 것 같다(정경모도 세지마 류조의 개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애초에 아키히토의 평상시 발언만 봐도 "내 땅인데 지금 못 되찾아서 아쉽다"란 뉘앙스랑은 좀 안 맞는다. 애초에 이런 시각이 일본의 극우적인 사상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게, 아신왕고구려와 전쟁을 한 결과 졌고, 패배자의 입장에서 승자에게 한 말로 일본은 한국과 싸움을 했다고 생각조차 안 한다.[10] 히로히토 본인이 전쟁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논하기 이전에, 일단 전쟁의 결과 히로히토가 제위에서 물러날 뻔한(심하면 목숨까지 날라갈 뻔한) 과거를 겪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반응이 정상적일 수밖에 없다. 참고로 A급 전범 합사 이전에는 8번 정도 참배했다고.[11] 사실 A급 전범의 합사 이전까지는 황족의 일원으로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제국주의의 일환이라기보다는 현충원과 비슷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그는 오히려 합사 이후의 야스쿠니 신사를 싫어했을 것이다. 강제든 타의든 국가를 위해 죽은 이들을 모시는 장소에 오히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종국에는 패배로 이끈 이들을 같이 영웅으로 모시자고 강제로 합사한다니…[12] 간신이라는 말이 틀린말은 아닌게 일부 각료들은 천황이 임명하므로 형식적으로는 신하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일본각료 대부분의 공식명칭이 내각총리대신, 문부대신, 재무대신등 대신이란 호칭이 들어간다.[13] 그런데 저 사이언스 논문은 과학 연구논문이라기보다는 일본 과학사에 관련된 에세이에 가깝고, 네이처 논문은 런던 린네 학회(분류학회) 연설을 글로 옮긴 것이다. 저자는 'His Majesty the Emperor of Japan'. 오히려 일본 어류 백과사전에 350페이지 가량을 투고한 것이 학문적인 기여에 가깝다. #[14] 사실 히로히토중국도 방문하고자 희망했지만, 중국 내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결국 방중하지 못했다. 다만 타이완에는 방문한 사실이 있다.[15]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에는 7주 연속으로 전국 각지 피난소들을 돌면서 위문을 했을 정도.[16] 뒤에 따라오는 검은 승용차는 렉서스 LS430의 형제차인 토요타 셀시오이다. 2005년에 렉서스가 일본에도 런칭하여, 저 모델을 마지막으로 셀시오는 사라지고 LS만 나온다.[17] 잘 보면 시동 걸고 달릴 때 엔진음도 속도도 장난 아니게 나오지만, 원래는 어느 정도 조작된 동영상이다. 실제로는 30km/h 정도로 운전한다고. 후반부 방향표시등이 깜빡이는 모습을 보면 조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괜히 폭주족처럼 보이게 만들었다.[18] 물론 성우는 아키히토 본인은 아니고 미국 성우인 댄 카스텔라네타의 성대모사로 나왔다. EBS판에서는 바로 옆 나라의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인지 도쿄 시장으로 바뀌어서 나왔다. 하지만 투니버스판에서는 그대로 천황으로 나온다.[19] 시즌 16에서는 영국에 가서 엘리자베스 2세의 마차를 차로 들이받아서 뒤엎어버렸다가 근위병들에게 구타당한 적도 있었다.[20] 쿠웨이트에서 태어나서 2살부터 일본에서 살게 된 배우로, 데뷔작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이다.[21] 그러한 불편한 심기가 얼굴에 드러내자 아내가 위로하는 말에 "우리는 원양 어선을 띄우는데 독일은 로켓을 날린다"라고 불안해 한다.[22] E655계 전동차로, 교직겸용차이다.[23] 열차 준비, 직원 교육, 경찰 배치 등등.[24] 물론 어쩔 수 없이 이용하는 것 외에는 국민들이 불편하지 않게 배려하는 덴노 중 유일[25] 실제로 해당 열차는 6량 중 중간의 전용객차 1량을 빼고 5량 상태로 전세열차 등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